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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다수의 최대행복 - 나의 마더(I Am Mother) / 지금 우리 학교는

Lesley 2022. 7. 19. 00:01

 

  서로 장르가 다른 영화와 드라마에서 뜻밖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2018년도 영화 '나의 마더(I Am Mother)'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올해 초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던 우리나라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이다.  전자는 소녀 한 명을 빼면 인류가 멸망하다시피 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물이고, 후자는 현대의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물이다.  그러니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란 말로 알려진 공리주의와 관련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나의 마더' 는 영화 전체에 공리주의가 깔려 있는데 비해 '지금 우리 학교는' 는 후반부에서 살짝 건드리는 정도라는 점이다. 

 

 

 

  나의 마더

 

  주인공 소녀는 거대한 벙커에서 마더(mother)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로봇과 살고 있다.

  마더의 설명으로는 어떤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벙커 밖 세상에서는 인류가 멸종했다고 한다.  마더는 그런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인류의 존속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도록 설계된 로봇이라, 많은 수정란(최소 수백 개는 되는 것 같음)을 벙커에 보관해두고 있다.

  마더가 그 중 하나를 인공자궁에 넣어 길러 태어나게 했는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소녀다.  소녀에게는 이름도 없고 그저 마더가 딸이라고 부른다.  어찌되었거나 마더는 최선을 다해 소녀를 양육했고, 마더와 소녀 사이에는 단단한 유대감이 있.었.다. (과거형 주의...!) 

 

  소녀는 마더를 좋아하고 의지하면서도 같은 인간을 그리워한다.

  어느 날 마더가 다른 수정란 중 하나를 태아로 만들어 출생시키기로 한다.  소녀는 동족이자 동생인 존재가 생긴다는 사실에 기뻐하는데...

 

  갑자기 낯선 여자(이쪽도 이름이 없음)가 다친 채 벙커로 찾아오면서 파국이 시작된다.

  마더는 그 여자를 위험시하며 경계하지만, 소녀는 자기와 같은 인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본능적으로 마음이 끌린다.  그래서 난생 처음 마더를 속이고 여자와 몰래 만나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소녀와 마더가 가족처럼 살고 있는 것에 기막혀 하면서, 바깥 세상에는 인간들이 좀 더 있는데 마더처럼 생긴 로봇들이 인간을 추적하여 학살하기 때문에 숨어 산다고 말한다.  소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차츰 마더가 자신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정황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바깥 세상으로 나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자는 여자의 제의를 받아들여 벙커를 탈출한다.  

 

  알고 보니 여자의 말은 절반만 사실이다.

  우선 마더처럼 생긴 로봇들이 인간들을 쫓고 살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로봇들은 마더와 시스템적으로 연결이 되어 일종의 AI 공동체(연속체?)를 이루고 있는데, 인간이 나날이 비윤리적인 짓을 벌이며 지구를 망치는 것을 보고 인간을 멸종시키기로 했다.  즉, 기존의 '썩어빠진 인간' 은 개선의 여지가 없으니 전부 없애버리고, 대신 '윤리관을 제대로 갖춘 인간' 을 태어나게 하고 길러서 퍼뜨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한때는 다른 인간들과 같이 살았지만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이유가 분명히 나오지는 않는데, 분위기로 보아 여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아마도 생존을 위해서) 동료들을 없애거나 버린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혼자 살려니 외롭고 힘들어서, 우연히 알게 된 소녀를 새로운 동료로 점찍고 바깥 세상으로 나오도록 속인 것이다. 

 

  소녀는 분노한다.

  일단 여자가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또한 여자가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다' 라며 타인을 속이거나 버리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에 분노한다.

  소녀가 어려서부터 마더에게 받은 교육에 의하면, 자신을 최우선시 하는 여자의 행동은 비윤리적이다.  그래서 마더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새로 태어난 동생과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동생들을 위해 벙커로 돌아가기로 한다.  즉, 소녀는 여자와는 다르게 '자신만을 위한 인생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인생' 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벌어지는 반전...

  이 모든 것이 마더가 의도한 바였다.

 

  영화 속에서 소녀가 윤리 교육을 받는 장면이 비중있게 나온다.

