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제2외국어 변천사(?)

Lesley 2021. 4. 8. 00:09

 

  가끔 들리는 지역 카페에 접속했다가 제2외국어 관련한 재미있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고등학교 제2외국어 현황.

 

  어떤 학부모가 곧 고등학생이 될 아이의 제2외국어 문제로 글을 올렸다.

  중학생인 아이가 일본어에 관심이 많고 실력도 괜찮은데, 이 동네 고등학교는 전부 제2외국어가 중국어라 아쉽다는 내용이었다.  댓글을 보니,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제2외국어를 중국어와 일본어 두 개는 개설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고, 요즘은 중국어가 대세라 일본어를 선택하는 학생수가 적어서 학교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요즘은 제2외국어를 중학교 때부터 배운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요즘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슬프게도(!) 제2외국어를 불어와 독일어로 배우던 세대에 속한다.

  그때는 고등학교에 가서야 제2외국어를 배웠는데, 대부분의 학교는 불어와 독일어 두 과목을 개설해서 학생에게 선택하게 했다.  학생에게 정말로 선택권을 주는 학교도 있었지만, 묘한 기준으로 '무늬만 선택권' 을 주는 학교도 있었다.  일부 남녀공학에서는 남학생은 무조건 독일어를 배우게 하고 여학생은 무조건 불어를 배우게 했다. (남자는 독일어고 여자는 불어라는 통념은 대학까지 이어져서, 대학마다 독일어과는 남자가 우글거렸고 불어과는 여자가 우글거렸음.)  그런가 하면 문과는 불어를 배우게 하고 이과는 독일어를 배우게 강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어 혹은 독일어 하나만 개설해서, 진짜 선택권이고 가짜 선택권이고 간에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학교가 바로 불어만 개설한 곳이어서 팔자에도 없는 불어를 배워야 했다.  '영어는 참으로 착한 언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어의 화려한(!) 동사 및 형용사 변화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독일어의 동사와 형용사 변화는 불어보다 한 술 더 뜬다고 하던데, 그때는 그 사실을 몰라서 '어떤 미친(!) 인간이 우리 학교 제2외국어를 독일어로 정하지 않고 불어로 정한 건가...!' 하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아직 일본 영화와 만화가 전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라, 고등학교 시절에 일본어를 배운 학생들이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학생들은 보통 새로 생긴 고등학교 출신이거나, 나의 모교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을 잘 타는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우리 학교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그 시절에 '전통 여성의 내훈' 을 강조하고, 대입을 코앞에 둔 고3 학생들에게 손바느질로 저고리를 만들게 하는, 매우 보수적인 여학교였다는...! ㅠ.ㅠ)  그런 학교들은 제2외국어로 '전통세력(!)인 불어와 독일어 중 하나' 와 '신흥세력(!)인 일본어' 를 같이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선택하게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똑같이 일본어가 개설된 학교라도 지역에 따라 일본어 선호도가 달랐다는 점이다.  보통 대도시 출신 학생들이 일본어 선호도가 높았다.  아무래도 대도시 특성상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라도 일본 영화와 만화를 접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일본어에 관심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방 중소도시 출신 학생 중에는 "일본어를 배워보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이 일본어는 무슨 일본어냐며 불어(또는 독일어)를 선택해서 나도 그냥 불어(또는 독일어)를 선택했다."라고 말하는 아이가 있었다.  대도시보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새로운 것에 대한 의구심이나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어쨌거나 20세기 후반은 불어와 독일어가 여전히 강세이면서 새로이 일본어가 등장한, 변화의 시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어는 외국어고등학교에서나 배우는 과목이지, 일반계 고등학교의 제2외국어로는 생소했다.  시내의 큰 서점에 가봐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 관련 서적의 비중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영어책이야 지금이나 그때나 압도적으로 많으니 말할 필요도 없고, 그 다음으로 많은 일본어책이 중국어책의 5~6배는 되었다.

  대학 3학년 때인지 4학년 때인지 중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어 독학하게 되었는데, 교재를 고를 때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이야 큰 서점에 중국어 책이 잔뜩 있어서 이것저것 비교해 가며 고민해야겠지만,  그때는 중국어 학습자를 위한 책 자체가 별로 없었다.  더구나 비전공자가 볼만한 책은 달랑 두세 종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뭘 선택해야 하나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있는 것을 고르면 그만이었다. 

