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Lesley 2021. 10. 10. 17:00

  영화 '트루먼 쇼' 를 다시 봤다.

 

  오래 전에 보고 20년은 지나서 다시 보니 느낌이 다르다.

  이 영화는 1998년 개봉작이니 '첨밀밀' , '가타카' 같은 나의 인생작(!)들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첨밀밀과 가타카는 지금까지 30번은 본 것 같은데, 트루먼 쇼는 반복해서 볼 정도로 빠지지는 못했다.

  지난 추석 연휴 중 다시 보니 영화 감상 시기가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미디어 상황이 많이 달라진 2000년대 중후반에 봤더라면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듯하다.

 

 

 

 

  예전에 봤을 때는 우리나라에서 한창 잘 나가던 '몰래 카메라' 의 확장판이란 점에만 주목했다.

  그때는 몰래 카메라 관련 프로그램이 유행이었다.  유명한 배우나 가수를 섭외하여 무슨 촬영을 하네, 인터뷰를 하네 식으로 속여 엉뚱한 상황 속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남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 속에서 섭외된 연예인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며 웃음을 자아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유치한 느낌도 들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한 아이디어여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트루먼(짐 캐리) 이란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하루 종일 방송한다.  특별한 사건만 방송하는 게 아니라 이웃과 인사하거나 잠자는 모습조차 방송할 지경이다. (최소한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트루먼 부부의 성생활 장면만큼은 방송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우리나라의 몰래 카마라 속 주인공이었던 연예인들은 몇 시간 속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트루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30년을 그렇게 살아간다.  인생 전체를 거대한 스튜디오에 꾸며놓은 인공 섬 마을 속에서, 사실은 연기자들인 부모와 친구와 이웃들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나니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요즘 드라마를 망치는 범인(!)으로 자주 언급되는 PPL이 있다.

 

  트루먼 쇼가 개봉되었던 1990년대 후반만 해도 PPL이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우리나라 방송계라고 PPL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협찬' 이란 이름으로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TV 광고란 드라마 앞뒤로 붙은 진짜(!) 광고였지, PPL처럼 '광고이기는 한데 광고의 탈(?)을 쓰지 않은 광고' 는 아니었다.  그래서 트루먼 쇼 속에 나오는 PPL 장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PPL이 넘쳐나서 문제가 되는 시대에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웃픈 장면이 하나 둘이 아니다.

  주로 트루먼 아내가 PPL 담당 배우로 열심히 뛰는데, 트루먼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대화의 맥락과 상관없이 뜬금포(!)로 상품 광고에 나선다.  다용도 식칼이라든지, 새로 나온 잔디깎기라든지, 맛도 좋고 영양가도 높은 코코아라든지...  특히 이렇게 광고 멘트를 날릴 때마다 짓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영업용 미소가 가관이다.  심지어 트루먼과 말다툼을 벌이다가도 갑자기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코코아 광고에 나서서, 그렇잖아도 자기 주변에 벌어지는 일에 수상함을 느끼던 트루먼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트루먼과 초등학교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던 이조차 PPL에서 한몫 한다.  트루먼은 이 친구를 친형제처럼 생각하며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 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면 친구는 우정을 강조하고 트루먼을 위로하는 멋진 말을 늘어놓는데, 그러다가도 맥주캔을 들어올리며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맥주지.' 식의 광고 멘트를 날린다.

  트루먼이 출근길에 마주치곤 하는 쌍둥이 형제(보험회사 직원인 트루먼의 영업 상대로 보임.)라고 다르지 않다.  트루먼과 인사를 나눌 때면 트루먼을 길거리 벽으로 밀어붙이곤 하는데, 그때마다 벽에 붙은 상품 광고 포스터가 클로즈업 된다. 

 

 

  트루먼은 사람이 아닌 방송사에 입양되었다.

 

  트루먼 말고도 트루먼 쇼의 주인공 후보가 여러 명 있었다.

