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아나스타샤(Anastasia) - 잉그리드 버그만, 율 브리너

Lesley 2017. 12. 9. 00:01

 

  오래간만에 추억의 영화 '아나스타샤' 를 봤다.

  다른 영화 리뷰와는 다르게 포스트 제목에 주연배우들 이름까지 표시한 이유는, 같은 제목의 작품이 여러 개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다.  아마 지금 아나스타샤란 제목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97년에 나온 애니메이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전인 1986년에 제작된 영화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소개할 아나스타샤는 1956년에 나온 영화로, 지금은 고인이 된 전설적인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과 율 브리너(Yul Brynner)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검색해 보면 제목이 '아나스타샤' 에서부터 '추상' 그리고 '프린세스 아나스타샤' 에 이르기까지 뒤죽박죽임.)

 

 

 

  ◎ 영화의 주인공 - 비운의 공주 아나스타샤

 

  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서 영화의 주인공 아나스타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이 영화 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 모두가, 실존인물인 러시아의 공주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Анастас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Anastasia Nikolaevna Romanova)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는 여러 차례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극적이다.

  아나스타샤는 1901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딸로 태어났다.  공주로 태어났으니 원래대로라면 평생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하필이면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던 20세기 초에 러시아 공주로 태어났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2세 일가(황제 부부, 아나스타샤를 포함한 4명의 공주,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인 황태자)는 볼셰비키군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8년,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감금되어 있던 곳의 지하실에서 총살당하고 암매장되었다.  가족과 함께 참혹한 죽음을 맞았을 때 아나스타샤는 겨우 17세였다.

 

  그런데 니콜라이 2세의 자녀 중 일부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전 유럽에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이런 소문이 생기게 된 원인은 황제 일가의 비극적인 죽음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기득권을 잃은 러시아의 보수파가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두 가지 모두가 원인이었을 수도 있고...

  더구나 니콜라이 2세가 혁명이 터지기 전에 자녀들을 러시아에서 탈출시키려고 유럽의 여러 은행에 거액의 재산을 숨겨두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니콜라이 2세 일가 중 누군가가 정말로 살아남았다면 바로 그 사람이 로마노프 왕조가 남긴 재산을 차지하게 될 상황이니, 두 가지 소문을 믿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욕망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황태자네 혹은 공주네 하고 나서는 사기꾼들이 나타났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이름을 올린 사기꾼만 20명은 될 정도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음.)

 

  그 사람들 대부분은 가짜라는 게 비교적 간단히 밝혀졌지만 안나 앤더슨(Anna Anderson)의 경우는 달랐다.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한 안나 앤더슨의 경우에는 여러 면에서 정말로 공주일 수도 있다는 정황이 보였다.  그래서 황실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대했던 인사들 사이에서 안나 앤더슨이 진짜 공주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벌어졌다.  자신을 로마노프 왕조의 공주로 인정해 달라는 안나 앤더슨의 주장은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지만, 이런 논란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안나 앤더슨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한 나라의 공주로 귀하게 살던 사람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온 가족이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고 혼자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여기저기 떠돌며 힘들게 살았다.... 라는 드라마틱한 사연은 많은 이의 관심과 동정심을 자아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법원의 판결 내용과 상관없이 안나 앤더슨의 주장이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안나 앤더슨 역시 사기꾼으로 드러났다.

  안나 앤더슨이 사망하고 한참 지난 1991년에야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의 유해는 없어서, 혹시 안나 앤더슨이 진짜 아나스타샤였던 게 아니냐는 추측이 강해졌는데...  2007년에 유해가 더 발견되었고 이듬해 그것들이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의 유해라는 게 밝혀졌다.  안나 앤더슨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사망해서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지만 이 영화가 제작되었던 1956년에는 아직 그런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서 아나스타샤의 생존 여부에 관한 논란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 생존설을 뼈대 삼아 살을 붙여 만든 이 영화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픽션이다.

  실존인물인 아나스타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만일 정말로 아나스타샤가 살아남았더라면?' 이라는 가정하에 상상력을 펼친 이야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영화를 근거로 아나스타샤가 1918년 후에도 살아있었다고 주장하거나, 거꾸로 아나스타샤는 분명히 죽은 걸로 확인되었으니 이 영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 거대한 사기극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감정

 

  영화 전반부는 부닌이 꾸민 사기극 속에서 아나스타샤와 부닌이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살해되고 10년째 되는 1928년의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한다.

  프랑스에는 러시아 혁명을 피해 망명한 러시아인(당연히 혁명을 반대하는 귀족 등 보수파들임.)이 많이 살고 있다.  그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절을 맞아 성당 주위로 몰려들어 부활절 행사를 치르는 중이다.

