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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 - 암담한 시대의 유쾌한 청춘 이야기

Lesley 2017. 2. 15. 00:01


  지난 크리스마스에 본 '족구왕' 을 소개하려 한다. 

  이 영화는 꽤 오랫동안 외장하드에 저장해두고 안 봤던 영화다.  어째서 안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제목이 워낙 촌스럽고 유치해 보여서 안 봤을 것이다. ^^;;  어쩌면 앞으로도 몇 년은 안 봤을지도 모르는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작년 하반기부터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희대의 정치 스캔들 때문이다.  그 스캔들 주역 중 한 사람의 아들이 이 영화에 비중있게 나온다고 해서, 어떤 역할로 나오나 궁금한 마음에 본 것이다.  


  그렇게 영화 외적인 면에 관심 갖고 본 영화인데도 의외로 재미있게 봤다.

  대단한 감동이나 요절복통 할 정도로 재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발랄한 분위기와 만화 같은 장면 연출로 소소한 웃음을 주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요즘 젊은이들의 어두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몇 년 전에 본 영화 '1999, 면회' 와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오래간만에 그 영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 1999, 면회(http://blog.daum.net/jha7791/15790964)






  ◎ 홍만섭이 그리운 학교로 돌아오다.  그러나...


  '홍만섭(안재홍)' 은 이제 막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식품영양학과 학생이다.

  버스에서 내려 캠퍼스를 바라보는 만섭의 표정을 보면, 그 동안 학교를 무척 그리워했다는 것과 앞으로의 학교 생활에 대해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희망과 현실은 다른 법...!  우리의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은 여러가지로 어둡기만 하다.


  먼저, 새 학기 등록부터 삐그덕거린다.

  집에서 등록금을 대줄 형편이 아니라, 입대하기 전에도 학자금 대출로 등록금을 해결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미 대출한 금액의 이자를 연체했기 때문에 새 학기에는 대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제 막 제대한 처지에 돈을 모아두었을 리도 없다.

  그래서 제대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찾아야 할 판국이다.  물론 등록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학교 등록이라는 것을 한 학기 내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는다 해도 시간 맞춰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배정받은 기숙사 방의 공기가 꽤나 삭막하다.

  룸메이트 중 가장 나이 많은 이가 공교롭게도 같은 학과 선배인데, 책상에 D-day까지 붙여놓고 공무원시험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선배가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거야 본인의 자유지만, 처음 만난 만섭에게까지 지금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느니 군바리 티 내지 말고 연애할 생각도 하지 말고 학교 다니라느니 하며, 고압적인 태도로 잔소리를 퍼붓는다. (만섭에게는 군바리 티 내지 말라면서, 정작 자신은 군대에서 고참이 신참에게 똥군기 잡는 태도로 만섭을 대함. -.-;;)

  나머지 룸메이트들(특별출연 혹은 우정출연으로 나온 듯한 김창환과 한근섭)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앞뒤 상황 보면 이 학생들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 같다.  이들은 선배처럼 살벌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지만, 만섭을 소 닭 보듯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필요한 경우 빼고는 아예 관심을 끊다시피 하는 이쪽이 선배보다 더 삭막하다고 할 수 있다.  




  ◎ 복학생의 사랑 - 족구와 여자


  만섭은 학교에서 두 가지 대상과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하나는 군대 가기 전부터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리고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무척 즐겼던 게 분명한 '족구' 다.  또 하나는 다른 학과 학생으로 보이는, 그런데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된 '여자' 다. 


  만섭은 같은 학과 동기생 '박창호(강봉성)' 와 다시 만난다.  

  복학생이라면 으레 겪는 일이지만 만섭은 복학한 뒤로 학교에서 겉돌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은 만섭이 군대에 가있는 동안 역시 군대에 가거나 졸업을 했고, 낯선 이들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재회한 창호가 무척 반갑다. 

