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버드 박스(Bird Box)

Lesley 2021. 10. 18. 00:01

  원래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를 잘 안 보는데 코로나 사태 터진 후로는 여러 편 봤다.

  코로나 사태로 세상이 어수선하다 보니 이런 영화에도 눈이 가는 모양이다.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를 뒤집어 놓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나의 영화 취향까지 바꾸어버린 코로나 바이러스의 힘에 경의(?)를 표한다. 

  

  지난 추석 연휴 때 넷플릭스 영화인 '버드 박스' 를 봤다.

  '산드라 블록' 이 주연을 맡은 2018년도 작품인데, 당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중 공개 첫 주만에 최다 조회수 찍었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사람들이 영화 속 상황을 흉내내다가(천으로 눈을 가린 채 밖을 돌아다니기) 사고 당하는 일이 줄줄이 생겨 뉴스에 보도될 정도였다.

 

 

 

 

  이 영화는 '공포물 +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이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세상을 망하게 한 무서운 존재가 있고, 살아남은 자들도 계속해서 그 존재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데, 그 존재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공포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망한 세상 속에서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는 점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로 볼 수 있다.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운 적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점은 공포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보통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는 귀신이나 좀비의 등장, 외계인의 침략, 바이러스의 창궐 등 공포의 대상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대놓고 나오느냐, 미스터리한 분위기 풍기다가 끝부분에서 반전을 일으키며 나오느냐의 차이일 뿐...)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세상을 망하게 한 원흉이 무엇인지, 어쩌다가 그것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미지의 적이다 보니 딱히 이름도 없어서 '그것' 이라고 불릴 뿐이다.

  흉칙하게 생긴 좀비나 피투성이 귀신도 무섭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니 피해다니거나 덤벼들어 싸울 수라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불과 한두 주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온 세상이 망해버렸다.

 

  우리는 '그것' 에 대해 단편적인 사실만 알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과 마주치면 환각을 경험하고 자살하게 된다.

  일단 그것을 보면 위험한 행동을 하도록 유혹하는 환청을 듣게 되어(그것도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이의 목소리로 듣게 됨) 본의 아니게 자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도록 창문을 가린 채 실내에서 숨어 살아야 한다.  불가피하게 밖으로 나가려면 안대로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고서 청각과 촉각에 의지해서 다녀야 한다.

  그것을 보고 자살하는 경우에도 개인차가 있다.  상당수 사람은 그것을 보면 곧 목숨을 끊지만, 의지력이 강하거나 절박한 사정이 있는 이는 어느 정도(그래봤자 10초 남짓) 버티다가 죽게 된다.

 

  둘째, 정신병 환자들은 그것을 봐도 죽지 않는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눈동자가 이상하게 변할 뿐(그것을 보고 죽는 사람들도 눈동자가 변함) 죽지는 않기 때문에 자유로이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어딘가에 모여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산다면 오죽 좋겠느냐만은, 미친 세상에서 활개치고 사는 게 가능한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법이다.

  정신병자들은 그것을 열렬히 추종하며 그것에게 타인의 목숨을 바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마치 사이비 종교에 푹 빠진 신자 같다.  사이비 종교 신자들이 자기들만 사이비 종교를 믿는 게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신세 망치게 하듯이, 이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그것을 보여주어 죽음으로 내몬다.  

 

  셋째, 그것에게는 형체는 없지만 힘은 있다.

  우리 시청자들이나 영화 속 맨 정신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정신이상자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 같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아름답다' 라고 감탄하지만, 말 그대로 정신이상자들이라 정말로 어떤 실체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육체가 없는데도 신기하게 힘은 쓸 수 있다.  낙엽이 거세게 휘날리도록 바람을 일으키거나 자동차 같은 큼직한 물체를 흔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다.

 

 

 

  생지옥으로 변한 세상

 

  주인공 멜로리(산드라 블록) 는 혼자 사는 화가다.

  영화 중간중간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스치듯 나오는 말에 의하면, 행복하지 못 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까칠한 성격이 된 듯하다.  조만간 아이를 낳을 예정인데 아이 아버지(남편인지 남자친구인지는 알 수 없음.)와 얼마 전에 헤어진 탓에, 뱃속 아이에게 애착을 못 느끼고 심란해 하고 있다.

 

  멜로리가 여동생과 함께 병원에 가서 산전검사를 받던 날, 세상이 뒤집어지고 지옥문이 열린다. 

