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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다른 각도로 보기

Lesley 2020. 10. 9. 00:01

 

  우리나라에서 '빨강머리 앤' 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여자는 상당수가 학창시절에 원작 소설로든 TV 애니메이션(일본에서 만든 1979년도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송국에서 몇 차례나 방영했음.)로든 즐겁게 감상했을 것이다.  남자도 여자보다 팬층이 얇을지언정 일부 에피소드라도 봤거나 최소한 이름이라도 들어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

 

  TV 애니메이션으로만 접한 이에게는 뜻밖이겠지만, '빨강머리 앤' 은 원래 10편짜리 연작 소설이다.

  1권에서 11살로 처음 등장했던 주인공 앤이, 뒤에 가서는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중년을 거쳐 노년까지 이르게 된다.  TV 애니메이션은 그 중 1권인 '초록 지붕 집의 앤' 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앤이 '초록 지붕 집' 에 와서 매튜-마릴라 남매와 같이 살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나는 애니메이션과 원작(단, 3권까지만...) 양쪽을 봤다.  그런데 원작이 있는 다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와는 달리, 이 애니메이션은 원작에 충실한 게 의외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에 대해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중년 남자였던 애니메이션 감독이 '다정다감하고 공상을 즐기며 예민한 여자아이의 심리' 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원작을 각색하는데 애를 먹다가, 차라리 원작 내용 그대로 가자고 결정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원작 소설 1권) 줄거리

 

 

  주인공 앤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서 자랐다.

  공교롭게도 앤이 신세졌던 두 집안 모두 아이들이 많아서, 어린 시절부터 아이 돌보는 일을 해야 했다.  특히 두 번째 집은 쌍둥이가 3쌍(!)이었다고 하니...  10살 때는 신세지던 집 사정으로 고아원에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에이번리 마을의 '초록 지붕 집' 에 사는 매튜와 마릴라 남매가 고아를 데려다가 키우기로 하면서, '초록 지붕 집' 식구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 매튜-마릴라 남매는 매튜의 농사를 도울 남자아이를 원했는데, 일이 묘하게 꼬여서 앤이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나이가 많든 적든 질색하고 쩔쩔매는 매튜가, 어찌된 영문인지 앤에게는 푹 빠져버린다.  게다가 엄격하고 차가운 성품의 마릴라까지 앤의 불행한 과거사를 듣고 동정심을 품게 되어, 앤을 식구로 받아들인다.  남의 집에서 애보기를 하거나 고아원 생활만 했던 앤으로서는, 드디어 자기 집과 가족이 생겼다는 것에 무척 기뻐하고 흥분하는데...

 

 

  앤이 온 후로 '초록 지붕 집' 에는 항상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게 된다.

 

  먼저, 마릴라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린든 부인과 부딪친다.

  물론, 린든 부인이 말을 함부로 하는 스타일이라 앤의 약점(삐쩍 마르고 주근깨가 많고 머리색이 빨갛다는 사실)을 대놓고 지적하는 무례를 저지르기는 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아이라면 기분은 나빠도, 상대방이 자신을 키워주기로 한 이의 친구라는 점 때문에 참았을 텐데...  우리의 앤은 부르르 떨며 큰 소리로 따지고 든다.  다행히 이 일은 어찌어찌하여 금세 풀리지만, 앤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이 사건으로 확 드러난다.

 

 

'홍당무...! 어이, 홍당무...!'

 

  미래의 남편(!)이 되는 길버트와도 요란하게 부딪친다.

  길버트는 에이번리 마을에서 가장 잘 생겼다는 말을 듣는 소년이다.  앤을 처음 만난 날 장난을 치면서 앤의 주의를 끌려고 했는데, 마침 앤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이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길버트는 언제나 여자아이들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앤의 무심한 태도에 약이 올라 앤의 성질을 건드리게 되는데...

  하필이면 앤의 최대 컴플렉스인 빨간색 머리에 빗대서 앤을 '홍당무' 라고 부른다.  그러자 앤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석판(당시 학생들이 노트 대신 쓰던 작은 휴대용 칠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려친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석판이 박살이 났을 정도다.

