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국가부도의 날 - IMF 시대의 시작을 돌아보다.

Lesley 2018. 12. 5. 00:01

 

 

  얼마 전에 IMF 시대의 시작을 소재로 하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 을 봤다.

  대단한 감동이 있는 영화도 아니고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오히려 보고나면 답답해지는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포스팅하는 것은, 이 영화가 IMF 시대가 서막을 여는 시기의 어수선하고 급박했던 분위기를 여러 각도에서 잘 묘사하고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 아쉬웠기 때문이다.  마치 IMF 시대를 재연 프로그램에서 다룬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 호환, 마마보다도 무서웠던 IMF 시대

 

  엄밀하게 말하면 'IMF 시대' 나 'IMF 사태' 는 틀린(혹은 이상한) 말이다.

  좀 장황하기는 해도 '1997년의 외환위기 및 그로 인한 몇 년간의 경제적 비상사태' 정도로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IMF는 '국제통화기금' 의 영문 약자이다.  IMF가 조선이나 고려 같은 왕조 이름도 아닌데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처럼 IMF 시대라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또한 IMF가 우리나라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IMF 사태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IMF 시대니 IMF 사태니 하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IMF 시대를 맞기 전까지는 IMF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1997년 말부터 시사 문제에 전혀 관심없던 아이들도, 세상사에 어두운 시골 노인들도, 모두 IMF란 단어에 강제로 익숙해졌고 그 무서운(!) 위력을 알게 되었다.  소위 IMF 시대라는 기간은 몇 년 밖에 안 되었지만, 그 기간 동안  IMF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우리는 21년 전에 IMF가 만들어 놓은 경제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  그 정도로 대단한 IMF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 속에서 약 500년이나 이어졌던 왕조의 이름을 붙인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IMF 시대라는 말을 써도 될 자격(?)이 IMF에게는 있는 것이다.

 

 

 

 ◎ IMF 시대 속의 네 사람

 

  영화의 줄거리는 전체적으로는 비교적 간단하고 단순하다.

  IMF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상황에서부터, IMF 시대가 시작된 직후의 급박한 상황까지, 각각 다른 위치에 있던 4명의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IMF 시대의 시작을 서로 다른 입장과 각도에서 살펴본다.

 

 

  주인공 1 -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IMF 사태가 터지기 몇 달 전부터 외환시장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 차례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다른 일(당연히 외환위기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일)로 바빠서 뒤늦게야 한시현의 보고서를 읽은 한국은행 총장도, 그 후에 한국은행 총장에게 보고를 받은 청와대 경제수석도, 그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할 뿐이다.  한시현은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무능한 행태에 답답해 하고 기막혀 하면서, 어쨌거나 이제라도 국민에게 상황을 알리고 대책을 세우자고 한다.

  그러나 높은 양반들은 상황의 심각성에 놀라면서도 사태의 수습과 책임은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국민에게 진상을 숨기고, 한국 경제에 아무 문제 없다는 거짓 주장만 한다.

 

  우려했던 사태가 터지고 우리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겠다고 하자, 한시현은 강력히 반대한다.

  한시현은 한국보다 앞서 IMF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들의 상황을 보았을 때, IMF에게 손을 벌릴 경우 한국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IMF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IMF 측의 무리한 요구에 경악하고 분노하며, 협상을 중단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대(대기업)를 위해서는 소(중소기업 및 국민)를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정부의 고위급 관료들에게 맞서기에는, 한국은행의 일개 팀장이라는 위치는 미약하기만 하다.  한시현은 자기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가며 저항하지만, 결국 한국 정부와 IMF 간에 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 후 한시현은 사표를 내고 한국은행을 떠난다.

  국가의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자괴감과 고위급 경제 관료들의 행태에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인공 2 - 재정국 차관(조우진)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현과 날카롭게 대치하는 엘리트 관료이다.   이 캐릭터는 IMF 사태 당시 재경원 차관을 지낸 강만수(공교롭게도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에 또 한 차례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도 이 사람이 기획재정부 장관이었음.  마이너스의 손인가... -.-;;)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꼭 강만수라는 특정인을 모델로 했다기보다는, 강만수로 대표되는 당시 경제 관료들의 집합체(?)나 대표 같은 캐릭터인 듯하다.   

  재정국 차관은 처음부터 다른 방법은 열외로 둔 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방법만 주장한다.

  부작용이 엄청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IMF 구제금융안만 밀어붙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재벌가의 아들 등 극히 일부에게만 외환위기가 터질 것이라는 기밀을 알려, 그들과의 연줄을 탄탄하게 만드는 식으로 개인적인 잇속을 차리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이며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재정국 차관의 경제정책관 내지는 정치사상이다.  재정국 차관이 외환위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시현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사람은 외환위기를 대다수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큰 재앙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을 좋은 기회(!)로 여긴다.

