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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TV판) 5 - 메텔 下

Lesley 2017. 7. 17. 00:01





  ◎ 막장(!)가정의 상처받은 딸


  책이든 영화든 예전에 봤던 작품을 한참 후에 다시 보면 그 느낌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은하철도 999가 세월 따라 느낌이 달라진 작품이다.  예전에 봤을 때는, 철이는 순수하지만 미성숙한 소년이고 메텔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한 성인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미모면 미모, 분위기면 분위기, 교양이면 교양, 전투력이면 전투력...  도대체 메텔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오히려 메텔이 철이보다 정서적으로 더 불안정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안정함의 이유는 바로 메텔의 부모이다.  철이는 일찍 세상을 뜬 부모에 대해서 따뜻한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철이의 부모는 이제 철이 곁에 없지만 항상 철이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준다.  하지만 메텔의 부모는 메텔이 어린 시절에는 좋은 부모였을지 몰라도, 기계제국 문제를 놓고 부모 사이가 갈라지면서부터는 메텔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마지막 회차인 112회 및 113회 '청춘의 환영, 안녕 999' 에서야 메텔의 어두운 가정사가 드러난다.

  메텔의 어머니 프로메슘은 자신이 건설한 기계제국을 우주 전체로 확장하려 한다.  그리고 메텔의 아버지는 기계제국 건설에 반대하다가 펜던트 속에 봉인되었지만, 여전히 기계제국을 멸망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메텔은 겉으로는 어머니에게 협조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기계제국을 멸망시키는 일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메텔의 태도를 보면 확실하게 아버지 쪽에 선 게 아니라 부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마치 지독하게 사이가 나빠진 부모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 딸 같은 느낌이다.  나중에 어머니와 어머니의 행성을 멸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고도, 어머니가 다정하게 몇 마디 하며 유혹(!)하자 금세 흔들리며 무너진다.  그 일로 하마터면 철이가 잃을 뻔하고서야 다시 마음을 다잡고 어머니를 타도하는 일에 나선다. (결국 결정적인 한 방은 철이가 터뜨리지만...) 



  일단, 메텔과 어머니의 관계부터 살펴보자면... 


  메텔의 어머니 프로메슘은 메텔에게 기계제국 확장에 앞장설 소년들을 데려오게 한다.

  메텔은 아버지처럼 기계제국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당장은 어머니를 제지할 힘이 없어서 후일을 기약하며 어머니의 말에 복종하는 척하기로 한다.  자신이 데려간 소년들이 인간으로서 죽고 기계인간으로 새로 태어나 기계제국의 전사가 되는 것을 보면서, 메텔은 큰 슬픔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프로메슘 역시 딸이 소년들을 데려오는 걸 무척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 일을 시켰다.


  어머니에게 메텔이 품은 복잡미묘한 감정은  95회 '야야볼의 작은 세계(후편)' 에서 슬쩍 드러난다.

  야야볼이라는 소년은 머리는 좋지만, 아들을 완벽히 지배하려는 비뚤어진 어머니 밑에서 자라 성격이 잔뜩 뒤틀린 마마보이다.  철이와 메텔은 야야볼 모자 때문에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야야볼 모자에 대한 비밀이 드러난다.  사실 야야볼의 어머니는 이미 사망했는데, 야야볼이 어머니의 기억과 성격을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음이 드러난다.  야야볼은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에 염증을 내면서도, 어머니에게 길들여져서 어머니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은 어머니의 기억을 컴퓨터에 집어넣는 무리수를 써가면서까지, 계속해서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사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메텔이 보이는 태도가 좀 묘하다.

  자기 스스로 어머니에게 얽매여 사는 쪽을 택한 야야볼을 한심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동시에 야야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다.  메텔은 자기 어머니의 행동이 옳지 못 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기계제국을 무너뜨리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미련을 끊어내지 못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철이를 종착역까지 데려간 후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에도 어머니 무릎에 기대어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했다.  이제와서 어머니가 기계제국을 포기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딸인 자신의 고통을 봐서라도 그만 멈춰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메텔은 어머니에 대해 상반된 감정을 품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 무척 복잡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999호가 야야볼의 별을 떠나 다시 우주를 달릴 때 철이에게 그런 마음을 슬쩍 내비친다.


메텔 : "철아,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철이 옆자리로 옮겨 앉는)

철이 : (옆에 앉는 메텔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뭘요?"

메텔 : "만약 네 엄마를...  컴퓨터를 통해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너도 그렇게 할 거니?"

철이 : (잠시 고민하다가 곧 웃는 얼굴로) "그렇지만 엄마는 내 마음 속에 살아계신데요,이 마음 속에...  그거면 됐어요."

메텔 : (여러가지 감정으로 복잡해진 눈빛으로) "철아..."  (감정에 북받친 표정으로 갑자기 철이를 끌어안는)

철이 : (처음에는 놀라더니 곧 기쁘고 편한 표정을 지으며 메텔에게 기대는)



메텔의 복잡한 심사를 모르는 철이는

메텔의 품 안에서 마냥 행복하기만 하고...