  병원에 가기 전 집에서 TV 뉴스를 봤는데, 헝가리인지 루마니아인지 하여튼 동유럽의 어떤 나라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집단 자살이 연달아 터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전염병처럼 다른 나라로 번져서 유럽 전체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끔찍한 사건이기는 해도 멀리 유럽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검사를 끝내고 병원을 나오기 직전, 한 여자가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머리를 유리벽에 박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일은 시작이었을 뿐이다.  멜로리와 여동생이 탄 차가 도로로 들어서니 모두가 미쳐날뛰고 있다.  차들이 과속을 하거나 역주행을 하며 서로 들이박고,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고, 산발을 하거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도로로 뛰어들고...  유럽에서 벌어졌다던 이상한 사건이 바다 건너 미국까지 번진 것이다.

 

  멜로리도 지옥 속으로 휘말리기 시작한다.

  멜로리가 자기네 차가 지나친 곳을 보느라 고개를 돌린 사이, 운전하던 여동생만 그것(!)을 본다.  여동생 역시 다른 사람처럼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차를 몰아 사고를 일으킨다.  전복된 차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여동생은 넋이 나간 듯 엉망진창이 된 도로를 가로지르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한다.

  충격적인 일을 잇따라 겪고 혼란스러워 하던 멜로리는, 지나가던 이의 도움으로 근처에 있는 집으로 피신한다.  라디오에서는 바깥이 혼란스러워 위험하니 집안에 머물라는 권고와 함께, 곧 군대가 투입되어 사태를 진정시킬 것이라는 긴급방송이 나온다.  하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그 막연한 방송조차 끊기고(방송국 사람들도 대부분 죽고 소수의 생존자는 어디론가 피했을 것임), 멜로리까지 10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집안에 고립된다.  각자 볼일이 있어서 그 집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얼떨결에 운명 공동체로 묶여서 한 공간 안에서 세상의 멸망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멜로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있으니, 이라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남자를 만난 것이다.

  세상이 한꺼번에 미쳐돌아가서 각자 자기 목숨 챙기기에 바쁜데, 톰은 일면식도 없는 멜라리를 부축하여 집안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임산부라 배려해주는 것 같았는데, 피난처가 된 집에서 함께 지내며 차츰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나타내다가 애인 사이로 발전한다.

  톰은 군인으로 지낼 때 이라크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  많은 미군이 해외의 전쟁터나 분쟁지에서 못 볼 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무너지거나 과격한 성격으로 변한다.  그러나 톰은 힘들고 위험한 이라크에서 매일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아버지를 보고, 아무리 험난한 상황에서라도 인간성과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피난처에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 중, 아무리 끔찍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인물이다.

 

 

  

  피신처로 찾아온 새 멤버들

 

  힘들고 불안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은신처에서 버티던 중에, 새로운 멤버들이 찾아온다.

 

  첫 번째는 올림피아 라는 젊은 여자다.

  멜로리처럼 만삭의 임산부인데, 군인인 남편을 잃은 후 도움을 요청하러 집밖으로 나갔다가 멜로리 일행이 있는 피난처까지 왔다.  멜로리와는 정반대의 성격지만 둘 다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친해진다.

  올림피아는 정상적인 세상에서라면 남들이 친구로 사귀고 싶어할 만한 착한 사람이지만, 영화 속 끔찍한 세상에서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작품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슬프게도 올림피아의 순하고 친절한 성격이 화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두 번째는 게리 라는 초로의 남자다.

  이 사람은 바깥 소식을 모르고 살던 피난처 사람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정신병을 앓는 범죄자를 수감하는 시설이 있는데, 난리통에 정신병자들이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봐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그것을 보여주어 죽게 만든다고 한다.  자신은 그 정신병자들에게 쫓겨 다니다가 우연히 피난처로 왔다는 것이다.

  사실, 피난처의 기존 멤버인 더글라스(존 말코비치) 는 게리를 의심쩍게 생각하며 쫓아내려고 했다. (더글라스는 올림피아를 받아들이는 것에도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었음.)  하지만 올림피아가 자신처럼 의지가지없이 헤매다가 온 게리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문을 열어준다.  다른 멤버들도 더글라스보다 인간미 있는 사람들이라 올림피아 편을 든다.  그렇게 게리도 피난처의 새 멤버로 자리잡나 싶었는데...

 

 

 

  남은 것은 어른 둘, 아이 둘

 

  알고 보니 게리가 털어놓은 정보는 절반만 진실이었다. 

  정신병자들의 특수성에 대한 부분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신병자들에게 쫓긴다는 말은 거짓이다.  게리야말로 그런 정신병자 중 하나였다...!  다른 정신병자들이 정상인에게 강제로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게리도 피난처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려 일부러 접근한 것이다. 