  그 때 스테판이라는 남자가 성당 근처의 상점에 들렸다가, 한 여자가 그 상점에 진열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친구 부닌(율 브리너)에게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보낸다.  부닌과 스테판은 문제의 여자 안나 코레프(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너무나 지치고 굶주리고 절망에 빠진 듯한 안나 코레프는 황급히 자리를 피하더니 강물에 투신하려 하고, 다행히 부닌이 자살을 막는다.     

 

  이 와중에 러시아 망명객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백작 작위를 갖고 있는데다가 각하라고 불리우는 노인이 택시 운전사로 일하다가, 부닌에게 빨리 와달라는 말을 전해주는 심부름을 하고 스테판에게 수고비를 받는다.  혁명 전 러시아에서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갖고 있던 이들이, 이제 모든 것을 잃은 채 외국에서 근근히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러시아에서 장군이었던 부닌은 다르다.

  파리에서 고급 러시아식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닌은 다른 망명객들보다 한결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닌이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부닌이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부닌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작위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다가 혁명의 와중에 무기력하게 몰락해버린 다른 러시아 기득권층과는 다르다.  매우 현실적이고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혁명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도 재빨리 적응하여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교활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성격이라는 뜻도 됨.)

 

  그런데 부닌과 스테판이 평범한 빈민으로만 보이는 안나 코레프에게 관심을 보인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앞뒤 상황을 보면, 부닌과 스테판은 아나스타샤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이용해서 니콜라이 2세가 남겨두었다는 유산을 차지할 계획을 진작부터 세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나스타샤 역을 맡을 여자를 물색하다가, 노숙자 구호소에 있던 안나 코레프란 여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안나 코레프는 만일 아나스타샤가 정말로 죽지 않고 10년의 세월을 보냈다면 딱 저런 모습이 되었겠구나 싶을 정도로, 아나스타샤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물론 영화상의 설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잉그리드 버그만과 실제 아나스타샤 공주는 닮지 않았음.)  더구나 무슨 사정인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이며 가족도 친구도 없다.  사기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기에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데 안나 코레프가 구호소를 나가버려 그 행방을 찾던 중에, 스테판이 부활절 밤에 러시아인들이 모인 성당 주변에서 발견한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안나 코레프를 아나스타샤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실제로 부닌 일당은 자신들의 음모가 성공하도록 만전을 기하기 위해, 안나 코레프를 그냥 아나스타샤인 척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진.짜. 아나스타샤로 대한다.  물론 이 사람들의 태도는 진짜 공주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지만, 적어도 호칭만 놓고 보면 남들에게는 물론이고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도 안나 코레프라고 하지 않고 '전하' 니 '여대공 전하' 니 하고 부를 정도다. 

  특히 부닌은 아나스타샤의 외로움이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심정을 꿰뚫어본다.  그리고 그런 절박한 심리를 이용해 아나스타샤 스스로도 자신이 진짜 아나스타샤라고 믿게끔 세뇌하다시피 한다.  아나스타샤 역시 부닌 등에게 들은 온갖 정보(아나스타샤가 어려서 겪은 일, 황실 사람들의 신상정보, 황실의 예법 등)를 마치 정말로 자신이 겪어서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주입시키고 말한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던 부닌의 계획에 예상 못 한 변수가 생긴다.

  아나스타샤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부닌은 음모를 본격화하기 위한 밑밥 깔기에 나선다.  즉, 과거에 러시아 황실 주변에 있었던 이들을 불러모아 아나스타샤를 소개한다.  유럽 여러 나라로 망명한 러시아 지배층 사이에 진짜 아나스타샤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처음에는 부닌에게 지시받은대로 간단한 대답만 하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대본(!)에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닌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나스타샤가 한 말은 정말로 예전에 아나스타샤 공주가 했던 말이라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이번에 나타난 사람이야말로 진짜 공주다.' 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린 것은 잘 풀린 것이고, 이 일은 부닌에게나 아나스타샤에게나 파란을 일으킨다.

  부닌은 아나스타샤가 진짜 황실 사람이 아니라면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해내는 데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은 분노로 표현된다.

  한편 아나스타샤는 아나스타샤대로, 부닌이 자신을 아나스타샤 공주로 만들기 위해 강압적으로 훈련시키는 것과, 자신이 꼭두각시처럼 부닌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염증과 반감을 느끼던 차였다.  그런데 전에는 몰랐던 일들이 떠오르자 자신이 정말 공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화를 내는 부닌에게 그 나름대로 날카롭게 응수한다.

 

  부닌 :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잖아요?  당신이 모든 걸 망쳐놓을 뻔했어요.  내가 니니(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기억해내서 언급했던 이름)에 대해 당신에게 언급한 적이 있던가요?"

