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IMF 시대의 시작을 소재로 하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 을 봤다.
대단한 감동이 있는 영화도 아니고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오히려 보고나면 답답해지는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포스팅하는 것은, 이 영화가 IMF 시대가 서막을 여는 시기의 어수선하고 급박했던 분위기를 여러 각도에서 잘 묘사하고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 아쉬웠기 때문이다. 마치 IMF 시대를 재연 프로그램에서 다룬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 호환, 마마보다도 무서웠던 IMF 시대
엄밀하게 말하면 'IMF 시대' 나 'IMF 사태' 는 틀린(혹은 이상한) 말이다.
좀 장황하기는 해도 '1997년의 외환위기 및 그로 인한 몇 년간의 경제적 비상사태' 정도로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IMF는 '국제통화기금' 의 영문 약자이다. IMF가 조선이나 고려 같은 왕조 이름도 아닌데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처럼 IMF 시대라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또한 IMF가 우리나라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IMF 사태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IMF 시대니 IMF 사태니 하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IMF 시대를 맞기 전까지는 IMF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1997년 말부터 시사 문제에 전혀 관심없던 아이들도, 세상사에 어두운 시골 노인들도, 모두 IMF란 단어에 강제로 익숙해졌고 그 무서운(!) 위력을 알게 되었다. 소위 IMF 시대라는 기간은 몇 년 밖에 안 되었지만, 그 기간 동안 IMF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우리는 21년 전에 IMF가 만들어 놓은 경제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 그 정도로 대단한 IMF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 속에서 약 500년이나 이어졌던 왕조의 이름을 붙인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IMF 시대라는 말을 써도 될 자격(?)이 IMF에게는 있는 것이다.
◎ IMF 시대 속의 네 사람
영화의 줄거리는 전체적으로는 비교적 간단하고 단순하다.
IMF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상황에서부터, IMF 시대가 시작된 직후의 급박한 상황까지, 각각 다른 위치에 있던 4명의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IMF 시대의 시작을 서로 다른 입장과 각도에서 살펴본다.
주인공 1 -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IMF 사태가 터지기 몇 달 전부터 외환시장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 차례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다른 일(당연히 외환위기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일)로 바빠서 뒤늦게야 한시현의 보고서를 읽은 한국은행 총장도, 그 후에 한국은행 총장에게 보고를 받은 청와대 경제수석도, 그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할 뿐이다. 한시현은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무능한 행태에 답답해 하고 기막혀 하면서, 어쨌거나 이제라도 국민에게 상황을 알리고 대책을 세우자고 한다.
그러나 높은 양반들은 상황의 심각성에 놀라면서도 사태의 수습과 책임은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국민에게 진상을 숨기고, 한국 경제에 아무 문제 없다는 거짓 주장만 한다.
우려했던 사태가 터지고 우리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겠다고 하자, 한시현은 강력히 반대한다.
한시현은 한국보다 앞서 IMF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들의 상황을 보았을 때, IMF에게 손을 벌릴 경우 한국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IMF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IMF 측의 무리한 요구에 경악하고 분노하며, 협상을 중단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대(대기업)를 위해서는 소(중소기업 및 국민)를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정부의 고위급 관료들에게 맞서기에는, 한국은행의 일개 팀장이라는 위치는 미약하기만 하다. 한시현은 자기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가며 저항하지만, 결국 한국 정부와 IMF 간에 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 후 한시현은 사표를 내고 한국은행을 떠난다.
국가의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자괴감과 고위급 경제 관료들의 행태에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인공 2 - 재정국 차관(조우진)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현과 날카롭게 대치하는 엘리트 관료이다. 이 캐릭터는 IMF 사태 당시 재경원 차관을 지낸 강만수(공교롭게도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에 또 한 차례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도 이 사람이 기획재정부 장관이었음. 마이너스의 손인가... -.-;;)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꼭 강만수라는 특정인을 모델로 했다기보다는, 강만수로 대표되는 당시 경제 관료들의 집합체(?)나 대표 같은 캐릭터인 듯하다.
재정국 차관은 처음부터 다른 방법은 열외로 둔 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방법만 주장한다.
부작용이 엄청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IMF 구제금융안만 밀어붙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재벌가의 아들 등 극히 일부에게만 외환위기가 터질 것이라는 기밀을 알려, 그들과의 연줄을 탄탄하게 만드는 식으로 개인적인 잇속을 차리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이며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재정국 차관의 경제정책관 내지는 정치사상이다. 재정국 차관이 외환위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시현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사람은 외환위기를 대다수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큰 재앙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을 좋은 기회(!)로 여긴다.
