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미러(BLACK MIRROR) - 독특한 영국 SF 드라마

 

 

 

 

 

 

  지난 설 연휴에 '블랙 미러(BLACK MIRROR)' 라는 영국 드라마를 봤다.

  이미 시즌3까지 방영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본 건 시즌1(2011년), 시즌2(2013년)이다.  전에 본 영국 드라마 '셜록' 도 한 시즌당 3회차 안 되더니, 이 드라마도 그렇다.  시즌당 회차가 적은 게 영국 드라마의 전통인가? ^^

  이 드라마의 장르는 SF인데,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들의 삶이 피폐해지지는 상황을 비판(또는 풍자)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 기술이 미디어와 인간의 추악한 속성과 결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비판한다.  그런 비판을 담은 내용을, 현대 혹은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해서 한 에피소드당 약 40분짜리로 깔끔히 정리한다. (즉, 옴니버스 드라마임.)  겨우 40분짜리 단편이건만 각 에피소드별로 짜임새 있는 이야기가 적절한 반전까지 갖추어 나온다. 

 

 

 

블랙 미러는 TV나 컴퓨터 모니터의 전원이 꺼져서

아무 것도 없이 검게만 보이는 화면을 뜻함.

과학 기술 발전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기도 함.

 

 

 

  여기에서는 시즌별로 특히 괜찮았던 에피소드 하나씩만 소개하겠다.

  개인적으로 시즌1의 에피소드2만 빼고는 전부 좋았다.  하지만 좋았던 에피소드를 전부 소개하는 건 무리라, 시즌1의 에피소드 1과 시즌2의 에피소드2의 줄거리만 이 포스트에 올리겠다.

 

 

  ※ 경고 :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래의 글을 읽지 마시오~~!

 

 

 

  ◎ 시즌1의 에피소드1 - The National Anthem(국가)

 

  블랙 미러 중 이 에피소드에만 SF적인 요소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만 놓고 보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풍자 드라마라고 봐도 된다.  

 

 

  어느 날 영국 공주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납치범이 공주의 목숨을 놓고 하는 요구가 기가 막히다.  한 나라의 공주 정도 되는 사람을 납치했다면 대단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인 요구를 할 것 같은데...  이 납치범의 요구는 황당하게도 '오늘 오후 4시에 영국 수상이 돼지(!)와 성관계를 갖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내보내라.  안 그러면 공주를 죽이겠다.' 는 것이다...! -0-;;

 

  이른 새벽에 전해진 날벼락 같은 소식에 수상 관저는 침통한 분위기가 된다.

  물론 수상도, 수상의 보좌관들도,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결코 들어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돼지와의 성관계라니, 수상 아니라 그 누구인들 그런 요구를 따르려 하겠는가...!  이 정도면 인격 살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러나 수상이나 보좌관들의 표정을 보면, 입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도 모두들 수상이 납치범의 요구를 따르게 되는 상황도 분명히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납치범이 공주를 죽이는 시한을 '오늘 오후 4시' 라고 못 박았기 때문에 납치범의 신원이나 위치를 알아내 공주를 구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그리고 '그냥 공주' 가 납치되어 살해당한다고 해도 큰일인데, 납치당한 공주는 '평소 페이스북으로 국민들과 자주 소통을 하고 환경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여서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공주' 이다.  만일 수상이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 때문에 납치범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정말로 공주가 살해된다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마어마한 파장이 생길 것이다.

 

  수상은 서둘러 공주를 구출할 방법을 찾으라고 한다.

  공주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수상 자신을 위해서라도, 공주는 반드시 무사히 구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상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계속 꼬인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종 경쟁에 눈이 뒤집힌 미디어와, 겉으로는 선과 정의를 말하지만 마음 속에는 비열한 욕망을 지닌 대중 때문이다. 

 

 

 

  사건 초기만 해도 국민 여론이 수상 편이라서 수상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수상의 아내는 한두 해 정치판을 지켜본 게 아니라 결국에는 남편이 굴욕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남편에게 매달려 운다.  그런가 하면 여왕은 여왕대로 수상에게 전화해서 공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식의 압력을 넣는다.