 

  21세기 들어서서 다시 제2외국어계에 변화가 생겼다.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던 때(2009년)를 전후하여 본 기사로 기억하는데, 고등학교 제2외국어에 관한 내용이었다.  90% 이상의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중국어와 일본어 두 과목을 개설했는데, 절반 넘는 학생이 일본어를 선택했고 중국어를 선택한 학생은 그보다 적다는 내용이었다.

  즉, 불어와 독일어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오죽하면 불어 교사와 독일어 교사들이 설 자리가 없어져서 다른 과목 교사로 전직(?) 할 정도였다.  또한 EBS에서 불어와 독일어 교육 프로그램을 청취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해당 프로그램을 없애버려서, 프랑스 대사관과 독일 대사관에서 EBS에 항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중국어와 일본어의 시대가 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일본어 선호도가 높았다.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문화(만화, 애니메이션) 쪽에서 중국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일본어가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서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기초 수준에서는 중국어보다 배우기 쉽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2020년대에 들어선 지금, 다시 제2외국어계에 변화가 감지된다.

  이 동네에 있는 몇몇 고등학교 상황만 가지고 전국 고등학교 상황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 정도는 알 수 있다.  일부 고등학교에서 일본어 과목을 개설하지 않을 정도로 일본어를 선택하는 학생이 줄어든 것이다.

  요 몇 년 중국이 막(!) 나가다 보니 중국에 대한 악감정이 심해졌다.  하지만 반중감정과는 별도로 국제사회에서 일본보다 중국의 존재감이 강해진 것이 사실이라, 중국어를 배우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이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이 있어도, 입학한 학교에 일본어 과목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일까지 생기고 있다.  격세지감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비전공자가 보기에 적합한 중국어 학습용 책이 거의 없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런 시국에 중국어 또는 일본어 공부?

 

  지역 카페에서 요즘의 고등학교 제2외국어에 대해 알게 된 김에 '중국어' 와 '일본어' 라는 검색어를 쳐봤다.

  전공 공부나 업무와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서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는 이들이 올린 글이 여러 개 보였다.  학원, 온라인 강의, 학습서를 추천해달라는 내용이거나 외국어 공부를 같이 할 사람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런 글에 자주 보이는 문구가 있으니, 바로 '이런 시국' 이다.  '이런 시국에 중국어를 공부하려니 좀 그렇기는 한데요.' 또는 '이런 시국에 일본어 공부하려니 눈치가 보이네요.' 식이다.

 

  지난 몇 년 중국과의 관계도 일본과의 관계도 최악이다.

  전에 한 친구가 "단군 할아버지는 대단하셔.  우리나라가 좁아 터져서 그렇지 중국이나 일본처럼 큰 지진도 안 나고, 단군 할아버지가 터를 잘 잡으셨네." 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던 친구가 요즘은 "단군 할아버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왜 이런 데에 터를 잡으셨냐고, 왜 우리나라는 양 사이드로 전부 미친(!) 것들만 있냐고~~!"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순수하게 공부하려는 이들이 남들 눈치를 보게 되나 보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한다고 해서 친중파나 친일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중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을 봤다고 해서, 대뜸 "이런 못된 것...!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그딴 것을 배우는 거냐...!" 라며 시비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말 그대로 시국이 이 모양이다 보니, 중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괜히 주눅 드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시절에 일본 유학 다녀온 이들이 모두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지 않나?  일본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한 건 한 거고, 그들이 우리보다 여러 분야에서 훨씬 앞선 게 사실이었기에 선진 학문을 배우려고 일본에 갔던 것 뿐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공부를 한 후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도 계시고, 독립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신 분들도 많다.

  그리고 도둑질과 바람 피우는 것 빼고는, 뭐든지 배워두면 어떤 식으로든 인생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무언가 배우는 것은  좋은 것이다.  더구나 대입이나 업무를 위해 의무적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가 마음 내켜서 하는 공부라면 더욱 좋지 않나...  여유 시간을 술이나 잔뜩 퍼마시거나 남의 뒷담화나 하는 것에 쓰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한 취미라고 생각한다.  특히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언어를 쓰는 나라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것을 알게 되는 일이다.  예전처럼 평생 남의 나라와 상관없이 사는 세상도 아닌데, 이 나라든 저 나라든 외국에 대해 배우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중국어 학습자나 일본어 학습자나 모두, 부디 당당히 공부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