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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Good Bye, Lenin!)

Lesley 2021. 11. 5. 00:01

  '굿바이 레닌(Good Bye, Lenin!)' 은 2003년도 독일 영화다.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을 이루던 때를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 영화인데, 우리가 코미디 영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종류는 아니다.  기본적인 장르는 코미디가 맞지만, 그 속에 한 가족의 비극과 화해, 급속히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는 자와 적응하지 못 하는 자의 모습이 잘 녹아있다.  즉, 심각한 소재들을 유머러스하게 녹여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알렉스(다니엘 브륄)' 는 20세 정도 되는 동독 청년이다.

  알렉스 가족은 모두 4명이다.  TV 수리기사로 일하는 알렉스, 전직 교사이며 지금은 가정주부인 어머니, 대학생이며 미혼모인 누나, 갓난아이인 조카딸.

  아버지는 알렉스와 누나가 아직 어렸을 적에 외국에서 만난 서독 여자와 같이 살겠다며 서독으로 망명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사라진 일은, 당시 어렸던 남매보다는 어머니에게 더 큰 타격이 되었다.

  어머니는 남편이 가정도 버리고 국가도 버린 일로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리고 퇴원한 후 열렬한 체제수호자 겸 모범적인 사회주의 시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편이 동독과 정통성 경쟁을 벌이던 서독으로 가버렸으니, 배신자의 가족이라는 오명과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가족을 버린 남편에 대한 소심한 복수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 나중에 반전이 벌어진다는...!!!)

 

  어머니는 어찌 보면 병적으로, 또 어찌 보면 우스울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한다.

  영화 중반부에 가서야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사회주의적 태도를 강조했던 탓에 동료 교사들과 갈등을 겪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어떤 이념과 체제 밑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 이념과 체제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준에서 자유 혹은 일탈을 적당히 즐기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좋게 말하면 순수하게, 나쁘게 말하면 짜증나게, 모든 이에게 사회주의적 도덕성을 강조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쳤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10년 정도 지난 1989년, 동독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서서 자유를 부르짖다가 경찰과 부딪친다.  알렉스도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게 폭행당하며 끌려가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어머니가 나타난다.  어머니는 그 날 있었던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시위로 길이 막혀서 택시에서 내렸다가 아들을 본 것이다.

  사회주의의 옹호자인 어머니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이들이 국가 체제를 뒤집겠다며 길거리로 쏟아져나온 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그 무리 속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어머니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쓰러져서 코마 상태에 빠진다.

 

  어머니가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누워있던 8개월 동안 동독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간다.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고, 자유 선거의 실시로 사회주의 정권도 무너진다.  동독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서독으로 몰려가는가 하면, 거꾸로 서독의 자본주의 문물이 동독으로 밀려든다.

  그래도 청년들은 어떻게든 세상의 흐름을 타고 앞으로 나가게 된다.  알렉스는 다니던 TV 수리 회사가 문을 닫아 곤란한 처지가 되지만, 곧 다양한 나라의 방송을 볼 수 있는 위성 TV 안테나를 설치하는 회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만났던 러시아 출신의 간호사와, 공교롭게도 어머니 병실에서 다시 만나 연인 사이가 된다.  대학을 그만 둔 누나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패스트푸드점(버거킹) 직원이 되더니, 서독 출신 남자와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노인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힘들어 한다.  알렉스 가족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은 동독 체제가 무너져 수많은 동독 기업이 문을 닫아 강제로 퇴직하게 된 사람인데, 알렉스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서독 놈들 때문에 우리가 쓰레기나 뒤지며 살게 되었어." 라고... 

 

  어느 날 회생 가능성이 없다던 어머니가 기적처럼 눈을 뜬다.

  의사는 어머니 상태가 안 좋으니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알렉스는 기어이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온다.  알렉스는, 지난 10년 간 사회주의를 맹렬히 추종했던 어머니가 바뀐 세상을 보면 충격을 받고 돌아가실 수 있을 것이라 걱정한다.  온갖 사람이 드나드는 병원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집에서라면 어머니를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알렉스의 기상천외한 연극이 시작된다.

