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라스트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

Lesley 2019. 12. 17. 00:01

 

  이번 달 초에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 를 봤다.

  솔직히 완성도가 탄탄하다든지 대단한 감동이 드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하니 모처럼 달달한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며 영화관에 갔던 이 순진한 관객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사기극(?)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형편없는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관객의 뒤통수를 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이 뒤통수 건(?)을 비롯하여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어서 포스팅해보려고 한다.

 

 

 

 

 

 

  줄거리(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중반부까지만...!) 

 

  이 영화가 아직 영화관에서 상영중이니 중반부까지의 줄거리만 소개하겠다.

 

  주인공 케이트(에밀리아 클라크)는 현실에서 만나면 꽤나 피곤할 것만 같은 캐릭터다.

  케이트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다.  산타(양자경)의 크리스마스 용품 전문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오디션에 참가하지만 언제나 불합격하기만 한다.  그런데 딱 봐도 불합격하게 생겼다.  차분히 오디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덮어놓고 달려들어 좌충우돌하기만 하니... 

  산타 말로는, 케이트가 원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었는데 (큰 수술을 받고) 복직한 후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형편상 따로 방을 구하지 못 하고 이 친구네 저 친구네를 떠돌며 신세를 지는데, 가는 곳마다 터무니없는 사고를 쳐서 쫓겨난다.  그런가 하면 남자 관계에 있어서도 충동적이라 이 남자 저 남자 전전하는 중이다.

   

  이런 때 케이트가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가족이라도 지주가 되어 주면 좋으련만, 케이트의 가족은 무늬(!)만 가족이다.

  케이트의 가족은 구 유고슬로비아 출신인데 내전을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왔다.  고향에서 살던 때에는 나름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특별한 날에만 의무적으로 모이는 사이가 되었다.

  엄마(엠마 톰슨)는 내전 중 험한 일을 많이 보고 들어서인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국에서 변호사였던 아빠는 영국에서는 택시기사가 되어, 옆의 사람을 힘들게 하는 아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만 한다.  언니는 변호사로 자리잡아 얼핏 보면 식구들 중 가장 안정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엄마가 동생만 편애하고 자신은 뭔가 모자라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에 상처를 많이 받은 상태이며, 무엇보다 부모 몰래 동성애인과 동거중이다.  위에 쓴 것처럼 케이트는 케이트대로 나사가 한두 개 풀린 것 같은 상태라, 모처럼 식구끼리 식사하는 자리에서 언니와 말다툼을 벌이고는 홧김에 언니가 동성애자라고 폭로해 버린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총체적 난국인 가족 상태... -.-;;)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는 톰(헨리 골딩)이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어째서인지 자꾸 마주치게 되는 톰은, 그 동안 케이트가 만난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  노숙자 보호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휴대폰이 있지만 일부러 안 갖고 다니고, 모두 바쁘게 사느라 매일 지나치면서도 깨닫지 못 하는 런던 거리의 소소한 풍경을 일깨워주며, 케이트의 푸념을 들어주는가 하면, 케이트 쪽에서 먼저 유혹해도 거절하고 케이트의 공허한 마음을 위로해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마냥 따뜻한 사람이다.

  차츰 톰에게 마음을 열게 된 케이트는, 톰의 충고에 따라 스스로의 태도를 바꾸어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보기로 한다.  그동안은 엄마의 푸념과 과잉보호적인 태도가 싫어 집에 가는 걸 꺼려했지만, 이제는 엄마에게 좀 더 살갑게 굴며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또한 직장에서도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황혼의 로맨스를 시작하려는 산타를 응원하고 도와주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톰을 찾으러 톰이 봉사활동 하는 노숙자 보호센터에 갔던 일을 계기로 스스로도 봉사활동에 나선다.

 

  이렇듯 톰 덕분에 새롭고도 보람찬 나날을 보내던 중에 톰의 정체를 알고 놀라게 되는데...

 

 

 

  로맨틱 코미디인 듯 아닌 듯한 영화

 

  자, 이제 저 위의 포스터를 보시라~~~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따뜻할 수 있을까요?' 와 '올 겨울 가장 로맨틱한 선물' 이라는 문구.  포스터를 본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모두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다음넷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의 영화 메뉴에도 로맨틱 코미디라고 나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관에서 하는 예고편을 봐도 분명히 로맨틱 코미디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위에 쓴 중반부까지의 줄거리만 봐도, 아무 희망 없이 되는 대로 살던 여자가 우연히 좋은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 덕분에 사랑스럽게 변하게 된다는, 그야말로 로맨틱 코미디의 정통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 러... 나...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

  아마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대표적인 로맨틱 코미디물이라면 '러브 액츄얼리' 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러브 액츄얼리' 나 '라스트 크리스마스' 나 겹치는 구석이 많다.  양쪽 모두 크리스마스 시즌의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며, 비중 있게 나오는 배우가 거의 영국 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스트 크리스마스' 를 보러 영화관에 갔던 사람들은 '러브 액츄얼리'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물로 볼 만한 건덕지(?)가 제법 나왔던 영화 초.중반부에서조차 '이거 로맨틱 코미디치고는 좀 이상한 걸?' 하며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후반부에서 반전이랄 수 있는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정체성도 날아가버린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남자 주인공의 정체가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라고 주구장창 홍보했던 이 영화가 사실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달달한 분위기 내겠다고 영화관에 가서 이 영화를 본 커플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 

 

  영화를 보고나서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봤는데...