  그런데 만섭에게 창호가 더욱 반가운 것은, 창호도 만섭처럼 족구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학교에 돌아온 후 예전의 족구장이 테니스장으로 바뀐 것을 보고 무척 서운해했다.  두 사람은 아쉬운 대로 건물 안에서 우유곽을 접어 만든 간이공(?)으로 족구를 즐긴다. (솔직히 우유곽으로 만든 공을 보고 놀랐음.  요즘 학생들도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구닥다리 방식을 그대로 쓸 줄 몰랐음. ^^;;)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한심하다는 눈길을 받기도 하고, 실수로 성질 괄괄한 여학생을 우유곽으로 맞췄다가 그 여학생에게 우유곽을 짓밟히는 참사(!)를 겪기도 하지만... 


  그리고 영어회화 수업 첫날, 예쁘장하고 도도하고 발랄한(그러나 입이 꽤나 거친) '서안나(황승언)' 를 보고 반한다...!

  마침 외국인 강사가 '두 명씩 한 조가 되어 영화 속 장면을 골라 영어로 연기하기' 를 과제로 내준다.  그저 조용히 자기 일만 하는 다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였던 만섭이건만, 뜻밖의 박력(!)을 보인다.  안나에게 같은 조가 되자고 제의한 것이다.  물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게 말 그대로 함께 과제만 하자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만섭은 착하고 성실하며 듬직하지만 요즘 여자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스타일의 남자는 아니다.  그에 비해 안나는 학교 홍보모델로 뽑혔을 정도로 학교 안의 모든 이가 인정하는 퀸카(!)다.  그러니 얼핏 생각하면 퇴짜 맞기 딱이겠지만, 의외로 안나는 만섭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안나가 선뜻 만섭과 같은 조가 되기로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안나가 영어회화 수업을 듣는 동안 복도에서 기다렸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안나와 함께 어디론가로 가던 '강민(정우식)' 이란 남학생이 있다.  그렇게 붙어다니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둘 다 치기 어린 자존심에 아직 서로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친구 이상 애인 이하' 인 사이로 다니는 중이다.

  그런데 만섭이 와서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냐고 묻자 강민이 삐딱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말에 화가 난 안나가 강민 보란 듯이 만섭의 제의를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만섭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명함이라며 엉뚱하고 발랄함이 넘치는 명함을 건네주자, 안나가 폭소를 터뜨린다.  만섭이 안나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자 강민은 당연히 기분 상한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잔잔하게 흐르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가 갑자기 삑사리(!) 나는 연출이 재미있음. ^^)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는 만섭의 명함.

굳이 명함 속 장면을 실제로 보여주는 만섭. ^^




  ◎ 우리에게 족구를 허하라...!


  족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만섭은 제대로 된 족구장에서 족구를 하고 싶다.

  마침 '총장과의 대화' 행사가 열린다고 해서 그 자리에 참석해서 족구장을 만들어달라고 건의한다.  참석한 학생 대부분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인데, 총장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총장과의 대화' 에서 창호 말고 또 한 명의 우군을 얻게되었으니, 뜻밖에도 여학생인 '이미래(황미영)' 다. (단, 미래는 족구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무척 뚱뚱해서 살을 뺄 목적으로 족구를 하기로 결심했음.  그러나 미래는 족구공 대신 쓰는 우유곽을 짓밟는 재주 밖에 없으니... ^^;;) 

  총장도 은근히 찬성한다는 뜻을 보였겠다, 학생들의 여론만 모을 수 있다면 족구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만섭, 창호, 미래가 뭉쳐(거기에 안나까지 도움을 주며) 족구장 건립을 위한 서명운동을 펼친다. 



학생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관심 끌려고

물개 같은 묘기를 보이는 만섭. ^^



  이 때 강민이 찾아와 다짜고짜 시비를 건다.

  강민은 원래 국가대표선수로 뽑혔을 정도로 우수한 축구선수였는데, 그만 큰 부상을 입고 축구를 그만 뒀다.  그래도 얼굴 잘 생겼겠다, 국가대표선수였으니 유명세도 있겠다, 안나와 함께 학교 홍보모델로 활동할 정도로 킹카 취급을 받는다.  아마도 안나와는 같이 홍보모델을 하면서 알게 되어 썸(!)을 타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전날 밤에 만섭과 안나가 영어회화 과제 때문에 영화를 보느라 시청각실에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밖에서 두 사람을 감시(?)하던 강민은, 창문에 비치는 두 사람의 그림자 모양을 보고 오해를 하게 된다. (그림자는 왜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런 오묘한 모습으로 나타났을까요? ^^;;)  그렇잖아도 축구를 그만 두게 된 일로 심사가 뒤틀려있는데, 마음에 둔 안나가 만섭과 깊은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일대일로 족구를 해서 승부를 내기로 한다.