  다행히도 국민의 반응은 여왕과는 다르다.  공주가 납치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상이 납치범의 요구대로 굴욕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80%나 된다.  수상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왕실이나 정치권에서도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공주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덮어놓고 수상에게만 비난을 퍼붓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수상 측근이 비밀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새어나가면서 상황이 악화된다.

  수상이 명령한 공주 구출 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수상 보좌관이 수상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별도의 프로젝트를 지시했다.  포르노 배우에게 돼지와 성관계를 갖게 하고,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서 포르노 배우의 얼굴 부분만 수상의 얼굴로 바꾸어 방송하자는 계획이다. -.-;;  하지만 녹화된 영상을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생방송으로 나가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조작하라니, 제 아무리 일류 컴퓨터그래픽팀이라도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통할 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는 촬영팀 직원 때문에 모든 게 뒤집어진다.  촬영팀 직원이 포르노 배우를 폰카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그러자 납치범은 정부가 자신을 속이려고 한다는 걸 눈치채고 분노한다.  그리고 분노와 경고의 뜻으로 두 가지 물건을 방송국으로 보낸다.  즉, '공주의 잘린 손가락'(!) 과 '공주의 손가락을 자르는 동영상' 을 보낸다.

  공포에 질린 공주가 몸부림치는 가운데 납치범이 공주의 손가락을 잘라내어 내보이는 모습이 TV에 보도되자, 국민 여론은 단숨에 뒤집힌다.  그 전까지는 수상이 납치범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공주를 살리기 위해 납치범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86%까지 치솟는다...!

 

  이제 수상의 마지막 희망은 공주 구출 계획이 성공하는 것이다.

  납치범이 공주를 납치해 가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알아낸 후 서둘러 특공대를 투입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납치범의 낚시(!)에 걸린 것이다.  그렇게 수상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진다.

 

  이 와중에 특종만을 추구하는 언론의 욕망과, 기자와 공직자 간의 추악한 유착이 드러난다.

  방송국의 여기자가 특종을 노리고 구출 계획 현장에 몰래 들어가 촬영을 하다가 특공대에게 들킨다.  그리고 도망치다가 납치범으로 오인받고 총에 맞아 다친다.  만일 정말로 그 자리에 공주와 납치범이 있었더라면, 여기자의 욕심 때문에 구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공주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여기자가 구출 계획 장소를 알아내게 된 과정도 문제다.  평소에 뉴스 정보를 얻으려고 수상 집무실의 남직원과 자주 접촉했던 모양인데, 그 남직원과 부적절한 거래를 해서 구출 계획에 대해 알게 되었다.  즉, 여기자는 자신의 벗은 모습을 폰카로 찍어 남직원에게 보내고, 그 남직원은 그런 사진 받았다고 입이 귀에 걸려 좋아라 하며 기밀사항을 누설한 것이다. (이래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나왔다는... -.-;;)

 

  수상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납치범이 공주를 죽이고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수상은 끝장난다.  사람들은 수상이 자기 자존심만 지키느라 가엾은 공주가 죽는 걸 방치했다며 폭동을 일으킬테고, 왕실과 정치권 등 사회 지도층도 수상을 매장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이 끝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수상은 물론이고 수상 가족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보좌관에게 들으면서, 수상은 한 마디도 못 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거나 불안하게 눈길을 이리저리 돌린다.  보좌관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수상 역시 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저 코 앞에 닥친 끔찍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결국 수상은 납치범의 요구에 굴복한다.  

  촬영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누군가가 건네주는 약을 단숨에 삼킨다.  아마 비아그라나 환각제, 혹은 양쪽 모두일 것이다.  누구라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을테니까.  더욱 잔인한 건, 그런 더러운 일을 짧게 끝내지도 못 하고 길게 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자의 말인즉슨, 너무 짧게 끝내면 수상이 마치 그 일을 즐기는 것 같은 인상을 국민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수상과 돼지의 성관계가 방송되기 얼마 전부터, 영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증발하기라도 한 것 마냥  영국의 모든 거리에서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차도에도, 주택가에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도, 사람이나 자동차를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집이나 직장이나 심지어 술집에 모여 앉아서 눈을 반짝거리며(!) 곧 있을 방송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밥만 먹고 있고

돼지 앞에는 수상에게 도움이 될 포르노가 상영 중이고

수상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란 표정을 짓고 있는...