  다음으로, 메텔과 아버지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메텔 아버지는 목소리로만 등장하다가 마지막 회차에 가서야 정체가 드러난다.

  여행 중에는 간간히 컴퓨터나 통신기, 심지어는 저녁놀이 깔린 공중을 통해서 메텔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곤 했다.  가끔씩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총알이나 다름없는 철갑곤충에게 등에서 가슴까지 완전히 꿰뚫린 메텔을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회 전까지는 목소리로 중장년층의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회차인 112회 및 113회 '청춘의 환영, 안녕 999' 에서 메텔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아버님' 이라고 불러서 정체가 밝혀진다.  메텔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이자 메텔의 어머니이기도 한 프로메슘의 기계제국 건설에 반대하다가 펜던트 속에 봉인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메텔과 함께 기계제국을 무너뜨릴 계획을 오랜 세월 동안 진행했다.


  그런데 메텔의 아버지를 그저 선한 사람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메텔의 아버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기계제국에 반대하는 사람, 즉 정의로운 쪽에 선 사람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연히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과 기계의 싸움' 라는 틀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  '부모와 자식' 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아버지도 어머니 만큼이나 메텔에게 무자비한 사람이다.

  메텔은 철이에게, 다른 소년들에게 느꼈던 감정보다 더 특별하고 강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 중간에 몇 번이나 철이를 프로메슘 행성으로 데려가는 걸 포기하려 한다.  그 때마다 메텔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딸다독이며 설득하기보다는, 대의와 의무를 내세우며 딸을 강하게 압박한다.  말하자면 메텔에게 아버지로서의 태도보다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상관으로서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메텔 아버지의 그런 냉정한 모습은 TV판의 스페셜판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스페셜판은 TV판 중 몇몇 에피소드에 살을 덧붙여서 완성도를 높인 것들이다.  그 중 TV판의 22회 '해적선 퀸 에메랄다스' 를 베이스로 한 '영원한 여행자 에메랄다스' 가 있다.

  TV판에서는 에메랄다스의 회상을 통해 메텔과 에메랄다스가 예전에 결투를 한 적이 있다는 것만 나온다.  하지만 스페셜판에서는 메텔이 에메랄다스와 결투를 한 후 몇 년이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지냈다는 부분이 덧붙여진다.  메텔은 기계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많은 소년들을 희생시키는 것에 지친 나머지 더는 살고 싶지 않아서, 우주 최고의 검객이라고 소문난 에메랄다스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처럼 묘사된다.  어떤 사정에서인지 메텔 스스로는 죽을 수도 없어서 에메랄다스와 싸우다가 죽는 쪽을 택한 것이다. (TV판에서도 스페셜판에서도 자신은 죽을 수조차 없다는 메텔의 슬픈 독백이 나옴.)  하지만 결투는 메텔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자 메텔의 아버지는 왜 그렇게까지 죽으려고 하느냐며 메텔을 쇠사슬로 묶어 감옥에 가두는 벌을 내린다.  인간들을 위해 기계제국 멸망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지도자로서는 불가피한 행동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로서는 딸의 정신적인 고통을 외면하는 냉혹한 처사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82회 ' 짧은 생명의 이야기' 에서는 겉으로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속으로는 아버지의 계획을 위해, 소년들을 기계제국으로 데려가 희생시켰던 메텔의 죄책감이 드러난다.

  이 회차에 나오는 별에서는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계급이 달라지는데, 날개 달린 여자 '클레어' 와 날개 없는 남자 '제프' 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날개 달린 사람들은 그 상황을 자기네 전체에 대한 불명예로 간주하며,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철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의 편을 든다.  하지만 철이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아는 메텔은 현실적인 태도를 취한다.  클레어와 제프가 그 별의 규칙을 어기면 그 별 어디에서도 살 수 없게 된다면서, 그게 진정으로 두 사람을 위하는 것이냐고 철이를 말린다.

  물론 열혈남아(!) 철이는 부당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 같은 메텔의 태도에 반발한다.  999호가 그 별을 떠나 우주로 나간 후에도 메텔에게 서운함과 분노가 안 풀려 메텔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철이에게 메텔이 말을 건넨다.  


메텔 : "철아, 혹시 네가 제프라면 어떻게 했겠니?"

철이 : (발끈해서 반항적인 태도로 대답하는) "꼭 클레어와 같이 살 거에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외면할 순 없어요!"

메텔 : (슬픈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며) "그래..."

철이 : (따지는 말투로) "메텔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규칙 따위 때문에 포기할 거에요?"

메텔 : (아픈 곳을 찔린 듯한 표정으로 아무 말 못 하는)

나레이션 : "메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철이에게는 말 못 할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까...  철이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규칙 때문에 포기할 거냐는

철이의 말에 아무 말 못 하는 메텔.



  "메텔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규칙 따위 때문에 포기할 거에요?" 라는 질문이 메텔을 동요하게 한다.