  심각한 중환자 5명이 있는데 모두 장기 이식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  이때 공교롭게도 5명의 중환자 모두에게 적합한 장기를 가진 새 환자가 등장한다.  새 환자는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 쉽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의사가 그 새 환자를 치료하여 살리면 5명의 중환자는 장기 이식을 못 받고 죽게 된다.  반대로 새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둔다면 그 환자의 장기로 5명의 중환자를 살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란 말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자면, 간단히 살릴 수 있었던 새 환자를 죽도록 방치하는 게 옳다.  1명의 죽음으로 5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에는 경중이 없고 모든 목숨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끔찍한 범죄다.  또한 소녀가 마더에게 했던 질문처럼, 5명의 중환자 중에 살인범 같은 악인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인간을 살려내겠다고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게 옳은가?

 

  벙커로 돌아온 소녀는 마더의 기능을 정지시킨다.

  인공지능을 지녔어도 결국에는 기계라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인간으로 치면 딸처럼 키운 존재에게 살해당한 셈이다.  하지만 마더는 만족스러워 하며 죽는다.  이기적인 기존의 인류를 말살하고 이타적인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킨다는 원대한 계획이 성공했으니까.

  마더는 소녀를 공리주의적인 인간으로 키우는데 성공했고, 소녀는 막 태어난 동생은 물론이고 벙커에 있는 수백 혹은 수천 개나 되는 배아들도 차례로 태어나게 하여 잘 키워낼 것이다.  그러면 마더가 의도했던 대로 이 지구는 '윤리적인 새로운 인류' 로 가득찰 것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올해 초에 나온 화제작이라 줄거리가 많이 알려졌을 테니, 공리주의 관련한 후반부 장면 위주로 쓰겠다.

 

  '지금 우리 학교는' 은 경기도에 있는 효산시(가상의 도시)에서 좀비 사태가 터진다는 설정의 드라마다.

  특히 효산시에 있는 효산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좀비들이 생기면서, 소수의 비감염자 학생들이 학교를 탈출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면서 학교 밖 세상의 학부모, 정치인, 경찰관, 유튜버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보이는 온갖 행태가 나온다.   

  정부에서는 계엄령까지 선포하며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려 하지만,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보니 정치인도 군부 인사들도 우왕좌왕 한다.  일단 좀비들이 효산시 밖으로 나가 다른 지역 사람들까지 감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효산시를 봉쇄한다.  하지만 영원히 도시를 봉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못 지킨다는 말처럼, 많은 군인을 동원하여 봉쇄한다고 해도 좀비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다.

 

  결국 계엄군 사령관은 어렵고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국가 전체를 지키기 위해 효산시를 폭격하기로 한다.  '만일 단 한 명의 좀비라도 효산시 밖으로 나갈 경우 1주일 안에 성남, 과천, 하남 등 경기 남부 지역이 순식간에 좀비 천지가 되고 곧 수도인 서울도 쑥대밭이 된다' 라는 암담한 시뮬레이션 결과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효산시 안에 미감염 상태로 좀비를 피해 다니는 사람이 1만 명 가량 있다는 사실이다.  효산시에 쏜 미사일이 좀비만 골라 공격할 리 없으니 미감염자들까지 죽을 게 뻔하다.  고민하던 사령관은 결국,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폭격 명령을 내린다.  

 

  물론 효산시 폭격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망설이는 군인들도 있다. 

  아무리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군인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행동으로 1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죽게 생겼는데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 사령관이 말한다.  "효산시 구하려다 대한민국 잃어.  군인답게 움직여."  폭격이 결정되고도 막상 버튼을 누르지 못 하는 부하에게 다시 일갈한다.  "(우리가) 몇 명을 죽이는지 계산하지 마.  몇 명을 살려야 되는지만 생각해." 

  단호한 태도로 흔들리는 부하들을 이끌고 폭격 작전을 수행한 사령관은, 정작 작전 종료 후 혼자 있게 되자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이기에 폭격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이라서 죄없는 1만 명의 국민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명령을 따른 부하들을 법적 책임이나 도덕적 비난에서 구해내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

 

  효산시가 폭격될 때 두 경찰관이 대화를 나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 두 사람이 이 드라마에 필요한 인물이 맞나,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나왔지?' 하고 의아해 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효산시 폭격 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이 사람들이 바로 이 장면을 위해 나왔던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먼저 형사가 폭격 때문에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하격인 서울대 출신 의경에게 말한다.  "야, 서울대.  다수가 살기 위해서 도대체 어디까지 잔인해져도 되는 거냐?  너희는 그런 거 학교에서 배울 거 아냐."  이 말을 울분에 차서 부르짖지 않고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질문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러자 의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대답한다.  "전 이과라 그런 거 안 배워요.  뭐 문과도 안 배우겠지만."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질문과 대답이다.

