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이규보(李奎報) 시문(18) - 사인혜선(謝人惠扇)

Lesley 2018. 8. 14. 00:01

 

 

  오래간만에 이규보의 시를 한 수 올린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름철이 되면 푹푹 찌는 더위를 기념(?)하는 뜻으로 여름 더위와 관련된 시를 올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고른 '사인혜선(謝人惠扇, 부채를 선물한 이에게 고마워하다)' 은 부채를 선물해 준 누군가에게 고마워 하는 마음에서 지은 작품이다.  다만, 부채를 주고받았다는 점과 서늘한 가을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이 시 속의 계절이 여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여름은 악명(!) 높은 1994년 여름을 넘어설 수준으로 대단한 여름이다.  이 여름이 하루라도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 고려 시대 에어컨(...은 너무 심했나?  그렇다면 그냥 선풍기 정도로... ^^;;)이라 할 수 있는 부채에 관련된 이 시를 포스팅하겠다.

 

 

 

謝人惠扇 (사인혜선)

부채를 선물한 이에게 고마워하다.

 

                                             - 李奎報(이규보) -

 

 

交情淡若水 (교정담약수)

사귐의 정은 맑기가 물과 같고

 

團扇皎如霜 (단선교여상)

둥근 부채는 희기가 서리와 같네.

 

不夜月長滿 (불야월장만)

밤이 아니어도 달이 항상 가득하고

 

先秋風自涼 (선추풍자량)

이른 가을 바람에 절로 서늘해진다. 


君心眞似氷 (군심진사빙)

그대 마음이 진정 얼음과 같아

 

相對洗煩鬱 (상대세번울)

서로 마주하면 괴로움과 울적함이 가시는구나.

 

更贈一襟秋 (갱증일금추)

다시 마음의 가을까지 보내주니

 

留爲雙手月 (유위쌍수월)

양손에 달을 만들어 주었네. 



 

  일단, 부채를 선물한 이는 이규보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으로 보인다.  아무리 부채가 여름철에 유용한 선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정이 안 가는 사람에게 받았다면 마음이 기쁠 리가 없다.  불편한 사람에게 선물을 받아봤자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시의 첫 부분에 "사귐의 정은 맑기가 물과 같고" 라고 묘사한 것으로 봐도 그렇고, 중간 부분에 "서로 마주하면 괴로움과 울적함이 가시는구나." 라고 읊은 것으로 봐도 그렇고, 부채를 선물한 사람은 이규보의 벗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부채는 여름철에 맞는 실용적인 선물인데, 친한 이에게 받기까지 했으니 이규보의 마음이 더욱 흡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시심이 절로 솟구쳐서 이 시를 지었다.
  또한, 이 시에서는 부채가 더위를 견디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은근슬쩍 드러난다.  고려시대라고 해서 여름이 안 더웠을 리 없다.  물론 지구 온난화 현상 같은 것은 없었으니 지금보다 기온이 낮은 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방기구가 없던 시절이라 어쩌면 몸이 느끼는 더위 수준은 지금과 비슷하거나 더 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높은 관직까지 역임한 이규보 아저씨 체면에 다 벗어부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시절에 높은 사람들이 체면에 손상이 가지 않게 더위를 견디는 방법이라고는 고상한 태도로 부채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한 이에게 받은 둥글고 하얀 부채를 두고, "둥근 부채는 희기가 서리와 같네.", "이른 가을 바람에 절로 서늘해진다.", "다시 마음의 가을까지 보내주니" 같은 시구를 지었다.  여름 다음이 가을이니 가을 바람이나 마음의 가을을 찾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늦가을에서 초겨울은 되어야 내리는 서리(!)까지 찾았던 걸 보면, 고려시대 여름 더위도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나저나 이 유별난 여름이 언제 끝나려나...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  여름, 너 빨리 가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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