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사건은 세월호 침몰 사고로 끝이기를 바랐건만 또 대형 사고가 터졌다.
10월 마지막 토요일, 자려고 누웠다가 문자 알림 소리를 듣고 휴대폰을 봤다.
'이태원의 모 호텔 근처에 사고가 나서 교통통제 중이니 우회해 달라' 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설명없이 '사고' 라고만 했고 '교통통제' 라는 단어까지 나오니 교통사고라고 여겼다. '재난문자까지 보낼 정도면 버스나 트럭 같은 대형차량이 교통사고로 도로를 막아 현장이 많이 막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 그대로 누운 채로 습관적으로 휴대폰부터 봤다.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터져서 150명 가량이 사망했다는 속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멍해졌다.
기사를 읽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라는 것이 원래 뜻밖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대도시에서 길을 걷다가 죽을 수가 있나...! 산에서 추락하거나 바다에서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위험한 공사장에서 다친 것도 아니고...
1990년대 중반, 언론에서 '사고 공화국' 이라고 아우성 칠 정도로 사고가 연달아 터졌더랬다.
부산 구포에서 열차 전복 사고가 나고, 서해에서 여객선이 침몰하더니, 목포에서는 아시아나 항공기가 추락했다. '육해공에서 전부 사고가 났으니 다음은 어디냐, 지하냐?' 라는 한탄인지 예언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나돌더니, 정말로 지하인 대구의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
전부 끔찍한 일이었지만 최소한 비현실감이 들지는 않았다. 충격적이고 슬프다는 감정적인 부분과, 현장의 안전 부주의 및 관청의 관리 감독 태만이라는 구조적인 부분을 제쳐놓고 생각한다면, 이성적으로는 대형 인명 사고로 이어진 상황이 납득이 갔다. 열차, 배, 비행기, 지하 공사장처럼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태원은 대도시 한복판인데, 그곳에서 길을 걷던 사람이 150명 넘게 사망했다니 이게 말이 되나...
처음에는 이해불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겨우 상황 파악이 되었다.
좁고 경사진 골목길,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처음으로 마스크 없이 할로윈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 이 정도만으로도 사고가 터질 위험이 높았는데...
사람이 몰릴 것이 뻔한데도 주최자가 따로 없다는 이유로 지자체와 경찰 상부는 안전 사고가 생길 위험을 방관했다. (일선 파출소에서는 할로윈 축제에 맞춰 지원을 요청했으나 위에서 묵살했다고...) 사고 나기 몇 시간 전부터 경찰 콜센터로 안전사고가 날 것 같다는 신고 전화가 여러 번 있었지만, 당시 책임자는 자리를 비웠고 경찰 윗선으로 향하는 보고 체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화가 나는 정도를 넘어서 말문이 막힌다.
현장의 하위직 공무원들(경찰, 구급대원, 소방관 등)과 이름 모를 시민들은 죽어라 구조작업을 하고도, 사람을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끔찍한 광경을 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의 우두머리들은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는 식으로 선긋기에 나섰다가, 욕을 잔뜩 먹은 후에야 마지못해 사과를 했다. (특히 용산구청장, 행정안전부 장관 이 두 양반은 싸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될 지경임.)
그렇게 책임지는 것이 싫다면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사기업에서도 안전사고가 터지면 사장이니 회장이니 하는 사람이 고개 숙여 사과한다. 사장이나 회장이 말단 직원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사고를 일으켜서 사과를 하는 것이겠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아니더라도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그 조직에서 일어난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마땅하기에 사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사기업도 아니고 관할 지역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지자체의 수장과, 국민 전체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부서의 수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 사고 공화국이란 말이 나오던 시절을 직접 겪은 이가 절반 이상은 될 것이고, 세월호 사건이 터진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니 놀라울 뿐이다.
큰일이 터진 후에야 대책 수립에 나서는 것에 대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고 비판하곤 한다. 그런데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안 고치는 상황은 어찌 해야 할까...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이미 소를 잃어버린 적이 있으면 그때라도 정신 차리고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 소를 몇 번을 더 잃어버려야 외양간을 고칠 생각인 걸까...
제발 윗사람들이 지금이라도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다.
대선 때마다 이 당 저 당 후보들이 부르짖는 복지국가니 일류국가니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이 터진 것도 아닌 평시에, 많은 이들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는 일은 안 생기는 국가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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