  강민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교내 여기저기에 금세 소문이 퍼져 너도 나도 구경하러 온다.  심지어 족구 경기를 스마트폰으로 녹화해서 다른 친구들에게 보내주는 이까지 있다.  강민이 부상을 당했다고는 해도 잘 나가는 축구선수였으니 유리할 것 같았지만, 만섭이 현란한 족구 솜씨를 보이며 이긴다! 

  이 승부로 만섭은 일약 유명인사가 되고, 만섭이 그토록 원했던 족구장 건립이 성사된다.  나아가 곧 있을 교내 체육대회에 족구 종목이 생기기까지 한다...!   만섭과 강민의 멋진 경기를 보고 반한 학생들 사이에 족구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 다소 뻔하지만 행복한 결말, 그리고 반전.


  족구 경기는 만화 같은 상상력이 넘치는 연출로 진행된다.

  이 영화 분위기에 잘 적응한 사람이라면 적당히 웃으며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유치찬란함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면서 짜증낼 지도 모른다. ^^;; 


  어쨌거나 만섭, 창호, 미래 삼총사로 이루어진 식품영양학과 팀은 승승장구하며 결승전까지 진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섭이 눈부신 활약을 하고 창호는 보조를 하고 미래는 그냥 깍두기 역할을 맡아 결승전까지 갔다. ^^;;  하지만 만섭이 부상하면서 강민이 들어간 해병대 팀에게 질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우연과 운명(?)이 겹치면서, 있으나 없으나 했던 미래가 뜻밖의 재주(?)를 선보이고, 항상 만섭에게 잔소리만 퍼붓던 기숙사 선배까지 참가하면서, 마침내 식품영양학과 팀이 우승한다.


  이 영화에 비중있게 등장한 인물 모두가 자기 짝을 찾는다.

  우승한 식품영양학과 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패배한 강민조차...  승부가 끝난 족구장 여기저기에서는 커플끼리 뭉쳐서 족구 경기 후속으로 키스 경기라도 벌이는 것 같은 광경이 나타난다.

  짝 없이 서있는 건 우리의 주인공 만섭 뿐이다.  만섭은 강민과 안나가 키스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좀 허탈한,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여한은 없다.' 라는 미소를 지으며 맑은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 드디어 영화의 결말...

  푸른 바다를 따라 난 도로 위로 자동차 한 대가 시원하게 달린다.  상쾌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영화 속 흐름과 너무 동떨어진 장면이라 위화감도 느껴진다.  자동차는 고급 외제 승용차인데 운전자는 뜻밖에도 만섭이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만섭의 모습이 잠시 나오는데, 지금까지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깔끔하다 못 해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만섭은 저렇게 달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속도를 급히 올린다.  그러더니 자동차가 저 멀리 가서 커브를 돌아 관객 시야에서 사라진다.  잠시 후 자동차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커브길에서 밝고 큰 빛이 확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SF영화에서 시간이동 또는 공간이동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연출이다...!





  ◎ 홍만섭은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일까?


  유쾌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이 영화 속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어쩌면 주인공 만섭은 미래에서 온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면, 즉 만섭이 탄 자동차가 저 멀리 가서 관객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 그 쪽에서 평범하지 않은 빛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나서야 '앗!  정말로 만섭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었어?' 하게 된다.

  그런 반전을 암시하는 단서가 영화 여기저기에 나왔지만, 정작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런 단서들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만섭의 농담이나 만섭의 취향을 보여주는 장치 정도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만섭이 미래에서 영화 속 시점인 2013년으로 왔다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만섭이 영어회화 과제를 위해 고른 영화가 1980년대의 히트작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다.  