  즉, 여러 사정으로 살려둘 수 밖에 없었던 부실기업을 털어내고 툭하면 시위 벌이는 노조를 눌러버릴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다.  그래서 한시현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상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의 피해를 걱정하느라 조바심 낼 때, 재정국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 시스템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며 오히려 열의를 불태우고 IMF 구제금융안을 기정사실화 한다.

 

  재정국 차관과 한시현의 대치는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나 있었다.  재정국 차관이란 위치가 한국은행 팀장보다 훨씬 높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했던 대로 IMF와 구제금융에 관한 협정을 맺는데 성공한다.

  주인공 3 - 영세업체 사장 한갑수(허준호)
  한갑수는 가족에게는 다정한 가장이며 직원들에게는 자상한 사장이다.  직원 10여 명  규모의 금속 그릇 공장을 꾸려나가던 중에 미도파 백화점에게서 납품 제의를 받는다.  회사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어음 거래를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계약을 망설인다.  하지만 친구이자 측근인 직원이 다른 업체들도 다 어음 거래를 한다면서 미도파와 계약할 것을 강권하자,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절묘하게도 한갑수가 망설이다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장면과, 한시현이 지금이라도 국민에게 진상을 알려야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위 관료들에게 묵살당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나온다.  만일 한시현의 주장대로 정부가 국가 경제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발표했더라면, 한갑수로 대표되는 많은 중소기업인이나 서민들은 그 시점에서 큰 계약을 체결하거나 대출을 받는 일은 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 터질 외환위기에 휘말릴 피해자 숫자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계약하고 얼마 안 되어 미도파 백화점이 부도를 내면서, 한갑수는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미도파에게서 받은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한갑수는 직원들에게 줄 월급도 거래처에 줄 대금도 마련하지 못 하게 된다.  고심 끝에 집을 팔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 하지만, 외환위기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너도 나도 집을 헐값에 내놓아서 여의치 않다.  그리고 친구 겸 측근인 직원이 구속된다.  이 직원은 자기가 미도파 백화점과 계약하자고 해서 회사가 위험해졌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처가 식구들에게 보증을 세우면서까지 한갑수에게 돈을 마련해줬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엄청나게 치솟은 이율 때문에 대출받은 돈을 갚지 못 하게 되자, 스스로는 구속되는 신세가 되고 보증을 선 처가 식구들마저 빚더미에 앉히게 된다.   그 와중에, 받을 돈을 제때 못 받게 되었는데도 한갑수를 따뜻하게 대해주던 거래처 사장이 자살하는 일까지 생긴다.  다른 거래처에게 받은 부도어음 때문에 연쇄부도의 위기에 처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같은 처지인 한갑수도 술김에 자살을 기도하다가 겨우 멈추고 오열한다.
  IMF와의 협정이 체결된 후에,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사직서를 쓰고 나가던 한시현 앞에 한갑수가 나타나 대출받는데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우연히 같은 나라의 같은 시대에서 살며 같은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점 빼고는 접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친남매였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진작 한국은행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착하기만 한 한갑수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어 혼자 끙끙 앓다가 그제서야 찾아온 것이다.  한시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붉어진 눈으로, 면목 없어하며 어렵게 대출 청탁을 하는 오빠를 바라본다.  궁지에 몰린 친오빠가 안타깝기도 했겠지만, 친오빠의 모습 위로 나락으로 떨어진 수많은 국민들이 겹쳐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주인공 4 - 투자의 귀재 윤정학(유아인)
  윤정학은 돈에 대해서라면 능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IMF 사태 전까지는 한 종합금융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사소한 일에서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사태의 냄새를 맡은 일로, 마침내 인생역전(!)을 하게 된다.
  윤정학의 인생은, 신입사원 연수를 담당하던 중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으로 완전히 바뀐다.  그렇잖아도 해외 투자자들이 갑자기 한국에서 돈을 빼나가는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전세 낸 관광버스 안에서 시청자들의 사연을 방송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여성시대)을 우연히 듣다가 묘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시청자들의 사연이란 게 온통 경제적 어려움에 관한 내용(요즘 아빠의 사업이 어렵다, 얼마 전에 오빠가 실업자가 되었다 등등)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안 좋긴 안 좋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윤정학은 외국 자본의 한국 탈출과 서민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연결해서, 정부가 언론에 발표하는 낙관적인 경제 전망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리고 고위 경제 관료들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이기 때문에, 전체 국민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다른 방안 대신 대기업만을 살릴 IMF 구제금융안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시에 자기 앞에, 평범한 시대라면 절대로 오지 않을 엄청난 기회가 왔음을 직감한다.
  윤정학은 상사에게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종합금융사를 때려치우고, 직원 하나 없이 투자회사를 차린다.  그리고 종합금융사에서 일할 때 자신이 담당했던 고객들을 불러모아 투자 설명회를 연다.  그 고객들은 모두 윤정학 덕분에 큰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윤정학에 대한 믿음이 크다.  하지만 그런 고객들조차 윤정학이 "곧 대한민국이 망할 겁니다." 라고 말하자 어이없어 한다.  당연한 일이다.  일개 기업도 아니고 국가가 도산할 수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투자 설명회가 끝난 후 윤정학에게 돈을 맡기는 미친(!) 결정을 한 고객은 달랑 두 명이다.  나름 경륜이 있어 보이는 노인과 20대 중반의 날라리(!).  대다수 사람들이 미친 소리로 여길 말에 귀를 기울이며 윤정학과 한 배를 탔다는 점에서, 노인과 날라리 모두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곧 터진 외환위기는 남들에게는 추락의 시작이었지만, 윤정학과 두 고객에게는 상승의 시작이 된다.  윤정학은 외환위기가 닥치면 달러가 금값이 될 것을 예상하고 노인과 날라리에게 투자받은 돈으로 달러를 잔뜩 사놓았다.  예상했던 대로 달러 가격이 무섭게 뛰자 큰 차익을 얻게 된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이번에는,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헐값에 내놓은 아파트를 수십 채씩 사들인다. (그 중에는 원래 주인이었던 사람이 목을 매고 죽은 아파트도 있음.)   그야말로 갈퀴로 긁어모으는 수준으로 돈을 벌어들이면서, 윤정학은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하나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는 쾌감.  또 하나는 평생 모은 돈을 하루 아침에 잃고 망연자실해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씁쓸함.

