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지옥

Lesley 2022. 2. 8. 00:01

 

  '연상호' 감독의 작품 '지옥' 은 작년에 '오징어 게임' 에 이어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우리나라 드라마다.

  다만 대중적인 인기로는 오징어 게임에 미치지 못 했다.  오징어 게임보다 더 처절하고 잔혹하고 어둡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취향 타는 작품이라는...) 

  연상호 감독 작품 중에 애니메이션 '사이비' 와 영화 '부산행' 을 본 적이 있다.  소재, 주제, 분위기 면에서 '지옥' 은 '사이비' 와 결이 비슷하다.  주요 소재가 종교, 그 중에서도 사이비 종교라는 점부터 그러하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사실은 비이성적인 것에 쉽게 휘둘리는 인간의 나약함, 그런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이용할 줄 아는 무리의 사악함, 그리고 비정상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이 잘 묘사된 작품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는 여기저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적인 게 아니라 진심이나 사랑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지옥이라는 드라마에 가져다 대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눈에 보인다고 다 진실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홀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하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전부 믿지 말아라.' 는 뜻으로 변질(!)된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중에 '시연' 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거대한 고릴라(?) 세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더니, SF 영화에 나오는 레이저 광선 비슷한 강렬한 빛으로 그 사람을 태워 죽여 뼈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 엄청난 광경을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길에서, 자동차 안에서, 상점 안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시연을 녹화한 동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린 사람이 있다.  '새진리회' 라는 신흥종교를 이끄는 '정진수(유아인)' 다.  정진수는 지난 10년 동안 시연이란 것이 '죄악에 물든 인간을 향한 신의 징벌' 이라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은 혹세무민으로 돈이나 뜯어내려는 사기꾼으로 취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연이 정말로 있다는 게 드러나자 너도 나도 정진수를 추종하게 되고 새진리회는 급속도로 세력을 넓히게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시연이 죄인에 대한 신의 징벌' 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연이라는 불가사의한 사건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와중에 벌어졌으니, 이런 저런 동영상을 적당히 편집해서 만든 가짜가 아니라는 것은 밝혀진 셈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시연이 신의 징벌이라는 근거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연당한 사람이 처참하게 죽을만한 짓을 저지른 죄인이라는 것도, 고릴라들이 죄인을 응징하라고 신이 보낸 사자라는 것도, 전부 정진수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공포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을 많은 이가 직접 보았고, 그런 무서우면서도 경이로운 사건을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모두들 정진수의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명에 빠져든다.  그렇게 시연은 어떤 근거도 없이 '신께서 사자를 보내 죽어 마땅한 자를 벌하는 것' 으로 굳어져버린다.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은 시연으로 죽은 자를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붙인다.

  '아무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한다' 가 아니라 '아무개가 시연을 당한 것을 보니 죄를 지은 게 분명하다' 는 식이다.  즉, 결과론적인 끼워맞추기로 엮어버린다.  또한 벌을 주더라도 벌이 죄의 정도와 비례해야 하는 법인데 누구도 그런 문제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먼저, 1회 앞부분에서 시연을 당한 남자는 드라마 내용만 봐서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시연 당할 만한 짓을 해서 시연 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너는 죄를 지었어...!" 같은 답정너 상황임.)

  두 번째로 시연을 당한 '박정자(김신록)' 는 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리며 두 아이를 기르던 미혼모인데, 바로 그 미혼모라는 점이 시연 당해 마땅한 죄로 찍힌다.  결혼 안 한 채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죄인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황당하다.  설사 고루한 사고방식으로 죄인이 맞다고 우기더라도 도덕적인 죄일 뿐 형법상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도 죽어야 한다니...! 

  새진리회가 세상을 장악한 뒤에 나온 새진리회 홍보 영상물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이제는 시연을 지켜보는 군중 뿐 아니라 시연을 당하는 사람조차 세뇌되어, 자신의 시연을 정당화하는 자아비판(!)에 나선다.  한 중년 남자가 시연을 앞두고 어린 딸을 앞세워 자기 죄를 고백하는데, 그 죄라는 것이 인터넷에서 포르노 영상물을 본 것이다.  포르노를 본 게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닐 짓은 아니라지만, 그 정도 일로 죽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양아치(!) 무리가 명분을 얻게 되면...