  철이는 어디까지나 제프와 클레어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만일 메텔에게 연인이 생긴다면 그 연인을 사회의 규칙이나 통념 때문에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메텔은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메텔은 아무리 인간의 존엄이니 정의니 하는 것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자신이 많은 소년들을 기계제국으로 인도해서 희생(포기)시키는 게 옳은 것일까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 메텔 입장에서는, 철이의 질문이 마치 자기 속내를 꿰뚫어 보고 한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철이 이전에 같이 여행했던 많은 소년들과도 틀림없이 정이 들었을텐데, 인간 전체를 위해서라는 명분 때문에 구해낼 수도 있었던 소년들을 그냥 희생시켰느냐는 질책처럼 들렸을 것이다.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메텔의 얼굴에 동요하는 빛이 역력한 걸 보면, 철이의 질문이 메텔에게는 무척이나 뼈아픈 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메텔은 때때로 모든 걸 포기하고 도피하고 싶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하는 것이든, 아버지와의 계획에 따라 대의를 위해 하는 것이든 간에, 메텔에게 이끌려 프로메슘 행성으로 간 소년들이 희생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괴로운 나머지 적당한 별에서 철이와 조용히 살거나 아예 죽고 싶어하기도 한다.

   

  49회 '지금부터의 별' 에서 철이와 메텔은 태풍 때문에 짐을 전부 잃어버린다.

  다른 물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999호의 승차권을 잃어버린 건 정말 큰 문제다.  까딱하면 평생 그 별에서 살게될 수도 있다.

  두 사람은 땅거미가 진 기차역 근처 계단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장면도 연출이 좋음.  해가 지자 계단 앞의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광경이나, 전등 불빛을 바라보고 앉은 철이와 메텔의 뒷모습이 무척 서정적인 느낌임.)  그런데 999호 출발시간까지 승차권을 못 찾을까봐 조바심 내는 철이와는 달리, 메텔은 차라리 승차권을 못 찾기를 바라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메텔 : "철아, 만약 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셈이니?"

철이 : "찾을 거에요.  난 믿어요."

메텔 : (철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은근한 말투로)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철이 : (왜 안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느냐는 말투로) "메텔, 무슨 소리에요!"

메텔 : (슬픈 표정을 짓더니 눈을 내리감고) "이 별에서 나랑 살지 않을래?"

철이 : (못마땅하게) "전에도 그런 소리하더니 또 그러네요, 메텔."

메텔 : "안 될까?"

철이 : (굳은 결심이 스민 말투로) "당연히 안 되죠, 메텔!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기계몸을 주는 별에 가야 해요!"

메텔 : (철이의 강경한 태도에 아무 말 없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 숙이며 눈을 내리감는)

철이 : "메텔도 같이 가겠다고 처음부터 약속했었잖아요.  지금 차표를 못찾는다고 해도 난 꼭 가고 말거에요.  돌아가신 엄마랑 약속했어요."



여행을 포기하자는 메텔의 은근한 권유에

정색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철이.   



  66회 '안개 낀 장례의 별' 에서 메텔은 그만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친다.

  '장례의 별' 주민은 모두 기계인간이라 자연사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수백 년에 걸쳐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 하며 살다 보니 모두들 권태감에 찌들게 된다.  그러던 중 다른 별 사람들이 우연히 이 별에 불시착했다가 죽은 일이 생기자, 장례식의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된다.  죽음이란 게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았고 또 끝없이 계속 되는 삶이 지긋지긋해진 나머지, 처음으로 겪은 장례식이 신선하게 느껴진 것이다.  즉, 장례식 특유의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일부러 죽이기까지 한다.  철이와 메텔도 이 별 주민들에게 공격당해서 그저 기절했을 뿐인데도 매장된다.  어차피 이 별 사람들은 장례식 자체가 목적이라, 상대방이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생매장 당한 두 사람이 각각 관 속에서 정신을 차린다.

  철이는 자신이 관 속에 들어간 채 땅속에 묻혔다는 걸 알고 기겁하며 어떻게든 나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옆의 무덤에서 깨어난 메텔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인생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철아...  철이에겐 미안하지만 난... 난 이대로 잠들고 싶어...  그리고 이 여행을 이쯤에서 끝내고 싶어...'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철이.

그만 삶을 끝낼 수 있기를 바라는 메텔.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그 별을 빠져나온다.

  그런데 999호 안에서 메텔이 뜻밖의 말을 한다.  만일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장례식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을 항상 기억해주고 가끔씩 생각해달라고...  철이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 하고 나즈막하게 메텔 이름만 부른다.


메텔 : (얼굴을 돌려 창밖을 보면서) "만일 내가 죽게 된다 해도 장례식은 하지 말아 주겠니?"

철이 : "네?"

메텔 : "다만... 언제까지나 날 기억해주고 가끔식 날 생각해준다면...  차라리 그게 기쁠 것 같아."

철이 : (뜻밖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메텔..."  (마음 속으로) '메텔이 자기가 죽는 일에 대해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나레이션 : 메텔은 왠지 무척 슬퍼 보였다.  메텔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을 처음으로 입에 담은 메텔.

그런 메텔을 바라보는 철이.