 

  ◎ 그리고 21년 후...

 

  주인공 1 - 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한시현은 한국은행을 그만 둔 후 금융 관련 단체(사기업?  시민단체?)를 차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은행 직원이 찾아온다.

  그 직원은 대규모 가계대출로 국가 경제가 위기에 처해있는데도 정부 관료들은 나 몰라라 한다면서 도움을 요청한다.  한시현은 IMF 사태 때 정부 관료들의 무책임한 행태를 겪었던 터라 처음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한시현이 외환위기를 예측하고 썼던 보고서를 읽어봤다는 그 직원은 물러서지 않는다.  한시현은 예전에 고위 관료들과 맞서 싸우던 자신의 모습을, 전 직장의 새까만 후배에게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직원과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싸워보기로 한다.

 

 

  주인공 2 - 전 재정국 차관(조우진)

 

 

 

  예상했던 대로 여전히 호의호식하고 있다.

  국민들에게는 외환위기 조짐을 철저히 숨기고 재벌가 아들에게만 귀띔해 준 덕에, 자신에게 얻은 정보로 재벌 총수가 된 그 사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벌 총수 및 옛날 자신과 비슷한 지위로 성장한 후배 관료와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고급 정보를 주고 받는다.

 

 

  주인공 3 - 영세업체 사장 한갑수(허준호)

 

 

 

  예전처럼 작은 공장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

  IMF 사태 때 여동생의 도움으로 대출을 받아 기사회생한 것인지, 아니면 결국 몰락했다가 어찌어찌하여 재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20여 년 전과 비슷한 규모 및 비슷한 모습을 한 공장을 꾸려나가고 있다.  이제는 공장에 한국인 직원들이 아닌 외국인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취업 면접을 보러 가는 아들에게 "(나쁜 사람 뿐 아니라) 누구도 믿지 말아라." 고 신신당부 한다.  예전에는 정 많고 순박하기만 했던 사람이 그 무서운 시대를 거치며 변한 것이다.

 

 

  주인공 4 - 투자의 귀재 윤정학(유아인)

 

 

  네 명의 주인공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 윤정학이다.

  재정국 차관이었던 사람도 잘 먹고 잘 산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은 IMF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도 국가경제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즉, 원래 잘 살던 사람이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것 뿐이다.

  하지만 윤정학은 IMF 시대 전에는 금융사의 일개 과장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투자 강연회에 수백 명의 청중을 몰고나닐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강연이 끝나고 한 사람이 윤정학을 쫓아와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식사하면서 투자의 귀재로 소문난 윤정학에게 정보나 조언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 윤정학은 "점심은 500만원, 저녁은 800만원. (900만원이었던가? 대사가 잘 기억나지 않는...)  점심은 60분, 저녁은 90분." 이라고 대답한다.  얼마짜리 식사를 대접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일단 수백만 원을 내야만 겨우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물로 큰 것이다.

 

 

 



  이모저모

 

  영화는 IMF 시대라는 위기의 시대를 속도감 있게 조망하지만, 전반적으로 건조한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영화를 보며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 소재가 IMF 시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 IMF 시대는 우울한 소재일 뿐 신나는 소재가 아니니까...