  어차피 어머니는 침대 위에서만 지내야 해서 방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니 이미 망해버린 동독을 어머니 방안에서만 부활(!)시키면 되는 거다.

 

  일단, 회사 동료의 도움으로 가짜 뉴스를 만든다.

  위성TV 설치 회사에서 알렉스의 파트너로 일하는 동료가 있는데, 이 사람이 영화 감독 지망생이라 영상물 촬영이나 편집에 익숙한다.  그 동료가 실제 뉴스에서 필요한 장면들을 뽑아내고, 가짜 아나운서 노릇을 하며 엉터리 뉴스 장면도 촬영한다.  그것들을 적당히 짜집기 하여 동독이 여전히 건재한 것처럼 거짓 뉴스를 만들어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한다.  그러면 알렉스는 그 비디오 테이프를 어머니 방에 있는 TV에 방영한다.

  거짓 뉴스 내용은 황당하다 못 해 웃음까지 나오는 것들이다.  많은 동독인들이 자유와 풍요를 찾아 서독으로 몰려가는 실제 뉴스 속 장면을 '서독인들이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에 질려서 동독으로 망명오는 장면' 으로 둔갑시킨다. (인정 많은 어머니는 서독인들이 불쌍하다며 도울 방법을 궁리한다는... -.-;;)  어머니가 창밖으로 펄럭이는 대형 코카콜라 광고 현수막을 우연히 보고 깜짝 놀라자, '코카콜라는 원래 동독의 발명품이었는데 그동안 미국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다가(!) 어찌어찌하여 다시 동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는 거짓 뉴스를 내보낸다. (코카콜라의 컴백홈 스토리... -.-;;)

 

  이미 생산이 끊긴 동독제 물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애용했던 피클이나 잼 같은 식료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제 마트에는 서독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입된 식품만 즐비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들여온 식품을 어머니 식탁에 올릴 수는 없다.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어머니는 당연히 깜짝 놀라고 의아해 할 테니까. 

  알렉스는 아쉬운대로 동독제 식품을 담았던 용기를 구해, 그 안에 서독이나 다른 나라 식품을 넣어 어머니에게 건넨다. (즉, 무늬만 동독제...)  동독제 식품 용기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하고, 위성TV 안테나를 설치하러 간 고객의 집에서 우연히 보고 얻어오기도 한다.

 

  어머니 생일에는 여러 사람을 불러모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어머니가 교사 시절 아이들에게 동독의 아름다운 땅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던 것을 생각해서, 돈을 주고 초등학생들을 불러 어머니의 옛 제자인 것 마냥 노래를 부르게 한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와 가까이 지냈던 비슷한 연배의 이웃이나 옛 동료에게 부탁하여,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어머니의 모범적인 사회주의적 태도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어머니는 손녀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딛는 것을 보고 기뻐하다가 자신도 용기를 내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어 본다.  의외로 그럭저럭 걸을 수 있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병원에 누워 있던 기간까지 합치면 거의 1년 만에 세상 구경을 한 셈인데, 바깥 풍경은 어머니의 기억과는 달리 어수선하고 낯설기만 하다.  아파트 건물 앞에 쌓인 이삿짐 중에 자본주의 국가 스웨덴의 이케아 가구가 있는 것도 뜻밖인데, 새로 이사오는 사람이 서독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그리고 동독에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리도 없는 서독의 BMW 자동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떡 하니 있는가 하면, 역시 서독의 벤츠 자동차 광고판도 보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계속 걷던 어머니는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맞닥뜨린다.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하는 것 같은 어머니의 멍한 표정.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이다.

  지구상에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을 세웠던 인물이기에, 공산진영에서는 위인으로 추앙받던 레닌.  그 레닌의 동상이 반토막이 난 채 헬리콥터에 묶여 날아가고 있다.  