 

  멜로리와 올림피아가 거의 동시에 출산을 시작하면서 일이 터진다.

  피난처 사람들 모두 그 일에 정신을 쏟는 틈에, 게리는 1층 창문을 가린 커텐과 신문지를 걷어내고 밖을 내다보며 황홀해 한다.  그리고 두 산모와 그들의 출산을 돕던 셰릴 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 그곳 창문을 가리고 있던 것들도 다 걷어낸다.

  멜로리와 셰릴은 깜짝 놀라서 얼른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올림피아는 갓 태어난 딸을 살피느라 게리가 하는 짓을 못 본 탓에, 무심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만다.

 

  결국 올림피아는 그것을 보고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 죽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딸을 안은 채 투신하지 않고 멜로리와 셰릴에게 딸을 넘겨줬다는 점이다.  멜로리와 다르게 임신한 아이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강력한 자살충동에 사로잡혀서도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줄 동안은 버텨낸 것 같다.

  이때 멜로리와 셰릴은 아이를 달라고 다급하게 설득할 뿐, 올림피아의 자살을 막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올림피아가 그것을 본 이상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갓난아이를 살리는 데에만 집중하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게리의 만행은 계속된다. 

  셰릴을 붙잡고 창가로 끌고가더니 감은 눈을 억지로 뜨게 한다.  그것을 본 셰릴은 탯줄을 자를 때 썼던 가위로 자기 목을 찔러 죽고 만다.

  이제 멜로리와 두 갓난아이마저 위기에 처하는데, 더글라스가 총을 들고 나타나 게리와 싸움을 벌인다.  게리는 더글라스를 살해하지만, 자신도 톰에게 죽는다.

 

  한때 10여 명이 있었던 피난처에, 이제 어른 둘과 아이 둘만 남게 된다.

  멜로리, 톰, 멜로리가 낳은 아들, 올림피아가 남긴 딸, 그렇게 4명만 남은 것이다.  그 후 이 4명이 가족이 되어 5년을 버티게 된다.

 

 

 

  희망 없는 세상의 이름 없는 두 아이

 

  이 영화는 멜로리가 5살짜리 아이 둘을 데리고 위험천만한 여정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멜로리 일행이 눈을 가려 앞을 못 보는 상태로 작은 보트를 타고 강물 위를 흘러가는 장면과,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 그 날부터 있었던 여러 사건을 보여주는 장면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그런데 멜로리가 여행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에게 주의사항을 이를 때 묘한 점이 있다.  다름 아닌 아이들의 호칭 문제이다.

 

  멜로리는 자기 아들을 보이(boy) 라고 부르고 올림피아의 딸을 걸(girl) 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자막이 잘못되었는 줄 알았다.  우리말로 '너' 또는 '얘야' 정도로 옮기면 될 일인데, 영어는 남녀를 칼 같이 나누어 지칭하는 단어가 많다 보니 자막 제작자가 오버(!)해서 번역한 줄 알았다. 

  그런데 두 아이 문제로 멜로리와 톰이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을 보고서야 알았다.  자막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아이들 이름이 보이와 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에게는 정식 이름이 없다.  그러나 이름이 없으면 아이들을 부르지 못 해 불편하니, 남자애는 보이라고 부르고 여자애는 걸이라고 부른 것이다.

 

  아이들 이름 문제로 멜로리와 톰이 부딪힌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 이름 문제로 대표되는 멜로리의 육아 방식 문제로 충돌한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팽팽하게 맞선다. 

  

  멜로리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아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체념하고 있다.

  함께 피난처에 머물던 사람들이 차례로 죽는 걸 봤고, 바깥 세상에도 살아남은 이들이 거의 없다는 걸 안다.  당장이야 근처의 빈 집이나 마트를 털어 생필품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가능할 지 아무도 모른다.  어른들도 살아남기 힘든 가혹한 환경인데 5살짜리 아이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어른으로 성장한다 한들 무슨 미래가 있을까...  아이들은 공부를 하거나 취미를 즐기거나 직업을 가질 일도 없을 테고, 자기들끼리 말고는 새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을 것이며, 평생 두더쥐처럼 숨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톰이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추억(큰 나무 위에 올라가는 등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일, 여러 아이들이 어울려 즐겁게 놀던 일)을 들려주는 일이 못마땅하다.  아이들은 톰과 같은 경험을 영원히 못 할텐데, 헛된 희망만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톰은 어떤 경우라도 '아이는 아이로서 누릴 것을 누려야 한다' 고 생각한다.