  그리고 IMF 사태가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면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테니, 영화에 제작진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하지만 IMF 시대는 불과 21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 지금 10대와 20대인 사람을 빼고는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그 암울한 시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그 때 추락해서 지금까지 재기하지 못 한 사람들도 많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IMF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그 때 벌어졌던 사건의 흐름을 그대로 타면서, 어느 정도는 재연 프로그램 같은 느낌으로 진행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 관료들이 대통령에게 위기상황을 보고하러 가는 장면에서 나오는 한시현의 대사가 명언이다.

  당시 대통령의 아들이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된 상태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 일로 불편한 대통령의 심기를 고려해서, 보고를 할 때 어려운 말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러자 한국은행 총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한시현을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한시현의 대사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남의 돈을 빌렸으면 제때 갚아야 하는데, 안 갚고 흥청망청 쓰다가 나라 전체가 망하게 생겼다... 라고 말씀드리세요." 

  빚이란 것은 결코 자신의 돈이 아니라 남에게 돌려줘야 하는 돈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뻔한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부와 기업이 철저히 무시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선진국 그룹이라는 OECD에 가입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은, 거대한 빚더미 위에 만들어진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며 소름끼쳤던 장면은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면서 재계 순위 명단에 빨간줄이 그어지는 장면이다.

 

  걷잡을 수 없는 연쇄부도 사태 속에서 외환위기 대책팀은 사무실 벽에 재계 순위 명단을 붙여놓고, 한 기업이 넘어갈 때마다 그 기업의 이름 위에 빨간줄을 긋는다.  대마불사란 말이 무색하게 한보그룹, 미도파 백화점, 해태그룹, 기아자동차가 차례로 도산한다.  그 때마다 빨간색 줄도 무섭게 늘어만 간다.

  그러다가 대우그룹이 무너질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미 대기업 도산 소식에 익숙해져있던 대책팀 사람들이지만, 대우그룹이란 말에는 모두 하얗게 질린 채 굳어져버린다.  곧 카메라가 재계 순위 명단 속에 4위로 표시되어 있는 대우그룹을 비춰준다.  한보, 미도파, 해태, 기아 등도 분명히 우리 경제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이었지만, 대우그룹은 자그마치 재계 순위 4위였다.  이미 국가 경제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대우마저 도산할 지도 모른다고 하니, 대한민국이 아예 끝장난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대우그룹은 이 때에는 어렵게 도산을 피했지만 결국 몇 년 후에 도산했음.)

 

 

  4명의 주역 말고도 눈에 띄는 배우들이 있다.

  일단,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IMF 총재 역을 맡은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이다.  '늑대의 후예들' 과 '블랙 스완' 에서 주연은 아니어도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줬던 이 배우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엄청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후반부의 몇 장면(한국 정부와 IMF가 협상하는 장면)에만 나오는데도, 영화 내내 나오는 4명의 주인공과 비중이 비슷한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특별출연 혹은 우정출연급으로 나왔던 류덕환한지민의 모습도 반가웠다.  류덕환은 뭘 하는 사람인지 24살인데도 수억 원의 현금을 갖고 있는 날라리로 나온다.  또라이(!)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인지 IMF 시대에 윤정학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사업에 투자해서 떼돈을 벌더니, 21년 후에도 여전히 윤정학의 조언으로 여기저기 크게 투자를 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  한지민은 마지막 장면에서 한시현을 찾아간 한국은행 직원이다.  과거에 외환위기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동분서주하던 한시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책임감과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맹렬 커리어 우먼이다.
  윤정학과 날라리는 아무래도 불로초라도 구해다가 먹었나 보다.  21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른 등장인물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는데, 이 두 사람만 너무 젊어 보인다.  하긴, 윤정학 역을 맡은 유아인이나, 날라리 역을 맡은 류덕환이나, 원래 평범한 동안을 넘어서 미친(!) 동안인 배우들이다.  초특급 동안에 괜히 주름 분장해봤자 어색해 보이기만 하니, 차라리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자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지난 21년간 돈을 워낙 많이 벌어서 그 돈을 피부미용에 아낌없이 썼다고 하면, 40대 혹은 50대에도 20대 같은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게 말이 된다.  

 

 이 영화는 IMF 시대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몇 년 전에 포스팅 한 '1999, 면회' 란 영화와 공통점이 있다.  ☞ 1999, 면회(http://blog.daum.net/jha7791/15790964)

  하지만 '1999, 면회' 가 IMF 시대의 우울함 속에서도 소소한 웃음과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면, '국가부도의 날' 은 IMF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긴박감과 IMF 시대가 시작되고나서의 절망감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래서 영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