  길버트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그 후 여러 번 사과를 하고 화해의 뜻을 비친다.  하지만 앤의 뒤끝이 보통이 아니라 몇 년 동안 철저히 무시당하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길버트가 앤에게 석판으로 폭행(!)당한 후에 앤보다 더 예쁘거나 착한 여자아이들을 놔두고, 앤에게만 목을 매게 된다는 것...  석판으로 머리를 세게 맞아서 뇌에 문제가 생긴 건지도... ^^;;)

 

 

단짝 친구인 앤과 다이아나.

 

  그런가 하면, 에이번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사귀었으며 가장 친한 사이가 된 다이아나를 취하게(!) 만드는 사고를 치기도 한다.

  앤이 다이아나를 집에 불러서 놀다가 주스를 준다는 게, 실수로 술을 줬기 때문이다. (술을 난생 처음 접해서 술인 줄 몰랐던 다이아나도 맛이 좋다며 몇 잔이나 벌컥벌컥 마셨고... -.-;;)  그 일로 다이아나의 엄마가 노발대발하여 한동안 다이아나와 못 만나게 된다.

  그런데 다이아나의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다이아나의 동생이 병에 걸려 위독해진다.  앤은 남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았던 탓에, 나이는 어려도 아이들의 질병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래서 적절한 조치를 하여 다이아나 동생을 구해낸다.  그 일로 다이아나 엄마의 마음이 풀려 다시 다이아나와 마음껏 어울리게 된다.

 

  

  이런저런 사고를 치면서도 학교 공부는 착실히 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그 과정에서 숙적(!) 길버트와 불꽃 튀는 경쟁을 하게 된다.  사실 길버트 쪽에서는 앤을 선의의 경쟁자로 여겼고, 앤이 자기를 이겼을 때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번 앤을 짝사랑하는 티를 내기도 했음.)  하지만 앤 혼자 어린 시절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적개심을 불태운다. 

  어쨌거나 열심히 공부한 덕에 퀸 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퀸 학원 시절에도 계속 길버트와 경쟁함.)  몇 년 후에는 역시 수석으로 졸업해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졸업 직후 연달아 불행한 일이 생긴다. 

  먼저, 아버지나 다름없는 매튜가 갑자기 세상을 뜬다.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 거래하던 은행이 파산하자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마릴라의 건강마저 나빠진다.  평소 편두통으로 고생했는데, 알고 보니 시력에 문제가 생긴 탓이었다.  게다가 눈에 더 무리가 가면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으니, 바느질이나 책읽기 같은 것마저 그만 두라는 경고까지 받는다.  마릴라는 그런 상태로는 농장을 운영할 수도 없고 '초록 지붕 집' 의 살림도 꾸려나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집을 팔 생각을 한다. 

  

  결국, 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마릴라와 함께 '초록 지붕 집' 을 지키기로 한다.

  마릴라는 매튜와 함께, 오갈데 없는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록 지붕 집' 은 그냥 집이 아니라, 난생 처음 갖게 된 가족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진학의 꿈은 훗날로 미루기로 하고, 일단 교사가 되어 에이번리 마을에 머물기로 한다.

  다만, 앤의 모교인 에이번리 마을의 학교에는 길버트가 부임하기로 결정된 상태다.  길버트도 대학 진학을 원하지만, 집안 형편상 스스로 학비를 모아야 하기 때문에 한동안 교사 생활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앤은 이웃 마을의 학교로 가서 하숙생활을 하며 주말마다 집에 들릴 계획을 세우는데...

 

  뜻밖에도 길버트가 에이번리 학교 교사 자리를 앤에게 양보한다.