  아나스타샤 : "어쩌면요.  나도 모르겠어요."
  부닌 : "분명히 내가 언급했을 거에요, 아니면 페트로빈(부닌 일당 중 한 명)이 했을 수도 있고.  혹은 당신이 우리 이야기를 엿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중요한 건..."

  아나스타샤 : "당신이 화내는 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내가 당신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그 후로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아나스타샤가 되기 위한 훈련이 계속되는데, 그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런 변화가 피아노 연습 장면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아나스타샤 공주가 어려서 피아노 교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아나스타샤도 피아노 연습을 하게 된다.  그런데 피아노 치는 걸 무척 지겨워한다.  그러자 부닌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과거에 아나스타샤 공주도 피아노 및 기타 교습을 받는 걸 싫어했다고 설명한다. (아나스타샤 공주도 아나스타샤처럼 피아노 치는 걸 싫어했다는 점은, 아나스타샤가 진짜 아나스타샤 공주일 수도 있다는 복선이 됨.)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부닌의 설명보다는 부닌의 기타 연주에 더 관심을 보인다.  감미로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모처럼 미소를 짓는다.  기타 연주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나스타샤를, 부닌이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런 부닌에게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 실린 눈빛을 보낸다. (이 장면에서 변하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눈빛을 보면, 잉그리드 버그만이 왜 명배우라는 말을 듣는지 알 수 있음.)

 

 

아나스타샤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부닌.

부닌을 매료된 듯한 눈빛으로 보는 아나스타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정신적인 압박감을 못 이기고 마침내 폭발한다.

  그 동안 부닌의 혹독한 훈련으로 심신이 지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 공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공주인 척 해야 하는 부담감까지 뒤범벅이 된다.  거기에, 러시아 황실을 잘 아는 사람에게 사기꾼 취급을 받고 분노하기까지 한다.

 

  흥분한 아나스타샤는 무작정 떠나겠다며 짐을 싸다가 부닌과 처음으로 심한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부닌은 아나스타샤를 달랠 겸 벽에 부딪친 자기 계획에 돌파구를 뚫을 겸, 아나스타샤를 태후(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이며 아나스타샤 공주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사람)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한다.  당장 떠나겠다던 아나스타샤는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태도를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부닌이 '당신을 위해서' 태후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다시 흥분한다.  부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일 뿐 결코 남을 위해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며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부닌 : (아나스타샤의 비난에 잠시 흥분하지만, 곧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소처럼 침착한 태도로 설득하는) "당신 말이 맞다고 칩시다.  사실은 정말로 맞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나와 같이 코펜하겐으로 가야 하는 거에요.  고귀한 의도로 움직이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말아요.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까지 좋은 건 아니니까.  결국에는 그런 좋은 사람이 당신을 실망시키게 될 거에요.  우리의 의도가 다르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같아요.  오직 그것만이 중요해요.  자, 함께 코펜하겐으로 가겠어요?"
  아나스타샤 : (현실적으로 부닌의 말이 맞다는 걸 알기에 갑자기 맥이 풀린 듯한 태도로) "어젯밤에 꿈을 꿨어요."
  부닌 : (평소와 다르게 아나스타샤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말투로) " 네, 당신 아버지가 서커스 연기 주임이라는 꿈이지요." (이전에 아나스타샤가 악몽을 꾸고 울부짖는 소동을 피웠는데, 그 때 꿈 속에서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서커스 연기 주임으로 나왔다고 말했음.)
  아나스타샤 : "아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인형 제작자로 나왔어요.  어머니는 인형 얼굴에 색을 칠하는 조수였고요.  나 같은 꼭두각시에게 어울리는 조상이죠."  (쌌던 짐을 다시 풀면서 체념하는 말투로 혼잣말 하듯이)  "내가 코펜하겐에 갈 거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어요.  당신은 항상 알고 있죠."

  부닌 : (아무 말 없이 다가서더니 손을 내미는)

  아나스타샤 : (코펜하겐으로 가는 걸 확실히 약속하자는 뜻으로 생각했는지 순순히 손을 내미는)

  부닌 : (군인답게 절제된 태도지만, 동시에 격정이 묻어나오는 태도로 아나스타샤의 손등에 키스하는)

  아나스타샤 : (놀라는 표정으로 부닌을 바라보는)

 

  이 장면은 두 사람 사이의 큰 전환점이 되는 부분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감정이 어디까지나 '이해관계가 얽힌 사기극' 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아나스타샤의 정체성 혼란과,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아나스타샤의 절박감도 나타난다.  또한, 항상 차갑고 사무적인 태도로 아나스타샤를 대했던 부닌이 처음으로 아나스타샤에게 자기 감정을 격정적이면서도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내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충돌한 후 오히려 감정적으로 밀착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태후를 만나기 위해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난다.

