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포스트에 이어 철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겠다. ☞ 은하철도 999(TV판) 2 - 철이(호시노 테츠로) 上(http://blog.daum.net/jha7791/15791394)
◎ 라면 먹방
은하철도 999 팬들이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철이의 라면 먹방이다...!
TV판에는 안 나오지만 원작 만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중에 "라면은 인류의 영원한 친구죠." 라는 게 있다. 라면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공감 100%인 대사다. (물론 내가 즐겨 먹는 인스턴트 라면과 철이가 먹는 라면은 다르지만... ^^;;)
은하철도 999에서는 두 종류의 라면이 나온다. 진짜 라면과 합성라면이다. 처음에는 합성라면이란 게 인스턴트 라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은하철도 999 TV판을 보고 나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인스턴트 라면은 따로 있고, 합성라면이란 건 물자가 귀한 상황에서 원래의 라면과 비슷한 맛을 내는 유사품이나 짝퉁(-.-;;)인 것 같다
9회 및 10회 '트레이더 분기점' 과 60회 및 61회 '4평 반 행성의 환상(내일의 별)' 에서는 철이의 각별한 라면 사랑이 묘사된다.
물론 철이는 음식이라면 전부 좋아한다. 하지만 라면 앞에서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한다. 은하철도 999에 라면 관련 에피소드가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가에 대해서는, 원작자 마츠모토 레이지가 어떤 라면 회사의 대주주여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 ^^
(위) 합성라면을 먹으면서도 너무 기뻐하는 철이.
(아래) 모처럼 진짜 라면을 먹게 되자 신이 나서 세 그릇을 연달아 먹는 철이.
그런데 라면이 그저 맛있는 음식이 아닌, 인간이었던 시절을 그리워 하는 상징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90회 및 91회 '안드로메다의 유키온나(눈의 여왕)' 이 그런 경우다.
여기에서는 현실 속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지 못 하고, 애인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기계인간이 되었던 여자가 나온다. 하지만 소중한 이를 버리면서까지 기계인간이 되어서 얻은 것은 행복이 아닌 회한 뿐이다.
여자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옛날 애인 '툴' 이 운영하는 라면가게에 종종 나타나 라면을 주문한다. (참고로 툴의 라면가게는, 우주를 수도 없이 여행한 메텔이 우주 최고의 라면가게라고 철이에게 소개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맛있는 라면을 만드는 곳임!) 그런데 여자가 '눈의 여왕' 으로 알려질 정도로 몸에서 강한 냉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라면에 젓가락을 대는 것만으로도 라면이 꽁꽁 얼어붙어서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철이가 눈의 여왕과 얽히게 된다.
철이는 눈의 여왕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줄 라면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눈의 여왕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자기 몸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물론 라면 먹는 재주만 있지 라면 만드는 재주는 없는 철이에게는, 처음부터 수행 불가능한 미션이다. ^^;;
하지만 다행히도 메텔이 눈의 여왕의 과거를 눈치채고 툴을 데려온다. 툴은 그제서야 눈의 여왕이 옛날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라는 걸 알고 온갖 정성을 다 해서 라면을 만든다. 그 라면은, 툴이 그 전에 눈의 여왕을 보고 공포에 질려 마구잡이로 만들었던 라면과 달리 얼어붙지 않는다. 그래서 눈의 여왕은 마침내 인간 시절에 먹었던 라면맛을 다시 느끼며 한을 풀고 죽는다.
(위 왼쪽) 철이를 구하러 갔다가 졸지에 라면 요리사가 된 철이를 본 메텔.
(위 오른쪽) 철이가 고생해서 만들어낸 라면도 얼어붙어 버리고...
(아래 왼쪽) 얼어붙은 라면에 기겁하는 철이.
(아래 오른쪽) 눈의 여왕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하는 철이.
◎ 메텔과의 관계
메텔은 철이에게 있어서 복합적인 존재다.
어머니, 누나, 친구, 보호자, 인도자(여행에서의 인도자 겸 정신적인 인도자), 그리고 첫사랑이다. 메텔이 이렇게 많은 의미를 지닌 특별한 존재이기에, 철이는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메텔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요!" 라고 몇 번이나 말한다.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메텔이 지닌 저런 여러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한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즉, 초반에는 어머니나 보호자로서의 의미가 강했지만, 후반으로 접어들면서는 첫사랑의 성격이 슬며시 드러나게 된다.