 

  실제 법이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일반인의 법감정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한다.

  피해자는 고통과 공포 속에 목숨을 잃었고 유족들은 슬픔으로 몸부림치는데, 정작 가해자는 '고의가 없었다' 혹은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였다' 는 이유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진경순(양익순)' 은 우리 사회의 법을 지키는 경찰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지키는 법 때문에 자기 아내를 죽인 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꼴을 봐야 했다.  범인은 살인 당시 마약중독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나마 감형되어 6년만에 출소했다.

 

  이런 현실에 대한 불만이,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싶어 안달 난 양아치들에게 명분을 주게 된다.

  '화살촉' 이라는 무리가 있는데, 그저 몰려다니며 술 마시고 싸움이나 하는 양아치가 아니다.  새진리회를 추종하며 공권력을 우습게 아는 무서운 폭력집단이다.

  흔히 이런 무리는 자기네 행동을 정당화 할 건덕지(!)를 찾는다.  예를 들어 일진들이 어떤 학생을 집단폭행하고 나서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 "걔가 먼저 우리 험담을 하고 다녔다." 고 변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화살촉은 박정자가 시연당해 죽은 후로도 새진리회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목표물로 찍고, 우르르 몰려가 집단폭행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죽이기까지 한다.  자기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죄를 지었으나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 자들을 응징하는 것이라고 포장하면서...

 

 

 

  마비된 이성은 양심도 내버리게 한다.

 

  '민혜진(김현주)' 은 변호사인데 새진리회로 인한 피해자들을 구제해주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박정자가 시연을 고지받고 겁에 질려 도움을 요청하자, 정진수는 그 일을 새진리회의 위상을 높일 기회로 생각하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거액의 돈을 줄 테니 박정자의 시연을 언론에 생방송으로 공개하자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하다니 기막힌 일이다.  그러나 박정자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뒤에 남겨질 어린 자식들이 살 길은 마련해줘야 안심이 될 것이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면서, 민혜진을 찾아와 계약서 작성을 도와달라 한다. 

  민혜진은 정진수의 뻔뻔함과 비정함에 치를 떨면서도, 박정자 본인이 원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설마 시연이라는 게 정말로 벌어지겠어?' 라는 마음에 박정자의 법률 대리인이 되어 새진리회 측과 계약을 체결한다.  1회 도입부에서 벌어졌던 시연 관련 동영상이 뉴스와 인터넷에 다 퍼졌다고는 해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닌데다가, 무엇보다 평소에 새진리회를 의심하고 혐오한 탓에 교활한 속임수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말로 시연이 벌어진다...!

  시연 장소에 모여있던 수많은 구경꾼과 언론인들은, 정말로 벌어진 시연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엎드린다.  현장에 있던 사람 중 민혜진을 비롯한 소수만 당황스러움과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으로 엎드리지 않는데, 이 모습이 언론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면서 민혜진의 불행이 시작된다.

 

  일단, 먹잇감을 찾던 화살촉들에게 공격받게 된다.

  민혜진은 자신에 대한 증오가 인터넷에 넘쳐나는 것을 보고 목숨의 위협을 느껴, 말기 암을 앓던 어머니와 함께 외국으로 피하려 한다.  그러나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가 화살촉 무리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한다.  이미 그 전에 경찰서도 습격했던 화살촉이니 만큼, 건장한 청년들이 힘없는 노인 한 명을 죽도록 패는 것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더 기막힌 일은 민혜진 모녀가 병원에 간 뒤에 벌어진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실로 들어가고 민혜진은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린다.  그런데 병원 직원들과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 TV에 나왔던 민혜진의 얼굴을 알아보고 수근거린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민혜진이 응급실로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침대 위에 방치된 채 사망한 상태다.  노인이 피투성이로 실려왔으니 누가 봐도 위급한 상황이 맞건만 옆에 붙어서 치료하는 사람도 없고, 한쪽 다리는 침대 밖으로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  응급실 의료진도 민혜진을 알아 보고 '새진리회에 순종하지 않는 못된 사람' 의 가족을 치료할 필요를 못 느껴서, 민혜진의 어머니를 죽게 방치한 것이다.

