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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Shang-Chi and the Legend of the Ten Rings)

Lesley 2021. 9. 19. 00:01

 

 

 

  오래간만에(대충 10년만에...!) 마블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다.

  마블 영화 최초로 아시아계 주인공이 나온다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이다.  마블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서, 굳이 스스로 찾아서 보지는 않고 누군가 같이 보자고 할 때 본다.  그런데 이번에 일부러 영화관을 찾은 이유는 이 영화의 출연진 때문이다.

  주인공 샹치 역을 맡은 '시무 리우' 는 전에 재미있게 본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 에서 한국계 가족의 아들 '정' 을 연기한 바 있다.  샹치의 아버지 역을 맡은 '양조위' 는 홍콩 영화 붐이 사그라든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영화팬들이 인정해주는 대배우다. (색계...!  화양연화...!  동사서독...!  무간도...!)  샹치의 이모 역은 지난 몇 년 열심히 보고 있는 미국 드라마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 에서 1인 2역을 멋지게 소화해 낸 '양자경' 이 맡아 열연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배우들이 줄줄이 나오니 안 볼 수가 있나...

 

  이 영화는 10점 만점에 7점 또는 8점짜리라고 생각한다.  

  만일 호쾌한 액션 영화, 화려한 과학 기술이 나오는 SF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액션, CG, 특수효과는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중심은 결국 스토리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마블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8점 넘게 줄 수는 없다.  이 영화고 저 영화고 간에 기본적인 스토리가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장점을 들라면...

 

  일단 마블 영화답게 볼거리가 풍성하다.

  초반부에 나오는 버스와 마카오 격투장에서의 시원시원한 액션 장면, 후반부에 나오는 CG와 특수효과의 도움을 많이 받은 샹치와 아버지의 액션 장면을 보면 '역시...!' 라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수호자' 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용이나 '모리스' 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모가지(!) 없는 닭(?)도 볼 만하다.  할리우드의 기술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또한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이 나온다.

  먼저, 양조위의 눈빛 연기나 카리스마는 최고다.  양조위가 장차 아내가 되는 여자(즉, 샹치의 어머니)와 벌이는 격투신을 보면, 양조위란 배우를 전혀 몰랐던 이라도 반할 만하다. (유튜브를 보면 양조위를 몰랐던 서구권 관객들이 난리가 났다는...)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은 치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럽게 묘사되는데, 관객에게 싸움 자체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만나자마자 대판 싸웠으면 원수 사이가 되는 게 맞지,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이냐...!' 라는 말이 나오기 딱인 장면이다.  하지만 양조위가 연기하니 없던 개연성과 현실성도 마구마구 샘솟는다.  싸움 도중 카메라가 양조위 주변을 돌며 잡아내는, 여자를 바라보는 양조위의 눈빛을 보면 '그래, 양조위의 눈빛 그 자체가 개연성이고 현실성이지, 무슨 개연성과 현실성이 더 필요하단 말이냐...!' 란 생각이 절로 든다. 

  양자경의 경우는 양조위보다 출연 비중이 훨씬 낮지만, 수십 년의 연기 내공이 어디 가는 게 아니라서 역시 섬세한 연기를 펼친다.  얼마 안 되는 장면 속에서도, 겉으로는 부드러우면서 속으로는 강인함을 갖춘 캐릭터를 잘 표현해냈다.  그리고 조카 샹치에게 과거 샹치의 어머니가 썼던 무술 기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대련하는 장면은, 짧지만 인상적이다.  양조위와 샹치 어머니의 격투신과는 다른 의미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대련신이다.

 

이 영화의 조연들이지만, 존재감으로는 주연급인 배우들.

 

 

  이 영화의 단점을 들자면...

 

  위에서 말한 장점인 양조위와 양자경의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단점도 된다.

  주연 배우인 시무 리우의 연기가 두 사람에게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무 리우의 연기가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다.  '김씨네 편의점' 속 연기를 봐도 평균 이상은 해내는 배우이고, 메이킹 필름을 보면 슈퍼 히어로물의 주역에 걸맞는 액션 장면을 위해 몸을 단련하는 데에도 무척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근사한 액션을 보여줬음.)