여행 초반부인 14회 '이중행성의 라라' 에서는 철이가 메텔에게 모정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악랄한 기계인간들 때문에 큰 위기를 넘긴 철이는 '평범한 인간으로 남는 게 좋은가, 기계인간이 되는 게 좋은가' 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자 메텔이 철이를 감싸주는 것처럼 다정한 말을 건네는데, 그렇잖아도 엄마를 그리워하던 철이에게는 그런 말을 하는 메텔이 엄마처럼 느껴진다.
철이 : "사람의 수명은 90년이나 100년 정도에요. 얼마 되지 않네요. 그래도 기계의 몸이라면 몇 천 년씩 살아서 무슨 일이나 할 수 있겠죠. 어느 쪽이 좋을까..."
메텔 : "철아, 이 여행은 오래 걸릴 테니 천천히 생각해보렴. 네가 기계인간이 될 때까지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어줄 테니까."
철이 : (감동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메텔에게 다가서며) "메텔..."
메텔 : (다가선 철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너의 몸은 따뜻하구나."
철이 : (메텔 옆에 앉아 메텔의 몸에 자기 머리를 비비면서) "메텔도요. 마치 엄마 같아."
"마치 엄마 같아."
메텔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철이.
여행 후반부에 들어선 77회 및 78회 '생명의 불을 마시는 마녀' 에서는 사람의 생명의 불을 빼앗아 마시며 젊음을 유지하는 마녀가 나온다.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못된 여자들 상당수가 그런 것처럼 이 마녀도 메텔의 미모에 눈독을 들인다. (같은 여자들조차 감탄하며 어떻게든 갖고 싶어 안달복달하게 만드는 메텔의 초절정 미모...!) 그래서 자신의 미모를 업그레이드(!) 할 욕심에 메텔의 생명의 불을 마시려다가 어찌어찌하여 오히려 폭삭 늙은 채로 비참하게 죽는다.
무사히 999호에 탄 다음에, 메텔은 자신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느라 지친데다가 다치기까지 한 철이를 자신에게 기대어 자게 한다. 철이는 너무 피곤해서 금세 잠이 드는데, 잠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목숨을 걸고 마녀에게서 되찾았던 메텔의 생명의 불에 대해 말한다.
메텔 : (철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자, 철아... 눈 좀 붙이지 그러니? 많이 피곤했지?"
철이 : "응."
메텔 : (철이를 살짝 잡아당겨 자기 몸에 기대게 하는)
철이 : "그런데요... 메텔의 생명의 불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어요." (너무 졸려서 눈이 풀어지더니 점점 감기고 목소리도 잦아드는) "메텔 것은... 정말... 아름다웠어..."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완전히 잠든)
메텔은 잠든 철이를 보다가 문득 자기 손가락이 잡혀있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려 손을 본다.
철이는 잠이 든 상태로도 메텔의 손가락 두 개를 꼭 붙잡고 있다. 하마터면 메텔을 잃을 뻔했기 때문에, 메텔에게 기대고 있으면서도 무의식 중에 메텔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이다.
철이가 메텔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게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철이를 내려다 보는 메텔의 표정을 보면, 메텔이 철이의 순수한 애정과 믿음에 기뻐하거나 흐뭇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씁쓸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텔의 생명의 불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어요.
메텔 것은... 정말... 아름다웠어..."
84회 '거대한 코끼리의 별' 에서 철이는 복잡미묘한 남녀 사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원래 사람의 감정, 특히 애정 관계로 얽혀 있는 남녀의 감정이란 것은 반드시 이성과 논리에 맞춰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남녀 사이의 감정은 보이는 게 전부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철이는 이제 10살짜리 소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해하지 못 하고 떠나려던 아내를 구하겠다고 남편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남편에게 지쳐서 떠나려던 아내가, 이제는 아무도 없는 별에서 평생 남편의 무덤을 지키며 살겠다고 결심한 상황도 이해하지 못 한다.
남녀사이에 대해 의문을 드러내는 철이에게, 메텔은 웃으면서 나중에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알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에 철이가 자기도 모르게 메텔을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철이 : (심각한 표정으로) "근데 참 묘한 것 같아요. 남녀사이란 거 말이에요."
메텔 : (웃으면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철이가 자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철이 : (발끈하며 목소리 높이는) "그런 거 필요없어요! 난 메텔만 있으면 된다고요!"
