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영화계도 힘들어졌는데, 딱 하나 바람직한 변화가 생겼으니...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 그 중에서도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영화 일색이던 극장가에 다양한 영화가 걸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전같으면 그런 영화는 아예 극장 개봉을 못 하거나, 개봉을 하더라도 저예산영화를 위한 소규모 극장에서만 상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수 극감으로 많은 영화가 상영을 미루거나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하게 되자, 영화관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다양한 영화를 개봉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블라인드' 라는 네덜란드, 벨기에, 불가리아의 합작 영화도 개봉했다.
2007년 작품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 1월에야 개봉했으니, 만일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으면 개봉하지 못 했을 것이다. 사방이 하얗게 눈으로 덮힌 황량하면서도 이국적인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 눈이 자주 내린 이번 겨울에 걸맞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루벤(요런 셀데슬라흐츠)' 은 아직 소년티를 다 벗지 못 한 시각장애인 청년이다.
집의 규모나 가구들을 보면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 같은데, 집 주위는 온통 눈으로 덮힌 들판 뿐이라 황량하고 외로운 느낌이다. 게다가 집이 항상 어두컴컴해서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건강이 나빠서 루벤을 돌보지 못한다. 그래서 루벤을 돌볼 사람을 여러 번 고용했지만, 루벤이 워낙 거칠고 괴팍하게 굴어서 오는 사람마다 얼마 못 버티고 그만 둔다. 루벤은 어려서는 앞을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사정으로 시각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절망감 때문에 성격이 거칠어진 듯하다.
어쨌거나 루벤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어머니는 또 다시 사람을 고용하는데...
새로 온 이는 '마리(할리나 레인)' 라는 여자다. 첫눈에도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인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지나치게 하얗고 얼굴이나 손은 흉터투성이다.
나중에 나오는 회상 장면을 보면 어린 시절에는 예쁘장하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마리의 어머니로 보임.)가 어린 마리의 모습이 끔찍하다며 막말을 퍼붓고 괴롭혔다. 아마 마리가 알비노(백색증) 환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딸의 특수한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며 학대하여 여기저기 흉터가 남게된 것 같다.
마리는 책을 무척 좋아한다.
루벤의 저택에 처음 와서 서재에 들어갔을 때, 많은 책 앞에서 황홀경에 빠진 모습을 보인다. 책꽂이에 진열된 책들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는 장면도 그렇고, 책을 펼쳐들고 그 냄새를 맡는 장면도 그렇고, 카메라가 마리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잡아낸다.
남다른 외모와 어린 시절 학대당한 경험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책에 빠져든 것 같다. 책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잊을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이유만 다를 뿐,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리나 루벤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루벤은 전에 왔던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마리에게도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이전 고용인이 겁을 먹고 도망치듯 일을 그만두었던 것과는 다르게, 마리는 루벤보다 더 강한 태도를 보이며 루벤의 기세를 꺾는다. 루벤이 앞을 못 보더라도 청년기에 들어선 남자이니, 만일 완력을 썼다면 마리를 충분히 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놀랐는지, 얼떨결(!)에 마리를 곁에 두게 된다.
루벤의 어머니는 고용인이 계속 바뀌는 것에 고심하던 차에, 마리가 붙박이(?)가 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기뻐한다. 일 년도 아니고 한 달만 버티면 수고비를 얼마든지 주겠다고 말할 정도다.
루벤은 차츰 마리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마리가 읽어주는 책 내용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쿡쿡 웃는다. 그동안에는 몸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씻지 않았는데, 이제는 마리가 이끄는대로 목욕도 한다.
마리의 모습을 궁금해 하며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기도 한다. 마리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피부와 머리카락이 새하얗고 흉터투성이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에서 루벤의 주치의의 입을 통해 30대 또는 40대라고 묘사된다. (루벤은 20세 전후로 보임.) 사회적 계층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나이로 보나, 두 사람은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마리도, 루벤의 어머니도, 차마 루벤이 상상하는 마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부정하지 못한다. 마리는, 자신처럼 고독하게 살면서 동시에 자신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루벤에게 끌리게 되었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 흉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루벤의 어머니는 마음의 벽을 닫고 살던 아들이 모처럼 타인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차마 그 기대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루벤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이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를 취한다.
루벤이 마리에게 자기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한다. 루벤이 마리를 마음에 두게 된 상황에서,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루벤의 어머니는 마리를 아들의 연인으로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들의 행동에 당혹해 한다. 그러면서도 마리를 집에 들이는 것을 묵인한다. 동시에, 마리에게 분수를 알고 행동하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경고한다.
외롭게 살던 아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마리를 잠시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마리 역시 루벤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비록 미래가 없는 사이가 될지언정 차마 루벤을 두고 떠나지 못 할 것이라고, 다 알고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행복하게 지내던 남녀에게 큰 변화가 닥친다.
