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자나깨나 보이스피싱 조심...!

Lesley 2018. 1. 29. 00:01


  얼마 전에 보이스피싱에 넘어갈 뻔했다.

  언제부턴가 보이스피싱이 너무 뻔하고 흔해져서 이제는 이야깃거리도 못 될 지경이다.  허구한 날 뉴스나 인터넷에 나와서 알려진 수법에 어떤 바보가 넘어갈까 싶지만, 속이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데야 당해낼 도리가 없다.  막상 그 일이 자신에게 닥치면 정신줄을 안드로메다로 내던지고 꼴까닥 넘어가게 된다.

  전에 엄마가 보이스피싱에 넘어갈 뻔했을 때, 옆에서 듣던 나는 사기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지만 우리 엄마는 아들이 붙들려서 많이 다쳤다는 말에 금세 울먹울먹... -.-;;  어떻게 저런 뻔한 수작에 넘어갈까 싶었는데, 막상 내가 보이스피싱의 목표물이 되니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상대편 말에 휘둘렸다가 겨우 정신차리고 빠져나왔다.    


  지난 주의 어느 날, 휴대폰이 울리기에 보니 낯선 번호가 떴다. 

  전화를 받아보니, 어떤 남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000씨 맞습니까?  저는 전주지방검찰청 특수금융수사팀 김00 수사관입니다." 라고 말했다.  검찰청이니 수사관이니 하는 말이 나오니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긴장부터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포통장을 이용해 사기를 친 일당을 체포했는데 그들이 소지한 대포통장 중에 내 명의로 된 것도 2개나 나왔다는 말까지 들으니 완전 멘붕...!!! (오, 마이 갓~~!!! ㅠ.ㅠ)


  이른바(!) 김 뭐시기 수사관이란 사람이 정말 수사관다운 목소리로 하는 말이 전부 그럴듯했다. 

  먼저, 문제의 대포통장이 농협과 하나은행 것이라며 나에게 정말로 그 두 은행에 계좌가 있는지, 지난 몇 년 동안 은행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된 적이 있는지 물었다. (대한민국 사람 중에 은행에서 개인정보 유출되는 일 안 겪은 사람이 어디 있겠수... ㅠ.ㅠ)  그리고 당황해 하는 나에게 달래는 듯한 말투로, 나는 피의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해자이며 참고인일 뿐이니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병 주고 약 주고...!  들었다 놨다...!)

  또한 나 말고도 전국적으로 20만명 이상의 피해자가 나와서 일일이 검찰청으로 불러 조사를 할 수 없으니, 전화로 몇 가지 묻고 녹음해서 재판 때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더구나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의심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실 때 계좌번호나 비밀번호는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공공기관도 그런 개인정보를 전화상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주도면밀함까지 보였다.


  나중에 사연을 들은 친구가 검찰청이니 경찰청이니 하는 말이 나왔을 때 전화를 끊어버렸어야지, 왜 바보처럼 그런 사기꾼과 말을 섞었느냐고 핀잔을 줬다.

  하지만 사기꾼스러운(?) 협박조가 아닌 적당히 예의차리며 위엄(!)도 느끼지는 말투를 들으니, 더구나 막연하게 검찰청이라고만 하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소속팀과 이름까지 밝히는 것을 들으니, 상대방 신분에 대한 신뢰도가 쭉~~~ 올라갔다. (네, 애초에 이런 효과를 노리고 한 거짓말이었겠지요... -.-;;)

  더구나 내가 아는 보이스피싱이란, 가족 누구를 납치했다며 돈을 요구하거나 검찰청이나 경찰청을 사칭해 미납된 벌금을 안 내면 형사처벌 받을 수 있다는 '협박성 사기' 이다.  그런데 이쪽은 오히려 졸지에 명의를 도용당하고 놀란 나를 안심(!)시키며 더 있을 지도 모르는 피해를 막아주겠다는 '배려(?)성 사기' 였기 때문에 깜빡 넘어갔다.  계좌번호나 비밀번호는 자신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니, 이토록 남을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착한 사기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그러나 속아넘어간 게 순식간이듯 사기를 눈치챈 것도 순식간이었다.

  소위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한 녹음이란 것을 시작하며 던진 질문이 뜬금없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 내가 전화를 막 받았을 때, 요즘 들어서 부쩍 휴대폰에 관심을 보이는 두 돌짜리 조카 녀석이 휴대폰을 뺏으려 해서 실랑이를 벌였더랬다.  그 소리를 들었던 문제의 김 뭐시기 수사관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 "그러니까 아이는 한 명 있는 겁니까, 아니면 더 있습니까?" 였다.  아무리 멘붕 상태라고는 해도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어?  이게 뭐지?' 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방이 내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법원에 '증거' 로 제출할 녹음이라면 이름이나 주소 같은 기본적인 사항부터 녹음한 후 다른 질문에 대한 답변도 녹음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처음으로 하는 질문이 웬 아이???