  메텔은 장례식에 대해 여러가지로 복잡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먼저, 고인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의식인 장례식이, 영원한 생명을 지겨워하며 미칠 지경이 된 기계인간들의 심심풀이 장난으로 전락한 것에 염증을 느꼈던 것 같다.  동시에, 많은 소년들을 그런 기계인간의 길로 이끌었던 자신은, 경건한 장례식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후에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 수수께끼투성이 메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메텔의 몸이 원래의 몸이 아니라는 건 무척 유명한 이야기다. 


  5회 '방황하는 별의 쉐도우' 에서 철이와 메텔은 명왕성에 가게 된다.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이며 얼음으로 덮여 있는 명왕성은, 기계인간이 된 사람들이 원래의 육신을 보관해 두는 거대한 공동묘지다. (2000년대 들어서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를 잃었음.  하지만 은하철도 999 TV판이 방영되던 시기에는 아직 행성으로 취급되었음.)  영원한 생명과 젊음을 꿈꾸며 기계인간이 된 사람들조차 원래 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 해서, 매장이나 화장으로 육신을 없애지 못 하고 원형 그대로 얼음 속에 보관해 두는 것이다.

  명왕성에서 메텔은 철이에게 먼저 호텔에 가있으라고 하고 혼자 어디론가 간다. 호기심을 못 이긴 철이가 몰래 메텔을 찾아나섰다가, 메텔이 얼음묘지 밑에 있는 누군가의 몸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게 된다.  나중에 철이가 왜 울었는지 묻자, 메텔은 가장 친한 친구가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얼음묘지의 누군가를 보며 눈물 흘리는 메텔.

(화면에 여러 번 비춰지던 저 파란머리 여자가

메텔이 바라보던 사람일까?)



  하지만 이 회차에서 메텔이 보이는 행동이나 분위기상, 메텔이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던 것은 메텔 자신의 몸인 듯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은하철도 999 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나온 원작만화(안드로메다 편)의 뒤를 이어 1990년대 들어 후속편으로 새로 연재한 만화(이터널 편)을 보면, 아예 메텔의 입으로 메텔의 원래 몸이 명왕성 얼음묘지에 묻혀 있다는 걸 인정한다.

  다만, 메텔의 원래 몸이 따로 있다는 이 설정은 레이지버스에서 큰 모순이 된다.  2000년대 들어 새로 나온 은하철도 999의 외전인 '메텔 레전드' 와 '우주교향시 메텔' 을 보면, 메텔은 10대 시절부터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점을 찾아 보자면 메텔의 눈동자 색깔이 TV판에서는 갈색인데 외전에서는 초록색이라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극장판도 1기와 2기에서는 갈색이고 3기에서는 초록색으로 변하는 등 뒤죽박죽이라, 눈색깔이 다른 것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원래 레이지버스는 모순투성이 세계라서 이 정도는 뭐...  혹은 메텔이 기나긴 여행이 지겨워서 칼라렌즈 끼는 걸로 기분전환을 했는지도... -.-;;)


  과연 진실은 무엇이려나...

  메텔 몸에 대한 문제는 원작자인 마츠모토 레이지가 중단된 만화 이터널편을 다시 연재하거나, 아니면 메텔에 관한 다른 외전 애니메이션을 또 내주지 않는 한 풀리지 않을 듯하다.  혹시 마츠모토 레이지가 나중에 반전을 일으킬 생각을 하며 뿌려놓은 떡밥인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덧붙이다 보니 자기 스스로도 수습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서 포기해버린 건 아닌지... ^^;;


  메텔의 몸과 관련한 유명한 미스테리가 하나 더 있는데, 몇몇 사람이 메텔의 알몸을 보고 기겁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이 정말 불가사의 한 게, 은하철도 999에는 메텔의 노출씬이 종종 나온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들도 메텔의 나체를 몇 번이나 보게 되는데, 메텔의 몸은 그냥 인간의 몸이다. (굳이 보통 사람의 몸과 다른 점을 찾아 보자면 무척 날씬한 몸이라는 것 정도 밖에... -.-;;)  그리고 은하철도 999의 고정출연자(!)인 철이나 차장도 이런저런 일로 메텔의 나체를 여러 번 봤지만 평범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런데 특수한 상황에서 메텔의 몸을 보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끔찍하고 충격적인 것을 보았다는 듯 경악하거나 공포에 질려 버린다.


  먼저 28회 '아지랑이 별의 문호' 에서 그런 상황이 처음으로 벌어진다.

  이 회차에서는 우주 최고의 걸작을 쓰겠다며 무인 행성에서 오랜 세월 혼자 살았던 소설가가 나온다.  그런데 이 소설가가 메텔을 보고 반한 나머지 메텔을 강제로 자기 옆에 두려고 한다.  그러자 메텔은 철이를 밖으로 내보낸 후에 소설가 앞에서 옷을 풀어헤쳐 자기 몸을 보인다.  그리고 이래도 자신과 함께 살고 싶느냐고 묻는다.

  소설가는 메텔의 몸을 보고서 입을 딱 벌리더니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주저앉아 버린다.  소설가의 반응을 보면, 그저 다 큰 여자가 갑자기 맨몸을 보여서 당황하거나 놀라는 게 아니다.  너무 충격적인 것을 보아서 넋을 놓은 것 같은 분위기다.  소설가는 메텔이 철이를 데리고 떠난 후 혼잣말을 한다.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지?  악몽을 본 거다...  잊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떠나가는 999호 안에서 메텔은 철이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냐고 묻는다.

