얼마 전 엄마의 전화를 받았는데, 평소와 달리 급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누가 전화를 해서 'XX신용카드사에서 000(엄마 성함) 고객님의 신용카드가 나와서 보내드리려 하는데, 주소가 인천 어쩌구 저쩌구가 맞나요?' 라고 묻더란다. 그래서 최근에 신용카드를 신청한 적도 없고 사는 곳도 인천이 아니라고 했더니, 이름과 생년월일과 주소를 확인하더란다. (아이고... 그냥 끊으셨어야지...)
그 사람이 '신용카드사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으니 고객님이 XXXX-XXXX 번호로 전화하셔서 취소하시면 됩니다.' 라고 알려주기에 전화번호를 종이에 받아적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전화번호로 전화하려다가 몇 달 전에 내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라 나에게 전화하셨다고 한다.
몇 달 전에 새로운 보이스 피싱이 판친다는 뉴스 기사를 읽고 걱정되어 경고해드렸다.
신청한 적도 없는 신용카드가 발급되었다며 전화해서는, 신용카드 회사의 착오로 신청된 것 같다며 신용카드 회사의 전화번호라는 것(물론 보이스 피싱 일당의 전화번호)을 알려주고 그리로 전화하게 하여 이런저런 말로 상대방을 구워삶아 자세한 개인정보를 알아내는 최신 버전(?) 보이스 피싱이라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신용카드를 취소하는 데 필요하다며 이상한 URL이 포함된 문자 메시지를 보내, 그 URL을 클릭하게 하여 피해자 휴대폰에 악성 프로그램을 깔아 휴대폰 속 정보도 다 캐낸다고 한다.
그러니 그런 이상한 전화 받으면 대꾸도 말고 끊어버리라고 경고했건만, 그만 엄마가 넘어가셨다. 그나마 이름과 주소 정도만 그 사기꾼에게 확인해주고 소위 카드회사라는 곳에는 전화를 걸지 않았으니, 큰 피해는 없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지려는데, 머릿속에서 도망치려는 정신줄 꼭 부여잡고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그 전화번호로 전화 안 해서 다행이네.' 라고 담담히 말했다.
사람이 어떤 일의 위험성에 대해 들은 게 있어도 막상 자기에게 그 일이 닥치면 '어어~~~' 하며 넘어가기 마련이다.
소싯적(!)에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며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에도 들리기로 하고 중국 여행 관련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곡부에 대해 알아봤다. 그런데 '중국의 좀도둑과 사기꾼은 모두 곡부에 몰려 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곡부에서 황당하게 돈을 뜯겼다는 사연이 넘쳐흘렀다. 좀 이상했다. '아무 것도 몰랐다면 당할 수 있지만, 곡부에서 당했다는 글이 중국 여행 카페에 이렇게 많은데 이걸 보고 가서도 당하는 사람들은 뭐지? 어디가 모자란 사람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연을 읽고 간 나도... 결국 당했다. (아, 젠장...!) 이게 조심한다고 안 당하는 게 아니다. 내 딴에는 곡부에 도착한 순간부터 온몸의 레이더(?)를 곤두세우며 조심했건만, 현지인과 한두 마디 말을 섞는 순간 멀쩡히 돌아가던 두뇌가 정지하며 바보처럼 당한다. 그 순간이 지나고나서야 '뭐야? 방금 나 당한 거야?' 라고 깨닫는다.
엄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마 나에게 이야기 들으실 때만 해도 엄마 스스로가 그런 뻔한 수법에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하지만 신청한 적도 없는 카드가 발급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당황하게 되고, 당황하면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기 힘들어진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 왈...
부모님들께는 경고 한 번으로 안 되고 세뇌교육(!) 시키는 수준으로 단단히 일러드려야 한다고 했다. 친구가 늦둥이 막내딸이라 친구 부모님은 연세가 무척 많으셔서, 부모님이 당하실까 걱정이 되어 엄마를 철저히 세뇌교육 시켜드렸단다. 얼마나 세뇌를 당하셨는지, 누가 들어도 진짜 사람 목소리가 아닌 기계음으로 흘러나오는 '안.녕.하.십.니.까. 여.기.는.우.체.국.입.니.다.' 라는 멘트에도 "이 나쁜 년아! 젊은 게 할일이 없어서 노인네한테 사기치려고 하냐!' 라고 호통실 지경이 되셨다고 한다. (이 시트콤 같은 상황은 무엇인가...)
아버지는 세뇌교육 안 시켜드렸냐고 하자, 차라리 아버지는 귀도 어두우신데다가 총기도 흐려지셔서 사기당하실 위험이 없다고 했다. 사기꾼 쪽에서 온갖 사탕발림 늘어놓아도 아버지가 알아듣지 못하시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실테니, 사기꾼 쪽에서 속터져서 포기할 거라고 했다. (아버지 의문의 1승, 사기꾼 의문의 1패)
정말이지, 세월따라 진화(?)하는 보이스 피싱을 못 막는 건지 안 막는 건지 모르겠다.
친구 말마따나 AI라는 대단한 기술까지 나오는 시대인데 보이스 피싱을 기술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아니면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한데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서 이동통신사나 정부 기관에서 손놓고 있는 걸까?
젊은 사람들이라고 보이스 피싱에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노인들은 휴대폰에 익숙치 못한데다가 너무나 빠세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더욱 당하기 쉽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대책을 못 세우는 건지 안 세우는 건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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