  만섭은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속 한 장면을 뽑아 영어회화 수업 과제(영어대사로 연기하기)를 하기로 한다.

  물론 신세대 나는 만섭이 이런 구닥다리(!) 영화를 고른 걸 알고 기막혀 한다.  그래서 만섭과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릴 뿐 전혀 집중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볼 때에는, 그저 만섭이 고전적인(?) SF영화를 좋아하나 보다, 혹은 요즘 세태나 유행과는 동떨어진 만섭의 인물됨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인가 보다 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내가 엑기스(!)로 생각했던 부분은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만섭의 말이다.  '백 투 더 퓨처' 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만섭이 정말로 시간여행자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안나가 '백 투 더 퓨처' 가 그리도 좋냐고 한심하다는 듯 물었을 때, 만섭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 한 채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했던 게 재해석(!) 된다.  어쩌면 만섭은 스스로가 시간여행을 했기 때문에, 과거 사람들이 시간여행에 대해 어떤 식으로 상상했는지가 잘 드러나는 '백 투 더 퓨처' 에 그토록 관심을 보인 건지도 모른다.



  둘째, 만섭이 안나에게 자신이 시간여행을 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만섭은 안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시간여행자라고 암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말한다. 

  그러나 안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안나가 만섭과 데이트를 한 이유는 강민의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강민이 나타나자 거기에 온통 신경이 쏠려 만섭의 말을 건성으로 들은 것이다.  그리고 만섭의 말에 집중했다 한들,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썰렁한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만섭 : "음... 안나씨는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제일 하고 싶으세요?"
  안나 : (강민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저요?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고 싶어요."
  만섭 : (안나의 성의 없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저랑은 좀 다르네요."
  안나 :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그래요?"
  만섭 : (진지한 말투로) "저는 사실, 미래에서 왔습니다."
  안나 : (만섭의 뒤편으로 강민의 자동차가 오는 걸 보고 얼른 말하는) "오빠, 우리 이거('백 투 더 퓨처' 비디오 테이프) 같이 봐야 되지 않아요?"
  만섭 : (갑자기 화제가 달라지자 얼떨떨해 하면서) "그, 그렇죠."
  안나 : (만섭의 손을 잡아 끌며) "지금 빨리 보러 가요."



  셋째, 만섭이 영어회화 과제를 통해 안나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시간여행자라고 말한다.  


  드디어 만섭이 안나와 영어 회화 과제 발표를 한다.

  원래는 등록기간 동안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 해서 그 동안 들은 영어회화 수업을 취소해야 한다.  하지만 외국인 강사에게 부탁해서 안나와 준비한 과제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 때까지는, 그저 만섭이 안나를 좋아하고 있으니 안나와 함께 하는 과제 발표를 꼭 하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안나가 강민을 선택하기는 했어도, 만섭이란 순수한 남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안나도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자세로 만섭과 발표에 나선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백 투 더 퓨처' 속 영어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조롭게 발표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만섭이 다른 이야기(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며 안나를 사랑한다는 내용임...!)를 한다.

  그 말을 전부 영어로 한다.  만섭의 영어 발음은 서툴지만, 그게 오히려 만섭의 진심을 드러내는 영화적 장치가 된다.  만일 만섭이 유창한 영어로 고백했더라면, 우직하고 소탈한 만섭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아 어색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섭의 영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 입장이 아님.  만섭은 발음은 서툴지만 간결한 문장으로 자기 의사를 분명히 전할 줄 아는데, 나는 영어로 길 묻는 외국인 만나면 '어, 어, 그게, 그러니까...' 하며 한국어로 버벅거림. ㅠ.ㅠ)



이 장면의 연출도 멋짐.

(천장의 강한 불빛으로 두 사람이 그림자처럼 보임.)