  철이는 하마터면 그 별에 혼자 남아 평생을 보낼 뻔했다가 다시 메텔을 만나 999호를 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메텔이 자기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대답한다.  마치 메텔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


메텔 : "철아..."

철이 : "네?"

메텔 : "너도 내 진짜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니?"

철이 : "음...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됐어요."

메텔 : "그래..."

나레이션 : "사람의 마음 속은 이 넓은 우주보다도 넓어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철이는 늘 옆에 있어주는 메텔의 마음을 믿고 우주를 여행하고 있다.  이 은하철도999의 종착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메텔의 몸을 보고 경악하는 소설가.

메텔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철이. (저 표정 좀 보게... ^^)




  메텔이 '내 진짜 모습' 을 보고 싶냐고 물은 건 '내 몸' 을 보고 싶냐는 뜻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비밀' 을 알고 싶냐는 뜻인 것 같다.

  사실 철이는 1회 '출발의 발라드' 에서 이미 메텔의 알몸을 봤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봤다.  그러니 메텔의 몸에 대해 궁금해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소설가의 경악한 표정을 보면 그저 여자 알몸을 봤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메텔이 소설가에게 보인 것은, 몸 자체가 아니라 몸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비밀일 수도 있다.  아니면 메텔의 신비함을 강조하느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레이지버스에 설정충돌이 난무한다는 걸 생각했을 때, 뭔가 반전을 노리고 떡밥으로 깔아놓았다가 결국 떡밥 회수에 실패한 것인지도... ^^;;) 


  90회 및 91회 '안드로메다의 유키온나(눈의 여왕)' 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메텔은 눈의 여왕과 같이 사라진 철이를 찾아나섰다가 그만 악질적인 기계몸 브로커에게 걸려든다.   그 브로커는 남이 기계인간이 되는 걸 원하거나 말거나 무조건 기계몸을 강매한다.  고객(?)을 납치해서 가둬놓고 기계몸을 사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니, 고객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메텔의 말마따나 그런 일을 하려면 상대를 잘 골라야 하는 법이다.  하필이면 천하무적(!) 메텔을 강매 대상을 골랐으니...  메텔이 아지랑이 별의 소설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몸을 내보이자, 유들유들하게 굴던 브로커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벌벌 떤다.  그래도 아지랑이 별의 소설가는 메텔의 몸을 본 후 깨끗이 포기했기에 아무 일 없이 넘어갔지만, 이 브로커는 떠나는 메텔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메텔이 분명히 말했잖아,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고...! -.-;;)



"이런 일을 하려면 팔 상대를

잘 골라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한 이야기지만, 메텔은 겉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오랜 기간 동안 여행을 했다.

  메텔이 매우 오랜 기간 여행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긴 여행 동안 슬프고 가혹한 광경을 수도 없이 봤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은 여러 회차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적접으로 드러난다.


  그 중 하나가 70회 '꽃의 도시' 다.

  '꽃의 도시' 란 별은 이름 그대로 온갖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별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건 겉모습 뿐이고 실제로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별 전체를 뒤덮은 꽃에서 독성을 품은 꽃가루가 날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거나 이미 죽었건만, 정부에서는 꽃을 없애는 자는 이유불문하고 무조건 극형에 처한다.  그런데 '코아' 라는 한 집안의 가장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모두를 위해 많은 꽃을 불태워버린다.  나중에 정부에게 들키게 되자 가족들이 코아 혼자 죽게할 수 없다며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해서, 일가족 모두가 생매장당할 처지가 된다. (사형 방법이 놀랍게도 집의 입구에 니켈을 쏟아부어 생매장하는 것임...!)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코아와 가족들 모두 살아남게 된다.

  그 별을 떠나며 철이와 메텔이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 끝에 나오는 나레이션에는, 메텔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철이 : "그런데 메텔, 사람은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메텔 : "응?"

철이 : (기계 백작에게 무의미하게 죽은 엄마를 떠올린 듯) "무의미하게 남에게 희생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아씨처럼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메텔 : "..."

철이 : (혼잣말처럼) "나도 꼭 필요할 때에 코아씨처럼 용감해질 수 있을까..."

나레이션 :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우주에도 용감하게 자기 목숨을 바친 수많은 희생자들이 말없이 잠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메텔의 얼굴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무척 슬퍼 보였다.  마치 메텔은 그 희생자들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철이는 생각했다.



메텔의 얼굴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무척 슬퍼 보였다...

마치 그 희생자들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75회 및 76회 '물의 나라의 샤인' 도 있다.

  이 회차에서는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원주민을 학살하고 탄압했다는 걸 빗대는 사연이 나온다.  다행히 앞으로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희망찬 미래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결말로 끝난다.  떠나가는 999호 안에서 철이와 메텔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철이 : "우주에서 산다는 건 참 힘든 것 같아요."

메텔 : (어두운 표정으로) "그래, 굉장히 가혹하고 힘겹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굉장히..."

