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씨받이 - 강수연을 추모하며

Lesley 2022. 5. 9. 00:01

  지난 주말 영화배우 강수연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

  어린이날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언젠가부터 연예계에서 종종 벌어지는 극단적인 선택의 경우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후속 보도를 보니 최근 건강이 안 좋았으며 뇌출혈을 일으켜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강수연의 작품을 많이 보지는 못 했다.  강수연이 활발히 영화 활동을 하던 1980년대는 내가 어려서 영화관을 드나들지 못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2000년대 초반에 '정난정' 역으로 출연했던 TV 드라마 '여인천하' 속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도 '토요명화' 니 '주말의 명화' 니 하며 TV를 통해 영화를 자주 접할 수 있던 시절을 거친 덕에 강수연의 작품 몇 편은 본 적이 있다.

 

  영화배우 강수연을 추모하는 뜻에서 1986년도 영화 '씨받이' 를 포스팅하려 한다.

  우리나라 영화가 국제 영화계에서 듣보잡(!) 취급 받던 시절에 우리나라 영화의 존재감을 알렸던 작품이며, 강수연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영화 씨받이를 TV를 통해 봤던 게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한 번 밖에 안 봐서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강렬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스토리와 분위기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메인 포스터로 위의 이미지가 뜬다.

  다만 위의 포스터는, 제목 윗부분에 있는 '디지털리마스터링' 이란 작은 글씨로 보건대 21세기 들어 새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코찔찔이 초등학생 시절 동네 전봇대(!)나 담벼락(!)에서 봤던 포스터에는 바로 위의 이미지가 나왔다.

  물론 위의 이미지 그대로는 아니고, 1980년대 분위기가 물씬 나도록 한글과 한자가 섞인 문구가 포스터의 4분의 1은 덕지덕지 채운 모습이었다. (그 시절 포스터는 어쩌면 다 그 모양이었을까...)

 

  당시는 어려서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저 이미지를 다시 보니....

  아무리 봐도 영화를 소개하는 포스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보면 '막 벗어붙이는 야한 영화인가 보다' 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인권 의식 희박하던 시절에 인습에 희생되고 마는 씨받이 여성' 을 묘사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뜨악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하긴 이 영화 뿐 아니라 다른 영화도 작품의 소재나 주제와 상관없이 포스터를 덮어놓고 야하게 꾸미는 게 그 시절의 관례(?)이기는 했다.  포스터만 보고 에로 영화라고 생각했다가, 한참 지나서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던 영화가 이 영화 말고도 여러 편 있다.   

 

 

 

  대물림 되는 씨받이의 운명

 

  '옥녀(강수연)' 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김형자)' 손에 자란 어린 처녀다.

  아버지가 없다고 해서 사망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어머니가 씨받이로 옥녀를 낳았기 때문에 친부를 아버지라고 밝히거나 연락할 수 없는 것이다.

  씨받이를 들이는 이유는, 어떤 남자가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지 못 한 경우 다른 여자에게서라도 아들을 낳기 위함이다.  그래서 씨받이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남자 집안에서 거두어 부인 소생으로 꾸미고 키우지만, 남자 집안에서 원하지 않는 딸을 낳을 경우에는 양육비 비슷하게 적당한 보상만 받고 씨받이 여자가 직접 키워야 한다.  옥녀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어느 날 옥녀가 씨받이 여자를 구하던 사람의 눈에 띄게 된다.

  딸을 씨받이로 내놓지 않겠느냐는 제의에, 어머니는 펄쩍 뛰며 거절한다.  씨받이의 기구한 인생을 딸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옥녀는 씨받이의 딸로 설움을 겪고 자란 것에 대한 반항심과, 한 번에 큰 재물을 벌어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순진한 바람으로, 씨받이로 가겠다고 나선다.

 

  그리하여 옥녀는 어느 양반 가문 서방님의 씨받이가 된다.

  이 서방님은 아직 젊은데 가문의 대를 이을 의무가 있는 장손이다.  10대에 결혼하던 시절이라 이미 오랜 기간 부인과 살았는데도 아들도 딸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조바심이 난 할머니와 숙부가 씨받이를 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부모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망한 듯.) 

 

 

 

  비극의 시작

  

  씨받이에 관한 일은 철저히 '거래' 로 이루어져야 한다.

  씨받이 여자는 남자 쪽에서 원하는 아들만 낳아주면 그만이고, 남자네 집안에서는 그에 대한 대가로 재물을 내어주면 그만이다.  아들이 태어나면 양쪽은 전혀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 평생 연락 없이 살아야 한다.  애초에 씨받이를 들이는 일 자체가 비밀이고, 아이가 미천한 여자의 소생이란 사실 역시 감추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옥녀와 서방님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싹트게 된 것이다.  처음에 서방님은 정해진 날에만 의무감으로 옥녀와 동침했지만 언젠가부터 정해지지 않은 날에도 옥녀를 찾게 된다.  지금 같으면 중.고등학교 다닐 나이 밖에 안 되는 옥녀도, 잘생기고 부드러운 서방님에게 빠져 행복해 한다. 

  옥녀를 찾아온 어머니는 첫사랑에 들뜬 딸을 보고 기겁한다.  이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 때문이다.  서방님에게 정을 주면 안 된다고 말리지만, 옥녀는 그 간절한 충고를 귓등으로 흘릴 뿐이고...