  태후는 아들인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된 후 친정인 덴마크로 돌아가 지내는 중이다. (태후는 원래 덴마크 공주임.)  태후는 살아남은 황실 사람 중 가장 서열이 높으며, 아나스타샤 공주의 친할머니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아나스타샤에 대해 뭐라고 하든 간에, 태후가 아나스타샤를 진짜 공주라고 인정한다면 모든 일이 깨끗이 해결될 것이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가벼운 밀당(!)을 벌이기도 한다.

  부닌이 아나스타샤의 덴마크 입국을 위해 마련한 가짜 여권 속 이름이 화제에 오른다.  공교롭게도 이 포스트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사기꾼의 이름인 '안나 앤더슨' 이다. (아마 감독이나 각본가가 안나 앤더슨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

  아나스타샤가 왜 하필이면 '안나 앤더슨' 이란 이름을 골랐는지 질문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평범한 연인들처럼 상대방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상대방에게 과거의 연애경험을 숨기고 싶어하는 마음을, 슬쩍 드러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모처럼 형성된 달달한 분위기 속에서도 불안정한 아나스타샤의 입장이 드러나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부닌 : "그 여권을 구하느라 고생했어요."
  아나스타샤 : "왜 하필 앤더슨이죠?"
  부닌 : "당신에게 가명이 필요한데, 한때 나와 관련이 있던..."
  아나스타샤 : (반은 장난하듯 반은 탐색하듯) "여자하고요?"
  부닌 : (약간 당황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음, 가명으로 쓰기에 무난한 이름이니까요."
  아나스타샤 :
(자조적인 말투로) "A. 앤더슨 부인이라...  나의 법적인 현실이 나의 가장 현실적이지 못 한 부분이로
군요."  (갑자기 말투와 화제를 확 바꾸어) "그 다른 앤더슨 부인은 어떻게 됐어요?"
  부닌 : "아, 그다지 중요한 일은 없었어요."
  아나스타샤 : (놀리듯이) "그저 그 여자에게 싫증난 것 뿐인가요?"
  부닌 : (쓴웃음을 지으며 슬쩍 화제를 바꾸는) "이 비자는 14일 동안만 유효해요."
  아나스타샤 : "2주일이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법적으로 인정받는데요.   2주일로는 모자랄 것 같은데요."
  부닌 : "충분할 거예요."

 

 

 

  ◎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선택한 러시아 공주

 

  후반부에서는 새로운 인물로 태후가 등장한다.

  후반부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세 사람의 주인공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태후의 캐릭터가 인상적이고 비중도 높다.  또한 대부분의 영화와는 다르게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두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고, 조연이라 할 수 있는 태후가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

 

  태후(헬렌 헤이스)는 아나스타샤를 만나는 걸 거절한다.

  부닌과 아나스타샤가 코펜하겐으로 오기 전부터 부닌에게서 아나스타샤를 만나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전부 거절했다.  부닌이나 아나스타샤의 대화 내용으로 보면, 태후는 원래 완고한 성격이라 러시아 혁명 전에도 다른 가족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 부부와 손주들이 비참하게 죽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유산을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한 사기꾼을 몇 번이나 만났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이다. 

 

  태후가 오페라 관람을 나온 틈을 타서, 부닌이 태후에게 몰래 접근한다.

  부닌은 아나스타샤를 만나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지만 태후는 요지부동이다.  태후의 말에는 슬픔과 절망에서 나오는 냉소가 짙게 묻어나온다.  "부닌, 나는 이미 아나스타샤 뿐 아니라 타치아나(아나스타샤 공주의 둘째 언니)는 두 명이나, 거기에 알렉세이(아나스타샤 공주의 남동생이자 황태자)와 마리아(아나스타샤 공주의 셋째 언니)까지 만났다네.  자네가 데려온 손님은 만나지 않을 생각이네.  부질없는 희망을 갖고 사는 것 만큼이나 가짜 손주들을 만나는 것에도 지쳤으니까.  나는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내 남편, 내 가족, 내 지위, 내 나라...  이제 내게 남은 건 추억 밖에 없네.  그저 추억에 잠겨 혼자 지내고 싶을 뿐이라네." 

 

  그러나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태후도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는 못 하고 아나스타샤를 찾아가 만난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아나스타샤를 찾아왔으면서도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의심과 냉소로 철저히 무장한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모습이 많이 변했느냐고 묻자, 태후는 아나스타샤도 결국 사기꾼일 것이라는 뜻을 담아 빈정대는 말을 한다.