나레이션 : "철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우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메텔의 표정이 무척 슬퍼진다고...  메텔은 아마 철이가 모르는 우주의 가혹함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메텔의 미소는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기만 했다.  그 미소가 있는 한 철이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메텔은 도대체 얼만큼의 세월 동안

슬픈 여행을 계속 해왔던 걸까...



  철이와 메텔의 여행이 막바지에 이른 109회 및 110회 '메텔의 여행' 에서는 메텔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일단, 그 동안 몇 번이나 암시되었던 '메텔의 여행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는 사실이 메텔의 입으로 확인된다.  또한, 철이와의 여행이 끝난 후에도 메텔의 여행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게 새롭게 암시되기도 한다. (결국 마지막 회에 나오는 메텔과 철이의 이별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함.)


  이 회차에서는 두 대의 999호가 등장한다.

  999호가 늦어진 일정을 맞추느라 워프로 운행하다가 시간왜곡이 생겼는데, 그 때 또 하나의 999호가 나타나서 이쪽 999호와 충돌하게 된다.  또 다른 999호에는 역시 또 다른 메텔과 또 다른 차장이 타고 있다.  양쪽 999호에서 다른 점은 오직 메텔과 함께 여행하는 소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즉, 상대편 999호에는 철이 대신 '레드릴' 이란 소년이 타고 있다.


  그런데 레드릴의 사연이 철이의 사연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레드릴은 엄마와 둘이서 무척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엄마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고 레드릴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때 갑자기 나타난 메텔이 구해주더니 999호 승차권까지 줘서, 메텔과 함께 기계몸을 공짜로 주는 별로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메텔이 기계제국으로 데려갔던 소년들 대부분이 가난하고 부모 없는 처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긴, 아무리 너도 나도 기계몸을 원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렇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고 보호해 줄 부모도 있다면 낯선 사람을 따라 위험천만한 여행에 나설 리가 없다.  아마 메텔은 일부러 철이처럼 의지할 데 없는 소년들을 여행의 동반자로 골랐을 것이다.  


  레드릴이 탄 또 다른 999호는 미래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레드릴도 철이처럼 우주에 오직 4대 밖에 없다는 코스모 드라군(전사의 총)을 갖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소년의 코스모 드라군은 일련번호까지 똑같다...!  즉, 두 사람의 총이 동일한 총으로 보인다.  다만, 레드릴의 총이 철이의 총보다 흠집이 더 많이 나있고 손잡이도 더 많이 닳은 상태다.  그래서 철이는 자신이 나중에 죽는다든지 혹은 그 밖의 다른 사정이 생겨서 자기 총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치다가 레드릴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 두 999호가 헤어진 후에 두 메텔의 옷이 서로 바뀌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런데 저쪽 메텔의 옷이 이쪽 메텔의 옷보다 낡은 상태이다.  저쪽 메텔이 이쪽 메텔보다 더 오랜 세월 여행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똑같은 999호, 똑같은 메텔, 똑같은 차장...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소년...



  하지만 두 999호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일 수도 있다. (즉, 평행우주) 

  철이는 자신과 레드릴이 같은 총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서 레드릴의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다.  그런데 레드릴의 고향은 철이로서는 처음 듣는 은하계 소속의 낯선 별이다.  그리고 레드릴 역시, 철이가 말하는 우리은하니 안드로메다 은하니 하는 곳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두 소년이 원래 전혀 다른 시공간에 속해 있었지만 999호가 워프로 운행하면서 우연히 같은 시공간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레드릴이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멸망하고서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사람이라서,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를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메텔이야 워낙 초현실적인 인물이라 메텔의 옷마저 주인을 닮아(-.-;;) 수천 수만 년 후에까지도 존재한다고 치고, 철이의 총마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까지 원형과 성능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레드릴과 또 다른 메텔을 태운 999호는, 철이가 사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또 다른 999호가 미래에서 왔든 다른 세계에서 왔든, 메텔에게는 무척이나 잔인한 일이다.

  메텔은 아주 먼 미래에서나, 아예 다른 세계에서나, 슬픔과 죄책감을 간직한 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999호가 미래에서 왔다면 철이와 메텔은 언젠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뜻이 된다.  미래의 메텔 옆에서 함께 여행할 소년은 철이가 아닌 레드릴이니까...  또 다른 999호와 헤어진 후 철이와 메텔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철이 : (메텔이 입고 있는 옷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어?  메텔, 그거 메텔이 입던 옷보다 좀 낡았는데..."

메텔 : "뭐?" (놀라서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만져보는)

철이 : (좀 불안한 표정으로) "메텔, 정말로 진짜 메텔이 맞아요?"

메텔 : "그러고 보니 이게 내 옷보다 조금...  봐, 이 옷을 보면 저쪽 메텔이 나보다 오래 여행한 것 같아."

철이 : "그러고 보니 레드릴도 나보다 오래 여행한 듯했어요."

메텔 : "응..."

철이 : "그러면 메텔, 레드릴은 미래에서 온 걸까요?"

메텔 : "글쎄..."

