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사라진 영화관의 추억

Lesley 2022. 5. 19. 00:01

  지난번 80년대 영화 '씨받이' 에 대해 포스팅을 한 김에, 옛날 영화관에 얽힌 추억을 풀어볼까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옛날 영화관이란 씨받이가 개봉되었던 1980년대 중반부터 20세기의 마지막 날인 1999년 12월 31일까지 내가 다녔던 영화관을 말한다. (어떻게 연도와 월일까지 정확하게 나올 수 있는지는 저 아래까지 읽다 보면 알 수 있다는...)

  지금이야 상영관을 10개 정도 갖추고,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우며, 좌석이 정해져 있는 영화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까지는 영화관마다 상영관이 몇 개 안 되었고, 내부도 지금만큼 깨끗하지 못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음침(?)하기까지 했다.  특히 1990년대 초중반까지도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은 영화관이 있엇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관객들이 달리기 경주를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뢰매 2 - 바다극장

 

  내 인생 최초(!)의 영화관 나들이가 '우뢰매 2' 를 보러 '바다극장' 에 갔던 일이다.

  어렸을 때라 바다극장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 하는데 종로 어딘가였던 것 같다.  무슨 오페라 극장처럼 관객석이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자리가 꽉 차있었다. (어린이가 바글바글...)

 

 

 

  이 첫 번째 영화관 방문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으니...

  지금은 영화 시작하기 전에 상업 광고가 나온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무언가를 읽는 영상이 나왔다. (댁이 거기서 왜 나와~~~ ㅠ.ㅠ)

 

  영화관을 찾은 어린이 손님들은 위의 포스터를 인쇄한 책받침을 한 장씩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 것 아닌데, 그때는 학교에 그 책받침 하나 들고 가면 잠시나마 신분상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이 사이에서 우뢰매가 워낙 인기 있던 때라 우뢰매 책받침은 '뭔가 있어 보이는 아이템(!)' 이었다.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 - 서울극장

 

  중학교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터미네이터 2' 를 종로의 '서울극장' 에서 봤다. 

  터미네이터 2가 개봉하기 얼마 전에 TV에서 터미네이터 1을 방영해줬는데(어쩌면 터미네이터 2 홍보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임팩트가 굉장했다.  그래서 터미네이터 2 개봉 소식을 접하고 꼭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문제는, 나 혼자만 터미네이터 2를 보고 싶어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터넷 예매라는 게 없던 시절이라 직접 영화관까지 가서 예매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인터넷 예매를 겪은 세대라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뭐 하러 두 번 발걸음 한 거냐, 그냥 영화 보는 날에 한두 시간 일찍 나가 표를 사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 쓴 것처럼 나 혼자만 터미네이터 2를 기대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보겠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표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 당일표는 일찌감치 동나서 구할 수 없고 암표상만 기승을 떨었다.  번거롭지만 영화 보기 며칠 전에 미리 가서 살 수 밖에 없었다.

 

  친구와 같이 학교 수업 마치고 부지런히 종로의 서울극장으로 갔더니만...

  요즘 화제가 되는 한정판 상품 구매를 위한 줄만큼이나 기다란 줄이 보였다.  서울극장이 있는 건물 밖 도로를 따라 만들어진 줄이 그 블록의 코너를 돌아 수백 미터나 계속 되었다.  줄서서 표 사는데 1시간 넘게 걸렸던 것 같다.  다행히도 며칠 후 본 영화는 예매하는데 든 고생을 보람있게 만들어줬다...!  

  

 

 

  패왕별희 - 코아아트홀

 

  고등학교 때 중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패왕별희' 를 종로에 있는 '코아아트홀' 에서 봤다.

  작품성 만큼이나 대중성도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칸느 영화제 수상작은 무조건 지루한 영화라는 편견 때문인지, 몇 년 전에 개봉했던 터미네이터 2 만큼 엄청난 열기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표를 못 구하면 어쩌나' 하며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가서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패왕별희 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으니...

  영화 초반부에는 아역들이 나오다가 나중에 성인 배우들이 등장한다.  장국영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는 순간, 여자 관객들 입에서 동시에 '아~~!' 하는 탄성이 나왔더랬다.  원래도 미남이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데 섞어 놓은 듯한 중성적인 매력에 약간의 퇴폐미까지 합쳐져서, 장국영의 매력을 300% 느낄 수 있었다.   

 

 

 

  해피 엔드 - 씨네코아

 

  1999년 12월 31일 저녁, 당시의 화제작 '해피 엔드'종로에 있는  '씨네코아' 에서 봤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들먹이는 종말론자가 설쳐대던 세기말이었다.  대학 동창 5명이 20세기의 마지막 날을 그냥 보내기 아쉽다며 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5명 중 4명이 미리 종로에 나가 표를 사놓기로 했다.

 

 

 

  그런데 Y2K가 우리 발목을 잡았다.

  Y2K의 기술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전산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겨서 금융사고가 터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1999년 마지막 날에 은행이 입출금 업무를 안 하기로 하고, 연말연시에 돈이 필요한 사람은 미리 찾아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우리 4명은 돈을 찾지 못 한 채 각자 지갑에 있던 돈만 들고 종로로 나갔다.  다행히 영화표 5장 살 정도는 되었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 밥을 사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 4명은 아직 학생이었는데 나중에 오기로 한 친구는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상태였다.  그러니 모두들 '그 애는 직장인이라 돈이 있을 테니 일단 그 애한테 빌려서 저녁값 하면 되지 뭐.'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합류한 친구도 돈이 없었다는 게 함정...!!!

  새내기 직장인으로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살던 참이라 돈 찾을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친구만 믿었듯이, 그 친구 역시 '다른 애들은 모두 학생이라 시간이 많으니 미리 돈을 찾아놨겠지.' 라고 우리만 믿었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씨네코아 근처 버거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으려는데, 100원짜리 동전까지 탈탈 털어 모았더니 햄버거 세트 2개 살 돈이 겨우 모였다.  그렇게 20세기의 마지막 날 저녁 시간을 5명이서 햄버거 세트 2개 나눠먹으며 보냈다는 슬픈 이야기다... ㅠ.ㅠ   

 

    

 

  기타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이 포스트에 나오는 영화관은 전부 종로 쪽에 있었다.  종로 지역 영화관의 전성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부 없어졌다.

 

  마지막까지 있었던 서울극장조차 작년인가 재작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CGV나 롯데시네마 같은 멀티플렉스 체인점에 밀리고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까지 터지자 더는 버틸 수 없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서울극장에 갔던 게 '설국열차' 를 보러 갔을 때였다.  그때도 영화관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문을 닫았구나...

 

  위에 나오지 않지만 '허리우드 극장' 도 있다.

  허리우드 극장 위치는 그 시절 영화관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종로 뒤편 낙원동 상가에 있었는데, 큰길에서 그쪽으로 가려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돼지머리(!)가 늘어선 시장 골목을 지나야 했다.  허름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그냥 4층이 아니라 건물 옥상이 나오면서, 옥상 한쪽에는 영화관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캬바레(!)가 있었다.

  영화관 하면 무조건 종로부터 떠올렸던 시절의 영화관들이 하나씩 사라졌기에, 허리우드 극장도 당연히 없어졌겠거니 했다.  그런데 검색해 보니 의외로 아직도 살아있다...!  2010년대부터 실버극장이라고 해서 주로 노년층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