  만섭 : (정해진 영어대사 대신 다른 말을 영어로 하는) "당신이 믿을 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인..."
  안나 :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해 하는)
  만섭 : "...2063년의 미래에서 왔습니다."
  안나 : (소리는 안 내고 입술 모양으로 '뭐 하는 거야?' 라고 하는)
  만섭: "그 때 저는 직장암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습니다."
  안나 : (당황해하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하는)
  만섭 :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천사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제가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지루한 인생을 살았다며, 천국에 가서도 즐기지 못 할 거라 말했습니다."
  안나 : (살며시 웃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만섭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만섭 : "그리고 저를 2013년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스물 네 살이었던 때로 말입니다."  (얼굴 찌푸리며 과장된 말투로) "젠장, 저는 군대를 다시 가야했습니다."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그래도 이십대로 돌아오니 정말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때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밤낮 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파묻혀 살았으니까요.  2013년으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먼저, 족구를 매일 하고 싶었습니다"
  안나 : (풋 하고 웃는)
  만섭 : "또 뭘 할까 생각하던 중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살면서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겁쟁이처럼 그녀에게 고백 한 번 못 해 보고 멀리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안나 : (미묘하게 슬프게 변하는 표정)
  만섭 : "정말 바보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에게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번엔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잠시 멈췄다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나 : "!"
  만섭 : (담담한 말투로, 그러나 감정을 담아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안나 : (눈물 글썽이며 역시 영어로) "고마워요."




  ◎ 현실은 현실이다.


  영화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밝지만, 그래도 요즘 화두가 되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온다.


  먼저, 영어회화 수업에서 만섭의 룸메이트 김창환이 한 말이 그렇다.

  외국인 강사는 '회화' 라는 수업 취지에 걸맞게 학생들에게 영어연극을 과제로 준다.  두 명씩 한 조가 되어 영화 속 장면을 영어로 연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섭의 기숙사 룸메이트이며 같이 영어회화 수업을 듣게 된 김창환이, 영어 연기 말고 토익이나 토플의 듣기 연습을 하는 걸로 수업을 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외국인 강사는 얼음 같은 표정으로 그 제의를 단칼에 잘라냈음. ^^;;)  김창환이라고 영어회화 수업의 취지와 영어시험 듣기 준비가 안 맞는 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취업난에 짓눌린 대학생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영어회화 수업보다 나중에 이력서에 써넣을 영어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공부가 더 중요하다. 


  또한, '총장과의 대화' 에서 총장이 한 말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총장은 참석한 학생들을 둘러보며 "지난 번엔 한 열 명 정도 밖에 안 왔었는데 가산점 준다니까 많이들 모였네요." 라고 한다.  영화상에서는 코믹하게 느껴지지만 분명히 사실적인 대사다.  스펙 쌓기에 여념없는 학생들은 학점과 직접적으로 연관없는 각종 행사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런 행사에 학생들을 많이 끌어모으려면 '출석을 학점에 반영하겠다' 또는 '이 행사에 참석하면 레포트를 안 내도 된다.' 같은 당근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하며 온갖 요구사항을 쏟아내는 학생들에게 퍼붓는 말도, 영화에서는 매우 우습게 표현되지만 대학가의 현실을 잘 드러낸다.  "아니, 근데 제가 무슨 대통령입니까?  청년 실업을 해소하기 위한 기업과의 제휴, 예, 저도 하고 싶지요.  저희랑 제휴 맺으려는 기업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제가 대학 총장직을 걸고 반대한 줄 아세요?  기업이 학교에 들어오면 학생식당, 매점, 기숙사 다 가져갑니다.  등록금 할인?  아, 그거 제가 못해요.  그거 재단에서 결정합니다.  여러분, 등록금 투쟁하지요?  그 학생회장들 저랑 합의 봅니다.  그 회장들 지금 어디 있는 줄 아세요?  전부 다 교직원 됐습니다.  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이게 다 누구 탓인 줄 아세요?  책상머리에 앉아 남 탓만 하는, 바로 너희들 탓이야!!!"


  그리고, 만섭만 보면 삐딱하게 나오는 룸메이트 선배가 하는 말도 워낙 재수없게(!) 말해서 듣기 거북할 뿐, 분명히 현실적이기는 하다.