  사실 앤은 오래 전에 길버트에 대한 미움이 사라져서, 길버트가 물에 빠질뻔한 자신을 구해주고 다시 용서를 구했을 때 화해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망설이다가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쌀쌀맞게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길버트도 화가 나서 그 뒤로는 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길버트가 앤의 사정을 알고 배려해 준 일로, 이번에는 앤이 먼저 길버트에게 화해를 청하게 된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겉으로는 서로를 무시하면서 속으로는 서로를 의식했던 두 사람이, 마침내 친구가 된다. (그리고 훗날 연인이 되었다가 아예 결혼까지 골인한다는... ^^;;)

 

 

 

  앤의 성장기이면서 마릴라의 성장기이기도 한 '빨강머리 앤'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중에는 세월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빨강머리 앤' 도 그러하다.  어려서 처음 접했을 때에는, 고아 출신으로 불행하게 살았으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던 아이가 '초록 지붕 집' 의 가족이 되고 성숙해지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즉, 이 작품을 앤의 성장기로 봤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에는 좀 다른 각도로 보게 되었다.  주된 이야기는 앤의 성장기가 맞지만, 곁가지(?) 이야기로는 마릴라의 성장기라고 볼 여지도 있다.

 

  마릴라는 매우 엄격하고 고집스러운 캐릭터로 등장한다.

  물론 나쁜 짓은 절대 안 하고, 자기 집에 잘못 온 앤을 돌려보내려다가 앤의 사정을 듣고 앤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평생 살아온 에이번리 마을에서 친구라고는 린든 부인 한 명 뿐이라는 것을 봐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이 마릴라를 까다롭다고 여기는 것으로 봐도 그렇고, 편한 성품은 아니다.

  앤을 키우면서도 처음에는 딱딱하게 대했다.  덜렁대고 수다스러운 앤을 올바르게 키워보겠다는 좋은 뜻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만 밀어붙인다. (그나마 그 원리원칙도 자기만의 원리원칙임.)  간식은 정해진 종류만 먹인다. (오빠 매튜가 앤을 위해 초콜릿을 사오자, 아이에게는 소화에 좋은 박하사탕이면 충분하다고 타박을 함.)  다른 여자아이들이 밝은 색상의 예쁜 옷을 입고 다닐 때 앤에게는 어두운 색상의 수수한 옷만 입힌다. (앤이 부러워 하는 다른 아이들의 옷을 '우습게 생겼고 천을 잔뜩 낭비하는 옷' 이라며 단칼에 자름.)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로 유명한 린든 부인조차, 마릴라의 교육 방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릴라의 성격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마릴라가 앤과 함께 지내며 조금씩 변한다.

  처음에는 앤이 끝도 없이 펼치는 수다에 화를 냈지만, 나중에는 앤이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계속 말하라며 적응(?)된 모습을 보인다.  매튜가 앤이 평소 갖고 싶어하던 예쁜 옷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만하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매튜의 정성과 앤의 기쁨을 위해 넘어가주기도 한다. (관심 없는 척 차를 마시면서 앤의 반응을 훔쳐보는 귀여운 모습도 보임. ^^)  앤이 뛰어난 성적을 보이자 놀랍게도 앤을 대학에 보낼 생각을 한다. (부유한 사람조차 어지간해서는 자기 친딸도 대학에 안 보내던 시절인데도...!)  앤이 퀸 학원을 졸업했을 때는 훌쩍 자란 앤의 모습을 보고 뿌듯함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끼며 눈물까지 보인다. 

 

  작품 후반부에서 마릴라와 관련한 작은 반전이 드러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마릴라가 젊었을 적에는 길버트의 아버지와 연인 사이였다.  두 사람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로 심하게 다투었고, 길버트의 아버지가 사과했지만 마릴라가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길버트의 아버지는 떠나버렸고, 마릴라는 훗날 그 일을 후회했다.

  어쩌면 마릴라의 성격이 원래는 원만한 편이었는데, 길버트 아버지와 틀어져서 딱딱한 성격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마음을 닫고 살았던 마릴라가 앤을 만나 다시 부드러움을 찾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성장이 아닐까?

  그리고 앤과 길버트가 화해를 한 것은, 마릴라와 길버트 아버지가 이루지 못 한 인연에 대한 보상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마릴라가 딸 같은 앤이 길버트와 이어지는 것을 보며, 오랜 세월 느꼈던 길버트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에서 해방(?)이 되었다든지... 

 

 

 

  팟캐스트 '뇌부자들' 과 '빨강머리 앤'

 

  한동안 꾸준히 듣다가 안 들었던 '뇌부자들(정신과 의사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를 추석 연휴 동안 다시 들었다. 