 

 

  여기에서 인간의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관음증적인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수상은 당장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TV 카메라 앞에 서는데, 그런 수상의 모습을 보면서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에 술잔을 들고서 환호성까지 지른다. -.-;;  수상이 굴욕적인 행동에 나선 것은 공주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 여론에 밀린 탓이 크다.  그런데 그 국민들은 더 이상 공주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들 눈 앞에서 곧 펼쳐질 전무후무한 구경거리에 몸이 잔뜩 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수상이 절박한 표정으로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합니다." 라고 할 때도, 사람들 얼굴에는 동정심이나 안타까움 대신 웃음과 기대가 나타날 뿐이다.

  드디어 납치범이 지시한 4시가 되어 수상이 돼지와 성관계를 시작한다.  그러자 모두들 한탄과 환호성이 뒤섞인 기묘한 소리를 내고, 역겹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색다른 볼거리에 눈을 반짝인다.  그러다가 수상과 돼지의 성관계가 1시간이나 지속되자, 사람들 얼굴이 점차 충격을 받은 듯 굳어진다.  몇몇 사람은 차마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얼굴을 돌리지만, 대다수 사람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뭐에 홀린 것처럼 TV에서 눈을 떼지 못 한다.   

 

  이 와중에 또 다른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다.

  납치되었던 공주가 풀려난다.  그런데 진정제를 맞은 상태로 풀려나서 몽롱한 정신으로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쓰러진다.  문제는, 위에 쓴대로 모든 사람이 TV 앞에 붙어있어서 길거리에 사람이 아예 없다는 점이다. (하다 못 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경찰도 없음!  경찰조차 경찰서에서 TV를 보는 모양임! -0-;;)

  결국, 공주는 수상이 돼지와 성관계를 맺는 방송이 나가는 내내 방치되어 있다가, 그 방송이 끝난 후에야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사람들은 공주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수상을 압박해 치욕스런 짓을 하게 했다.  그런데 정작 공주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모두가 수상과 돼지의 모습을 구경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아무도 공주를 돌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막바지에 벌어지는 반전...

  수상은 돼지와의 일이 끝난 후 화장실에 되는대로 주저앉아 마구 토한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다 내던진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빛이 역력하다.  화장실 밖에는 보좌관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  그 때 누군가 보좌관에게 전화를 해서 보고를 한다.  공주가 쓰러진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이다.  여기까지야 시청자 모두가 이미 아는 사실인데...

  공주의 생환 소식에 이어 놀라운 소식 두 가지가 더 나온다.  일단, 납치범이 공주에게서 잘라낸 것이라며 보낸 손가락이 DNA 조사 결과 남자의 손가락으로 밝혀졌다...!  알고 보니 납치범이 자기 손가락을 잘라 공주의 손가락인 것 마냥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또한, 공주가 길거리 CCTV에 찍힌 시간이 3시 30분이라고 한다.  수상이 돼지와 성관계를 시작한 시간이 납치범이 정해준 4시였는데, 그 30분 전에 공주는 이미 풀려났던 것이다.  즉, 수상이 그런 끔찍한 일을 하지 않아도 공주는 어차피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수상은 겪지 않아도 되는 굴욕을 겪은 것이다...! 

 

  보좌관은 납치범이 노린 게 무엇이었는지 드디어 눈치챈다.

  다들 공주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수상을 그 지경으로 몰아넣고는, 수상의 굴욕적인 모습을 구경하느라 공주가 풀려나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는 상황...  바로 그 모순된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보좌관은 공주가 3시 30분에 풀려났다는 사실을 사건 보고서에서 빼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누구도, 특히 수상은 절대로 그 일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나 한 인간으로서나 온 세상에 치욕스런 보습을 보인 수상에 대한 배려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일이 그럴만한 가치와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만, 수상의 굴욕감이 조금이나마 덜어질테니까.

  보좌관이 "당신이 공주를 구했습니다.  공주가 무사하다고 합니다." 라고 화장실 문에 대고 말하자, 수상은 엉망이 된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아내가 전화를 걸자 받지 않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로부터 1년 후...