메텔 : (약간 놀란 표정으로) "응?"
철이 :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그게... 그러니까...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도망치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네."
메텔 : (그런 철이를 바라보며 다정히 미소 짓더니 이내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본의 아니게 사랑 고백을 하고
당황한 나머지 도망치는 철이.
철이는 이 일을 계기로 메텔에 대한 자기 감정이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 했던 자기 감정이, 메텔의 말을 계기로 해서 무심코 튀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각성(!)은 바로 다음 회차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85회 '사랑의 환상 행성' 에서 철이는 바로 전 회차에서 깨닫게 된 메텔에 대한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999호가 '사랑의 환상' 이란 별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철이는 이상한 변화를 겪게 된다. 실제로는 없는 향기로운 냄새가 느껴지는가 하면 괜히 가슴이 저려오며 간절한 마음이 든다. 알고 보니 '사랑의 환상' 이라는 별 이름에 걸맞게, 그 별 가까이에 가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텔은 뜻밖이라는 듯 웃으면서, 철이가 벌써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철이가 마음에 둔 이가 누구인지 속으로 궁금해 한다. (누구는 누구겠수... 바로 메텔 당신 아니겠수... ^^;;)
그런데 '사랑의 환상' 별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메텔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온종일 메텔을 찾아 헤매느라 지친 철이는 어둠이 깔린 돌계단에 앉아 쉬면서, 메텔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메텔은 어떤 존재일까... 구하기 힘든 은하철도 승차권을 그냥 주질 않나, 날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질 않나, 또 어떤 때는 엄마처럼 따뜻하게 감싸주질 않나... 늘 같이 있을 때는 느끼지 못 했는데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거지... 가슴이 답답해.'
메텔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철이.
철이는 한밤중에야 메텔을 만나게 되는데, 메텔과 마주 앉아서도 계속해서 메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한다.
철이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메텔을 보며 생각한다. '메텔이랑 있으면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 가슴 속까지 푸근해지는 건 왜일까? 나중에 내가 기계인간이 되면 메텔은 어떻게 할까? 날 두고 혼자 떠나 버릴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여행을 계속 하고 싶어. 절대로 메텔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러다가 문득 메텔을 찾아 헤매던 중에 만난 여자(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남자를 일방적으로 열렬히 사랑하는 여자임.)가 했던 "기다리는 거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끝까지 기다려야 해." 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깨닫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부정한다. '사랑이라고? 내가 메텔을? 그런...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다가 메텔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침대에서 자면서 꿈을 꾼 것이었다. ^^
꿈인 듯 현실인 듯 메텔과 마주하고 앉아
온갖 생각을 하며 다양한 표정을 짓는 철이.
철이와 메텔이 마주 앉아 음료수를 마시면서 철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장면은, 다소 애매모호하게 처리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메텔과 만난 밤에 일어난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철이가 자면서 꾼 꿈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장면을 포함해서 은하철도 999의 여러 인상적인 장면들을 보면, 비록 1970년대 작품이라 작화 상태는 요즘 애니메이션보다 떨어지지만 연출은 세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하철도 999가 괜히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인 게 아님! ^^)
99회 '4차원의 엘리베이터' 에서는 메텔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철이의 잠재의식 속 욕망이 드러난다.
어떤 남자가 마치 메텔과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하며 접근하는데, 철이는 처음부터 그 남자를 경계한다. 그저 수상한 사람이라 경계하는 게 아니라, 메텔에 대한 감정을 깨달은 후라 다른 남자가 메텔에게 다가서는 게 싫은 거다. 그것도 어린 아이인 자신과는 달리 메텔에게 어울릴 법한 어엿한 성인 남자라니... 게다가 메텔이 그 남자의 외모를 괜찮다고 말한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즉, 메텔을 두고 그 남자에게 질투심을 느낀 것이다.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악당이었고, 철이는 그 악당의 함정에 걸려들어 4차원 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그 세계는 잠재의식이 형상화 되어 현실처럼 느끼게 되는 곳인데, 그 남자에게 메텔을 빼앗길 수 있다는 철이의 잠재의식 속에 깔린 걱정도 환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철이는 메텔과 그 남자의 결혼식 장면을 목격하고 흥분하게 된다. (그런데 철이의 환상 속 메텔은 결혼식에서조차 검은색 옷차림인... ^^;;)
"이것으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됐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안돼! 그만둬! 메텔!"
