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추억의 미드 - V(브이) / 미녀와 야수

Lesley 2021. 5. 21. 00:01

  먼저 우리나라의 해외 드라마(사실상 미국 드라마) 시청 발전사(?)를 살펴보자면...

 

  20세기에는 공중파 TV(20세기 후반부터는 케이블 TV도 추가)에서 방영해 주는 해외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 때에는 시청자에게 드라마를 선택할 권리도, 시청 시간을 선택할 권리도 없었다.  방송국에서 방영해주는 것만 볼 수 있었고, 방영 시간에 맞춰서 TV 앞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 했다.  '600만불의 사나이', '맥가이버', '전격 Z 작전' 등이 일방통행식으로 방영했던 드라마들이다.  

  이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꼭 해외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고자, 방영시간에 맞춰서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모래시계', 허준', '대장금' 같은 엄청난 인기를 누린 드라마 방영시간에는, 평소 사람이 우글거리던 시내 음식점이나 술집이 텅텅 비었더라는 언론 보도가 나올 지경이었다.

 

  대망(!)의 2000년대가 되어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자 P2P 사이트나 웹하드 사이트에서 해외 드라마를 다운받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이것도 구닥다리 방식처럼 느껴지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방송국에서 외면(?)한 드라마라도 시청자가 인터넷을 뒤져 찾아내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한글 자막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청 시간도 각자의 상황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미드 한 시즌을 며칠 동안 몰아봐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폐인들이 등장했다는... ^^;;)

 

  2010년대가 되자 넷플릭스 같은 OTT나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해외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고 파일 압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다운받을 필요도 없이 그냥 보게 된 것이다.  다운받을 때는 불과 몇 십분일지라도 시간을 들여야 했고, 또 다운받은 영화 파일을 저장할 넉넉한 공간(내장 디스크든 외장 디스크든...)도 필요했다.  하지만 실시간 방송의 시대가 되자, 그 최소한의 수고와 장비조차 필요없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워낙 익숙해져서 영화와 음악을 다운받아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운 방식에 익숙해져서 지금도 그런 식으로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는 나로서는 놀라울 뿐이다.  

 

 

 

  자, 지금부터 본론이다.

 

  위에 쓴 것처럼 20세기는 해외 드라마 시청에 있어서는 원시시대나 다름 없었다.

  돌도끼 휘두르며 사냥하던 시절이라고 할까... ^^;;  하지만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얼마 안 되는 것들을 시청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 편 한 편이 소중한 시절이기도 했다. (원래 뭐든지 희소성이 있으면 가치가 오르는 법...!)

  그 시절에 우리나라 공중파 TV에서 방영하여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두 편을 소개하려 한다.  1980년대 중반 작품인 '브이(V)' 와 1980년대 후반 작품인 '미녀와 야수(애니메이션 말고 드라마)' 다. 

 

 

 

  브이(V)  

 

  뻔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브이(V)' 는 말 그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에 제작하여 방영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처음 방영했다가 큰 인기에 힘입어 1990년대 초반에 재방영했다.  지금 본다면 '이게 뭐냐? 미국판 우뢰매냐?'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특수효과와 특수분장을 보여서 한국 시청자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빨간색 제복 입은 이들이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

 

  이 드라마가 어찌나 인기가 좋았는지, 외계인 제복 디자인이 유행했을 정도다.

  주로 어린이용 점퍼나 조끼에 저런 디자인이 사용되었다.  80년대 드라마 속 의상답지 않게 세련된 디자인의 제복인데, 독일 나치의 친위대 제복과 비슷해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디자인 그 자체보다는 느낌이 비슷하다.  검은색 친위대 제복과 달리 빨간색이기는 하지만 각잡힌(!) 느낌이 흡사하다.  가슴에 붙은 검은색 선과 점으로 된 문양도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변형한 것처럼 보이고...

  재미있는 사실은,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외계인이 저런 제복을 입었건만, 제복 디자인을 차용한 어린이 옷은 전부 '다이아나 옷'(!) 으로 통했다는 점이다.  누구도 '외계인 옷' 또는 '브이 옷' 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만큼 다이아나란 캐릭터의 인상이 강렬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검은머리 여자가 '다이아나' 인데 외계인 무리의 간부급 인물이다. 