  겉으로만 보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다.  수상은 부부 동반으로 학교를 시찰하며 학생들 앞에서 공을 차는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공주 역시 임신을 한 행복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공주의 납치범이었던 저명한 미술가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가를 두고 문화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기는 하지만, 일단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는데 모든 게 그대로 일 수는 없다.  수상 부부는 언론의 카메라가 자신들을 비추는 동안에는 서로 손을 잡거나 상대방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수상 관저의 문이 닫히고 카메라에게서 벗어나자 곧 위태로운 모습을 보인다.  수상의 아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계단으로 올라간다.  수상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아내를 부르지만, 아내는 아무 대답 없이 수상을 흘깃 보고 2층으로 가버린다.  수상은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군다.   

 

 

 

 

  ◎ 시즌2의 에피소드2 - White Bear(하얀 곰)

 

  주인공은 어떤 젊은 여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웬 낯선 집의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다.

  양쪽 팔목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주인공이 앉아있는 의자 앞에는 알약이 한 무더기 떨어져 있다.  마치 자살하려고 약을 잔뜩 먹고서 팔목을 그었다가 어찌어찌하여 살아난 것 같은 모양새다.  혼란스런 기분으로 맞은 편에 있는 TV를 보니, 낯선 하얀색 기호가 덩그러니 떠있다.  

 

 

 

TV에 나타난 문제의 특이한 기호.

(그런데 LG TV로구만... ^^)

 

 

  주인공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자신이 깨어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간다.

  1층에는 주인공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갈증을 달래줄 물, 민소매옷 위에 걸칠 운동복 상의, 밖에 나가는 데 신을 신발)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과 어떤 남자가 다정한 포즈로 찍은 사진이 든 액자가 있고, 그 액자 위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작은 사진이 별도로 꽂혀 있다.  그 외에도 달력이 벽에 걸려있는데, 그 달 날짜 중 절반이 넘는 날짜 위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X가 그어져 있다.  

  자신의 사진이 액자에 고이 들어간 채 가구 위에 있는 걸 보니, 아무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집이 자신의 집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전혀 기억 못 하지만, 심한 두통과 함께 어떤 이미지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그 중에는 사진 속 여자아이도 있다.  아무래도 사진 속 여자아이는 자신의 딸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래서 여자아이 사진을 옷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보니, 그 곳은 한적한 주택가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요청해야겠는데, 마침 이 건물 저 건물의 유리창에 바짝 붙어 서서 주인공을 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인공은 그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며 도와달라고 외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빤히 쳐다보며 휴대폰으로 주인공을 촬영할 뿐이다.

 

  주인공은 이런 기묘한 상황에 점점 두려워지는데 곧 정말로 무서운 일이 터진다.

  난데없이 복면 쓴 남자가 나타나더니 주인공에게 총을 겨누며 쫓아온다. (편의상 이 남자를 사냥꾼A라고 하자.)  주인공은 왜 사냥꾼A가 자신을 노리는 건지 이유도 모른 채 겁에 질려 도망친다.  정신없이 뛰면서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안 한다.  그저 주인공과 사냥꾼A를 쫓아다니며 휴대폰으로 촬영할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총 들고 쫓아오는 놈보다 좀비 같은 구경꾼들의 모습이 더욱 소름끼침.)  엎친 데 덮친다고, 가면을 쓴 남녀(이 사람들을 사냥꾼B와 사냥꾼C라고 하자.)까지 나타나 각각 몽둥이와 전동톱을 휘두르며 주인공을 위협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군복을 입은 남녀 한 쌍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이들을 군복남과 군복녀라고 하자.)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군복남은 사냥꾼A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고, 주인공은 군복녀와 함께 처음 의식을 차렸던 집으로 도망친다.

 

  겨우 대화를 할 짬이 생기자, 군복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준다.

