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박경리의 '토지'에 관한 추억들

Lesley 2018. 10. 3. 00:01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에 대해 써보려 한다.

  갑자기 웬 '토지' 냐 하면, 조만간 친구와 강원도 원주에 가기로 했는데 그 때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공원' 에도 들릴 생각이기 때문이다.  박경리 작가는 원래 경상남도 통영 출신이며 청년기 및 중.장년기에는 서울에서 살았지만, 노년기는 강원도 원주에서 보냈다.  그래서 작가가 생전에 살았던 집과 그 주변에 토지문학공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토지의 팬이라면 원주에 가면서 토지문학공원에 안 들릴 수가 없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랴? ^^) 


  토지란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느 날 학교 점심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토지란 책을 읽고 계신 것을 봤다.  요즘 책처럼 가로읽기가 아닌 예스러운 세로읽기로 된 책이었다는 것도 아직 기억난다.  나는 그 책과 당시 KBS에서 방영하던 드라마 '토지' 를 연결짓지 못 했는데, 같은 반 아이가 "이 책 제목하고 드라마 제목하고 같네요." 라고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선생님 왈, "그 드라마가 이 소설 갖고 만든 거야."

  '원작이 따로 있는 드라마' 라는 개념(?)을 그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차피 그 드라마는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몇 번 본 게 전부라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드라마의 원작 소설에 대해서도 '그런 게 있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드라마가 원작 소설 2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접어들면서(5학년 때였던 듯.) 꼬박꼬박 챙겨보는 팬이 되었다.

  대하드라마답게 많은 인물들의 사연이 얼키고 설켜서 나오는데 흡인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나중에 원작 소설을 읽고서야 알았지만, KBS판 토지는 내용상으로도 그렇고 캐스팅상으로도 그렇고 원작에 굉장히 충실했다.  소설에서 묘사된 주요 등장인물들과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의 외모 싱크로율이 최소한 90% 이상은 되었다. (단, 주인공 최서희의 남편 김길상은 예외였음.  원작에서는 머슴 출신으로는 도무지 안 보이는 '미남 + 지식인' 의 외모로 나오는데, KBS판 드라마에서는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음. -.-;;)

  2000년대 들어 방영한 SBS판 토지는 줄거리를 지나치게 각색해서 도저히 '토지' 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KBS판 토지는 원작 소설의 1~3부를 약 2년에 걸쳐 방영했는데(아직 4~5부는 안 나온 상태였음.), SBS판 토지는 1~5부 전체를 겨우 반 년 동안 방영했다.  그러니 SBS판 토지에서는 어지간한 등장인물은 다 쳐내고, 어지간한 사건도 생략하거나 다루더라도 대폭 줄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SBS판 토지는 제대로 된 토지가 아니라, 토지와 비슷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는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부터 소설 '토지' 에 빠지기 시작했다.

  큰집에 갔다가 사촌언니의 책꽂이에서 소설 토지를 발견한 게 시작이었다.  그 후로 큰집에 갈 때면 항상 토지를 읽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었다.  그러다가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마침내 토지의 마지막 5부가 완결되었다.  자그마치 26년 만에 토지가 완성된 것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TV에서 토지가 완결되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얼마 후에는 박경리 작가가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도 보도되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해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고등학교 졸업 때 나에게 받았던 편지를 돌려줬다.

  절교의 의미로 돌려준 것이 아니다.  그 편지에는 '대학 가서 꼭 해야 할 것들', 즉 요즘 식으로 말하면 '버킷 리스트' 라 할 만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친구에게 돌려받기 전까지는 그런 편지를 썼다는 것도 잊고 살았는데, 친구는 '네가 대학 때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몇 가지나 정말로 해봤느냐?' 란 뜻에서 편지를 돌려준 것이다.

  그 버킷 리스트 중에 '토지 한 질을 살 것' 도 있었다.  사실은 대학 때도 도서관에서 종종 토지를 읽곤 했지만 굳이 구입할 생각까지는 안 했더랬다.  아마 중.고등학교 때보다 토지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토지가 아직 완간되지 않아서 다음 권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 했고, 다음 권이 나와 페이지를 넘길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물론 대학 때도 여전히 토지를 좋아해서 다시 보기는 했지만,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처럼 호기심과 열정이 넘쳐흐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친구가 돌려준 편지가 계기가 되어 다시 토지에 대한 소유욕(!)을 불태우게 되었고,  결국에는 토지 한 질을 구입했다.  다만, 대하소설이라 양이 상당해서 가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인터넷 헌책방에서 중고로 구입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 버킷 리스트였던 '토지'...!

(꿈☆은 이루어진다~~! ^^)



  내가 구입한 토지는 1990년대에 나온 솔출판사 버전이다. 

  솔출판사 버전은 이미 절판되어서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고, 지금 시중 서점가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버전이 있다.  솔출판사 버전은 토지가 완간된 최초의 버전이며 총 16권(1~4부는 각 3권, 5부만 4권으로 되어 있음.)으로 되어 있다.  그 후에 나온 다른 출판사 버전은 판형을 줄인 탓에 20권이 넘어간다.  권수가 많고 내용이 방대하니 청소년들이 보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지, 언제부터인가 청소년용 토지는 물론이고 만화(!) 토지까지 나왔다. 


