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이규보(李奎報) 시문(20) - 일일불음희작(一日不飮戱作)

Lesley 2019. 6. 23. 00:01

 

 

 

 

 

 

 

  오래간만에 이규보의 시를 소개하려 한다.

  오늘 소개할 시의 제목은 一日不飮戱作(일일불음희작)이다.  제목을 풀이하면 '하루 술을 마시지 않고 희롱삼아 짓다' 가 된다.

 

  이 시에서 우리는 이규보란 사람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이규보의 아내는 그런 남편 때문에 얼마나 속이 터졌을지 알 수가 있다.

  일단, 시의 제목에 나오는 '하루 술을 마시지 않고' 란 부분에서부터 이규보의 애주가 기질이 팍팍 드러난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술을 마신 김에 흥취가 올라 시를 지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술고래(!) 이규보는 평소에 술을 물 마시듯 하던 사람이라, 오히려 모처럼 술을 안 마신 날이 특별한 날로 생각될 지경이어서 바로 그 날 이 시를 지었다. 

 

 

 

一日不飮戱作(일일불음희작)

하루 술을 마시지 않고 희롱삼아 짓다.


                                            - 李奎報(이규보) -

 

 

君不見昔時周太常(군불견석시주태상)

당신은 옛날 주 태상을 모르오?

 

* 주 태상(周太常) : 후한 시대 인물인 주택(周澤)을 말하는데, 태상 벼슬을 지내서 주 태상이라고 했음. 주 태상이 병이 나서 재궁(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머무는 궁.  또는 공자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에 누워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걱정이 되어 재궁을 엿보며 아픈 곳을 물었다. 그러자 주 태상은 아내가 감히 재궁을 범했다며 감옥에 가두고 죄를 묻게 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태도가 과격함을 두고 “세상에 태어나 운명이 기구하여 태상의 아내가 되었구나. 태상은 1년 360일에 359일 동안 재계한다.” 말하며, 남편과 해로하지 못하는 여인을 '태상의 아내(太常妻)' 라 한다.

 

一年三百五十九日齋而淸(일년삼백우십구일재이청)

1년 359일을 재계하며 맑게 지냈다오.

 

又不見今時李春卿(요불견금시이춘경)

또 지금 이춘경을 모르오?

 

* 이춘경(李春卿) : 춘경은 이규보의 자(字)로, 이춘경은 이규보 자신을 뜻한다.

 

閱歲一萬八十日今日幸而醒(열세일만팔십일금일행이성)

10080일을 지나 오늘은 다행히 술이 깨었다오.

 

莫作太常妻(막작태상처)
태상의 아내는 되지 마시오.

 

一窺怒犯齋(일규노범재)
한 번 엿본 것을 재계를 범하였다며 노여워 할테니.

 

莫作春卿婦(막작춘경부)

춘경의 아내도 되지 마시오.

 

醉倒不與偕(취도불여해)

취한 나머지 쓰러져서 (당신과 )함께 해주지 않을 테니.

 

彼淸我狂雖或異(피청아광수혹이)
저쪽은 맑고 이쪽은 미친 것이 비록 다르지만

 

於婦均是生不諧(어귀균시생불해)

아내에게는 똑같이 화목하지 못했다오.

 

不如却作梁鴻妻(불여각작양홍처)
차라리 양홍의 아내가 되는 것이 좋겠소.

 

* 양홍(梁鴻) : 양홍은 동한 시대 사람인데, 가난하지만 절의를 숭상하고 학문에 힘썼다.  같은 마을의 맹광(孟光)이라는 무척 못생긴 여자가 31세가 되어도 혼인하려 들지 않자 부모가 연유를 물으니, 양홍처럼 훌륭한 사람에게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  양홍이 이 말을 듣고 맹광에게 장가 들었는데, 맹광이 대단히 화려한 장신구를 하자 7일이 지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내가 베옷을 입고 직접 나서서 일을 하자, 양홍이 기뻐했다.  나중에 이 부부는 산에 들어가 손수 농사짓고 길쌈하며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황제의 부름을 피하여 멀리 떠나 행랑에서 삯방아를 찧으며 살았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밥상을 들고 올 때는 눈썹 높이에 맞추어 상을 들어 공손한 예를 다하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공순하게 예를 다하고 남편과 해로한 여인을 '양홍의 아내(梁鴻妻)' 라 한다.

 

不恥布裙與荊釵(불치포군여형채)

베 치마와 나무 비녀 부끄러워하지 않고  

 

賢相敵歡有餘(현상적환유여)
어질기가 (남편과) 같아 (남편과) 즐기고도 남음이 있으니

 

擧案與眉齊(거안여미제)
눈썹에 가지런히 밥상을 들더라도 말이오.