루벤의 주치의가 새로운 눈 수술법이 도입되었다며, 루벤에게 수술을 권한다. 루벤의 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고, 루벤도 사랑하는 마리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들뜬다. 하지만 마리에게는, 루벤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수술을 앞두고 마리는 떠난다. 루벤은 어째서 마리가 자기 곁에 없는지 알 수 없어 힘들어 한다. 게다가 어머니가 수술 성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서, 마리를 잃고 힘들어하던 루벤은 더욱 슬퍼한다.
루벤은 앞을 보게 되는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루벤이 마리의 일로 계속 방황하자, 루벤의 주치의가 자기 딴에는 돕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게 루벤을 매춘업소로 데려간 것이다. 미리 주치의에게 귀띔을 받은 듯한 여자들이 루벤의 관심을 끌려 애쓰지만, 루벤은 관심없어 한다. 마리를 잊지 못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을 보지 못 한 채 성장한 탓에 보통의 남자보다 시각적인 자극(여자들의 노출 심한 옷, 아양떠는 모습 등)에 반응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마리가 그랬던 것처럼 매춘업소 여자들에게 책을 낭독하게 하면서, 그 목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루벤이 시각적 자극에 낯설어 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난다. 면도를 할 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쩔쩔매다가, 멀쩡히 보이는 눈을 천으로 가리고서 예전처럼 손의 감각만으로 면도를 한다. 복도를 걸을 때도, 앞이 안 보이는 때는 손으로 가구를 만지며 그럭저럭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걷다가 가구에 부딪친다.
어느 날, 루벤이 도서관에 가서 마리가 종종 읽어줬던 '눈의 여왕' 을 찾는다.
공교롭게도 마리가 그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고, 루벤은 마리를 알아보지 못 한 채 눈의 여왕이 어디 있는지 묻는다. 마리는 아무 말 없이(루벤이 자기 모습은 못 알아봐도 목소리는 알아들으니까.) 책만 찾아주고서 자리를 뜨려 한다. 하지만 루벤은 앞을 못 보던 시절 다른 감각에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마리가 자기 옆을 스쳐지나갈 때 그 체취만으로 마리를 알아챈다.
루벤에게는, 마리의 모습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루벤보다 세상을 오래 산 마리는, 더구나 외모 때문에 학대를 당한 적이 있는 마리는, 세상살이에 '보이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고 있다. 깊은 산골에 들어가 둘이서만 살 게 아닌 다음에야 얼굴, 나이, 사회적 격차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고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붙잡는 루벤을 애써 뿌리치고 떠난다.
영화는 '역시 이 영화는 판타지가 아니지만 판타지로 봐야 해.' 라는 생각이 들게끔 끝을 맺는다.
루벤이 자기 집 정원에 뾰족한 고드름 두 개를 가져와 세워놓는다. '아, 이거 혹시...' 하며 섬찟한 기분으로 그 장면을 보는데, 누군가의 말처럼 불길한 느낌은 좋은 느낌보다 더 잘 맞아떨어지는 법이다. 루벤은 잠시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드름을 내려다 보더니, 고드름을 향해 얼굴을 확 숙인다.
어렵게 얻은 시력을 스스로 내버린 대가로, 루벤이 마리를 되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환상인지 꿈인지 알 수 없게, 눈을 천으로 가린 채 행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루벤과, 그 곁에서 루벤을 감싸안은 마리를 보여주며, 영화는 조용히 끝난다.
뱀발
이 영화는 분위기가 매우 독특하다.
시각장애인인 청년과 그를 돌봐주는 여자 사이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 장르는 로맨스 또는 드라마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동화 같고 설화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무슨 요정이니 마법이니 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것들이 전혀 안 나오는데도 말이다...!
하긴, 영화 포스터의 문구에도 나오는 것처럼, 영화의 모티브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이다. 그러니 판타지 영화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의 이미지 속 마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19세기 정도인 듯.)을 생각했을 때 특이한 옷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수도사처럼 두건 달린 옷을 입고 두건을 깊히 눌러써 얼굴을 감춘 채, 아무도 없는 눈벌판을 혼자 걷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질적이다.
이 영화가 '눈의 여왕' 을 모티브로 했고 마리와 루벤이 연인으로 나오는 점을 생각하면, 마리는 '눈의 여왕' 속 여주인공인 게르다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위의 이미지를 보면 오히려 눈의 여왕의 포스(!)가 느껴진다.
루벤은 영화에 처음 등장했을 때와 그 후의 모습의 간극이 크다.
처음에는 자기를 돌봐주러 온 여자에게 행패를 부리고 흥분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그냥 사납고 거칠다는 느낌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리 덕분에 변하면서 묘하게 인상이 달라진다. 여전히 불우한 처지에 있지만,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고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력을 되찾고 안경을 쓴 모습을 보면, 아예 해리 포터 비슷한 인상을 주는 미남으로 변해있다.
루벤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이 훌륭하다는 증거다. 같은 사람이 연기한 같은 배역인데도, 배역의 심리 변화에 따라 마치 얼굴이 달라지는 것 같이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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