  어느 날 갑자기 TV에 기묘한 기호(위의 사진 속 기호)가 나타나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면서 휴대폰 촬영이나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일부 사람들은 그 기호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물론 주인공과 군복녀도 영향을 안 받은 사람임.), 그런 사람 중 일부는 소위 사냥꾼이 되어 타인을 죽이고 다닌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누구도 자신들을 말리거나 처벌하지 않으니, 그저 재미로 사람 사냥에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아무 것도 기억 못 하는 것과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 모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요즘은 그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며, 무법천지로 변한 세상에 절망한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을 시도하거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군복녀는 이 끔찍한 상황을 끝내기 위해, 문제의 기호를 송출하는 TV 전파 송신소를 파괴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 송신소는 화이트 베어라는 곳에 있다며 주인공에게 함께 가서 불을 지르자고 한다.  주인공은 화이트 베어란 이름이 어쩐지 귀에 익다고 생각한다.  아까 집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심한 두통과 함께 몇몇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이트 베어에 가는 게 겁이 난다.  절대로 그 곳에 가서는 안 될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잔인한 현실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군복녀 뿐이다.  게다가 사냥꾼들과 구경꾼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시 몰려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군복녀와 함께 움직인다. 

 

  두 사람은 사냥꾼들에게 쫓기다가 자신들처럼 기호의 영향을 안 받는 어떤 노인의 차를 얻어타게 된다. 

  노인은 두 사람에게 좀 거친 태도를 보이면서도(하긴 이 미친 세상에 무슨 예의범절을 따질까...) 안전한 장소가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노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꺼림찍한 기분을 느꼈는데, 노인이 안전한 장소라고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 안전한 장소가 숲이죠?" 라고 말한다.  노인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만 주인공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그냥 갑자기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인도 사냥꾼이다...! (이 노인을 사냥꾼D라고 하자.)  사냥꾼D는 두 사람을 위협해 숲 속으로 데려가는데, 거기는 고문을 받고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채 죽은 사람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끔찍한 곳이다.  하마터면 주인공도 사냥꾼D의 전동드릴에 등이 뚫릴 뻔했는데, 다행히 군복녀가 사냥꾼D를 처치해서 다시 도망치게 된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화이트 베어 송신소에 도착한다.

  주인공은 수시로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에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송신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군복녀의 재촉에 마지못 해 들어간다.

  군복녀가 송신소 안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려 할 때,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사냥꾼 B, 사냥꾼 C, 구경꾼들이 나타난다.  군복녀가 사냥꾼 C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 동안 항상 겁에 질려 아무 것도 못 하고 군복녀에게 도움만 받았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용기를 낸다.  그래서 사냥꾼 B에게서 총을 빼앗아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데...

 

  방아쇠를 당긴 순간, 주인공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벌어진다.

  주인공이 쏜 총에서는 총알 대신 엉뚱하게도 종이 조각(축제나 파티 때 공중에서 뿌리는 여러 색깔의 사각형 종이)이 튀어나온다.  곧 이어 주인공 뒤편의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갈채와 함께 강한 빛이 쏟아진다.  

  그리고 사냥꾼들은 물론이고 군복녀까지 가세해서, 뜻밖의 상황에 멍해진 주인공을 강한 조명이 비치는 무대에 놓인 의자에 앉힌다.  그리고 의자에 붙은 족쇄로 주인공의 손목과 발목을 의자에 묶기까지 한다.  이것만으로도 주인공의 머리는 뒤죽박죽이 될 지경인데, 한 술 더 떠서 아까 군복녀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냥꾼D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등장한다...!   그리고 사냥꾼 B, C, D와 군복녀가 나란히 서서, 여전히 박수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다.  흔히 연극을 끝낸 배우들이 관중에게 인사하는 식으로 정중하게 말이다.

 

  마침내 드러나는 끔찍한 진실...

  알고 보니 주인공은 약혼자(처음 의식을 차린 집의 액자 속 사진에 나오는 주인공과 다정한 포즈를 취한 남자)와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6살 난 여자아이(주인공이 자기 딸이라고 추측했던 사진 속 소녀)를 납치해서 잔인하게 고문한 후 죽인 것이다.  약혼자는 아이를 고문해서 죽이고 시신을 불태우는 일을 맡았고, 주인공은 그 광경을 태연히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나중에 두 사람 모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약혼자는 중간에 자살해버렸다.  사람들은 약혼자의 자살을 천벌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의 처벌을 피하려는 비겁한 행동으로 보고 더욱 분노했다.  또한 주인공이 모든 일은 죽은 약혼자가 저질렀고 자신은 약혼자의 강요로 가담했다고 변명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배심원들과 판사는 주인공이 약혼자와 같은 방식으로 도피하지 못 하게 하면서(즉,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자살하지 못 하도록 함.) 죽은 아이가 겪었을 죽음의 공포를 똑같이 겪어야 하는 벌을 내린다.  더구나 그 벌을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겪어야 한다.  즉, 주인공이 이유도 모른 채 사냥꾼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에야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전부 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바탕 겪고나면 최첨단기술의 힘으로 그 기억을 삭제당한 채 또 다시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의문의 기호와 '화이트 베어' 에 얽힌 수수께끼도 풀린다.