  그런데 빈정거릴 때의 표정이나 말투를 보면 한 조각 비웃음도 없이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그래서 태후의 메마른 심리가 더욱 잘 드러난다.  "나는 되살아난 로마노프 황실 사람들에게서 만나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지.  총살형을 집행한 군인들 솜씨가 그렇게 형편없는데도 혁명이 성공하다니 놀라운 일이야."

 

 

부닌과 아나스타샤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태후.

 

 

  결국 아나스타샤는 태후의 진짜 손녀로 드러난다.

  먼저 아나스타샤는 황실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몇 가지 한다.  그러나 태후는 이번에는 절대로 속지 않겠노라 다짐했기에, 아나스타샤의 말에 놀라면서도 여전히 아나스타샤를 거부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긴장할 때면 마른 기침을 연달아 하는 아나스타샤의 어린 시절 버릇이 나타나자 아나스타샤를 손녀로 인정한다.

 

  그런데 할머니와 손녀가 10년 만에 상봉하는 장면 뒤로 묘한 장면이 나온다.

  태후는 아나스타샤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말한다.  "하지만 제발, 만일 진짜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면 절대로 나에게 말하지 말렴." 

  얼핏 생각하면, 드디어 손녀를 찾았지만 지금까지 여러 사기꾼에게 속으며 절망과 실망을 겪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진짜 손녀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 영화 속 아나스타샤가 일단은 진짜 아나스타샤 공주로 보이지만 어쩌면 역시 가짜일 수 있다는, 이른바 '열린 결말' 을 위한 복선 같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아나스타샤를 공식적으로 공주로 소개하기 위한 연회가 열리게 된다.

  그런데 연회에 앞서 먼저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나 코레프 시절의 아나스타샤를 아는 기자가 나타나 아나스타샤가 가짜일 수 있다는 여러 정황을 댄다.  그러자 언론을 대하는 데 익숙하지 못 한 아나스타샤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다.  일이 꼬이는 듯하자 부닌이 서둘러 기자회견을 끝내버리고 기자 및 외부인이 연회장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버린다.

 

  사실은 태후를 만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아나스타샤와 부닌은 갈등을 겪었다.

  부닌은 태후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아나스타샤를 폴 대공에게 접근시켰다.  폴은 태후의 조카인데,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는 태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와는 육촌 사이로, 아나스타샤가 16살에 사교계에 데뷔했을 때 댄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또한 첫사랑이기도 했던 듯하다.  만일 혁명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아나스타샤와 폴은 결혼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 아나스타사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부닌이, 어떻게든 아나스타샤를 공주로 인정받게 해서 재산을 상속받아야 한다는 목표에만 집중하느라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러자 아나스타샤는 마치 그런 부닌에게 보란 듯이 필요 이상으로 폴에게 다가선다.  부닌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 알고 있고 자신 또한 부닌에게 마음이 가 있다.  그런데 정작 부닌이 자신에게 폴을 유혹하라고 지시하자 반발심을 느낀 것이다.

 

 

처음으로 오래 떨어져있다가 만난 두 사람.

(그 와중에 사이좋게 같이 담배를 피우는... ^^;;)

연회에서 함께 춤추는 아나스타샤와 폴.

 

 

  두 사람은 기자들을 내보낸 후 연회 시작 전에 모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부닌은 아나스타샤가 태후에게 손녀로 인정받은 후로 아나스타샤를 만나지 못 했다. 그래서 자신을 경계하는 태후나 아나스타샤와 곧 약혼할 것으로 보이는 폴,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자신들의 만남을 방해한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부닌과의 만남을 거절한 것은 아나스타샤의 뜻이었다.  부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자신에게 다가서려 하지는 않고 그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도구로만 대하는 듯하자, 부닌을 포기하고 폴과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듯하다.

  부닌은 더 늦기 전에 마음을 고백하려 하는데, 현실적이며 야심만만하고 출세지향적인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도 상대방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것에도 서툴다.  결국 마음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돈과 지위에 눈이 멀었다는 식으로 아나스타샤를 비난한다.  아나스타샤는 아나스타샤대로, 자신을 폴에게 떠밀었던 사람이 부닌 아니냐며 이제와서 부닌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연회에서 아나스타샤와 폴이 춤추는 걸 바라보던 부닌이 태후에게 간다.

  태후는 부닌이 갑자기 떠나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묻는다.  바로 이 장면에서 부닌과 태후 사이의 케미(!)가 제대로 터진다. (태후야말로 이 영화 후반부의 진정한 주인공임...!)