(난 이 결혼 반댈세...! ^^;;)
철이와 메텔이 4차원 세계를 빠져나와 999호로 돌아왔을 때, 철이는 자기 감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메텔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걸로 말이다. (귀여운 녀석... ^^) 물론 철이가 메텔에게 첫사랑을 느꼈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가 획기적으로 변하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사실상 사랑 고백을 해놓고도 쑥스럽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철이의 모습을 봐도 그렇고,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철이를 바라보는 메텔의 모습을 봐도 그렇고... (메텔의 미소는 완전히 엄마 미소...)
아무래도 두 사람의 나이차가 워낙 커서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비록 나이차가 많이 나더라도 두 사람 모두 성인이라면 그나마 관계가 변할 여지가 있겠지만, 두 사람 중 하나가 초등학교 다닐 나이라니 서로 이어질 가능성이 0%에 가깝다.
"하지만 메텔, 난 정말 용서 못해요!"
"뭐를?"
"뭐긴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죠!"
그리고 철이가 메텔을 이성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회차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사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 때부터 마지막 회까지 특별한 변화없이 그대로 이어진다.
하긴, 이 회차 후로는 여행이 막바지로 치닫게 되면서 철이나 메텔이나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철이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기계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메텔은 메텔대로 철이를 계속 속이면서 기계제국으로 데려가도 되는 건지 망설이며 고민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감정이 더 이상 진전될 시간적 여유도, 심정적 여유도 없게 된다.
◎ 메텔의 비밀에 대한 철이의 태도 변화
긴 여행 속에서 유일한 동반자의 정체와 과거를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메텔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아예 말을 안 하다시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할 수 없는 것' 이겠지만... 철이도 메텔이 그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평소에는 아무 말 안 한다.
하지만 때때로 메텔이 무심코 한 말이나 불가피하게 한 행동 때문에, 철이가 메텔에 대해 묻어두었던 궁금증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아이답게 자신의 궁금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메텔이 난처해 하거나 슬픈 빛을 보이면 곧장 물러선다.
40회 및 41회 '공중 주택단지의 대추장' 에서 메텔이 999호를 타고 여행하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그 사실을 알고 놀란 철이가 호기심 많은 아이 특유의 집요함으로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하지만 메텔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피한다. 철이가 궁금해 하는 메텔의 과거는, 메텔로서는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괴로운 기억이기 때문이다.
철이 : (안개가 자욱한 역에서 메텔의 뒤를 따라가다가) "생각보다 역이 큰 편이네요."
메텔 : (혼잣말 하는 것처럼 무심코)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아."
철이 : (깜짝 놀라서) "잠, 잠깐만, 메텔! 그럼 전에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메텔 :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어?"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감으며) "응..."
철이 : "언제 와 봤는데요?
메텔 : (여전히 눈을 내리감고서)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철이 : "무슨 일로 왔던 거에요?
메텔 : (어두운 과거가 떠올랐는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냥 일 때문에..."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는)
철이 : (메텔을 쫓아가며) "무슨 일인데요? 메텔, 말해줘요! 메텔도 참..." (잠시 후) "화났어요?"
메텔 : "아니, 화 안 났으니 걱정마."
이 장면 연출도 괜찮음.
안개가 자욱하게 낀 기차역은 마치
비밀에 싸인 메텔의 과거를 상징하는 듯...
62회 '밤이 없는 도시' 에서는 메텔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이 회차에 나온 별에서는 해가 진 후에는 외출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다. 그런데 호기심 강한 철이가 몰래 밖으로 나가자, 메텔도 철이를 찾느라 그 법을 어기고 나갔다가 경찰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자 메텔은 자신을 연행하려는 경찰들에게 빛을 내는 무언가(전자 신분증 정도 되나?)를 내보인다. 그걸 본 경찰들은 깜짝 놀라서 고압적이던 태도를 버리고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진다.
나중에 철이와 메텔은 살인범으로 오해받고 체포될 위기에 빠지는데, 이 때 경찰은 "메텔 양, 이번 일 만큼은 당신의 특권이 통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한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겨우 999호에 탄 철이가 뒤늦게 경찰이 한 말을 떠올리고 궁금해 한다.
철이 : (다른 말을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그건 그렇고 메텔, 경찰들이 말했던 메텔의 특권이란 게 무슨 소리에요?"
