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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The Last Duel)

Lesley 2021. 11. 29. 00:01

  이번 달 초에 봤던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를 소개하려 한다.

  감독은 '리들리 스콧' 이고 주연 배우로 '맷 데이먼' 과 '조디 코머'가 등장한다. (조디 코머는 내가 모르는 배우인데, 몇 년 전부터 방영하고 있는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 로 유명해졌다고 함.)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흥행에서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박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쪽박(!) 수준을 기록하고 말았다.  괜찮은 소재와 주제로 만든 영화지만, 마지막 결투 장면을 빼면 밋밋하고 진행되는 편인데다가 상영시간이 152분이나 되어 지루한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지루하다는 점과는 별도로, 한 번 보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영화이기에 포스팅하려 한다.

 

 

 

  줄거리는 단순한 편이다.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는 부잣집 딸이며 상당한 미녀지만, 배신자의 딸이라는 약점 때문에 나이가 자기보다 훨씬 많은 홀아비이며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장(맷 데이먼)' 과 결혼한다.  어느 날 남편의 친구 '자크(애덤 드라이버)' 에게 강간을 당하는데, 대다수 강간 피해자들이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하는 시절인데도 자크를 고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자크는 범행을 부인하고, 장과 자크의 주군이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 '피에르(벤 애플렉)' 는 평소 자크를 총애하기 때문에 강간 사건을 적당히 뭉개버리려고 한다. 

  그러자 장은 파리로 가서 왕을 알현하고 결투재판을 신청한다.  이 강간 사건처럼 명확한 증거나 증인이 없어 시시비비를 가리기 곤란할 때, 양 당사자가 결투를 해서 이기는 쪽이 승소하고 지는 쪽이 패소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장은 아내 대신 결투재판에 출전하여(여자, 아이, 노인은 체력적인 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가 대신 결투재판에 나갈 수 있음.) 자크와 처절하게 싸워 마침내 이긴다.  패배하여 죽은 자크는 강간죄가 인정되어 시신이 벌거벗겨진 채 매달리는 형벌을 받게 되고, 승리한 장은 민중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줄거리만 보면 뻔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친구의 아내를 강간한 악당,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아내를 위한 복수에 나선 용감한 기사, 결국 악당은 천벌을 받고 정의로운 기사는 승리한다...  그러나 그렇게 뻔한 스토리라면 굳이 포스팅하지 않았다.  다소 뻔하고 지루한 느낌 속에서도 짚어볼 만한 것들이 있다. 

 

  일단, 영화가 진행되는 형식이 독특하다.

  영화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같은 사건을 세 사람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첫 번째 파트는 '장이 말하는 진실' 이고 두 번째 파트는 '자크가 말하는 진실' 이며 세 번째 파트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 '진실' 이다.

  세 번째 파트에서만 '00가 말하는 진실' 이라는 자막이 나온 뒤에 별도로 '진실' 이라는 자막이 뜬다.  결국 세 번째 파트가 진실, 혹은 진실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파트와 두 번째 파트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장과 자크가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에게 유리하게 진술한 것들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술한 것이 의식적인 행동이든 무의식적인 행동이든 간에...)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보통 각자의 입장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주장' 이라고 하지 '진실' 이라고 하지 않는데, 이 영화에서는 굳이 '00가 말하는 진실' 이라고 자막을 띄운다는 점이다.  장과 자크가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딴에는 '진실' 이라고 믿으며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있는 그대로를 찍어 남기는 사진이 아니다.  각자의 생각과 감정이 개입되거나, 여러 사실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 또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 위주로 취사선택이 일어나서,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의 야만성이 생생히 묘사된다.

  영화 속 배경은 14세기 프랑스다.  어렸을 적에 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꽤 낭만적으로 묘사되는 시대다.  정의롭고 용감하며 약자를 배려하는 기사, 아름답고 우아한 귀족 여인, 그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멋진 사랑... 

  하지만 머리가 굵어진 후에 알게 되었으니, 소위 '기사의 시대' 에는 낭만 대신 야만성만 넘쳐났다. 이 영화에는 그 시대의 형편없는 의학 지식, 인권 의식, 성 의식과 함께 불합리한 법률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누가 누구를 구했는가?

 

  첫 번째 파트와 두 번째 파트는 같은 전투 장면으로 시작한다.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을 벌이던 때라, 장과 자크는 영주 피에르의 명령으로 그 지역 요새를 수비하며 영국군과 대치하고 있다.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조롱하며 보란 듯이 프랑스 민간인들을 살해하자, 다혈질이고 우직한 장은 분노하고, 냉철한 자크는 영국군이 일부러 프랑스군을 도발하는 것이니 그대로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이 분을 못 참고 혼자 말을 달려 나가자 프랑스군 전체가 그 뒤를 따라 진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결국 프랑스군이 패전하여 요새를 영국군에게 빼앗긴다.