  몇몇 책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룬 에피소드를 골라 들었는데, 그 중에 이 '빨강머리 앤' 이 있었다.  그런데 진행자들이 이 작품을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 한 각도에서 분석하는 것을 보니 흥미진진했다. 

 

  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갑자기 다가서는 태도를 보인다.

  보통은 무척 활발하고 사교적인 사람이더라도, 처음 만난 이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전혀 모르니, 친한 사이가 되기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앤은 자기를 마중 나온 매튜를 만났을 때, 매튜에게는 거의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물론 기회를 줬어도 매튜 성격에 한두 마디나 겨우 했겠지만...) 혼자 쉴새 없이 떠든다.  자기 소개는 그렇다 치고, 매튜와 같이 탄 마차가 지나가는 길목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감탄에, 드디어 집이 생겨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는 이야기 등등 온갖 이야기를 한다. 

  다이아나를 만났을 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뜸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주겠니?" 라고 말한다.  이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친한 친구' 라니...!   

 

  '뇌부자들' 의 진행자들은 이런 앤의 태도를,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대인관계에서의 거리를 조절 못 하는 것으로 봤다.

  무슨 정신의학 용어를 써서 말했는데 그건 기억이 안 나고... ^^;;  어찌되었거나 갓난아이 때 부모를 잃고 남의 집과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아서 애정결핍이 된 데다가, 매튜와 마릴라와 같이 살게 되기 전까지는 안정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 했던 탓에, 대인관계에 대해 잘 모르는 것으로 보았다.  

  맞는 말이다.  다이아나가 착하고 순한 성격인데다가 앤의 태도를 재미있게 여겨서 받아줬으니 망정이지,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얘가 날 언제 봤다고 이러나?' 하며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앤의 신체적인 컴플렉스(빨간색 머리, 얼굴의 주근깨 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했다.

  진행자들 왈, 앤의 처지에서 제일 큰 불행이며 가장 큰 약점은 외모가 아니라 고아라는 상황이다.  그런데 앤은 자신이 고아 출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딱히 열등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작은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외모에 대해서는 무척 예민하게 굴면서 말이다. (길버트가 앤의 빨간색 머리카락을 한 번 놀렸다가 5년이나 무시당한 것을 보라...!) 

  진행자들은 이 상황을, 앤이 무의식적으로 큰 약점을 외면하기 위해 작은 약점에 집착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분석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불행한 현실에 대해서는, 마치 그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마냥 구는 일이 종종 있으니 말이다.  

 

  '뇌부자들' 에서 앤의 성격과 태도를 분석한 것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이런 당연한 생각을 왜 나는 못 했지? 라는 의문도 들었다.  특히, 처음 만난 이에게 대뜸 거리를 좁히며 다가서는 앤의 태도가 그러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친한 사이에서나 할 법한 민감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기겁하며 피한 경험이 있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다고 여기며 곁을 내주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쳐서 관계를 정리한 적도 있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사람들은 특수한 성장기를 보낸 탓에 대인관계에 매우 서툴렀다.  나도 앤 같은 사람과 만난 적이 여러 번 있는데도, 애니메이션을 볼 때나 원작 소설을 읽을 때나 어째서 앤을 '그냥 낯을 안 가리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아이' 라고만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위에 쓴대로 TV 애니메이션은 원작에 매우 충실하다.

  그런데 '뇌부자들' 의 분석을 듣고 나니 어쩌면 나중에는 그런 분석을 반영한, 보다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어떤 인물이 등장해서 앤의 성격상 결점을 지적하며 '너의 그러한 성격은 이러이러한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식으로 팩트폭력(!)을 날린다.  그러면 자존심 강한 앤이 처음에는 그 말을 부인하며 분노하고 방황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을 인정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 진다든지 하는... (이러면 원작의 밝은 분위기에서 너무 멀어지는 건가요... ^^;;)

 

 

팟캐스트(3) - 뇌부자들(정신과 의사들의 진짜 정신과 이야기) blog.daum.net/jha7791/15791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