  사실 두 사람은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태후가 처음 등장해서 부닌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태후는 부닌이 과거에 황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으려고 애썼던 것과 지금 로마노프 왕조의 이름을 사업에 이용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  그리고 부닌은 태후를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험난한 장벽 정도로만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데 이 때 두 사람은 처음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두 사람 모두 아나스타샤를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인간적으로 통하게  부닌과 태후.

 

 

  부닌은 군인 출신답게 절도있고 당당한 태도로 아나스타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다.

  다만, 아나스타샤를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눈치 없는 사람이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에둘러서 말한다.  하지만 태후는 부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태후는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다른 나라의 황후가 되었다가 마침내 태후가 되어서 맞은 혁명으로 모든 것을 다 잃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점의 삶과 나락의 삶을 모두 경험한 적 있는 태후는, 비록 고집불통이지만 세상사나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태후 : (부닌의 뜻을 알아채고 부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에 반은 놀라워하고 반은 장난하듯이)  "황실에서 자네에게 작위를 수여하지 않은 게 전부가 아니었군.  자네를 외교관으로 임명하지 않은 것도 실수였어.  하고 싶은 말을 이처럼 돌려서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일세.  게다가 지금도 직접 말하지는 않는군.  그토록 원하면서 그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

  부닌 : (아무 말 없이 태후를 응시하는)

  태후 : (평소의 엄격한 태도로 돌아와서)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자네는 무엇을 요청하고 싶은 건가?  왜 나에게 말하는 건가?  어째서 그 아이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 건가?"

  부닌 : (전혀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때때로 저에게는 간단한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항상 간단한 일이 저에게는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녀에게 말해봤지만, 폐하,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태후 : (작게 소리내 웃으며) "자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악당은 아니었군.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바보로군."

 

  비록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태후는 하나 남은 소중한 손녀의 앞날에 대해 무척 고민했던 듯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손녀를 10년 만에 만난 것은 너무나 기쁘다.  하지만 이제와서 아나스타샤를 공주로 인정한다 한들, 이미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라 없는 공주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공주라는 과거의 신분에 발목이 잡혀, 아나스타샤가 온갖 정치적인 풍파에 휘말려 위험해질 수 있다.

 

  태후는 자신이 속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기 가족을 죽인 혁명세력을 증오하지만, 현실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연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 태후의 시녀인 리벤바움 남작 부인은 화려한 차림새의 귀족들이 모인 연회장을 내려다보며 모든 게 옛날과 똑같다고 흥분했다.  마치 무너진 제정 러시아가 아나스타샤의 귀환으로 부활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아마 연회에 참석한 러시아의 옛 귀족 상당수가 리벤바움과 비슷하게 마음에서 들뜨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아나스타샤를 새로운 권력의 축으로 보고, 남들보다 그 곁에 먼저 다가서야 잃어버린 지위와 재산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기며 앞다투어 달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태후는 예전처럼 호화로운 연회를 연다 한들, 그것은 그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하며 흉내내는 것 밖에 안 된다는 걸 직시한다.  그래서 호들갑 떠는 리벤바움에게 "그래, 좀약 냄새가 나는 것 같군." 이라고 냉소적으로 대답한다.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며 이미 멸망한 왕조의 그림자에 매달리려고 몰려든 옛날 귀족들은, 좀약 덕분에 썩어문드러지지는 않고 겨우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철지난 옷과 같은 신세일 뿐이다.   

 

  태후는 아나스타샤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생각하고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태후는 부닌에게 자신의 결정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은 통한다.  태후는 부닌에게 그 방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부닌도 이심전심으로 알겠다는 대답만 한다.

 

 

비록 자신은 과거에 머물기로 했지만

손녀는 미래로 떠나보내기로 결심한 태후. 

 

 

  태후는 아나스타샤와 단 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다른 사람들을 물리친다. 

  처음에는 심상한 대화 몇 마디 주고받더니, 폴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돌직구(!)로 던져서 아나스타샤를 당황하게 한다.  그리고 폴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외로움에 지쳐 소속감과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 결혼하려 한다는 손녀에게, 부닌과 함께 떠나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으라 충고한다.  물론, 이번에도 부닌과 떠나라는 말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할머니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이 때 태후가 하는 말에는, 손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 뿐 아니라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지혜도 함께 묻어나온다.

  "리벤바움은 연회장의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다고 말하더구나.  리벤바움은 어리석어.  세상은 변하고 있단다, 말렌카야.(가족 사이에서 통했던 아나스타샤의 애칭)  그리고 우리도 세상에 맞춰 변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과거와 함께 시들게 될 테니까.  나는 과거의 사람이지만 그게 좋단다.  과거는 달콤하고 익숙하니까.  현재는 차갑고 낯설어.  그리고 미래는... 다행히도 내가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너는 미래를 생각해야 한단다.  미래는 너의 것이니까."