 

 

 

  허구한 날 술을 마시는 자기 때문에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이규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처럼 술을 안 마셔서 맨정신(!)이던 날, 아내에게 말하는 형식의 시 한 편을 지었다.  다만, 이 시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뿐만 아니라 '아내를 약 올리려는 심보' 도 들어가 있다는 게 문제다.  더구나 미안한 마음보다는 약 올리려는 심보가 더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규보 = 고려시대 주당 + 간 큰 남편. -.-;;)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드러나는 앞부분부터 살펴보자.

 

  일단, 나쁜 남편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주 태상이란 인물이 누군고 하니...

  중국 후한시대 관리인 주 태상은 근무 중에 병에 걸린 자기를 찾아온 아내가 신성한 재궁을 훔쳐봤다는 이유만으로, 아내를 기어이 감옥에 보내버린 사람이다.  만일 아내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도둑질이라도 해서 벌을 받게 한 것이라면, 자기 가족이라도 봐주지 않고 법에 따라 처리하는 공명정대한 공직자로 이름을 날리며 존경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이 난 자신이 걱정되어 살펴보러 온 아내가 잠시 재궁을 엿보았다는 이유만으로(자신이 바로 그 재궁에 누워있었는데...!) 아내의 호적에 빨간줄 쫙 그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도 주 태상의 처사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서 "세상에 태어나 운명이 기구하여 태상의 아내가 되었구나.  태상은 1년 360일 중에 359일 동안 재계한다." 라고 조롱하며 비난했다.  당시 달력으로는 1년이 360일인데 그 중 단 하루를 빼놓고 재계를 하다니, 결국 주 태상은 평소에도 아내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방치해두었다는 말이 된다.  역사극이나 역사소설 자주 본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재계라는 말에는 목욕 깨끗이 하고 몸가짐 바로 하는 것 외에도 이성과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즉, 주 태상은 거의 매일 같이 아내를 독수공방시킨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규보 아저씨는 바로 그 주 태상을 자신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거의 매일 재계를 하느라 아내를 방치해 두다가 재궁 한번 엿보았다고 펄펄 뛴 주 태상이나, 10080일(자그마치 28년...! -.-;;) 내내 술만 마시고 취해서 쓰러지기 일쑤라 아내를 돌보지 않았던 자신이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 태상은 몸과 정신이 맑기라도 했고 자신은 술에 취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아내와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기로는 똑같다고 말한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이규보가 아내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갖고 자아비판의 시를 쓴 것만 같다.  그러나 원래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봐야(혹은 읽어봐야) 하는 법...!

  뒷부분을 보면 결국 이 시는 아내를 은근히 약올리는 내용이다.
  먼저, 뒷부분에 등장하는 양홍과 맹광이 누구인고 하니...  중국 동한시대 인물인 양홍은 학문에도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했지만 가난했다.  하지만 굳이 출세해서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훗날 황제가 양홍의 명성을 듣고 관직을 주려고 불렀지만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다른 먼 지방으로 떠나버렸다고 하니, 애초에 속세의 일에 별 관심 없고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양홍네 옆집에 살던 맹광이란 여자가 혼기를 한참 넘기고도 시집 갈 생각을 도통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양홍에게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결국 두 사람은 혼인했다.  맹광은 혼인 전에는 넉넉하게 살던 사람이었지만, 남편의 뜻을 존중해서 기꺼이 예쁜 옷과 장신구를 내던지고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수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맹광은 남편을 잘 받들며 남편과 평생 사이 좋게 지내는 아내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에서 이규보는 자기 아내에게 차라리 양홍의 아내가 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양홍의 아내 맹광은 비록 베 치마를 입고 나무 비녀나 꽂는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남편만큼이나 어질어서 남편과 평범한 일상을 즐기며 살았다.  그러니 남편에게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다가 바치는 수고를 할 지언정, 이규보 자신처럼 술독에 빠져사는 사람과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규보가 이 부분을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와 상관없이, 결국 이규보 아내 입장에서는 약 올리는 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조선시대보다 여자들의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던 고려시대라고 해도, 말 그대로 조선시대보다 자유로웠을 뿐이다.  이규보와의 사이에 자식도 여럿 두었는데, 이제와서 이혼하고 재혼한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아내가 속 끓이게 된 원흉(!)이 바로 남편 이규보의 과도한 음주이니, 이규보가 술을 끊어내거나 적당한 수준으로 자제하기만 해도 아내의 마음은 한결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판 술고래 이규보 아저씨는 자신의 음주 습관을 뜯어고칠 생각은 안 하고 '술 퍼마시는 나랑 사는 게 싫으면 다른 남자 찾아서 재혼해~~~' 라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

 

 

 

  옛날이나 지금이나 술꾼의 아내(혹은 아내 이외의 다른 식구)로 산다는 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마시고 죽자' 식의 음주 문화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다행히 요 몇 년 사이 많이 개선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흐름에 반항하며 두주불사를 외치는 주당들도 많다.  여보시오, 주당들, 당신들 건강은 물론이고 식구들을 생각해서라도 술 좀 줄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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