 

  옥녀와 서방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게 알려지자 서방님의 할머니와 부인이 나선다.

  천것 주제에 양반가의 귀한 장손을 넘본 옥녀가 괘씸하지만, 옥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벌을 줄 수 없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가 겨우 생겼는데 잘못 되면 큰일이니까. 

  대신 옥녀의 어머니를 잡아가 매를 친다.  어머니는 죄책감을 느끼는 딸에게 과거 이야기를 해준다.  예전에(아마도 옥녀를 낳기 전에) 어머니는 어떤 양반 가문에 씨받이로 들어가 아들을 낳아주었다.  약속대로 대가를 받고 떠났지만, 아이가 눈에 밟혀서 몰래 찾아가 만나다가 들켜서 매질을 당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숨겨온 아픔을 털어놓은 이유는 분명하다.  씨받이는 상대 남자나 아이에게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을 품게 되면 결국 상처받는 것은 씨받이 본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이란 게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결국...

 

  옥녀는 서방님의 가문에서 간절히 원하던 아들을 낳는다.  

  죽을 고생을 해서 낳고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데, 서방님의 부인이 들어와 갓난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아이를 잘 키워줄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같은 뻔한 위로의 말조차 없다.  어차피 목적은 아이였으니 아이의 모습에 미소 지을 뿐, 아이 낳는 도구(!) 밖에 안 되는 옥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곧 옥녀도 떠나게 된다.

  출산한지 얼마 안 된 몸이라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집안 사람들 눈에 안 띄게 한밤중에 나간다.  서방님은 집안 어른들 때문에 옥녀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 한다.  방에 숙부와 마주 앉아서, 숙부가 배려해주는 것처럼(과연 그것이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방문을 조금 열어주자 그 틈으로 떠나가는 옥녀를 보며 눈물만 흘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 다음 장면에서 나무에 매달린 여자의 몸이 나온다.

  옥녀가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도 이 마지막 장면을 봤을 때의 충격이 강렬해서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옥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를 그리워하며 힘들어하는 에피소드가 한두 개 나온 뒤에 자살 장면이 나왔더라면, 영화 엔딩 장면이 그토록 충격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저렇게 되고 말았네' 정도의 씁쓸함만 느꼈을 것이다. 

  서방님의 집안을 떠난 장면 바로 다음에 옥녀의 자살 장면을 배치한 사람이 임권택 감독인지, 아니면 별도의 편집 담당 직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의 결정이었든 간에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옥녀도 좋은 결말을 맺지 못 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아니,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 이전에 씨받이로 나섰을 때부터 행복한 결말이 나올 수 없었다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여자의 몸은 보는 사람을 멍하게 할 정도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기타 

 

  이 영화를 괜찮게 본 사람들에게는 배신처럼 느껴질 수 있는 사실인데...

  이 영화가 남녀차별 심하고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던 시대상을 잘 묘사한, 작품성 뛰어난 영화라는 점과는 별개로...  씨받이를 들이는 풍습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세상에는 온갖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씨받이 같은 사례가 아예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씨받이라는 '풍습' 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에서 암암리에 행해지는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만일 씨받이가 널리 행해졌다면, 조선시대에 흔했던 '양자 입적' 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영화 속 설정처럼 아들 없는 양반가에서 몰래 씨받이를 들이는 게 흔한 일이었다면,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지 못 한 양반 남자가 굳이 조카뻘 되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씨받이를 이용해 아들을 낳는 선택지가 있으니 말이다.  자기 피를 이어받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아니던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씨받이를 들이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가족 사회라 사생활이란 게 없다시피 했던 시절이다.  더구나 지체 높고 부유한 양반 가문이라면 하인까지 많아서 무언가를 은밀하게 하기 힘들다.  그런데 신분 낮은 여자를 씨받이로 들여 숨겨두고 임신할 때까지 성관계를 갖는다든지, 씨받이가 아이를 갖게 되면 임신하지 않은 부인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 달이나 임신한 척 꾸미고 산다든지...  이런 일을 은밀히 해치우는 것은 매우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위험이 크다.

  신분제 사회에서 아이의 생모가 천한 신분이라는 게 드러나면 아이의 앞날에 지장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씨받이를 들여서라도 이어나가려던 그 소중한 가문의 명예에도 금이 간다.  가문의 명예와 핏줄의 순결성에 목숨 걸던 시절이니, 다소 아쉽더라도 출생과 신분이 확실한 조카 중 적당한 아이를 골라 양자로 들이는 게 안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는 수작이다...! 

  물론 80년대 작품이라 지금 보면 화질이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90년대에 TV로 볼 때에도 영상이 거칠었고 야간 장면은 사람이나 사물이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앞머리에 올린 포스터가 디지털리마스터링판인 것을 보면 좀 더 괜찮게 손 본 버전이 있는 모양이다. (원본이 80년대 것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요즘은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가 여러 곳이라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코로나 사태로 침체되어 있던 영화관 분위기가 거리두기 완화로 살아났다고 하니, 조만간 몇몇 영화관에서 강수연 회고전이나 추모전을 기획할 지도 모른다.  36년이나 된 영화지만 감상할만한 가치는 분명히 있으니, 기회가 닿는다면 감상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