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이규보(李奎報) 시문(17) - 신축정단(辛丑正旦)

Lesley 2018. 1. 1. 00:01

 

 

 

  또 한 해가 시작되었다.

  언젠가부터 세월 가는 게 빠르다는 어른들 말씀을 실감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냥 빠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빛의 속도인 것 같다.  2017년이라는 연도에도 아직 익숙해지지 못 했는데 벌써 2018년이 되어 버리다니...  아마 이번 2018년도 순식간에 지나가겠지...

  이제는 새해가 기쁜 게 아니라 또 한 살 더 먹었구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  마음은 아직도 파릇파릇한 10대이건만 몸은 이미... ㅠ.ㅠ

 

  고려시대 사람인 이규보 아저씨도 새해가 마냥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긴,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봤자 나이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속세의 일에는 초탈한 것처럼 굴던 고려시대의 호방한 시인도, 설날을 맞아 한 살 더 늙게된 것이 좋긴 뭐가 좋느냐며 투덜대는 시를 한 수 남겼다.  그 시가 바로 오늘 소개할 辛丑正旦(신축정단)이다.  

 

 

辛丑正旦 (신축정단)
신축년 설날 아침에

 

                                     - 李奎報(이규보) -

 

 

花山第十春 (화산제십춘)

화산의 열 번째 봄인

 

花山(화산) : 강화도에 있는 산 이름으로, 이 시에서는 강화도를 의미함.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10년째 되던 해의 설날에 이 시를 지은 것임.

 

辛丑陬月旦 (신축추월단)

신축년 정월 초하루 아침이네.

 

人應賀新正 (인응하신정)

사람들은 응당 설날을 축하하러

 

奔集塡閭閈 (분집전여한)

바쁘게 모여 마을 문을 메웠지.

 

歲月周復始 (세월주부시)

세월이 돌아서 다시 시작되니

 

剖判已來慣 (부판이래관)

(천지가) 처음으로 열린 이래 그러했다네.

 

剖判(부판) : 한덩어리였던 하늘과 땅이 갈라져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天地剖判 (천지부판)을 의미함. 즉, 세상이 처음 만들어진 때를 뜻함.

 

常事不須賀 (상사부수하)

항상 있는 일을 축하할 필요 없으니

 

是賀信浮誕 (시하신부탄)

이러한 축하는 쓸데없이 허황될 뿐.

 

我悲舊歲闌 (아비구세란)

나는 옛시절이 저무는 것을 슬퍼하고

 

不善新年換 (불선신년환)

새해로 바뀐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네.

 

曾不與韶顔 (증불여소안)

일찌기 소안 못지않았건만

 

韶顔(소안) : 젊어보이는 노인의 얼굴

 

醞作老醜漢 (온작노추한)

늙고 추한 몰골로 변하였네.

 

賀本賀人喜 (하본하인희)

축하란 본래 남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인데

 

未聞賀所嘆 (미분하소탄)

한탄하는 바를 축하한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네.

 

但欣風日和 (단흔풍일화)

다만 바람과 날씨가 온화함을 기꺼워하니

 

氣色空中漫 (기색공중만)

(새해의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가득찼네.

 

草木含芳意 (초목함방의)

초목이 싹트려는 뜻을 머금고

 

啼鳥弄微暖 (제조농미난)

우는 새가 활발히 노는 것이 따뜻해 보이네.

 

今年作詩幾 (금년작시기)

금년에는 시를 얼마나 지을 것이며

 

飮酒又幾醆 (음주우기잔)

술은 또 몇 잔이나 마시게 될까.

 

生死猶未知 (생사유미지)

살고 죽는 일도 알 바 아닌데

 

細事安足算 (세사안족산)

자잘한 일이야 어찌 따질 것인가.

 

 

 

  시의 앞부분에는 신축년의 첫날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규보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몽골과의 전쟁으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맞는 10번째 설날이다.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새해를 축하하며 마을 입구를 메울 정도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떠들썩한 설날 풍경을 바라보는 이규보의 마음은 심드렁하기만 하다. 설날이란 것은 이 세상이 생긴 이래로 매해 반복된 것일 뿐인데, 항상 있던 일을 어째서 새삼스레 축하한다고 야단법석인지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이 허황될 뿐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중간부분에는 이규보가 설날에 대해 삐딱한(!) 마음을 품인 이유가 드러난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었어도 제법 젊어보였던 얼굴(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동안이었던 얼굴)이 이제는 확연히 늙어보이는 게 싫은 것이다.  그래서 축하라는 게 원래 남이 기쁜 일을 맞았을 때 해주는 것인데,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한탄하는 판국에 무슨 축하냐며 불평한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설날 기분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축하는 무슨 축하...' 하고 툴툴대면서도, 설날 특유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도 설레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 한다.  아직은 차가운 겨울 바람과 날씨가 온화하게 느껴지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가득찬 듯 생각되며, 풀과 나무가 다가오는 봄을 벌써부터 준비하며 싹을 틔우려 하고 새가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따뜻해 보인다 했으니 말이다.  결국, 아닌 척 했지만 이규보 아저씨도 새해를 기쁜 마음으로 맞은 것이다. (그냥 솔직히 좋다고 하시지... ^^;;) 

 

  중간부분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보인 게 무안했는지, 끝부분에서는 다시 쿨한(?) 모습을 가장한다.

  일단은, 새해에 자신이 시를 몇 편이나 쓰고 술은 또 몇 잔이나 마시게 될 것인가 하며 갑자기 화제를 돌린다.  그러더니 자신은 살고 죽는 심각한 일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인데, 자잘한 것까지 신경쓰겠느냐고 큰소리친다.  

  그런데 이규보는 '자잘한 일' 목록에서 술을 빼놓았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술은 분명히 자잘한 일에 들어가는데 말이다.  역시 이규보 아저씨는 술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고려시대의 1등 주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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