  

 

  

  기타  

 

  1. 트롤리의 딜레마

 

  공리주의 관련하여 '트롤리의 딜레마' 라는 게 있다. 

  트롤리는 영국에서는 광차(탄광 안에서 석탄 같은 광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큰 수레)를, 미국에서는 도시의 대중교통인 전차를 말한다고 한다.  광차로 해석하든 전차로 해석하든, 트롤리의 딜레마에서 제기하는 문제의 뜻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첫 번째 사례.

  트롤리의 진행 방향 선로에 5명의 사람이 있어서, 트롤리가 그대로 지나가면 그 사람들은 치여 죽고 만다.  그런데 레버를 당겨 진행 방향을 다른 선로로 바꾼다면, 다른 선로에 있던 1명만 죽게 된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버를 당긴다는 쪽을 선택한다.  누군가 죽을 수 밖에 없다면 1명만 죽고 5명이 사는 게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몇몇 사람은 5명이 죽게 내버려 두는 쪽을 선택한다.  그 사람들은 '인간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기 때문에, 더 많은 목숨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한 목숨을 희생시킬 수 없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례.

  첫 번째 사례처럼 이번에도 트롤리의 진행 방향 선로에 5명이 있어서 곧 트롤리에 치여 죽게 생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로를 바꿀 수 없다.  대신 선로 옆에 덩치가 매우 큰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선로로 밀어버린다면 그 사람의 몸으로 트롤리를 멈춰세울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경우 첫 번째 사례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고민에 빠진다.  첫 번째 사례에서 대다수 사람은 '최대한 많은 목숨을 살리는 게 낫다' 고 생각하며 다른 선로에 있던 1명을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당수가 1명을 살리는 쪽을 선택한다.  레버만 당겨 선로를 바꿀 때에는 '이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불가피한 결정이야' 라고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지만, 자기 손으로 직접 다른 사람을 떠밀어 죽일 때는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 라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어차피 인명피해를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목숨을 구하는 게 옳다' 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 생각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지는 못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을 추구하는 게 언뜻 생각하면 당연하고 옳은 것 같지만, 우리 인간은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 때문에 모든 경우에 철저히 다수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지 못한다. 

 

  학교, 회사, 사회, 국가 등 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조직에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쉽다.

  머릿수가 많아질수록 모두를 만족시키기 힘들어지고, 구성원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게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유용하게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수를 위해 소외되고 희생되는 소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10년 전쯤 중국에서 폭우로 장강의 하류가 위험해지자, 중국 정부는 장강 하류가 범람하기 전에 먼저 장강 상류의 댐과 둑을 파괴했다.  장강 하류에는 상하이, 난징, 항저우 등 인구도 많고 중국 경제에 매우 중요한 도시들이 있다.  즉, 훨씬 많은 인구와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 하류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인구도 적고 경제적으로도 큰 가치 없는 상류 지역을 희생시킨 것이다.

  국가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범람이 아닌, 정부가 일부러 일으킨 범람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우리를 버렸다' 고 느낄만한 원통한 일이다. 

 

  또한 제3자는 물론이고 이익을 보는 다수에 속한 사람이 보기에도, 다수를 위하는 게 무조건 옳은 일인가 고민할 만한 경우도 있다.

  어린 아이가 사나운 개에게 공격당하고 있는데 마침 주위에 어른이 여러 명이 있다고 치자.  개가 워낙 사나워서 힘 센 어른들이 달려들어도 제압하기는 커녕 어른들까지 위험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사람이 개에게 물리는 것보다는 1명만 물리는 게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니, 어린 아이가 개에게 물려 죽거나 말거나 어른들은 가만히 있어야 할까? 

 

  2. 내가 '지금 우리 학교는' 속 계엄군 사령관이라면?  

 

  '나의 마더' 쪽보다는 '지금 우리 학교는' 쪽 상황이 훨씬 극적이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의 고뇌가 생생히 느껴진다.

  만일 내가 '지금 우리 학교는' 에 나오는 계엄군 사령관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항상 같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 하고 대통령이든 국방부장관이든, 하여튼 다른 누군가에게 결정을 해달라고 요청할 것 같다.

  요청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1만 명의 목숨을 죽이느냐 마느냐 하는 엄청난 결정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책임을 미룬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법적.정치적 책임보다 죄책감 같은 도덕적 책임이 더욱 끔찍할 것 같다는...)

  그저... 살아가면서 그런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