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부루마블은 현실적인 게임이었구나.

Lesley 2020. 3. 20. 00:15

 

  최근에 5살짜리 조카 녀석이 추억의 게임인 '부루마블' 의 광팬(!)이 되었다.

  원래는 올해부터 유치원에 갔어야 하는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지난 2월 마지막 주부터 계속 집에 머물고 있다.  처음 2주는 부모도 자가격리 및 재택근무하느라 함께 집에 있었는데, 그때 아이와 같이 시간 보내려고 구입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조카가 올해 들어서 세계지도에 푹 빠져 나라 이름이나 국기 모양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땅따먹기(!)를 하는 부루마블 게임을 접하더니 완전히 반해 버렸다...!

 

  부루마블은 나도 초등학교 때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다.

  아마 친척집에서 언니.오빠가 갖고 놀던 것을 물려받았던 것 같은데, 지금보다 놀거리가 부족했던 당시에는 무척이나 신박(!)한 놀이였다.  그때만 해도 꿈 같은 일이었던 해외여행을 간접적으로나마 마음껏 할 수 있고, 세계 여러 도시에 호텔.빌딩.별장을 지어 다른 참가자에게 돈을 받아내며 부동산 투기의 희열(?)도 느낄 수도 있는,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를 즐기는 데에는 적당한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어려서는 앉은 자리에서 몇 판씩 하곤 했는데, 이 나이에 다시 하려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부루마블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조카 녀석 때문에 의무감(!)으로 할 뿐이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하려니 부루마블을 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언젠가 인터넷에서 '아기공룡 둘리' 의 고길동을 이해하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모두 아는 것처럼 고길동은 우리의 주인공 둘리를 괴롭히는 악역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현실의 냉엄함을 겪고서 '아기공룡 둘리' 를 다시 보면 고길동이란 캐릭터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만화니까 고길동이 악당으로 보일 뿐이지, 현실에서 우리가 고길동의 입장이 된다고 생각하면 둘리와 그 친구들을 예뻐할래야 예뻐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식 두 명을 키우는 것만으로 빠듯한 샐러리맨 가장에게 난데없이 둘리라는 군식구(!)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막힐 노릇인데, 그 군식구가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온갖 말썽은 다 피운다.  어디 그 뿐인가, 나중에는 군식구가 새로운 군식구들을 불러들이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예수나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둘리와 그 친구들을 구박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부루마블이란 게임도 어른의 시선으로 보니 어린 시절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부루마블에서는 상대방이 땡전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자신이 상대방보다 돈을 많이 벌면 이기게 된다.  그리고 목돈을 가장 빠르게 버는 방법은 부동산 투자, 즉 세계 각국의 땅을 사서 그 위에 호텔.빌딩.별장을 짓고 상대방이 그 땅에 들릴 때마다 사용료를 받는 것이다.  건물주를 갓물주라고 부를 정도로, 큰 부자가 되려면 부동산 투자만한 게 없다고 모두가 믿는 세태를 잘 묘사한 게임인 셈이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라는 걸 함부로 하면 패가망신(!) 하는 법...!

  조카는 초반부에는 조심스럽게 게임을 하다가 흥이 오르면 호텔이고 빌딩이고 마구잡이로 지어댄다.  상대방이 자기가 지은 호텔이나 빌딩이 있는 땅에 걸릴 때마다 돈을 두둑히 받아낼 수 있으니, 그 재미에 빠져서 소위 '묻지마 투자'(!)를 하는 것이다.

  제법 똘똘한 것 같아도 결국 5살짜리 아이라서, 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것저것 신나게 지어대며 돈을 쓰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호텔이나 빌딩 같은 부동산은 잔뜩 있는데, 정작 현금은 거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자기가 상대방의 부동산이 있는 땅에 가게 되어 거액의 사용료를 내게 되거나, 황금열쇠라는 카드를 뽑았을 때 부동산 수리비용 또는 종부세를 왕창 물게 되면, 돈이 없어 파산하게 된다. (그렇게 지고 나면 약이 잔뜩 올라서 울음보를 터뜨린다는... ^^;;)

 

  결국, 부루마블은 상당히 현실적인 게임인 셈이다.

  부동산 투자의 유용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분명히 부동산 투자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지만, 그것도 나름 전략을 세워가며 해야지 묻지마 투자를 하다가는 오히려 망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저것 따져서 계획을 잘 세워 부동산 투자를 해도, 돌발상황(부루마블 속 황금열쇠 카드 같은...)이 터져서 망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재미로 한동안 즐겼던 게임 속에 우리 현실이 이렇게 잘 녹아들어 있을 줄이야... ^^;;

 

 

  뱀발

 

  난 지금까지 부루마블을 '블루마블' 로 기억하고 있었다.

  부루마블 상자에 인쇄되어 있는 이름을 보고 블루마블의 짝퉁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게임의 원래 이름이 '부루마블' 이 맞다.  80년대에 처음 나온 게임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Blue Marble이라는 영어의 한글 표기가 참으로 구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