 

  그런데 '장과 자크 중 누가 누구를 구했는가' 에 대해 두 사람의 기억이 엇갈린다.

 

  첫 번째 파트 '장이 말하는 진실' 에서 장은 자크의 목숨을 구한다. 

  자크는 치열한 전투 중 적군에게 죽을 뻔했는데 마침 장이 그 광경을 보고 가서 적군을 죽였다.  전투가 끝난 후 자크는 "자네 덕분에 살았네.  고맙네." 라고 감사 인사를 한다.  장이 자크를 살려줬다는 기억은, 마르그리트가 강간당한 사건은 물론이고 그 밖에 장과 자크가 여러 가지 일로 갈등을 빚게 되었을 때, 장의 분노에 정당성을 더해 준다.  장은 그저 자크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자크가 배은망덕하게 굴었기 때문에 격노하게 된다.

  또한 여기에서 장은 늠름하고 의연한 지휘관의 모습을 보인다.  무고한 민간인들의 죽음에 분노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며, 패전해서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비록 졌어도 너희는 용감하게 싸웠다." 라고 격려해주는 사려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두 번째 파트 '자크가 말하는 진실' 에서는 자크가 좌충우돌하는 장을 보호한다.

  장은 무술에 뛰어나고 용감하지만, 외골수 기질이 강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장이 영국군의 도발에 넘어가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자, 장의 아버지조차 기막혀하며 아들 한 사람 때문에 전투를 망칠 수 없으니 아들을 포기하자고 한다.  하지만 자크는 장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군사들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장이 영국군에게 죽을 뻔한 자크를 구해내는 일도 없었다.  즉, 장이 자크를 구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크가 장을 구해낸 셈이다. 

  두 사람의 주군인 피에르는 장의 무모함 때문에 요새를 빼앗겼다며 화를 내는데, 자크는 그 자리에 없는 장을 열심히 변호해준다.  즉, 자크는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장에게 친구로서 의리를 지키면서 최대한 보호해주려 애썼다. 

 

 

 

  강간 혹은 간통? 

 

  두 번째 파트 '자크가 말하는 진실' 에서는 자크와 마르그리트가 간통을 벌인다.

  바람둥이 자크는 유부녀 마르그리트에게 반해 마르그리트가 홀로 집에 있을 때를 노려 찾아간다.  이때 마르그리트는 자크를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맨 아래칸에서 일부러 신발을 벗어놓는다.  입식문화권인 서양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잠자리에 든다는 뜻이니, 자크에 대한 유혹인 셈이다.  그것도 '나 잡아 봐라~~' 하는 듯한 요염한 표정으로 자크를 흘끗 쳐다본 후 신발을 벗었으니...  자기 방으로 들어간 후에는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하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저 형식적으로 부르는 티가 역력하다.

  즉, 자크의 기억 속에서는 마르그리트도 장과의 성관계를 원했고 또 그 성관계를 즐겼다.  자기도 자크에게 마음이 있지만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대놓고 침대에 들면 가벼운 여자 취급을 받으니, 억지로 당한 것 같은 모양새를 꾸민 것이다. 

 

  세 번째 파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에서는 마르그리트가 자크에게 강간당한다.

  자크의 기억 속에서는 마르그리트가 계단을 올라가면서 일부러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기억 속에서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도망치느라 계단을 뛰어오르던 중에 신발이 벗겨졌을 뿐이다.  자크의 기억 속에서 신발이 유혹의 상징이라면, 마르그리트의 기억 속에서는 신발이 절박감과 공포의 상징인 셈이다.

  하녀가 외출해서 자기를 도와주러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타게 하녀의 이름을 외친다.  그러나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어서 무참히 유린된다.

 

 

 

  다정한 남편 혹은 고압적인 남편?

 

  첫 번째 파트 '장이 말하는 진실' 에서 장은 무뚝뚝하기는 해도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이다.

  마르그리트의 아버지는 한때 영국 편에 섰던 자인데 나중에 프랑스 국왕에게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조국을 배반했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사람들에게 경원시 당하고 있어서, 아름답고 총명한 딸 마르그리트의 혼삿길도 밝지 못하다.  장도 다른 사람처럼 마르그리트의 아버지를 경멸하지만 마르그리트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한다.  그런데 마르그리트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했던 땅이 세금 징수관 자크를 통해 영주 피에르에게 넘어간다.  이때 장은 단순히 자기 몫의 땅을 빼앗겼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 땅이 사랑하는 아내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라 아내가 상처받을까봐 화를 낸다. 