  미모가 출중한데다가 묘한 카리스마, 사악함, 요부 기질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 마디로 외계판 팜므파탈...!)  무엇보다 아래에서 언급할 쇼킹(!)한 장면 때문에 시청자들 머릿속에 단단히 박혔다.

  사실 메인 여주는 따로 있었다.  바로 '줄리엣' 이다. (사진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노란머리 여자)이다.  이쪽도 인형 같은 미모와 다정한 성격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정의감과 추진력으로 레지스탕스를 이끄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러나 존재감만 따지자면 서브 여주라 할 수 있는 다이아나를 당할 수 없었다.  오래 전에 방영한 드라마라 줄리엣이란 이름은 기억 못 하는 이들은 많겠지만, 다이아나란 이름을 기억 못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사실 줄리엣이고 뭐고 간에 많은 등장인물 중 다이아나란 이름 하나만 기억하는 시청자가 태반일 듯... ^^;;)

 

 

어린이 시청자들을 기겁하게 했던 문제의 장면...!

 

  지금 보면 조악한 장면이지만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 속 외계인들은 원래 파충류 종족인데(단, 인간처럼 두 발로 걸어다니는 파충류), 지구를 정복하여 지구인을 자기네 식량(!)으로 삼으려고 지구에 왔다.  다만, 처음에는 지구인과 같은 모습으로 꾸미고 예의 바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여 지구인의 환심을 샀다. 

  하지만 남주인공 '마이클'(첫 번째 사진 속 줄리엣 옆에 선 5:5 가르마를 탄 남자)은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외계인의 우주선인지 숙소인지에 잠입한다.  그리고 위의 사진 속 광경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  겉으로만 보면 지구인 여자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다이아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뿜어내며 쥐를 맨손으로 잡아 올릴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만...  입을 쫙~~~ 벌려서(턱을 쫙~~~ 늘려서... -.-;;) 쥐를 한 입에 꿀꺽하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장면 하나로 다이아나란 캐릭터는 브이에 나오는 외계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다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지만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태로 끝맺었다.

  외계인 세계의 최고 지도자급 인물이 '엘리자베스'(지구인 여자와 외계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인데, 생후 1~2년 만에 성인 여성으로 자랐음.)를 자기네 행성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떠난 직후, 엘리자베스의 연인(이쪽은 지구인 남자)도 엘리자베스가 탄 우주선에 몰래 타서 떠났음이 밝혀진다.  그러자 마이클과 줄리엣이 깜짝 놀라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그냥 끝나버린다. -.-;;

  요즘 유행하는 '열린 결말' 도 아니고 도대체 뭔지...  마치 그 후의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즉, 다음 시즌을 위한 떡밥을 투척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상상력 넘쳐나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미국에서는 후속편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방영해주지 않는다.' 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미녀와 야수

 

  '미녀와 야수' 도 브이만큼이나 열심히 봤던 드라마다.

 

  여주인공 '캐서린' 역은 영화 '터미네이터 2' 로 유명한 '린다 해밀턴' 이 맡았고, 남주인공 '빈센트' 는 영화 '헬 보이' 로 유명한 '론 펄먼' 이 맡았다.

  론 펄먼은 외모가 독특해서 여러 SF 영화에서 외계인 역할로 자주 나왔고, 심지어 '불을 찾아서' 라는 원시시대 배경의 영화에서는 원시인 역할까지 맡았다. (진짜 원시인 같았다는... ^^;;)  마침 이 드라마 속 빈센트는 사자 같은 얼굴로 태어난 캐릭터이기 때문에, 론 펄먼은 빈센트 역에 안성맞춤인 배우라 할 수 있다.  특수분장팀이 론 펄먼을 분장할 때 수고로움을 덜어서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린다 해밀턴에 대해서는 미스 캐스팅이란 의견이 많았다.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우의 외모가 전형적인 미인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 드라마 제목이 '미녀와 야수' 라면서?  그런데 왜 야수만 있고 미녀는 없어?" 같은 반응이 나왔다. (나는 린다 해밀턴의 외모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란 사람이 원래 미적 감각이 특이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지라.... -.-;;)

 

 

캐서린(린다 해밀턴)과 빈센트(론 펄먼).