즉, 여러 사정으로 살려둘 수 밖에 없었던 부실기업을 털어내고 툭하면 시위 벌이는 노조를 눌러버릴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다. 그래서 한시현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상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의 피해를 걱정하느라 조바심 낼 때, 재정국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 시스템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며 오히려 열의를 불태우고 IMF 구제금융안을 기정사실화 한다.
재정국 차관과 한시현의 대치는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나 있었다. 재정국 차관이란 위치가 한국은행 팀장보다 훨씬 높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했던 대로 IMF와 구제금융에 관한 협정을 맺는데 성공한다.
주인공 3 - 영세업체 사장 한갑수(허준호)
한갑수는 가족에게는 다정한 가장이며 직원들에게는 자상한 사장이다. 직원 10여 명 규모의 금속 그릇 공장을 꾸려나가던 중에 미도파 백화점에게서 납품 제의를 받는다. 회사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어음 거래를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계약을 망설인다. 하지만 친구이자 측근인 직원이 다른 업체들도 다 어음 거래를 한다면서 미도파와 계약할 것을 강권하자,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절묘하게도 한갑수가 망설이다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장면과, 한시현이 지금이라도 국민에게 진상을 알려야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위 관료들에게 묵살당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나온다. 만일 한시현의 주장대로 정부가 국가 경제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발표했더라면, 한갑수로 대표되는 많은 중소기업인이나 서민들은 그 시점에서 큰 계약을 체결하거나 대출을 받는 일은 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 터질 외환위기에 휘말릴 피해자 숫자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계약하고 얼마 안 되어 미도파 백화점이 부도를 내면서, 한갑수는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미도파에게서 받은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한갑수는 직원들에게 줄 월급도 거래처에 줄 대금도 마련하지 못 하게 된다. 고심 끝에 집을 팔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 하지만, 외환위기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너도 나도 집을 헐값에 내놓아서 여의치 않다. 그리고 친구 겸 측근인 직원이 구속된다. 이 직원은 자기가 미도파 백화점과 계약하자고 해서 회사가 위험해졌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처가 식구들에게 보증을 세우면서까지 한갑수에게 돈을 마련해줬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엄청나게 치솟은 이율 때문에 대출받은 돈을 갚지 못 하게 되자, 스스로는 구속되는 신세가 되고 보증을 선 처가 식구들마저 빚더미에 앉히게 된다. 그 와중에, 받을 돈을 제때 못 받게 되었는데도 한갑수를 따뜻하게 대해주던 거래처 사장이 자살하는 일까지 생긴다. 다른 거래처에게 받은 부도어음 때문에 연쇄부도의 위기에 처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같은 처지인 한갑수도 술김에 자살을 기도하다가 겨우 멈추고 오열한다.
IMF와의 협정이 체결된 후에,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사직서를 쓰고 나가던 한시현 앞에 한갑수가 나타나 대출받는데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우연히 같은 나라의 같은 시대에서 살며 같은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점 빼고는 접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친남매였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진작 한국은행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착하기만 한 한갑수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어 혼자 끙끙 앓다가 그제서야 찾아온 것이다. 한시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붉어진 눈으로, 면목 없어하며 어렵게 대출 청탁을 하는 오빠를 바라본다. 궁지에 몰린 친오빠가 안타깝기도 했겠지만, 친오빠의 모습 위로 나락으로 떨어진 수많은 국민들이 겹쳐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주인공 4 - 투자의 귀재 윤정학(유아인)
윤정학은 돈에 대해서라면 능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IMF 사태 전까지는 한 종합금융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사소한 일에서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사태의 냄새를 맡은 일로, 마침내 인생역전(!)을 하게 된다.
윤정학의 인생은, 신입사원 연수를 담당하던 중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으로 완전히 바뀐다. 그렇잖아도 해외 투자자들이 갑자기 한국에서 돈을 빼나가는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전세 낸 관광버스 안에서 시청자들의 사연을 방송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여성시대)을 우연히 듣다가 묘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시청자들의 사연이란 게 온통 경제적 어려움에 관한 내용(요즘 아빠의 사업이 어렵다, 얼마 전에 오빠가 실업자가 되었다 등등)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안 좋긴 안 좋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윤정학은 외국 자본의 한국 탈출과 서민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