  배려심과 통찰력 깊은 톰은 멜로리의 심정과 의도를 알고 있다.  멜로리가 아이들을 딱딱하고 엄하게 대하는 것은, 훗날 상처를 덜 받으려는 방어적인 행동이다.  어쩌면 머지 않아 아이들을 잃게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이 살아남더라도 생존만을 목표로 하는 회색빛 인생을 살아야 할 게 뻔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가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 어느 쪽이 되더라도 자신이 상처를 덜 받도록 아이들에게 정을 안 주면서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톰은 아이들이 얼마 못 살더라도 엄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옛날 이라크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한 이라크 아버지가 매일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었듯이,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아이로서 누릴 것들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 혹은 함정

 

 

  어느 날 다른 생존자의 소식을 듣게 된다.

  멜로리 일행은 피난처 생활 초기부터 무전기를 통해 다른 생존자들(물론 그것을 추종하는 정신이상자들 말고, 정신 멀쩡한 상태로 살아남은 사람들)과 연락하려 했다.  5년이나 소득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전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자기네는 멜로리 일행이 있는 곳에서 강을 타고 며칠 내려가면 있는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면서, 그곳은 안전하니 찾아오라고 권한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톰은 그 말을 믿고 싶어하고, 원래도 냉소적이었고 이제 생존을 최우선시 하게 된 멜로리는 정신이상자들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의심한다. 

 

  결국 생존자들의 공동체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그 계기는 톰의 죽음이다.

  멜로리 일행이 생필품을 구하러 빈 집에 갔는데 하필이면 정신이상자들이 그 집으로 찾아온다.  톰은 멜로리와 아이들이 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혼자 뒤에 남기로 한다.  자신이 15분 안에 따라가지 않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생존자들의 공동체로 떠나라는 말과 함께, 과거 이라크에서 만난 그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목걸이를 유품으로 건넨다.  애정의 표시로 주는 선물일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아버지를 보고 인간성과 희망을 잃지 않았듯이 멜로리도 인간성과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주었을 것이다. 

  눈을 가리고 여러 명의 적을 상대할 수는 없으니, 톰은 어쩔 수 없이 눈을 싸맨 천을 풀어낸다.  적을 차례로 없애지만 결국 그것을 보게 된다.  멜로리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버티다가 마지막 남은 적을 없앤 후에야 최후를 맞는다.  

 

  멜로리는 유일한 의지처였던 톰마저 잃고 아이들의 안전을 혼자 책임지게 되자 더욱 독해진다.  

  희망일지 함정일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기에 앞서 두 아이에게 단단히 이른다.  어떤 경우라도 눈을 가린 천을 풀어내서는 안 되고 소리도 내지 말라고.  만일 말을 듣지 않는다면 때리겠다고.  두 아이는 왜 갑자기 떠나야 하는 건지, 다정한 톰이 왜 돌아오지 않는 건지, 전혀 이해 못 한 채 멜로리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질려 고개만 끄덕인다.

 

  멜로리와 아이들은 며칠을 추운 강물 위의 보트 안에서 지낸다.

  낮 동안 멜로리는 눈을 가린 채 그저 감으로 노를 젓고, 아이들도 눈을 가린 채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입을 꼭 다물고 있기만 한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이 되면, 그것에 노출되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안대를 풀고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밤이 되면 셋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겨우 눈을 붙인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위기를 겪는다.

  어디선가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처음에는 그것이 유혹하는 건가 했는데, 그것을 추종하는 정신이상자다.  광신자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멜로리 일행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다가 멜로리의 공격으로 죽는다.  멜로리가 눈을 가린 상태로도 상대를 공격해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보면, 지난 5년간 산전수전 겪으면서 날카로운 생존본능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이가 물에 빠져서 멜로리가 앞을 못 보는 상태로 겨우 건져내지만, 그 와중에 식량 가방을 강물에 빠뜨려 막막한 처지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만 보트 옆에 남겨놓고 혼자 인가를 찾아가 식량을 구하려다가, 멜로리를 유혹하려는 그것 때문에 위험해지기도 한다.

 

  어렵게 한 고비 한 고비 헤쳐나가는 중에 멜로리와 두 아이 사이의 양가적 감정이 드러난다.

  보이는 물에 빠졌을 때 '멜로리' 라고 외친다.  그 나이 아이라면 본능적으로 '엄마' 를 부르게 되고 또 멜로리가 자기 친엄마이기도 하지만, 평소 멜로리가 아들에게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멜로리가 홀로 식량을 찾으러 가서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걸이 앞도 못 보면서 멜로리를 찾아나선다.  멜로리를 무서워하면서도, 멜로리가 자라는 동안 본 두 어른 중 하나이며 이제 톰은 없기에, 멜로리에게 크게 의지하는 것이다.