  태후는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으로서 제정이 무너진 게 가슴 아프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미력한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인간에게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여 새로운 삶을 찾거나 혹은 과거의 영광과 함께 시들어 가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앞날이 창창한 손녀는 미래로 떠나보내고 자신은 과거와 함께 역사 속에 묻히기로 결심한다. 

 

 

서로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지만

이것이 영원한 이별임을 아는 할머니와 손녀.

 

 

  결국 아나스타샤는 미래의 삶을 위해 떠나고, 태후는 이미 크게 벌어진 판의 뒷수습에 나선다.

  부닌과 함께 있던 리벤바움이 태후의 뜻대로 아나스타샤와 부닌을 떠나보낸 후 돌아와 보고한다.  그러자 태후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잘 됐군.  그럼 우리는 이 연극을 계속해야겠지.  광대들을 안으로 들이게." 

  몰려들어온 연회 관계자들이, 태후가 연회에 등장하는 장면을 장엄하게 연출하기 위해 요란하게 마지막 점검에 나선다.  그 때 아나스타샤와 부닌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당연히 모두가 당황해한다. (특히 부닌과 함께 음모를 꾸몄던 스테판은 부닌에게 완전히 뒤통수 맞은...)

 

  이 와중에 폴이 보이는 반응이 인상적이다.

  곧 자신의 약혼녀로 발표될 예정이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도망쳤다고 하면, 보통의 남자라면 분노하거나 경악할 것이다.  그런데 폴은 '역시 아나스타샤는 다른 사람들이 수근거리던대로 가짜였던 것이냐?' 정도의 미적지근한 놀라움만 보일 뿐이다.

  결국 폴은 나스타샤가 가짜일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태후가 아나스타샤를 공주로 인정하기만 하면 그 진위와 상관없이 아나스타샤가 상속녀가 될 것을 보고 결혼하려 했던 것이다.  어차피 사적인 감정과 상관없이 하려던 결혼이었기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도망을 쳐도 상처입을 일도 없다. 

 

 

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태후.

 

 

  연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뭐라고 말하느냐며 울상 짓는 스테판에게, 태후는 자신이 말하겠다고 한다.

  태후는 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그 뒤를 리벤바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따른다.  폴이 걱정스러운 듯 태후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폴 : "죄송합니다만, 폐하, 뭐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태후 : "뭐라고 말할 거냐고?  이렇게 말할 생각이란다.  '연극은 끝났소.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오.'" 

 

  태후는 손녀를 떠나보낸 슬픔을 누르고 의연한 태도로 나선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국가가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태후가 연회장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자 좀약(!)에 찌든 옛날 러시아 귀족들이 정중하고도 우아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태후를 맞는다.

  그렇게 한 편의 거대한 연극은 끝을 맺는다.  그 연극이 사기극이었는지, 연애극이었는지, 혹은 한 사람의 자아찾기였는지는, 관객이 판단할 몫인 듯하다.

 

 

 

  ◎ 기타

 

  1.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옥의 티가 있다. 

 

  태후가 계단을 내려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옛날 영화 특유의 거대한 'THE END' 라는 글자가 화면 한가운데 시뻘겋게 나타난다.

  현대의 뛰어난 컴퓨터 기술로 이 시뻘건 글자 좀 어떻게 지울 수 없을까...  영화가 주는 감동의 여운을 마지막까지 즐기고 싶은데, 그 여운이 그만 중간에 뚝 잘렸다. ㅠ.ㅠ

 

  2. 이 영화는 미국에서 제작되었지만, 공교롭게도 주역을 맡은 배우들은 미국 출신이 아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웨덴 출신이고, 율 브리너는 이 영화 속 부닌처럼 러시아 출신이다.

  특히 율 브리너 같은 경우에는 조상 중에 몽골인과 집시도 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중학교 때만 해도 율 브리너가 러시아 출신에 여러 인종의 혼혈이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이름이나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을 봐서는 분명히 서양인 같은데 동양인 느낌도 나는 특이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3. 이 영화의 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은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넘어가는 시기의 여배우 중 내가 최고의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또래 사람들은 그 시대 배우 중 최고의 미인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서 주역을 맡은 '비비안 리' 를 꼽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 눈에는 비비안 리가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분명히 미인이기는 하지만 너무 날카롭게 생겨서(사나운 들고양이 스타일의 얼굴이랄까...) 거부감이 든다.