  만섭 : "제가 말입니다, 학교 앞의 고깃집에서 알바를 시작했는데 시간 되시면 한 번 오십..."
  선배 : (만섭의 말을 끊고서) "너, 학교에 족구장 만들어 달라고 했다며?"
  만섭 : "네, 그렇습니다."
  선배 : "너희 집 잘 살아?"
  만섭 : "아닙니다."
  선배 : "그럼 뭘 믿고 그렇게..." (한심하고 답답해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낭만이 흥건하냐?"  (웃기게 생긴 팬티를 빨랫줄에 널고서) "청춘이 영원할 것 같지?  학교에서 발 빼는 순간에 네 청춘이 네 뒤통수를 칠 거다."




  ◎ '족구왕' 과 '1999, 면회'


  첫째, 두 영화 속 등장인물이 겹친다.

  '1999, 면회' 에서는 김창환, 심희섭, 안재홍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다만, 이 삼총사 중에서 안재홍의 비중이 좀 낮은 편이다.  주로 군복무 중인 김창환과 대학생인 심희섭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재수생인 안재홍은 '주연이라기에는 조연 같고 조연이라기에는 주연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족구왕' 에서는 안재홍이 명실상부한 주인공으로 나오고, 김창환과 심희섭은 우정출연 정도로 등장한다.  그래도 안재홍의 기숙사 룸메이트인 김창환은 여러 번 등장하기도 하고 처음 등장할 때 금세 알아봤지만, 심희섭은 딱 한 번 등장할 뿐이고 그나마 전혀 알아보지 못 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심희섭까지 나왔으면 '1999, 면회' 의 삼총사가 다시 뭉치는 거였는데 하고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을 보니, 영화의 처음 장면에서 안재홍에게 전역신고를 하라는 상부 지시를 전해준 군인이 심희섭이란다...! (헉...!  전혀 못 알아봤음...!!! @.@) 


  둘째, 두 영화가 중앙대학교와 관련이 있다.

  '1999, 면회' 에서는 중앙대 자체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심희섭이 중앙대에 다니는 학생으로 나온다.  그런데 '족구왕' 에서는 영화 속 학교가 중앙대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실제로 중앙대 안산 캠퍼스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그런데 '족구왕' 의 촬영장소에 대해 검색했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학교의 야외 장면은 분명히 중앙대 안산 캠퍼스에서 찍었지만, 건물 내부 장면은 엉뚱하게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사오기 전까지 산책 겸 걷기운동을 하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자주 다녔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정보였다. ^^ 


  셋째, 영화의 소재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1999, 면회' 는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인한, 이른바 IMF시대를 살아가는 20살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족구왕' 은 그 IMF시대를 지나며 학자금 대출, 인턴, 비정규직이 일상화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다.

  분위기도 비슷하다.  코미디물은 코미디물인데, 관객을 폭소하게 만들기 보다는 소소한 웃음을 준다.  그리고 그 웃음 안에 암담한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잘 녹여넣었다.  다만, 웃음의 코드는 좀 다르다.  '1999, 면회' 의 웃음은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나오지만, '족구왕' 의 웃음은 일상의 사소함 뿐 아니라 만화에나 나올 법한 기발한 상상력에서도 나온다.


  넷째, 두 영화의 제작사가 같다...!

  두 영화의 몇 가지 공통점 때문에 혹시 감독이 같은 사람인가 했는데, 찾아 보니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두 영화의 고향(?)이 같다.  두 영화 모두 '광화문시네마' 라는 제작사에서 만들었다.  광화문시네마에서 처음 제작한 영화가 '1999, 면회' 고 두번째로 제작한 영화가 '족구왕' 이다.  세번째로 제작했다는 '범죄의 여왕' 도 조만간 감상해야겠다. (트리플 크라운의 업적을 달성해야지~~! ^^)




  ◎ 복합적인 장르


  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보기에 따라, 부담없이 웃으며 볼 수 있는 코미디물이라 말할 수도 있고, 순박하고 우직한 대학생의 사랑을 소재로 하는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과 취업난으로  빡빡한 대학생들의 현실을 잘 묘사한 사회비판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 주목한다면 의외의 반전을 보여주는 '스릴러물 + SF물'(!) 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장르 저 장르를 섞어놓은 영화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복합 장르 혹은 짬뽕 장르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