철이 : "만약 그렇다면..."  (시선을 내리고 우울하게) "난 언젠가 메텔과 헤어져서 여행하게 될 지도..."

메텔 : (그런 철이를 슬프게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철이 : "메텔..."

메텔 :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나의 여행이 아주 길다는 것 뿐..."

철이 : (고개를 숙이며) "왠지 피곤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으며) "꿈인지, 현실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전혀 모르겠어..."

나레이션 : "그렇다고 해도 철이는, 언젠가 메텔과 헤어지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애달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나의 여행이 아주 길다는 것 뿐..."





  ◎  메텔은 청춘의 환영, 영원한 여행자

 

  청춘의 환영이라는 메텔의 성격도 세월이 흐르면서 좀 변한 듯하다.

  원래의 메텔(즉, 은하철도 999의 원작만화 및 원작만화에 충실한 TV판 속 메텔)은 '청춘의 환영' 이라는 말에 걸맞는 수수께끼투성이의 신비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메텔의 과거에 관한 외전들('메텔 레전드' 및 '우주교향시 메텔')이 나오면서 메텔의 과거 상당 부분이 밝혀졌다. (물론 아직도 이런저런 의문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외전을 통해 팬들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기는 했지만, 천상의 존재인 듯 신비로움에 둘러싸여 있던 메텔이 속세로 내려와 평범해진 느낌도 없지 않다.


  그래도 어쨌거나 은하철도 999의 '메텔의 원형(!)' 은 청춘의 환영이며 청춘의 기억이기도 하고 청춘 그 자체이기도 하다.

  메텔의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트에 이미 쓴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새로 정리해서 쓸 필요없이 그 포스트의 해당 부분을 그대로 가져오겠다. ('Ctrl+C → Ctrl+V' 는 참으로 편리하죠... ^^;;)  ☞ 은하철도 999(TV판) 1 - 은하철도 999 훑어보기 / TV판과 극장판 비교(http://blog.daum.net/jha7791/15791406)



  그리고 은하철도 999가 세상에 나온 지 4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스테리에 싸여 있는 메텔...

  포스트 앞부분에 쓴 것처럼, 레이지버스에는 설정상의 모순이 워낙 많아서 메텔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은하철도 999를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풀린다.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 부분에서 철이와 메텔은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메텔은 스스로를 '청춘의 환영' 이라고 말하고 나레이션으로도 '메텔은 청춘의 환영' 이라고 다시 나온다.

  환영이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에서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을 말한다.  메텔을 소년의 성장을 상징하는 환영으로 본다면, 메텔이 어째서 이 세상과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게 신비롭고 아름답고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메텔은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청춘' 이란 시기를 의인화 한 존재이며,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나도록 이끌어주는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인도자이기도 하다.  애초에 현실적인 인물이 아닌 메텔에게 논리니 인과관계니 하는 현실에서나 통하는 잣대를 들이대니, 그 정체가 밝혀질 리가 있나...




메텔은 철이의 청춘과 함께 한

신비로운 여인...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생겨나고

스쳐 지나가는 내일을 향한 꿈...




<마지막 회 中 메텔이 남긴 이별의 편지>


철아..
결국 이별의 날이 오고 말았어.
네가 혼자 일어서서 살아갈 수 있을 때가 너와 내가 이별할 때임을 알고 있었어.
언젠가 반드시 오늘과 같은 날이 올 것을 각오하고서 나는 여행을 계속 했지.
고통스럽고 슬프게 운명지어진 여행을...


이제 나는 다른 소년을 미래로 안내하기 위해 새로운 여행을 떠나.
이제 다시는 철이와 만날 수 없겠지.
나는 너와의 추억을 가슴에 묻고 영원한 여행을 계속 하겠어.
끝없는 여행을...


안녕, 철아..
언제까지나 건강하기를...





  ◎ 기타


  메텔의 일본판 목소리는 이케다 마사코(池田昌子)란 성우가 맡았다.

  오랫동안 한국어판 메텔 목소리('송도영' 이란 성우가 맡았음.)에 익숙해진 상태라, 일본어판으로 처음 봤을 때는 메텔 목소리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작품에 몰입이 안 될 지경이었다.  송도영의 메텔 목소리는 가냘프고 부드러워서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한데, 이케다 마사코의 메텔 목소리는 좀 더 성숙하고 강단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113편이나 되는 TV판을 쭉 봤더니 어느새 이케다 마사코의 목소리에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오히려 송도영의 메텔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메텔의 어두운 과거라든지 때때로 보이는 서릿발 같은 모습을 볼 때면 차라리 이케다 마사코의 목소리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성우가 누구인지까지 따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메텔에 대해서는 굳이 성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케다 마사코가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메텔의 목소리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TV판(1978~1981년 작품), 극장판 1기(1979년 작품), 극장판 2기(1981년 작품)야 동시대 작품들이니 기왕에 메텔 목소리를 연기하던 성우가 계속해서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첫 작품인 TV판에서 무려  20년(!)이나 지나 만든 '극장판 3기(1998년도 작품)' 와 한술 더 떠서 아예 29년(!)이나 지나 만든 '은하철도 이야기' 의 OVA편 '잊혀진 시간의 혹성(2007년도 작품)' 에서까지, 전부 이케다 마사코가 메텔 목소리를 담당했다..