  돈을 벌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가서 전쟁을 치르며 온갖 고생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중나온 아내를 끌어안고 두 번 다시 헤어지기 싫다는 듯 애틋한 표정을 짓는다.  아내가 자크에게 강간당했다고 고백했을 때, 자신도 충격 받았으면서 아내를 품에 안고 위로해주며 아내를 위해 자크를 반드시 심판받게 하겠노라 맹세한다. 

 

  세 번째 파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에서 장은 재산과 가문의 후계에만 신경쓰는 남편이다.

  마르그리트와 결혼식을 올리던 중, 마르그리트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했던 땅이 피에르에게 넘어간 것을 알게 되자 장인의 멱살을 쥐고 위협한다.  장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사정하자 마지못한 듯 태도를 누그러뜨리는데, 이때 하는 말을 들으면 결혼의 목적이 확실히 드러난다.  비록 지참금은 없지만 마르그리트가 젊고 건강하니 곧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즉, 장은 마르그리트란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재정난을 해결해 줄 지참금 및 가문의 후계자를 낳아줄 여자가 필요해서 결혼한 것이다.

  결혼 첫날 밤도 그렇고 그후에도 아내가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몇 년이 지나도록 임신 소식이 없자 아내를 탓한다.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왔을 때 마중나와 다가서는 아내를 집안으로 잡아끌고 가서, 가슴선이 많이 파인 정숙하지 못한 옷을 입었다고 화를 내기도 한다.

  아내가 강간당한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첫 반응이 "정말 강간이었소?" 다.  즉, 아내의 말을 믿지 않고 혹시 불륜을 저지르고서 거짓말을 하는 건가 의심부터 한다.  강간 피해자가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손가락질에 시달리는 시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나중에 반전처럼 나오는 '강간죄로 남자를 고발하고서 강간 피해를 입증하지 못 한 여자는 화형당한다' 는 법률을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다. (엄청난 사회적 불이익은 기본이고 심지어 불에 타죽을 위험까지 무릅써가며 강간당했다는 거짓말 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리고 곧장 아내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아내의 마지막 성관계 대상이 외간남자이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이유다.  아내에 대한 소유욕과 자크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아직 강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 한 아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힌 것이다. 

   

 

 

  형편없는 의학 지식과 형편없는 인권 의식이 만났을 때...

 

  흔히 유럽의 중세를 '암흑의 시대' 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면이 잘 묘사된다.

 

  의사와 재판관 등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진 의학 지식 수준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마르그리트는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되지 않자 의사를 찾아간다.  이때 의사의 질문이 다음과 같다.  "성관계에서 절정을 느껴야 임신할 수 있는 법인데, 남편분과 잠자리를 같이 할 때 절정을 느꼈습니까?"  14세기 의학 수준이 21세기 의학 수준보다 훨씬 뒤쳐진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파리의 최고법원 재판관들도 의사처럼 황당한 믿음을 갖고 있다.  공교롭게도 마르그리트는 강간 사건 후에 임신했는데, 재판관들은 바로 그 점을 들어 강간 주장을 의심한다.  먼저, 남편 장과의 사이에서 몇 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태아가 자크의 자식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부분은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보면 뱃속 아기는 남편의 자식일 가능성이 높음.)  그리고 자크와의 성관계에서 절정을 느꼈으니 임신되었을 것이라면서, 그렇다면 성관계를 강제로 한 게 아니라 원해서 한 것 아니냐고 추궁한다.  한술 더 떠서 "강간으로는 임신할 수 없소." 라고 단언하는 재판관까지 있다. 

 

  의학 수준 뿐 아니라 법률 수준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강간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발했다가 패소했을 경우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은밀히 벌어지는 강간죄의 특성상 증인이 존재하기 힘들고, 지금처럼 CCTV나 유전자 검사법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니, 범행을 입증하기 곤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가해자의 범행을 입증 못 하면, 몇 달 감옥살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형 당해야 한다.

  재판관이 마르그리트에게 정말로 결투재판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냐며 "결투재판에서 지면 당신은 상대방을 무고한 게 되는 거요.  이미 남편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여자가 남자를 무고할 경우 화형을 당하게 되어 있소." 라고 말한다.  그런데 패소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닥치는지에 대해서, 남편은 한 마디 설명도 해 준 적이 없다...!  마르그리트는 크게 동요하지만, 국왕과 왕비까지 지켜보는 자리라 남편에게 설명을 들었다고 대답한다.