  이 영화의 감독은 폴 페이그이며, 제작 및 각본 작업에 폴 페이그와 엠마 톰슨(여자 주인공의 엄마 역으로도 출연함.)이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폴 페이그의 이력을 살펴보고, 엠마 톰슨이 이 영화에서 연기만 한 게 아니라 제작자 및 각본가 역할도 했다는 것을 알고나니, 이 영화의 독특한 정체성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 올바름' 을 중요시하는 영화인들이다.  일단 여자 주인공 가족이 전쟁을 피해 이민 온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고, 로맨틱 코미디답지 않게 외국인(이민자) 혐오, 브렉시트 문제, 남녀 차별, 동성애자 차별, 노숙자에 대한 편견 등을 은근슬쩍 다루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셈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러브 액츄얼리' 보다 '라스트 크리스마스' 야말로 진정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원래 크리스마스라는 게 연인들끼리 신나게 데이트나 하라고 만든 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기독교 정신('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이상한 것 말고 참된 기독교 정신)을 되새겨보자고 만든 날이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 '온갖 종류의 차별과 편견을 버리고 모두 사랑하며 살자.' 는 메시지를 담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정신을 잘 담아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영화에 담긴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왜 굳이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라고 홍보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왜...???)

  처음부터 '인간애를 담은 따뜻한 드라마' 정도로 홍보했더라면, 그런 종류의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만 영화를 보러 갔을 것이다.  실제로 각 포털의 영화 메뉴를 보면, 이 영화 속에 담긴 인류애적인 메시지에 공감하는 이들은 영화에 후한 평을 내렸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라는 홍보에 낚여버린 가엾은 희생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안 좋다.  내내 쿨쿨 자다가 나왔다는 둥, 남자친구를 졸라 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남자친구에게 미안해 죽는 줄 알았다는 둥, 자신의 연애담도 이 영화보다는 재미있겠다는 둥(으잉? ^^;;), 포털 영화 메뉴에 실망과 분노의 댓글을 남겼다.

 

  굳이 추측 해보자면...

  영화 제작사가 땅 파먹고 사는 곳은 아닐테니 수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따뜻한 영화라고만 하면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마침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니 이 영화에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풍기는 로맨틱 코미디' 라는 가면(!)을 씌웠던 게 아닐까...

  만일 내 추측대로 전략적(!) 의도로 로맨틱 코미디라고 홍보한 것이라면, 그 전략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애초에 이 영화가 특수효과나 물량공세 퍼부어야 하는 SF물이나 액션물이 아니라 제작비가 적게 든 편이다. (물론 2,500만 달러는 우리나라 영화 기준으로는 상당한 제작비임.  다만 미국이나 영국 기준으로는... ^^;;)  그런데 영화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와중에도 흥행에 성공해서, 이 포스트를 쓰고 있는 시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올린 극장 수익이 1억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좋아할 만한 사람

 

  1. 분노하고 갈등하는 사람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지쳐서 영화 속에서라도 따뜻한 세상을 맛보고 싶은 이.

  영화의 주제가 한 마디로 'We are the world' 임. (우리 모두 사랑하며 살아요~~~)

 

  2.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넘쳐 흐르는 런던 거리를 보고 싶은 이.

  호불호가 갈리는 내용과는 별개로 영상미는 훌륭함.  크리스마스 시즌의 런던 거리를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색감으로 담아냈음.

 

 

 

  이 영화를 싫어할 만한 사람

 

  1. 순수한(!)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는 이.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탈(!)을 뒤집어 쓴 '비(非) 로맨틱 코미디' 영화임.

 

  2. 영화 '식스센스' 수준의 반전을 기대하는 이.

  이 영화 속 반전에 깜짝 놀랐다는 관객들도 있지만, 상당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관객도 많음.

 

 

 

  뱀발(※ 경고 : 스포일러 위험)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서 제목이 '라스트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 인 줄로만 알았다.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영국 출신의 유명 가수 조지 마이클이 부른 팝송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팝송이 아니라  '징글벨' 과 동급의 캐롤송 대접을 받고 있는,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예고편에서도 계속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이 영화 본편에서도 배경음악 또는 케이트가 직접 부르는 버전으로 몇 번이나 흘러 나온다.

 

  그런데 제목 자체가 일종의 복선이었다.

  라스트 크리스마스의 가사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지난 크리스마스에 나는 당신에게 내 마음을 주었지요.)  즉, 이 노래에서 heart는 '마음' 또는 '사랑' 이라는 비유적인 뜻으로 쓰이고 있고, 노래 속 화자는 누군가에게 지난 크리스마스에 사랑 고백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heart가 마음이나 사랑이 아닌 본래의 의미인 '심장' 이다...! 

  구글을 뒤져보니, 애초에 제작진이 조지 마이클의 라스트 크리스마스 가사에서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한다.  남자 주인공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 부분이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졌다는 반응이 제법 많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 가사의 뜻을 바꾸어 해석해서 영화 내용을 구성한 아이디어 만큼은 기발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