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라는 영화를 봤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라는데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올해 미국을 뒤집어놓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관련하여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을 듣고서야, 이런 영화가 있는 줄 알게 되었다.
196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흑인에 대한 차별을 소재로 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보통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교훈적인 영화는 그 교훈적인 성격 때문에 지루한 편인데, 이 영화는 다행히도 재미면에서도 괜찮다. (즉, 교훈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영화라는...!)
영화는 1926년 미국의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 시작한다.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이라는 흑인 여학생은 이제 6학년인데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그래서 학교측에서는 캐서린의 부모에게 아이를 고등학교 과정으로 월반시킬 것과,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모 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사갈 것을 권한다.
당시 미국의 상당수 지역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별도의 학교에 다녀야 했고, 그나마 흑인 학생의 수업 연한에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캐서린이 사는 웨스트 버지니아주는 흑인 학생에게 원칙적으로 8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까지만 공교육을 허용했다. 학교에서 추천한 고등학교는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 유일하게 흑인 학생이 8학년 이후로도 공부할 수 있는 공립 학교였다. 본인의 영재성, 학교 측의 권유,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캐서린은 그 시대의 흑인(그리고 여성)으로는 드물게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훗날 대단한 인재들만 모인다는 나사(NASA)에서 일하게 된다.
캐서린이 나사에서 근무하던 1960년대는 냉전이 한창이라 미국과 구 소련이 체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57년에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소련을 한 수 아래로 보던 미국은 충격을 받게 되었고, 나사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가며 우주선 개발에 노력하게 된다.
이런 시대에 캐서린,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메리 잭슨(자넬 모네) 등 흑인 여성 트리오가 나사에서 계산원으로 일한다. 계산원이라고 해서 마트의 계산원이나 경리 직원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우주선 궤도 계산이나 연료량 계산 등 요즘 같으면 컴퓨터가 할만한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하는, 수학 분야의 고급 인력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나사에서 근무하게 된 이유가 요즘 말로 웃프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음.)
인종차별이 암암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합.법.적.으로 존재했던 시절이었고, 백인이냐 흑인이냐를 떠나서 여성의 사회활동이 드물었던 때였다. 그런데 난다 긴다 하는 엘리트만 모아놓은 나사에서 어떻게 흑인 여성들이 일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차별과 성차별 덕분(?)이다. 지금처럼 슈퍼컴퓨터란 신통방통한 물건이 없었던 탓에, 우주선 개발에 필요한 복잡한 수학 계산을 사람이 일일이 해야 했다. 많은 계산원을 쓰려니 인건비 압박이 커서, 그 시대 특성상 같은 일을 해도 남자보다 급여를 덜 줄 수 있는 여자(백인 여자)들을 채용했다. 하지만 계산원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백인 여자 계산원의 급여조차 부담스러워지자, 역시 그 시대 특성상 백인보다 급여를 덜 줄 수 있는 흑인 여자들을 고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트리오의 대접이 좋을 수가 없다.
애초에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싼값에 부려먹을 수 있는 고급 인력' 이라서 채용된 이들이다. 분명히 나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건만 여기에서 치이고 저기에서 치인다.
원래의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떠맡고도, 정작 그에 상응하는 권한이나 보수는 받지 못 한다. 나사 직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백인 남자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기본이요, 백인 여자들도 '같은 여자라도 우리는 너희와는 달라.' 식의 모멸적인 태도로 나온다.
제일 황당한 건 화장실 문제다. 캐서린이 새로 배정받은 부서가 있는 건물에는 흑인용 화장실이 없다. 화장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려야 하는 곳인데, 800미터나 떨어진 다른 건물에 있는 화장실을 써야 한다. (왕복으로 1,600미터나 되니, 이게 무슨 옛날 체력장 오래달리기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트리오는 분투한다.
트리오 중 큰언니 뻘인 도로시는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날 도로시는 나사에 IBM 컴퓨터를 들여놓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복잡하고 정밀한 수학 계산을 하는데, 이제 사람이 필요없어진다는 뜻이다. 즉, 도로시와 다른 계산원들의 일자리가 한꺼번에 날아가게 생겼다....!
도로시는 시대의 흐름에 묻혀버리는 쪽보다 시대의 흐름을 타는 쪽을 선택한다.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익히더니, 자신이 이끄는 다른 계산원들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주기까지 한다.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쓰게 되었을 때, 도로시 덕분에 계산원들은 퇴물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된다.
트리오 중 막내이며 성격이 당찬 메리는, 흑인 여성 최초로 나사의 정식 엔지니어가 된다.
물론 간단하게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은 아니다. 나사의 엔지니어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하려면 버지니아 대학교나 햄프턴 고등학교에서 관련 강좌를 이수해야 한다. 문제는, 당시 두 학교 모두 흑인의 수강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메리는 햄프턴 고등학교의 강좌를 들을 수 있는 허가를 받으려고 재판까지 신청한다.
