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Lesley 2021. 1. 26. 00:01

  최근에 화제가 된 사건이 있다.

  손 모씨가 문학 공모전에서 입상했는데, 남의 작품을 도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도 한 군데도 아니고 다섯 군데나 되는 공모전에...!

  남의 문학 작품을 자기 것 마냥 이용했다고 하면, 보통은 자기 작품 속에 남의 작품 일부를 슬쩍 집어넣는 경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손 모씨는 타인의 작품 '일부' 가 아니라 아예 '전체' 를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고 그 후로 다른 일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손 모씨는 문학 관련 공모전 뿐 아니라 국토교통부, 특허청,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까지 타인의 작품을 도용해서 입상했다. (국토교통부는 그렇다 치고, 저작권 관련한 기관인 특허청과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까지 깜빡 속았다는 점은 좀 우습기까지 함. -.-;;)  기본적인 인적 사항인 나이와 학력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점이 많다.  게다가 거짓투성이 경력으로 야당의 국방·안보분과위원회 위원을 맡았던 게 드러나, 이번 일이 터진 후에 해임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네티즌 사이에서는 '이 사람의 인생 중 거짓이 아닌 게 있기는 한 것이냐' 라든지 '이 사람의 이름은 실명이 확실하냐' 등의 반응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단순한 표절이나 도용이 아니다 보니, 많은 이들이 손 모씨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궁금해 한다.

  직업군인으로 살다가 불명예제대를 한 뒤로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점, 타인의 작품으로 입상을 하니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 같아 기뻤다는 말을 한 점으로 보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을 벌인 듯하다.

  하긴, 사리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부정한 방법을 쓰더라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했을 것이다.  가령, 남의 작품 중 일부만 가져다가 표가 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수정하여 자기 작품에 끼워넣는다든지, 들켰을 때 파장이 덜하도록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공모전 한 군데에만 응모한다든지...  손 모씨처럼 수십 개나 되는 공모전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작품을 통째로 가져다가 응모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손 모씨가 '리플리 증후군' 에 걸린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았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은 영화 '리플리' 의 주인공 '톰 리플리' 에서 나왔다.  무언가(높은 사회적 지위, 부, 인기 등)를 너무나 동경하고 갈망한 나머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다가 스스로도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인 것처럼 믿어버리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정신질환은 없다고 한다. (이런...!) 그런데 '삶 전체가 거짓일 정도로 병적인 거짓말' 을 하는 이들의 행동과 동기를 설명할 때, 언론에서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을 워낙 많이 쓰다 보니 그냥 굳어져버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소위 리플리 증후군의 예가 몇 개 있는데, 아래의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십수 년 전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30대 여자 A가 서울대 졸업생 및 국가정보원 직원을 사칭하며 사기를 쳤다가 체포되었던 일이다.

  A는 대입에 실패하여 재수를 했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모님에게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4년 동안 등록금을 받아서 자기 용돈으로 썼다.  마침내 '졸업할 때'(?)가 되자 부모님과 함께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해서 학사모를 쓰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후 국정원에 들어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면서, 자신에게 돈을 맡기면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과 함께 굴려서 높은 이자를 받게 해주겠다고 지인들을 유혹했다. (국정원 직원은 보안을 생명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데, 그런 국정원 직원이 자기 업무를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다니, 사람들도 참...)  처음에는 카드 돌려막기 식으로, 이 사람의 돈으로 저 사람에게 이자를 지급하여 신뢰를 얻었다.  그 와중에 좋은 집안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들까지 낳고 살았다.

  하지만 A는 지인들의 돈을 생활비 및 사치품 구입에 탕진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이자를 지급 못 하여 빚독촉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돈을 맡긴 사람들이 형사고발에 나서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A의 친정 부모와 남편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자,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이제부터 본론이다. ^^;;

 

  A 관련 사건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A의 부모와 남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야 속을 수 있다 치더라도, 몇 주도 아니고 몇 달도 아니고 어떻게 10년 넘게 속을 수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속은 사람들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위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집에서 매일 얼굴 마주하며 사는 가족의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거짓말하는 티가 나지 않았겠느냐고, 그런데도 속았다면 좀 모자란 것이라고... 

  그런데 이번에 손 모씨의 사건을 접하고서 A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니, 예전과는 다른 생각이 든다.

  의외로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믿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객관적인 근거 없는 믿음' 을 품고 살아간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진다.

  가령, 내 고등학교 시절 친구 X가 Z대학을 나왔다.  그런데 그 X가 Z대학 출신인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설마 X에게 "네가 정말 Z대학 출신인지 확인해야겠으니 합격증이나 졸업장을 가져와라." 라고 했겠는가?  X가 고등학교 졸업 전에 Z대학에 합격했다고 말했고 몇 년 지나서는 졸업했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믿는 것 뿐이다.

  그리고 대학 시절 친구 Q는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Q가 다니는 회사 앞으로 찾아가 기다리다가 Q와 만난 적도 여러 번 있다. 하지만 Q의 재직증명서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  그저 Q가 그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고 말했고, 또 Q가 그 회사 건물에서 나오는 것도 보았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자기 일에 대해 말한 게 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으니, 친구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X는 고3 때 대입에 실패했지만, 대학에 합격한 내 앞에서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Z대학에 입학했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X는 대학 때 1년을 휴학해서 5년만에 졸업했는데, 사실은 재수기간 1년과 대학 재학기간 4년을 합치다 보니 5년만에 졸업한 것일 수도 있다.

  Q도 허영심에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했을 때 미리 그 회사 건물 안에 들어가 있다가, 내가 회사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마치 퇴근하는 것마냥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들도 내가 하는 온갖 말을 아무런 근거 없이 그대로 믿고 있다.  어쩌면 내가 어떤 사정 때문에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A의 부모와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는 설마 남도 아니고 딸이 자신들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 딸이 서울대 졸업하고 국정원에서 일하게 됐어요." 라고 말하며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애초에 거짓이라고 생각 못 했으니, 부모가 그런 말을 할 때의 몸짓이나 말투는 무척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정말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을 것이고...

  남편 역시 지인에게서 A를 서울대 출신의 국정원 직원으로 소개받았기에, 그 지인과의 관계상 지인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생각 못 했을 것이다.  물론 지인도 정말로 그렇게 믿고 말했을 테고...  혹은 소개 없이 우.연.히. A를 만나 연애를 했더라도, A 주변 사람들이 A를 서울대 졸업생이며 국정원 직원으로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믿게 되었을 것이다. 

  흔히 가족이나 친구 같은 사적인 관계는 업무상의 관계보다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순수한 사적인 관계가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차라리 업무상의 관계로 만난 사람이라면, 회사에 제출한 각종 인사 관련 서류로 그 사람의 신상정보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가족이나 친구에게 학력이나 경력을 확인할 서류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묘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가깝게 지내는 이들에게 가진 믿음의 기반이란 게, 사실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A의 경우와는 달리 이 세상 대부분의 가족이나 친구는 그런 허접한(!) 믿음으로도 서로 돕고 아끼며 살고 있고, 이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