  여러 아이가 태아(!) 시절에 방송사에 섭외되었는데, 그중 트루먼이 방송 시작일에 맞추어 태어나서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트루먼은 단순히 방송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것이 아니라 아예 방송국에 입양되었다.  최초로 법인에 입양된 경우라고 한다.  영화상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이에게 친권자가 별도로 있다면 아이의 24시간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에 법적으로 여러 제약이 있을 것이기에, 방송사가 입양해서 친권을 확보한 것 같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들이 흔히 내뱉는 '내 아이 내 마음대로 키우겠다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 식의 막장스러운 상황...)

  또한 아이들이 태아 때 이미 섭외되었다는 것은, 그 아이들을 임신하고 있던 사람들도 모든 조건만 맞아떨어지면 자기 아이를 방송국에 넘겨주는데 동의했다는 뜻도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 친부모와 방송사 사이에 큰 돈이 오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전쟁이 터지고 굶주림이 넘쳐나서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엄연히 문명세계에 속하며 인권을 중시한다는 나라에서 웬 인신매매란 말이냐... 

 

  물론 이 세상이 미쳐돌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 현실에서 아이가 방송사에 입양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방송사는 시청률에 목숨 걸고 있고, 그 시청률에 따라 거액의 자본이 왔다갔다 한다.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진다면, 방송사가 법이 허용하는 선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무슨 짓이든 하려 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차라리 방송사는 덩치가 크다보니 각종 법률에 얽매여있고 여론에 의식해야 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행동을 벌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요즘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1인 방송인들(유튜브나 아프리카 TV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이들은 여건만 허락된다면 정말로 트루먼 쇼 같은 프로그램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트루먼에게 자녀가 생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트루먼의 아내는 아이를 갖자고 여러 번 트루먼를 재촉했다.

  트루먼 쇼에는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다고 하지만, 결국 TV 프로그램이다 보니 연기자들이 쇼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갈 것인가 하는 큰 틀은 제작자가 정해준다.  그러니 아이를 낳자는 것은 아내의 뜻이 아니라 제작자의 뜻일 것이다.  평생 트루먼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던 제작자는 무슨 생각으로 트루먼 2세를 원했던 걸까?

 

  제작자의 의도는 영화 속에서 끝까지 나오지 않지만, 이 부분을 추측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제작자는 이미 트루먼으로 하여금 평생 남에게 보여지는 삶, 스스로만 모를 뿐 남들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게 했다.  거기에 트루먼의 아이까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살게 하면서 트루먼 쇼의 인기와 명성을 더 높일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시청자들도 언젠가는 트루먼의 생활을 지켜보는 것에 싫증을 낼 것이기에, 드라마에 새로운 활력을 집어넣는 차원에서 트루먼의 자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즌 2를 만들려 했을까?  나중에 그 아이가 성장하여 또 다시 자식을 낳게 되면 또 시즌 3을 제작하는 식으로, 이미 세계 방송사상 최대 프로그램이라는 트루먼 쇼에게 최장 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도 얹어줄 생각이었을까?

 

 

  그 후 트루먼은 어떻게 살았을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제작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트루먼은 평생 살았던 스튜디오를 빠져나간다.

  그 장면 자체는 감동적이지만 그후 트루먼은 어찌 되었을까?  지난 30여년 간 트루먼의 일상 하나하나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  TV 같은 것이 없는 오지에 가서 산다면 모를까,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든 다른 사람들이 트루먼을 알아볼 것이다.

 

  영화 끝부분의 감동을 깨는 생각이지만, 현실 속 트루먼의 삶은 불행했을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인생 전체가 남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다.  거기에 팬이랍시고 그 일에 대해 신나하면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마주치며 사는 생활은 끔찍할 것이다.

  조금 더 세속적(!)으로 파고들자면, 트루먼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보통의 직업을 갖기는 힘들 것이니 결국 다시 방송계(!)로 돌아갔을 것 같다.  '트루먼의 도둑맞은 30년' 같은 제목을 붙인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등에 출연하는 식으로 말이다.  설사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탐험가의 꿈' 을 이루고 세간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오지 여행만 하며 살았다 하더라도, 특종거리나 시청률에 목매는 방송사는 끊임없이 트루먼을 쫓아다녔을 것이다.  몸은 트루먼 쇼로 대표되는 탐욕스러운 방송계에서 벗어났지만, 현실에서도 결국 방송계에게 얽매인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