 

  나중에 마르그리트는 장에게 자신이 화형당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결투재판을 걸 수 있느냐고 따진다.

  이때 장은 자신감 넘치다 못 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이기면 되는 거 아니요?" 라고 반문한다.  물론 장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인이라 싸움에 익숙하고, 자크는 세금 징수관인데다가 영주와 함께 여자들 모아놓고 음탕한 짓이나 벌이는 난봉꾼으로 살았으니, 장이 이길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게 어디 반드시 실력 좋은 쪽이 이기게 되어 있던가?  운이라든지 그 날의 컨디션이라든지, 여러 요소로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월드컵에서도 약한 팀이 뜻밖에도 강한 팀을 깨부수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 않나...!)  그런데도 장은 아내가 강간당한 것 말고도 여러가지 일로 자크에게 원한이 쌓여서, 자크를 죽이기 위해 아내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도박판에 나선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법률에 대해 알고나면, 장의 어머니가 했던 말의 의미가 달라진다.

  장의 어머니는 평소 마르그리트와 고부갈등을 겪었는데, 마르그리트가 괜히 강간 사실을 털어놓은 탓에 아들 장이 위험해졌다며 며느리를 원망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젊은 시절 강간당했지만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며느리가 그렇게 입을 다물어 얻은 게 뭐냐고 묻자, "살아남았다." 라고 대답한다.

  이때는 장의 어머니가 강간범에게서 살아남았다는 뜻인 줄 알았다.  즉, 강간범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라서, 그런 자를 고발했다가 오히려 장의 어머니가 입막음 차원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어서 가만히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재판관이 화형 이야기를 할 때 화면에 잡히는 장의 어머니 표정을 보면, 장의 어머니는 그 법률을 알고 있어서 화형당할까봐 겁이 나서 침묵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자크를 고발할 수 있는 자가 마르그리트가 아닌 장이라는 점도 이 시대 인권 의식 수준을 보여준다.

  여자들이 사회 활동 못 하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던 시절이라, 세상물정 밝은 남편이 자기 배우자를 위해 대신 고발하고 법정 투쟁을 하는 것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장이 나서서 자크를 고발한 이유는, 마르그리트에게는 애초에 고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탓에, 여자가 강간당한 일을 '남편의 소유물을 훼손한 죄' 로 다루었다.  강간이란 행위는 분명히 있는데 강간죄란 죄목은 없는 것이다.  강간당한 사람은 마르그리트인데, 정작 마르그리트에게는 강간범을 고발할 권리가 없고 오직 남편을 통해서만 고발할 수 있다.  만일 장이 아내의 강간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든지, 혹은 자크가 영주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라는 점에 겁을 먹고 맞대결을 피했더라면, 마르그리트는 자크를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법의 심판을 구하는 일도,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인 마르그리트가 화형당할 각오를 하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점이 참...)    

 

 

 

  결투재판 - 마지막 순간에 자크는 거짓말을 한 걸까?  

 

  결말부를 장식하는(그리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박진감 넘쳤던) 결투재판은 이 시대 야만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결투재판이란 것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유죄냐 무죄냐를 결투로 가리다니...  당연한 말이지만 결투의 승패는 죄의 유무나 신의 심판으로 갈리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싸움을 잘 하고 누구에게 더 운이 따라주느냐로 정해진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시절이라 '신은 착한 사람의 편을 들고 나쁜 사람을 벌할 것이다' 는 믿음으로 결투재판을 치렀다.

  물론 죄를 지은 자크가 패배하여 목숨을 잃었으니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만일 운 좋게 자크가 승리했더라면...?  그렇다면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장이 피범벅이 된 채 죽었을 것이다.  또한 마르그리트는 강간범이 아무 처벌 안 받는 꼴을 봐야 하는 것도 모자라, 불길과 연기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자크는 마지막까지 자기 죄를 부인한다.

  자크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패배가 확실시 된 상황에서, 장이 자크에게 단검을 바짝 들이대며 죄를 고백하라고 외친다.  자크는 억울하다는 듯 "나는 정말로 강간하지 않았다!  내가 강간했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고 외친다.  그러자 장이 분노하여 자크의 입에 단검을 박아넣어 죽인다. 