  사람들을 좀비 아니면 살인광으로 만들었다던 의문의 기호는, 알고 보니 약혼자의 뒷목에 있던 문신이었다.  그리고 화이트 베어는 말 그대로 '하얀 곰' 을 뜻하는데, 납치되어 살해된 소녀가 평소 아끼며 들고 다니던 하얀색 곰인형이다.  경찰이 납치당한 아이를 찾다가 그 곰인형 하나만 발견했고, 납치사건이 큰 이슈가 되면서 그 곰인형은 납치된 아이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떠올랐다.  결국, 주인공이 벌인 범죄에 얽힌 두 가지 상징(기호, 화이트 베어)가 주인공을 벌주는 연극 속 주요 소재로 이용된 것이다. 

 

 

 

주인공을 가운데 두고 관객에게 인사하는 사냥꾼들과 군복녀.

화이트 베어에서 집으로 이송되며 조리돌림 당하는 주인공.

 

 

  이 에피소드의 엔딩 타이틀이 나온 후 단편적인 몇 장면이 더 이어진다.

  또 다시 기억을 삭제당하고 의식을 잃었던 주인공이 깨어나자, 군복남.군복녀.사냥꾼 역을 맡은 이들이 마치 평범한 영화를 찍는 배우들처럼 촬영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배우가 아니라 주인공을 벌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 말하자면 일종의 고문관이다. 

  그리고 구경꾼들의 모습도 보다 자세하게 나온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화이트 베어 정의 공원' 에 온다.  아무리 봐도 동물원이나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화기애애하고 신나는 분위기다.  그리고 본격적인 '관람' 에 앞서서 고문관들에게 '관람 규칙' 을 듣는데, 주인공이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위험인물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으라고 한다.  마치 사파리 투어에 앞서 가이드가 '차량에 안전장치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유리창에 너무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호랑이와 사자는 맹수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라고 안전수칙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기분이 참 묘하고 복잡해진다.

  잔혹한 범죄 소식이 보도될 때면, 많은 사람이 자기 일처럼 분노하며 법에 규정된 처벌이 그 잔혹함의 대가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성토한다.  그리고 "저 인간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피해자가 당한 그대로 당하게 해야 하는데!" 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일을 저지른 데다가, 피해자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것 같은 뻔뻔한 태도까지 보이니, 대중의 분노가 폭발한 나머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만일 이 에피소드가 주인공이 피해자의 기분을 그대로 느끼도록 죽음의 공포를 맛보는 벌을 받는 걸로 끝났더라면, 차라리 속시원하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엔딩 타이틀 부분에 나오는 구경꾼들의 모습을 보면, 속이 시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화이트 베어 정의 공원' 이라는 체험공간(!)을 개장한 취지는 분명히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 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구경꾼들의 행동이나 반응을 보면, 이미 인과응보니 정의실현이니 하는 대의명분이 허락하는 수준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 같다.  주인공이 다시 원래의 집으로 끌려갈 때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살인자니 뭐니 외치지만, 그건 정의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누구 하나를 목표로 찍어 집단으로 위협하며 즐기는 광기로 보일 뿐이다.  요즘 학교에서 문제되는 '집단 괴롭힘' 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며 미래판 조리돌림이라고나 할까?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의 제목 '정의란 무엇인가' 처럼, 정의란 정말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법과 도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의의 한계선일까?  또 어디서부터 불의가 시작되는 걸까?  악행을 저지른 자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은 분명히 정의로운 게 맞다.  하지만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정확한 기준은 무엇이며, 정의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 건지는, 도무지 가늠이 안 된다.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즌3 - 'Shut Up and Dance(닥치고 춤 춰라)'(http://blog.daum.net/jha7791/1579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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