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시는 권필(權韠)이 지은 제목 없는 시, 즉 무제시(無題詩)이다.
권필은 조선 중기(선조 및 광해군 재위 시절)의 문인이었다.
뛰어난 시인으로 유명해서 당대의 다른 유명 문사들과 친분이 있었고, 재주를 인정받아 여러 사람에게 관직 추천을 받는가 하면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영접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주로 강화도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지냈을 뿐 정식으로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권필의 성격이 자유분방한 편이라 관직에 맞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조정의 상황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정치 현실을 싫어했을 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있었기에 임진왜란 때 참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광해군 시절에 권세를 휘두르던 유희분(광해군의 처남)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일로 분노한 광해군에게 친국을 받고 해남으로 귀양을 가던 중 44세에 사망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양길을 떠나던 중, 행인들이 안타까워 하며 주는 술을 마시고 장독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 이 시를 블로그에 올리게 된 것은 캐나다 사극인 '튜더스(The Tudors)' 때문이다.
튜더스는 6명의 왕비와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헨리 8세에 관한 드라마이다. 결혼을 6번이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설수에 오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2명의 왕비와 이혼하고 또 다른 2명의 왕비는 사형시켜버렸으니, 당연히 후세의 소설이나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이 사극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었다. 정치, 외교, 종교 등의 문제에 헨리 8세의 바람둥이 기질 및 변덕스러움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6명의 왕비들이 번갈아가며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전에 봤던 권필의 시가 떠올랐다. 마침 권필의 무제시가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궁중의 암투 속에 스려져가는 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無題(무제)
제목 없음
- 權韠(권필) -
宮中氣候風兼雨
(궁중기후풍겸우)
궁중 날씨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妾似盈盈枝上花
(첩사영영지상화)
첩은 아름답기가 가지 위의 꽃과 같네.
※ 이 시에서의 첩(妾)은 본부인과 대비되는 소실(측실)이 아님. 옛날 여자들이 자신을 낮추는 뜻으로 쓰던 말임.
昨日被催今被妬
(작일피최금피투)
어제는 (꽃이 피라고) 재촉 받더니 오늘은 질투 받아
可憐零落委泥沙
(가련영락위니사)
가련하게 (꽃이) 떨어져 진흙에 버려졌구나.
전에도 궁중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를 포스팅 한 적이 있다.
바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추석이라는 시이다. ☞ 두목(杜牧)의 추석(秋夕)(http://blog.daum.net/jha7791/15791121) 구중궁궐 속 여인의 마음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권필의 무제시와 두목의 추석은 일맥상통한다.
다만, 두목의 시가 궁중 여인의 외로움 쪽에 방점을 찍었다면, 권필의 시는 궁중 암투에 휘말려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여인의 슬픔과 허무함을 읊고 있다. 즉, 권필의 시에는 단순히 궁중 여인의 서글픈 마음만 드러난 게 아니라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도 묘사된다.
이 시의 주인공은 아리따운 궁중 여인이다.
자기 스스로가 '아름답기가 가지 위의 꽃과 같네' 라고 말할 정도니 상당한 미녀인 듯하다. 다만, 자신의 예쁜 외모를 자랑(?)한 구절이, 앞서 '궁중 날씨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라는 구절과 짝을 이룬 것이 불안해 보인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으로 표현된 궁중 날씨란, 결국 살벌하기 짝이 없는 궁중 분위기를 말하는 게 분명하다.
평화로운 상황에서라면 몰라도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외모로든 재주로든 남들 눈에 확 띄는 사람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으로 쉽게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특히,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자인 임금 주위에 있는 여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 때로는 자신이 남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이 남에게 가해자가 되는 일도 생긴다. 그리고 얄궂게도 가끔은 희생자 겸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시의 주인공은 빼어난 미모 덕분에 한때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추락하고 만다.
여인은 아마도 그 미모로 인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을 것이고, 궁중 사람들은 왕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 여인의 곁으로 몰려들어 아첨을 하며 어떤 행동(물론 자신들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곁에서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 여인의 주위에는, 비위를 맞추며 아부를 떠는 무리 뿐 아니라 여인을 적대시 하는 무리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어제는 (꽃이 피라고) 재촉 받더니 오늘은 질투 받아' 라는 구절로 표현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왕에게 새로 총애를 받는 후궁이 생겼을 수도 있고 기존의 후궁이 꾸민 음모에 걸려들었을 수도 있겠지...) 추락하게 된다. 즉, 왕의 총애와 권세를 모두 잃고 '가련하게 (꽃이) 떨어져 진흙에 버려졌구나.' 라고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는 보기에 따라 좀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도 가능할 듯하다.
옛날 사람들, 특히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임금에 대한 절절한 충성심(...이라고 쓰고 때로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미련' 이라고도 읽는... ^^;;)을 드러내기 위하여 임금을 '님' 이라고 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는 것 같은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은 그 '님' 을 원망하는 것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권필은 평생 동안 관직에 진출하는 걸 거부했던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나 훗날 광해군의 처남이 권세를 휘두르는 걸 풍자한 시를 썼다가 죽게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시도, 복마전 같은 궁궐에서 충심으로 임금을 보필하며 총애를 받다가 간신들의 농간 때문에 임금에게 버림받은 충신의 우울한 처지에 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권필(權韠)의 궁류시(宮柳詩)(http://blog.daum.net/jha7791/15791522)
두목(杜牧)의 추석(秋夕)(http://blog.daum.net/jha7791/157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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