  한 번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의심이 줄줄이 사탕처럼 생겨났다.

  본인 입으로 어떤 공공기관도 계좌번호나 비밀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전화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돈과 직접 관련되지 않더라도 중요한 개인정보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계좌번호나 비밀번호만 아니면 전화상으로 다 말해도 되는 건가?

  그리고 원래 수사기관이 전화로 증거를 채취하나?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대면 조사하여 서류를 작성한 후 서명이나 지장을 받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수상해서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확인하려고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떼어서 봤다.

  그랬더니 전화번호 앞자리가 전주가 속한 전라도 쪽 지역번호(06X)가 아니라 휴대폰 전화번호(010)다. -0-;;  아, 진짜, 이 인간이...!!! 

  사기업 직원이 영업차 전화한 것도 아니고 수사관이 범죄수사차 전화했다면서, 그것도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녹음까지 한다면서, 웬 개인 휴대폰???  대포통장 피해자가 20만명이 넘는다면서, 설마 개인 휴대폰으로 그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전화할 생각이란 말인가...!  휴대폰 요금이야 무제한 통화요금으로 해결한다 하더라도 배터리와 메모리는 도대체 어쩔 건데...!


  산산조각 났던 정신줄을 다시 합쳐 뇌 속에 꾹국 박아넣은 후, 세상이 워낙 험하니 일단 전주지방검찰청에 전화해서 전화한 이의 신분을 확인한 후 다시 조사받겠다고 말했다.

  아, 그랬더니 이 사기꾼 아저씨 하는 말 좀 보소~~~  끝까지 수사관 느낌(!) 팍팍 나는 차분하고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은근히 협박을 한다.  나의 편의를 봐주려고 전화로 조사하려던 건데, 내가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돈 받고 내 명의의 계좌를 팔았다고 의심할 수 밖에 없으니 소환장을 발부하겠다는 것이다. -.-;;  당장은 내가 참고인 신분이라 2, 3분만 전화조사 받으면 끝낼 수 있지만, 자기네가 소환장을 발부하면 내가 전주까지 내려가 자세히 조사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래도 전주지방검찰청에 먼저 전화해보겠다고 했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그러면 소환장 발부하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들으니,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는 지인은 소환장도 아니고 무려 구속영장(!)씩이나 발부할 거라는 협박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가 사기꾼이란 걸 확신한 뒤라 아주 쿨~~ 하게 "뭐 그러든지 말든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젠장, 나도 그렇게 멋있게(!) 한 방 먹였어야 했는데...!  이 인간이 사기꾼이구나 하는 감을 잡고서도,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관록(-.-;;) 때문에 어쩌면 진짜 수사관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끝까지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이 망할 놈의 소심함... ㅠ.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주지방검찰청에 전화를 걸어 알아봤더니 역시나다.

  "조금 전에 어떤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는데요, 혹시 거기에 특수금융수사팀..." 까지만 말했는데, 전화받은 사람이 "그런 팀 없습니다. 사기입니다." 라고 잘라 말한다. -.-;;  질문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대답하는 걸 보니 그런 용건으로 전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김 뭐시기가 가짜 수사관일 뿐 특수금융수사팀이란 팀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팀 자체가 가공의 조직이라니, 참...

  이런 일은 남들에게도 경고해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카톡을 보냈다.  알고 보니 나 말고도 여러 명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한다.  누구는 인천지방검찰청을, 또 누구는 창원지방검찰청을 사칭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사기꾼들이 사칭한 게 죄다 지방검찰청인 걸 보니, 대검찰청이나 고등검찰청은 너무 높아서 사기꾼들도 감히 사칭 못 하나 보다. -.-;; 


  나날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정말 문제다.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개인정보 유출사건 관련 댓글을 보니 웃픈(!) 것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개인정보는 공공재로 봐야 한다, 나도 못 한 세계일주를 내 개인정보는 인터넷 타고 이미 했다 등등.  정말 그런 것 같다.  나만 해도 과거에 은행에, 포털에, 네이트온까지 아주 탈탈 털렸다.  그렇게 유출된 정보가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는데, 바로 이런 식으로 쓰이고 있었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 사기꾼님들아, 고맙소~~  -.-;;)

  그리고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드는 또 다른 걱정이 하나 있으니, 앞으로는 경찰청이나 검찰청에서 전화왔다고 하면 무조건 불신부터 하게 될 것 같다.  정말로 그런 기관에서 연락이 올 수도 있는데(가령 식구 중 누군가가 범죄에 휘말렸다든지, 사고를 당했다든지...), 아마 그런 연락도 사기꾼의 교활한 수작 정도로 여기며 전화를 끊어버릴 것 같다.  그럼 정말 곤란해 질 수도 있는데 어쩌나...  정말 보이스피싱 사기꾼들 너무 너무 너무 싫다...!!!


  자나깨나 보이스피싱 조심...!

  "00지방검찰청 특수금융수사팀 000 수사관(혹은 검사)입니다." 라는 전화를 조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