  영화관에서 이 장면을 볼 때에는 '강간범답게 마지막 모습까지 추악하네.' 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입을 다물며 살았던 자들이 죽음을 앞두고는 죄를 고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자크는 분명히 강간을 저질렀는데도 끝까지 부인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을까 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자크는 정말로 자기가 강간하지 않았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위의 두 번째 파트 '자크가 말하는 진실' 에서 자크와 마르그리트는 서로 끌려서 간통을 벌인 것처럼 묘사된다.  그것이 자크의 뻔뻔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그 시대의 형편없는 인권 의식과 잘못된 성 관념으로 인한 왜곡된 믿음과 기억일 수도 있다.

  여자가 강간당한 일을 '강간죄' 가 아니라 '남편의 소유물 훼손죄' 로 다루는 시대다.  의사니 재판관이니 하는 배운 사람들조차 '성관계에서 절정을 느껴야만 임신이 된다' 느니 '강간으로는 임신할 수 없다' 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여자와 성에 대해 비뚤어진 생각을 갖게 되어, 여자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조차 자신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보게 되고, 겁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저항하지 못 하는 것을 '성관계 동의' 로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이 자크를 고발했을 때 영주 피에르는 자크에게 정말로 강간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자크는 억울하다는 듯 마르그리트와 성관계를 가진 것은 맞지만 강간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 이름이 더럽혀졌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처벌이 두렵고 자기 명예가 떨어질 것이 걱정되어 범행을 부인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자크는 자기 나름대로의 진실을 말했을 수도 있다.  그저 그 진실이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과 환경으로 인해 자기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엮어진 진실이라는 게 문제일 뿐... 

   

 

 

  기타

 

  1.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이 이상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The Last Duel' 인데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면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로 바뀌었다.  그런데 '라스트 듀얼' 이나 '최후의 결투' 나 같은 말 아닌가?  그저 하나는 영어 발음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고, 또 하나는 영어의 뜻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고...

  어째서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True Love' 란 멜로 영화가 나오면 '트루 러브: 진정한 사랑' 같은 식으로 우리나라 영화관에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2. 리들리 스콧 감독은 중세의 전투씬에 강한 것 같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 중 십자군 전쟁을 다룬 '킹덤 오브 헤븐' 과 의적 로빈후드 전설에 관한 '로빈후드' 를 본 적이 있다.  두 영화 모두 호흡이 길어 잔재미는 없는 편이지만 전투 장면만큼은 생생하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의 마지막 결투재판 장면만큼이나 말이다.

  보통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기사들의 전투 장면은 멋있게 윤색되어 묘사되곤 하는데, 리들리 스콧의 영화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전쟁터는 결코 잘생긴 사나이들이 폼 잡고 영웅 노릇하는 무대가 아니라, 피와 비명이 난무하며 지는 쪽에게도 이기는 쪽에게도 잔혹한 곳일 뿐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3. 백년전쟁 시절 프랑스인 역할을 영어권 배우들이 맡았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미국이나 영국 배우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 장교, 그리스 신화 속 영웅 등 다른 언어권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니 이 영화 속 프랑스인 역할을 미국과 영국 배우들이 맡은 것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데...

  등장인물들이 그냥 프랑스인이 아니라 백년전쟁 시기의 프랑스인들이다.  프랑스와 영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던 시절이고, 영화 속에서도 장과 자크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영국군과 싸우는 장면이 두 차례 나온다.  그런데 영국군 상대로 싸우는 프랑스인들이, 영국군의 언어인 영어로 말한다는 게 얄궂다.

 

  4. 마르그리트가 남편을 위해 수절한 것 같지는 않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르그리트는 걸음마를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자막으로, 결투재판 몇 년 후 장이 십자군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했으며 마르그리트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살았다고 나온다.

  마르그리트는 결투 내내 높은 단상 위에 족쇄를 찬 채 있다가, 남편이 승리한 후 족쇄가 풀리자 쭈삣거리며 남편에게 다가선다.  자기 목숨을 갖고 위험한 도박을 벌인 남편에게 정이 뚝 떨어졌겠지만, 결투장을 에워싼 민중의 기대에 찬 표정을 보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남편과 포옹한다.  치열한 전투를 보고 잔뜩 흥분했던 민중은 이제, '아내를 위해 용감히 싸워 이긴 남편과 그 남편을 자랑스러워 하는 아름다운 아내' 라는 멋진 결말에 관한 기대치가 충족되자 열광한다.  장은 파리 시내를 퍼레이드하며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마르그리트가 자기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남편을 못 잊어 평생 수절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장은 자기 목숨 뿐 아니라 아내의 목숨도 같이 걸었지만...)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본 결혼 생활과 강간 사건의 공론화 과정을 보면, 남편을 잊지 못 해서가 아니라 더는 다른 사람 손에 운명이 좌우되며 살기 싫어서 재혼을 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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