  멜로리는 멜로리대로 보통 때는 아이들을 차갑고 엄격하게 대하기만 하면서, 막상 아이들이 위기에 처하면 필사적으로 구하려 한다.  사실은 아이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지만, 원래도 성격이 온화하지 않았고 험난한 생활로 신경이 곤두서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맥 빠지는 결말

 

  마침내 세 사람은 생존자들의 공동체에 도착한다. 

  알고보니 그곳은 시각장애인 학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없어서 그것에게 노출되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로 바깥 세상의 (눈이 보이는) 생존자들이 소식을 듣고 하나씩 찾아와 꽤 큰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멜로리도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보이와 걸에게는 놀라운 경험이다.

  두 아이는 태어난 후로 자기들 외에 다른 또래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걸 보게 된 것이다.  톰이 말해줬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멜로리가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준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어서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데, 이제 멜로리가 다시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보이에게는 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멜로리가 가장 힘들고 막막해 할 때 따뜻하고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었던 애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걸에게는 친엄마의 이름을 따서 올림피아라는 이름을 준다.  올림피아는 자기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주면서...

 

  솔직히,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이지만 맥이 빠진다.

  영화 초반부부터 시각장애인 학교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긴장감과 공포감이 쭉 유지되었는데, 갑자기 모든 게 확 풀려버린다.  내내 잘 부르던 노래를 마지막 부분에서 삑사리 낸 기분이랄까...

  끝부분에 시간을 더 할애하여 살을 덧붙이거나...  아니면 후반부의 긴장감을 서서히 줄여나가서, 마지막에 '드디어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는 느낌이 영화 전체 분위기와 따로 놀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기타

 

  1. 앞부분에 나왔던 인도계 여자 의사가 '슈팅 라이크 배컴' 에서 주연이었던 '파민다 나그라(Parminder Nagra)' 다...!

  ☞ 슈팅 라이크 베컴 (Bend It Like Beckham)  https://blog.daum.net/jha7791/15790990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슈팅 라이크 배컴' 에서 '버드 박스' 까지 16년이나 흐르면서 모습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슈팅 라이크 배컴' 개봉 당시 파민다 나그라는 27세였는데, 워낙 동안이다 보니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역할이 어색하지 않았다.  공동 주연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 보다 10살이나 많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하지만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 중년이 되니 자기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변했다. 

 

  2. 파민다 나그라가 연기한 의사가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파민다 나그라는 영화 초반부에서 멜로리가 병원에 가서 산전 검사 받을 때 담당의사로 등장했다.  그후로 등장하지 않기에, 영화 속에 잠깐 나왔다가 그것 때문에 죽은 수많은 조역 또는 단역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끝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것도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지내는 생존자 중 한 명으로...!  멜로리와 포옹을 나누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  세상이 엉망이 되기 전 멜로리가 알았던 사람 대부분은 죽거나 연락이 끊겼다.  그런데 그런 사람 중 하나인 의사가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옛날 같은 평온함과 희망을 조금은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걸까? 

 

  3. 이 영화 제목 '버드 박스' 는 멜로리 일행이 가까이에 두는 새장에서 비롯되었다.

  피신처 생활 초기에 멜로리 일행이 식량을 구하러 마트에 갔다가 새가 든 새장을 발견한다.  멜로리 일행을 속여 그것에 노출시키려던 마트 직원(그 후의 이야기 진행을 보면, 이 사람도 정신이상자였기 때문에 초반의 난리 북새통 속에서도 죽지 않았던 듯.)이 등장하자, 조용히 있던 새가 미친듯이 울어대며 날개짓을 해댄다.  즉, 새는 그것 또는 그것을 추종하는 정신이상자가 가까이 오면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후로 멜로리는 피난처 안에 새장을 두고, 새를 살아 숨쉬는 경보장치로 쓴다.  나중에 아이들과 생존자들의 공동체를 찾아 나설 때에도 새장을 챙긴다.  

 

  4.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 후속편이 있다고 한다.

  원작 소설도 영화처럼 멜로리 일행이 시각장애인 학교에 도착하여 안심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후속편에서는 시각장애인 학교에 도착하고 불과 몇 년 후에 시각장애인들마저 그것을 보고 자살하게 되어, 멜로리가 다시 아이들과 함께 도망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뜨뜻미지근한 해피엔딩은 2편을 위한 포석인 걸까?  이 영화가 인기를 끌며 흥행에 성공했다니, 원작 소설의 후속편을 바탕으로 하는 2편도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