 

  독일 통일을 TV를 통해 지켜봤던 세대에게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젊은이들의 함성과 화려한 불빛 속에서 축제처럼 이루어진 베를린 장벽의 붕괴.  또 하나는 옆으로 쓰러진 채 사람들에게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당하던 커다란 레닌 동상.

  레닌은 동독에서 수십 년 간 위대한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동독을 말아먹은(!) 잘못된 이념의 상징으로 변해서, 동독 사람들에게 몸이 두 동강 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어디론가 실려가는 것이다. 

 

 

'안녕,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레닌 동상.

 

  레닌 동상의 자세도 절묘하기 짝이 없다.

  레닌 동상은 한 팔에 책을 안고 다른 팔을 앞으로 뻗고 있는데, 공산주의 이념을 민중에게 설파하는 모습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그리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 앞으로 레닌 동상이 팔을 뻗은 채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제 이 땅에서 나의 시대는 끝났어.  영원히 안녕~~~' 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다.

 

  이쯤 되니 어머니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알렉스는 연극을 계속 밀어붙인다.

  영화에서 표현되지는 않지만, 알렉스는 어머니를 걱정할 뿐만 아니라 죄책감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자신이 시위에 참가한 것을 보고 어머니가 쓰러져서 건강을 해치게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때 일어나는 반전...

  알렉스네 네 식구에, 알렉스의 여자친구와 누나의 남자친구까지 모두 별장으로 놀러간다.  아직 아버지가 함께 살던 시절에 온 가족이 휴가를 갔던 추억이 서린 별장이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10년만에 털어놓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가정을 버린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출신성분이 안 좋아서 동독에서 제대로 활동 할 수 없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학술회의차 서독에 갔다가 그곳에서라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고, 아내에게 함께 망명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너무 무서웠다.  왜 안 그렇겠는가, 꼭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고 실패할 경우 온 가족이 끝장날 판국이니...  결국 어머니는 아이들과 동독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

 

  어머니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한 안전장치로 거짓말을 생각해냈다.

  남편이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억압받고 살다가 자유를 찾아 망명했다는 쪽보다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느라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망명했다는 쪽이, 동독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가족에게 그나마 유리했을 테니까.  전자라면 남편은 사상범이 되고 가족도 정치적으로 의심받고 감시받게 되지만, 후자라면 남편은 그냥 파렴치한 바람둥이일 뿐이며 가족은 동정의 눈길과 뒷담화만 참아내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안전장치가 '모범적인 사회주의자' 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망명자의 아내인데도 정부에게 표창장을 받을 정도였으니, 어머니가 완벽한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알렉스와 누나는 말도 제대로 못한다.

  이들 남매가 그동안 아버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는, 영화 속에서 묘사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여자에 빠져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아버지에게 좋은 감정을 품었을 리 없다.  틀림없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외도 이야기가 어머니의 거짓말이었다니...

  알렉스는 스스로도 충격을 삭혀내지 못 한 채, 그래도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간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편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머니는 알렉스의 여자친구에게서 진실을 듣게 된다.

  알렉스의 여자친구는, 알렉스가 어머니를 위한다며 어머니를 속이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어머니의 결벽적인 사회주의적 도덕 수준에 맞추느라,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청각장애인 학교의 교사라는 거짓말까지 했다. (보통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보다는 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더 힘들고 더 봉사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훌륭한(!) 직업이기 때문에...)

  알렉스의 여자친구는 잔인한 진실이 아름다운 거짓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충격을 받더라도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스가 아버지를 데려오는 사이 알렉스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얼마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떴다.

  마지막 순간까지 알렉스는 연극을 계속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것을 끝까지 모르고 돌아가신 것에 위안을 느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알렉스의 시선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영화를 보는 이들은 어머니가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아들의 연극에 장단을 맞추어줬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터무니 없는 짓을 벌이면서까지 어머니를 지키고 싶어한 아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도 오랜 시간 아들과 딸을 속여왔다는 미안함에서 나온 작은 속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