  나의 토지사(?)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 역사에 관한 것인데 '만보산 사건' 과 '형평(사) 운동' 이다. 

  요즘은 학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한국사' 와 '근현대사' 로 나누어 가르친다.  고대~조선 중기 역사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배우지만, 반대로 조선 후기~현대사는 무척 자세히 배운다.  그러니 아마 지금의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만보산 사건과 형평사 운동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2권(상, 하)짜리 교과서를 쓰는 '국사' 라는 단일 교과로 배웠다.  고대~개화기 역사는 자세히 배우고, 대신 일제강점기~ 해방 후 역사는 지금 교과서보다 양이 훨씬 적었으며 시험에서의 비중도 낮았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부분은 몇 문제라도 나오니 공부해야 하지만, 해방 이후 부분은 통째로 건너뛰어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국사 선생님이 해방 이후 부분은 아예 설명 없이 각자 알아서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을 정도였다. (국사 선생님 왈,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 시대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어차피 수능에 안 나와.  그 사람들 다 죽어야 나올 거니까 너희는 공부 안 해도 돼." ^^;;)

  상황이 이렇다 보니, 토지에서 읽은 만보산 사건이나 형평사 운동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 줄 몰랐다.  그저 작가가 그 시대 상황에 맞추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대학에 가서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또 하나는,  4권(솔출판사 버전으로 2부의 첫 번째 권에 해당함.) 후반부에 나오는 대목이다.

  대학 때 학교 도서관에서 토지를 복습(!)하다가, 나보다 먼저 읽었던 누군가가 빨간색 볼펜으로 줄을 그어놓은 것을 봤다.  처음에는 빨간줄만 눈에 들어오며 짜증이 났다.  도대체 어떤 무식한 인간이 모두 함께 보는 도서관 책에 줄을 그어놓은 건가, 대학생이면 분명히 어른인데 매너가 왜 이 모양인가... 대충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데 막상 빨간줄 쳐진 대목을 읽으니, 자기 책도 아니면서 줄 그어놓은 기분도 이해가 갔다. (물론 옳은 행동은 아니니 공중도덕을 중요시하는 착한 시민들은 이런 짓 하지 맙시다...! -.-;;)

  그 대목은, 주인공 최서희가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마차를 타러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나온다.  타고난 미모에, 한복과 서양옷을 세련되게 섞어 입은 모습에, 심지어 그 동안의 마음 고생 때문에 생긴 초췌함까지 합쳐져서, 서희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길을 한 번에 잡아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의 문장이 나온다.  "숨이 막히고 고뇌스러우며 탄식하게 되는, 아무튼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용정 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뿌린 여자이던가." 

  아마 토지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별 감흥 없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토지 애독자들이라면, 토지 속에 나오는 최서희의 이미지가 이 문장 하나로 압축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저 외모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어지간한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곡절을 어린 시절부터 겪은 내력, 그런 환경에서 비롯된 냉정함과 영악함과 오만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천애고아라는 외로움이 어우러졌기에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 후로 한동안 옛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미모를 갖춘 여장부 스타일의 캐릭터를 볼 때면, 위의 문장을 떠올리며 '그래봤자 최서희보다는 격이 한참 떨어지네.'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몇 년 전까지 토지를 읽은 횟수가 수십 번은 되지만, 단 한 번도 1권에서 16권까지 쭉 읽어 본 적이 없다.

  양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어떤 때는 2부만 읽고, 또 어떤 때는 3부 중 한 권만 읽고...  그런 식으로 조각(!) 내어서 읽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토지를 접했던 중학교 때는 한 권조차 쭉 읽어나가지 못하고 건너뛰어가며 봤다.  일단, 수많은 등장인물 중 비중이 떨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건너뛰었고(조연급의 비애... ^^;;). 일제강점기 때의 사상의 흐름이나 독립운동 동향에 대한 부분 역시 통째로 넘겼다.  특히 후자는 중학생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내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부분은 대학에 가서야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청소년용으로 나온 토지가 바로 그런 부분을 생략한 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듦.)

  토지를 몇 번씩 보고도 질리지 않았던 것은, 책의 내용 자체도 좋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전에는 안 읽었던 부분을 새로 읽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토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해서 읽는 날이 올까?


  공교롭게도 올해가 박경리 작가 서거 10주기라고 한다.

  그런 시기에 작가가 생전에 살았던, 그리고 토지를 완결했던 집에 가본다니 기대가 크다.  물론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그만큼 큰 법이다.  또한 작가의 집이 무슨 옛날에 지은 대단한 궁궐이나 성도 아닌데, 우리가 사는 평범한 집과 특별히 다를 리 없다.  그래도 노년의 작가가 건강이 안 좋아지는 가운데도 열정을 불태우며 토지의 후반부를 집필했던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토지 팬에게는 특별한 곳으로 느껴질 게 분명하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는 모험(!)을 해보려 한다. ^^


강원도 원주(1) - 박경리문학공원(http://blog.daum.net/jha7791/1579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