  한 캐릭터를 강산이 세 번 바뀔 만큼의 세월 동안 담당하다니...! @.@

  우리나라에도 한 캐릭터를 29년씩이나 연기한 성우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런 성우가 있느냐는 둘째치고 29년이나 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없다... 고 생각했지만 '아기공룡 둘리' 의 둘리가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둘리의 목소리는 세월 따라 여러 성우가 번갈아 가며 맡았다.

  일본에서는 원래 한 성우가 한 캐릭터를 장기간 맡는 건가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는 무슨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처음에 맡았던 성우가 계속해서 맡는 모양이다.  심지어 오랫동안 한 캐릭터를 맡다 보면 해당 캐릭터에 대한 권리까지 생겨서, 원래의 성우가 동의하지 않으면 함부로 성우를 교체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권리라는 것이 법률상 권리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선업계과 성우업계에서 관례상 인정하는 권리인지는 모르겠음.)


  문제는, 아무리 목소리를 관리 잘 하는 성우라도 세월이 흐르면 목소리가 변한다는 점이다.

  이케다 마사코는 1939년생이다.  TV판에서 메텔 역을 처음 맡았을 때 이미 40세였다.  하지만 성우가 괜히 성우인 게 아니라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메텔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데 별 문제 없었다.  '20대 여자의 목소리치고 상당히 성숙하고 차분한 느낌이구나.' 정도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케다 마사코가 극장판 3기 속 메텔을 연기할 때가 59세였다.  이 작품에서부터 메텔의 외모와 목소리가 겉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성우라도 환갑 다 된 나이에 20대 목소리를 연기하는 건 무리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은하철도 999의 스핀오프 작품인 '은하철도 이야기' 의 OVA편 '잊혀진 시간의 혹성' 속 메텔을 연기할 때는, 이케다 마사코가 무려 68세였다...! -0-;;  그러니 메텔의 젊은 모습이 무색하게 목소리가 중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이 작품 끝부분에서 메텔이 '키리안' 과 '유키 마나부' 라는 인물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얼굴은 여대생이지만 목소리는 정년퇴임을 앞둔 교수님이시다. ㅠ.ㅠ


  메텔의 10대 시절을 다룬 '메텔 레전드' 와 '우주교향시 메텔' 에서는 아예 다른 성우가 메텔 목소리를 연기했다.

  이케다 마사코가 20대의 메텔 목소리를 연기하는 것도 어색해지는 상황에서, 10대의 메텔 목소리를 연기하는 건 정말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위에 언급한 '한 캐릭터를 오래 연기한 성우의 권리' 에 의해 10대 메텔을 연기할 성우를 이케다 마사코가 직접 골랐다고 한다. (단,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오는 메텔의 나레이션은 이케다 마사코가 그대로 맡았음.)  젊은(!) 메텔은 유키노 사츠키라는 1970년도 출생의 성우라는데 다행히 메텔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다.


  2007년도에 '은하철도 이야기' 의 OVA '잊혀진 시간의 혹성' 이 나온 후로는 더 이상 철이와 메텔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지 않은 것 같다.

  만일 나중에라도 또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면, 이제는 이케다 마사코에게 지명된 유키노 사츠키가 20대 메텔의 목소리까지 맡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은하철도 999 속 메텔은 영원한 청춘의 환영이지만, 메텔의 목소리를 맡는 성우는 현실 속 인물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역시 꿈과 현실은 다르구나 하는 걸 새삼스레 느낀다.



은하철도 999(TV판) 1 - 은하철도 999 훑어보기 / TV판과 극장판 비교(http://blog.daum.net/jha7791/15791406)

은하철도 999(TV판) 2 - 철이(호시노 테츠로) 上(http://blog.daum.net/jha7791/15791394)
은하철도 999(TV판) 3 - 철이(호시노 테츠로) 下(http://blog.daum.net/jha7791/15791411)

은하철도 999(TV판) 4 - 메텔 上(http://blog.daum.net/jha7791/15791396)

은하철도 999(TV판) 6 - 차장(http://blog.daum.net/jha7791/15791393)

캡틴 하록(キャプテンハーロック, Harlock : Space Pirate) / 은하철도 999(銀河鐵道999)(http://blog.daum.net/jha7791/15791042)
마츠모토 레이지 은하철도999展 - 발표 40주년 기념 전시회(http://blog.daum.net/jha7791/15791386)
은하철도 999 TV판 엔딩곡 青い地球(푸른 지구)(http://blog.daum.net/jha7791/15791395)

롯데리아 은하철도 999 피규어 뒤늦게 득템...!(http://blog.daum.net/jha7791/15791466)

코스모 워리어 제로(Cosmo Warrior Zero) 오프닝곡 - 時代(http://blog.daum.net/jha7791/15791473)

은하철도999 갤럭시 오디세이 展 - 마츠모토 레이지의 오래된 미래(http://blog.daum.net/jha7791/15791506)

은하철도 999 실사 라이브 드라마(http://blog.daum.net/jha7791/15791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