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와 '에어 서플라이' 에 얽힌 추억

Lesley 2017. 8. 7. 00:01

 

  오랫동안 잊고 있던 굴욕(?)적인 사건들을 우연한 일로 떠올리게 되었다.

  얼마 전 햇볕이 가장 기승떠는 시간에 거리를 걷다가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잠시 패스트푸드점에 들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얼음 동동 뜬 음료수를 홀짝거리다가 무심코 옆자리를 봤더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사람들의 탁자 위에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DVD가 있었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 는 1992년도 작품이다.

  같은 1990년대 영화인 '터미네이터 2' 나 '타이타닉' 처럼 어마어마한 관객몰이를 한 흥행작은 아니다.  하지만 잔잔하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영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별 감흥을 느끼지 못 했다.  고등학교 때 TV를 통해서 처음 본 이 영화는 너무 밋밋하기만 했다.  그렇게 이 수작이 내 기억 속에서는 그냥 그런 영화로 남을 뻔했는데...


  대학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이 영화의 원작소설을 발견해서 읽었다.

  소설에는 더 많은 이들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큰 줄기만 놓고 보면 소설이나 영화나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영화는 시간 관계상 소설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지는 못 한다.  게다가 1920년대의 두 여자 이야기와 1980년대의 두 여자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되어서, 그렇잖아도 한정된 시간이 더 부족해진다.  그러니 주인공 격인 인물들 말고는 과감히 생략할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조연급 인물들의 사연을 통해 표현되는 1920년대 미국의 여러 모순이나 갈등도 생략되었다.  이 소설의 묘미가 인종갈등, 남녀차별, 가정폭력 등 심각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분위기가 어둡거나 칙칙하지 않고 오히려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다는 점이다...! (살인 및 시체유기가 이 정도로 코믹하고 통쾌하게 그려진 소설을 본 적이 없음...!)  그런데 그런 부분이 영화상에서는 거의 다 날아가버렸으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보다 보수적인 1990년대에 제작된 영화라 그런 건지 소설 속 동성애 요소가 영화에서는 상당히 순화(?)되어 나온다.  소설에서는 1920년대의 두 주인공이 동성애 관계라는 게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굳건하고 진실된 우정 정도로 묘사된다. (가요 '사랑과 우정 사이' 의 가사처럼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정도로 보인다고 할까...)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혹시라도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를 영화로 보고서 별 느낌을 못 받거나 아예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꼭 원작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영화만으로도 감동을 느낀 사람이라면 더욱 더 원작소설을 읽어봐야 한다.  틀림없이 없던 감동을 느끼거나, 있는 감동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강추...!)

  그리고 위에서 원작소설에는 동성애 부분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뜻이다.  소설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그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분위기나 문맥상 '이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구나.' 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하게 표현된다.  그러니 동성애 관련 작품을 싫어하는 독자라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큰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상상력을 죽여가며(!) 행간의 의미를 무시하고 읽는다면, 즉 겉으로 드러난 내용만 받아들인다면, 주인공들을 플라토닉한 관계로 볼 여지도 있다.

  소설도 1990년대에 출간되어서 이미 절판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봤더니 2011년에 새로 나와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다만, 2011년도판 소설의 제목은 '라이드 그린 토마토' 가 아니라 '라이드 그린 토마토' 다. ('계란 후라이' 와 '계란 프라이' 의 관계와 비슷한... ^^;;)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로 백날 검색해봐야 절판 또는 없음으로 나올 뿐이니 주의하기를...


  자, 삼천포를 지나 남해로 뛰쳐나가던 이야기를 붙잡아서 원래의 길로 되돌려놓자면...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원작소설을 읽고서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을 했다.  소설을 보고 영화 속에서 생략된 부분을 알게 된 뒤라,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디오 대여점에 갔는데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가 눈에 띄지 않았다.  비디오 테이프 진열장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훑고 있는 나를 보고 직원이 다가왔다.


  직원 : "손님, 어떤 영화 찾으세요?"

  나 : (아주 당연하게) "후라이드 그린 포테이토요."

  직원 : (-.-;; ← 요런 표정을 짓는)

  나 : "?"

  직원 : (무표정한 얼굴로)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찾으시는 거죠?"

  나 : "네?"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에야 사태파악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아, 네..."


  그런데 사실은 이 '후라이드 그린 포테이토' 사건(!)이 고등학교 때 있었던 사건의 2탄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미국 출신이었던가 호주 출신이었던가, 하여튼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 라고 하는 남성 2인조 록 밴드가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에어 서플라이가 부른 'without you' 는 애절한 가사 만큼이나 애절한 보컬의 목소리 덕분에 히트쳤다.

  그래서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에어 서플라이의 카세트 테이프를 사주기로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딸린 음반매장으로 사러 갔는데, 그 때도 테이프가 빼곡히 들어찬 진열장 앞에서 얼른 물건을 못 찾고 두리번거리다가 직원의 레이다망에 걸려들었다.


  직원 : "손님, 뭐 찾으세요?"

  나 : (역시 아주 당연하게) "에어 플레인이요."

  직원 : "네?"

  나 : (자신이 실수한 줄 전혀 모르고 태연하게) "에어 플레인 테이프요.  without you 들어간 걸로 주세요."

  직원 : (씩 웃으며 진열장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뽑아내며) "에어 서플라이겠죠.  에어 플레인은 가수가 아니라 비행기죠."

  나 : (마음 속으로) '인생무상... 삶의 허무...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ㅠ.ㅠ'


  위의 두 가지 일로 확인된 나란 사람의 약점을 정리하자면...

  첫째, 나의 영어 울렁증은 그저 외국인 앞에서 쉬운 영어도 제대로 못 하고 버벅거리는 걸 넘어서, 기본적인 단어도 헷갈리는 수준의 중증이라는 것이다.

  둘째, 왜 나는 항상 혼자 힘으로 물건을 못 찾는가...!  내 힘으로 찾았으면 직원들과 말 섞을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굴욕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ㅠ.ㅠ



  뱀발


  그런데 쓰다 보니 다른 일도 생각나는데, 아무래도 내 헷갈림증(?)이 영어 쪽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닌 듯하다.

  가령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는 속담을 '원수는 외다리나무에서 만난다' 라고 말해서 듣는 사람 빵 터지게 한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학창시절 국어 시험 정답이 '명약관화' 란 사자성어였는데 '명약화관' 이라고 써서 틀린 적도 있다.  음...  영어나 국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언어능력 자체에 살짝쿵~~ 문제가 있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