메텔 : (당황한 표정으로)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철이 : "응? 어째서요?"
메텔 : "아직은 안돼." (고개를 돌리며 절박한 표정으로) "이해해 주겠니? 부탁이야, 철아..."
철이 : "알았어요, 이제 묻지 않을게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창밖을 보는)
메텔 : (철이가 자신을 배려해주는 걸 알고 마음 속으로) '미안해, 철아. 너는 정말 인정 많은 아이구나.'
철이의 질문에 당혹해 하는 메텔.
메텔이 곤란해 하는 걸 보고 더 안 묻는 철이.
68회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별' 에서는 인간에 대해 강렬하고 비뚤어진 호기심을 갖고 있는 별이 나온다.
그 별은 그저 자기의 호기심을 풀겠다는 욕심 하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납치한다. 당하는 사람의 수치심이나 공포심은 전혀 생각 안 하고 옷을 벗겨 겉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해부해서 몸속까지 구경한다. 해부당한 사람들은 당연히 목숨을 잃게 된다. 철이, 메텔, 차장도 이 별에게 납치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게 된다.
그 사건을 통해 철이는, 상대방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자기 호기심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메텔을 보며 생각한다. '메텔... 나는 메텔에 대해 언제나 더 자세히 알고 싶어했는데... 그렇지만 메텔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알아내려 한다면... 그 별과 똑같은 짓이겠지.'
메텔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철이.
이 때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철이는 더이상 메텔의 신상이나 과거에 대해 묻지 않는다.
물론 그 후로도 가끔씩 메텔에 대해 궁금해 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 여러 일을 경험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굳이 캐묻지 않는다. 즉, 누구나 가슴 속에 남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을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뜻에 반해가면서까지 모든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것이다.
◎ 999호를 타고 한 여행은 철이의 성장 과정
철이가 999호를 타고 하는 긴 여행은 기계인간이 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철이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장기간 성장하면서 겪는 온갖 일들을, 철이는 여행을 하면서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성숙해진다. 마지막 회에서는, 999호를 타고 한 여행이 철이가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게 나온다. 그리고 메텔은 미숙한 소년을 성숙한 어른의 길로 이끄는 인도자이며 소년기의 상징이었음도 드러난다.
기계제국이 멸망한 후, 철이는 인간의 몸으로 고향인 지구로 돌아가 지구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메텔은 그런 철이의 결심을 듣고나서 철이를 격려해준다. 그리고 잠시 볼일이 있다며 철이에게 먼저 999호에 타라고 하고는, 슬픈 눈으로 철이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키스해주고 몸을 돌려 걸어간다. 철이는 뜻밖의 키스에 멍해졌다가, 999호가 출발하기 직전에야 메텔이 남긴 이별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999호와 나란히 출발하는 건너편 기차에 메텔이 앉아 있는 것도 보게 된다.
이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마치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반드시 정해진 단계를 차례로 거치며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때로는 불시에 닥친 고통과 슬픔을 통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다른 기차에 탄 메텔을 보고 울부짖는 철이.
서로를 눈물로 바라보며 헤어지는 두 사람.
어쩌면 마지막 회의 나레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철이의 여행은 처음부터 철이 혼자만의 여행이었는 지도 모른다.
메텔은 철이가 엄마를 잃고 세상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나타났고, 철이가 영원하지만 무의미한 생명 대신 유한하지만 가치 있는 생명을 선택했을 때 떠나갔다. 즉, 어린 철이가 갑자기 보호자를 잃고 막막한 처지가 되었을 때 나타나 돌봐주고 이끌어주다가, 철이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사라진 것이다.
왜냐하면 메텔은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 청춘의 환영이며, 청춘의 추억이고, 청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고 미숙한 철이 곁에만 머물 수 있을 뿐, 자라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된 철이 곁에는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회 中 마지막 장면의 나레이션>
사람들은 말한다.
999는 소년의 마음 속을 달려가는 열차라고...
철이는 다시 생각한다.
철이의 여행은 처음부터 자기 혼자만의 여행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메텔은 철이의 청춘과 함께 한 신비로운 여인...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생겨나고 스쳐 지나가는 내일을 향한 꿈...
지금 온갖 추억을 품고 기적이 울린다.
안녕, 철아...
안녕, 메텔...
안녕, 은하철도 999...
안녕, 소년 시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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