  그런데도 영화가 끝났을 때 머리 속에 가장 깊이 꽂힌 사람은 시무 리우가 아닌 양조위다.  아시아권 배우를 잘 모르는 서구권 팬들도 유튜브에서 '양조위, 양조위...' 하며 노래를 부르는 판국이다.  관련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점유율(?) 1위는 양조위이고 2위가 양자경인 듯하다.  시무 리우에 대해서는 딱히 혹평도 없지만 그렇다고 양조위나 양자경 같은 수준의 호평도 없다.  한 마디로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양조위와 양자경이 아무리 멋진 연기를 펼쳤다고 해도 결국 두 사람은 이 영화의 조연이다.  그런데 조연들이 너무 튀는(!) 탓에 주연의 존재감이 희미해졌으니...

 

  다만 이 문제는 훗날 나올 후속편에서 해결될 지도 모른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이 영화가 북미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후속편 제작은 기정사실화 된 것 같은 분위기다.  이 영화에서 샹치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평범한 사람인 척 하며 살다가 슈퍼 히어로로 각성하게 된다.  즉, 이제 막 슈퍼 히어로 세계에 뛰어든 상태이기 때문에 주인공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각성한 상태라 후속편에서는 몇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뱀발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질려버렸다.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영화관을 빼면, 관객들이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안 보고 나가는 게 우리나라의 관람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쿠키 영상이 두 개 딸려있고 그 중 하나가 엔딩 크레딧 후에 나온다고 미리 알고 갔기 때문에,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참을성 있게 앉아 있었는데... 

  오, 마이 갓...!  엔딩 크레딧이 정말 길고도 길다.  어지간한 영화 엔딩 크레딧의 3~4배는 되는 것 같다.  촬영팀이고 특수효과팀이고 몇 개씩 된다.  여러 나라에서 촬영했고 각 나라에서 별도의 팀을 꾸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협조해 준 기관으로도 호주, 캐나다(정확히는 캐나다의 퀘벡 지방), 마카오 정부가 줄줄이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어마어마한 자본력을 실감하게 되면서, 영화 그 자체보다 엔딩 크레딧에게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블록버스터 영화이건만 코로나 사태의 그림자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진 뒤로 영화를 볼 때면 한 상영관 안에 관객이 겨우 서너 명 있기 일쑤였고, 마치 전세낸 것처럼 혼자 본 적도 있다.  이 영화가 명색이 블록버스터 영화, 그 중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갖추고 있는 마블 영화이건만, 역시나 관객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우리 동네가 대중교통이 불편하여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도 영화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 조조 시간에 봐서 사람이 더욱 없기도 했다. (주말에는 늦잠 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영화를 보더라도 점심 무렵이나 되어야 영화관으로 나가니까.)  하지만 그래도 코로나 사태가 없었다면, 이런 종류의 영화를 나 포함 6명(!)이 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1, 2년 더 계속된다면 영화관이 다 문닫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 상황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중감정으로 울었다가 웃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 영화가 처음 홍보활동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 인터넷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넘쳐났다.  지난 몇 년 중국이 막가파식으로 움직인 탓에 전 세계적으로 반중감정이 치솟았는데, 우리나라는 사드 보복으로 다른 나라보다 일찍 피해를 봤기 때문에 반중감정이 더욱 강하다.  그러다 보니 중국 문화가 많이 녹아들어있고 중국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이 영화에 대해서도 반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개봉한 지 2주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거부감을 표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막상 개봉하고 나니 우리나라의 박스 오피스 성적이 전 세계 3위다.  마블 영화의 고향인 미국에서 1위를 한 거야 당연하다 볼 수 있고, 미국 영화계와 동조현상(!)을 보인지 오래 된 영국에서 2위 한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3위를 한 것은, 코로나 사태로 관객수가 대폭 줄어들었고 반중감정이 현재진행형 상태라는 점을 보았을 때 의외라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로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중감정이 흥행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중국 색채가 짙은 이 영화가 정작 중국에서는 상영 금지되었는데, 중국에 반감 가진 사람들이 '중국에서 상영금지했다니 그렇다면 나는 보러 가야지.' 식으로 호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제작사나 배급사 등 이해관계자 입장에서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묘한 기분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