  의료진이라면 흉악한 연쇄 살인범이라도 일단 살려야 하는 법인데, 민혜진의 가족이란 이유로 의료 윤리고 뭐고 내던져버린 것이다.  차라리 화살촉이야 원래 극단주의자들이고 테러리스트들이라 그렇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조차 민혜진이나 민혜진 주위 사람에게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외면할 정도로, 대다수 사람이 새진리회에 넘어간 것이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두 눈인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한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시즌 1의 결말 / 시즌 2는 어떤 내용일까? 

 

  시즌 1은 작은 희망과 강렬한 충격으로 끝난다. 

 

  먼저, 작은 희망...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이가 시연을 고지받은 일로, 몇 년 간 굳건했던 새진리회의 위상에 금이 간다.

  새진리회가 급속히 세력을 넓힌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 같은 기성 종교에 비해 죄와 벌의 관계를 직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죄인이라는 원죄론을 주장하는데, 타 종교를 믿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교리다.  아마 기독교인이라도 어지간히 신앙심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일상 생활 중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의식하며 사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에 비해 새진리회는 법률상 죄든 도덕상 죄든 큰 죄든 작은 죄든, 어쨌거나 스스로 죄를 지은 자만 벌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던 아기가 무슨 죄를 지을 수 있겠나...  갓난아이가 시연을 고지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새진리회의 교리가 엉터리라는 증거가 된다.  민혜진은 아이의 시연을 통해 새진리회의 거짓을 밝히려고 하고, 새진리회는 시연이 벌어지기 전에 아이의 신병을 확보하여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

 

  결국 시연이 벌어지는데, 묘하게 기독교의 예수와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아기 예수가 신분 낮은 이들이 드나드는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났듯이, 그 아기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시연을 겪게 된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이, 아기 부모들이 대신 죽어서 원래 시연 대상자였던 아기는 살아남게 된다.  또한 예수의 죽음으로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갔듯이, 부모가 목숨을 버려가며 아기를 살려낸 과정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휴대폰을 통해 세상에 알려져 반 새진리회 진영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다.

  아기에게 벌어진 일 중에 예수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여럿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아기가 새진리회로 엉망이 된 세상을 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복선이 아닐까...  아기 스스로 구세주 역할을 하게 되든, 혹은 아기기 반 새진리회 운동의 상징이 되는 것이든 간에...  

 

  그리고, 강렬한 충격...

 

  놀랍게도 죽었던 박정자가 부활(!)한다.

  시연 당하는 모습이 생중계 되어, 사람들이 새진리회에 동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박정자.  그 박정자의 유해는 박정자가 살던 집터에 만든 기념관에 전시(!)되어, 사람들에게 새진리회의 주장이 옳다고 선전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런데 드라마 끝부분에서 상반신 뼈만 남은 박정자의 시신에 신비한 일이 벌어지며 박정자의 육신이 원상복구되더니 숨을 내쉬기까지 한다. 

 

  박정자는 시즌 2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위에서 말한 아기는 어떤 식으로든 희망적인 존재가 될 게 분명해 보이지만, 박정자의 경우는 모르겠다.  어쩌면 반 새진리회 진영에 큰 힘을 보태줄 우군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죽었다가(그것도 매우 끔찍하게 죽었다가) 살아난 트라우마나 자신을 죄인 취급했던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오히려 새진리회보다 한 술 더 뜨는 사악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박정자가 악에 받쳐서 새진리회고 세상이고 전부 갈아엎으려 할 때, 희망의 아기를 앞세운 민혜진 및 동지들이 박정자를 막아내고 세상을 구하게 되려나?   

  

 

  오징어 게임보다는 지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오징어 게임보다 지옥의 시즌 2가 먼저 나오기를 바란다.

  부디 시즌 2에서는 혹세무민이나 일삼는 사이비 집단이 벌을 받고, 이성과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