인종차별이 합법적이었던 시절이니 판사는 당연히 불허하려고 한다. 하지만 메리는 '최초의 중요성' 을 앞세워 판사를 설득한다. 판사가 자기 집안에서는 '최초로 군복무를 한 사람이며 최초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 이고 버지니아주 법원에서도 '최초로 세 명의 주지자에게 연속해서 판사 임명을 받은 사람' 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점을 강조하며 베이스를 깐다. (판사의 말처럼 판사에 대한 뒷조사를 철저히 했음. ^^;;)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 최초가 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장차 그 판사가 '흑인을 백인 전용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최초로 허가한 판사' 로 역사에 기록될 것임을 설파하면서... 판사는 반은 감탄한 듯 반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더니 메리의 요청을 허가한다.
캐서린은 유인 우주선 계획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흑인과는 커피포트조차 같이 안 쓰려고 하는 백인 동료들 틈바구니에서 일을 하다가, 능력제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상관에게 인정받게 된다. 처음에 상관은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캐서린이 자주, 그리고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그 건물에 흑인용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서, 캐서린이 보다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중에는 관례를 깨고 우주선 관련한 국방부 회의에 캐서린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나중에 유인 우주선 개발 막바지 단계에서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캐서린은 업무에서 배제된다. 하지만 우주선 발사 직전에 컴퓨터가 오류를 일으키며 궤도 및 회항 좌표 계산에 문제가 생긴다. 이때 평소 캐서린의 능력을 눈여겨봤던 우주선 조종사(이 사람도 상대방의 능력만 보고 인종이나 성별은 개의치 않는 사람임.)가 "그 똑똑한 여직원에게 계산을 맡겨주세요.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나도 떠날 준비를 하겠어요." 라며 캐서린을 강력 추천한다. 캐서린이 급하게 복잡한 계산을 끝낸 덕분에 우주선은 무사히 발사되고 귀환한다.
기타
1. 이 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는 '숨겨진 수치' 란 뜻도 되지만 '숨겨진 인물' 이란 뜻도 된다.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우주선 개발이 성공하면 우주선 조종사들과 개발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가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마련이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노력하지만, 계산원으로 대표되는 대다수 사람들이나 그들의 업무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개발에 공을 세운 계산원들과, 그들이 맡았던 수학 계산으로 나온 수치를 생각하면,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는 적절하면서도 재치있게 지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2. 미국이 20세기 중반까지 흑인에 대해 제도적인 차별을 했다는 것을 고등학교 때에야 알았다.
어려서 링컨 대통령의 위인전을 읽고,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것으로 흑인들도 백인들과 평등해졌다고 여겼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평등이 '실질적인 평등' 은 아니다. 코찔찔이 초등학생이라도, 바로 얼마 전까지 노예로 살던 흑인들이 해방되었다고 해서 노예 주인으로 살던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조차 어느 나라에서나 현실적으로는 여러 불평등이 있으니...) 다만, 적어도 '법적인 평등' 은 적용되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등학교 때 케네디 평전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케네디가 대통령이었던 1960년대까지 학교, 식당, 주유소, 화장실, 심지어 버스 좌석이나 버스 정류장 벤치까지, 백인용과 흑인용이 나누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게 알게 모르게 벌어지는 차별이 아니라, 합.법.적.인 차별이었다...!
흑인들이 어떤 지역에 처음 갈 때에는 흑인용 식당, 숙소, 주유소를 표시한 여행안내책을 들고 다녀야 했을 정도다. 사정을 몰라 백인용 업소에 들렸다가는, 백인들에게 수모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집단폭행을 당하거나 아예 살해당하는 경우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1960년대의 제도적인 흑인 차별 사례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흑인용 화장실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욕구를 해결하는 데에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공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한 차별도 있다. 흑인은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공교육상으로는 8학년을 넘어서서 공부하기 힘들었다.
수백 년 전도 아니고 겨우 60년 전쯤에,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이 당연시 되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차라리 소련 같은 공산권 국가나 독재정권이 들어선 국가에서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나라 꼴이 그 모양이다 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겠거니 하며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로 취급받던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참... 다행히 그 후 세상이 변해서 제도적인 차별은 철폐되었지만, 실질적인 차별 철폐을 이루기 위해 갈 길은 여전히 먼 것 같다.
'영화, 드라마, 연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라인드(Blind) - '눈의 여왕' 의 변주곡 같은 영화 (0) | 2021.02.26 |
---|---|
스타 트렉 : 디스커버리(Star Trek: Discovery) - 시즌3 (0) | 2021.01.14 |
'빨강머리 앤' 다른 각도로 보기 (0) | 2020.10.09 |
코로나 시대와 공포영화 - 부산행 / 나는 전설이다 (0) | 2020.09.21 |
소년시절의 너(少年的你) -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 (0) | 202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