 

  그에 비해 잉그리드 버그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에, 청초하고 신비한 분위기까지 더해진 미인이다.  정작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신의 코가 너무 높아서 얼굴의 전체적인 균형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 데뷔할 때 코를 성형수술로 낮추라는 요구는 단호히 물리쳤다고 함.), 그 얼굴에 약점이 아예 없으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잉그리드 버그만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흑백영화로 봤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컬러영화와는 다르게 얼굴에 음영이 뚜렷이 생기며 미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잉그리드 버그만을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카사블랑카' 는 현대에 들어 컬러영화로 변환한 버전으로 봐서는 안 된다.  옛날 흑백영화 버전 그대로 봐야 잉그리드 버그만의 미모를 100% 느낄 수 있다.

 

  4. 잉그리드 버그만이 몇 년만에 할리우드로 돌아와 처음으로 찍은 영화가 바로 '아나스타샤' 였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때 할리우드에서 추방(!)된 적이 있다.

  남편과 딸을 두고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열애에 빠져 동거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요즘의 할리우드를 보면 불륜이나 이혼은 다반사라서 오히려 한 배우자와 평생 가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특이하게 보일 정도다.  언론이나 사람들도 그냥 그러려니 혹은 또 시작했구나 정도의 반응만 보일 뿐이고.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미국은 지금과는 다르게 무척 보수적이었다.  언론과 대중이 비난을 퍼붓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 상원에서까지 잉그리드 버그만을 성토할 지경이었다. -0-;;  그래서 몇 년에 걸쳐 할리우드에는 발도 못 붙이고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만 활동했다.

 

  그러다가 '아나스타샤' 에서 주연을 맡아 화려하게 할리우드로 컴백하게 된다.

  제작사 측에서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하면 영화 흥행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감독인 아나톨리 리트바크(참고로 이 사람도 율 브리너처럼 러시아 출신임.)가 아나스타샤 공주 역을 맡을 배우로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가장 적합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감독이 상당한 안목을 지닌 사람이다.  이 영화가 흥행과 작품성 양쪽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번째로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 번도 타기 힘든 아카데미상을 두 번이나 탄 것으로도 기뻤겠지만, 어쩌면 자신을 추방했던 할리우드에 한방 제대로 먹인 게 더 기뻤을 지도 모른다.

 

  잉그리드 버그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In Her Own Words)' 를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어린 시절 사진과 일기, 영화 경력, 개인적으로 찍은 홈비디오, 결혼과 이혼, 자녀 관계 등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로 역시 영화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 와 후배 배우인 '시고니 위버' 등이 나와 자신들의 눈으로 본 잉그리드 버그만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5. 율 브리너가 이 영화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 삭발 상태로 출연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중학교 때 같은 반 아이에게서 들었다.

  이 영화를 중학생 때 TV를 통해 처음 봤는데, 지금처럼 영화를 볼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지 못 해서 TV에서 방영하는 영화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같은 반에도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이 많아서 다음 날 학교에서 이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기 언니인지 오빠인지에게서 들었다면서 율 브리너의 헤어 스타일에 얽힌 비화(?)를 털어놓았다.  율 브리너가 잘 생겼다며 여자들이 하도 많이 쫓아다니자, 귀찮아진(!) 율 브리너가 자기 인기를 줄여볼 생각으로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삭발한 모습이 더욱 멋있어서 오히려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그 때는 나도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그렇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직 순진했던 나이라서 곧이 곧대로 믿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런 낭설이 그럴 듯하게 들릴 정도로 이 영화 속 율 브리너의 모습은 무척 매력적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다.

  율 브리너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영화 '왕과 나' 이다.  그 영화에서 태국의 국왕 역할을 맡았는데 삭발 모습으로 출연했다.  그래서 율 브리너가 인기 관리 차원에서 '왕과 나' 속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계속해서 삭발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60세가 넘어서까지도 뮤지컬 '왕과 나' 에 꾸준히 출연했으니 어차피 삭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외모에서 머리카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도, 머리카락 없이도 매력을 발산하는 배우들이 있다.

  우리나라 사극 '태조 왕건' 에서 궁예 역을 맡았던 '김영철' 이라든지, SF 드라마 '스타트렉 - 넥스트 제너레이션' 과 영화 '엑스맨' 시리즈로 유명한 '패트릭 스튜어트' 라든지...  (김영철은 승려 출신인 역할을 맡아 머리를 일부러 삭발했고, 패트릭 스튜어트는 자연적인 대머리라는 차이가 있음.) 

  하지만 지금까지 율 브리너 같은 강렬한 인상의 배우는 본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싶다.  혹시 나처럼 이 영화 속 율 브리너의 카리스마에 반한 사람이라면, 한때 크리스마스 때마다 주구장창(!) TV 특선영화로 방영해줬던 '십계' 를 꼭 보기를...  주인공이며 선한 인물 모세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 보다, 오히려 악당이며 권력욕과 소유욕과 오만함에 찌든 람세스 역을 맡은 율 브리너가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