 

  이 드라마는 세계관이 독특하다.

  미국 뉴욕의 지하에는 다른 대도시처럼 커다란 하수도관이 얼기설기 이어져 있는데, 그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가면 미로 같은 복잡한 동굴로 이루어진 지하세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연으로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모여서, 남주인공 빈센트의 아버지를 지도자 삼아 자기들만의 세상을 꾸려나간다는 설정이다.

 

  남녀 주인공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을 보면, 중세풍 로맨스의 현대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캐서린은 뉴욕 상류층 출신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한 남자와 사귀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과 아버지의 빽(!)을 믿는 마음으로 업무도 연애도 대충대충 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얼굴을 난도질당한 채 뉴욕 뒷골목에 버려지는데, 빈센트가 우연히 발견하고 지하 세계로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준다.

  남주인공 빈센트는 선천적인 기형인 건지 무슨 생체실험의 산물인 건지, 어쨌거나 사자 얼굴을 한 채로 태어나서 곧 버림받았다.  그런데 지하세계의 지도자가 빈센트를 발견하여 양자로 삼아 반듯하게 키웠다.  외모 때문에 한밤중에만, 그것도 옷에 달린 두건을 뒤집어쓰고서만 지상세계로 나갈 수 있지만, 외모를 빼면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남주인공(즉, 엄친아...!)이다.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데도 누구보다 고전 문학과 고전 음악에 해박하고, 정의감과 선량함과 낭만이 넘쳐흐르고, 매우 예의바르며 진중한 성격이며,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강한 힘과 스피드를 갖추고 있다. 

  빈센트의 특수한 상황과 두 사람이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캐서린과 빈센트는 보통의 연인처럼 함께 지내지 못하고 비밀리에 만나며 사랑을 이어간다.  '지하세계의 차기 지도자 격인 빈센트와, 지상세계의 공주 격인 캐서린이 묘한 인연으로 만나 깊은 교감을 나누고 사랑하게 된다' 는 스토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중세의 낭만적인 '기사와 공주'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 같다.  

 

  또한 요정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이다.  그런 뉴욕의 지하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점, 지하 세계 사람들이 중세풍의 옷을 입고 산다는 점, 때때로 고전 문학 낭송회나 고전 음악 연주회를 즐기는 낭만적인 생활을 한다는 점 등이 몽환적인 느낌을 더했을 것이다.

  동시에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물질주의적인 느낌도 은근히 느껴졌다.  지하세계 사람 대부분은 원래 지상세계에서 살다가 슬픈 사연 때문에 밀려났는데, 지하세계에서는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이 쓰는 물건은 주로 지상세계 사람들이 내버린 물건들이다.  지상세계 사람들은 아직 충분히 쓸만한 물건을 함부로 버린다는 대사가 여러 번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식량이나 의약품 같은 것들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지하 세계 사람들의 친구 혹은 조력자가 된 이들이 구해다 준다는, 현실적인 설정도 덧붙여진다. 

 

 

자신들의 초상화 앞에 선 캐서린과 빈센트.

 

  유감스럽게도 이 드라마도 위의 브이처럼 용두사미로 끝났다. 

  린다 해밀턴이 영화 '터미네이터 2' 에 캐스팅 되면서, 이 드라마 시즌3 첫 회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어 하차했기 때문이다. (새 시즌 시작하자마자 여주인공이 죽다니 이 무슨 황당한...!!! ㅠ.ㅠ)  여주인공 없이 드라마를 한 시즌을 더 끌고 간 것을 보면, 후속 드라마를 미처 준비하지 못 했던 모양이다.    

 

  최근에야 안 사실인데...

  유명한 미드 '왕좌의 게임' 의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조지 마틴이 '미녀와 야수' 의 각본도 썼다고 한다.  '미녀와 야수' 가 현대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중세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면, '왕좌의 게임' 은 아예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물이다.  아무래도 조지 마틴의 취향이 중세풍인 모양이다.

  인지도와 인기도로 보자면 '미녀와 야수' 는 '왕좌의 게임' 근처도 못 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녀와 야수'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왕좌의 게임' 을 시즌3까지만 보고 포기했더랬다.  무엇때문에 흥미를 못 느끼는 건지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미녀와 야수' 는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고 '왕좌의 게임' 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