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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카(Gattaca) - 2

Lesley 2017. 1. 18. 00:01


  먼저 번에 올린 '가타카(Gattaca) - 1' 의 뒤를 잇는 '가타카(Gattaca) - 2' 다.  

  ☞ 가타카(Gattaca) - 1(http://blog.daum.net/jha7791/15791352)





  ◎  고정관념에 사로 잡힌 사람들

  - "누구도 자기 잠재력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경찰들이 살인사건을 조사하며 가타카 안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한다.

  바닥에 떨어진 티끌 하나까지도 모아서 분석하는데, 그 중에는 제롬의 몸에서 떨어진 눈썹도 있다.  결국 그 눈썹의 주인이며 전에 가타카에서 청소부로 일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부적격자 빈센트' 가 용의자로 떠오른다. 

  이 때 살인사건을 담당하는 경찰관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형사(일단 '상급 형사' 라고 부르겠음.)가 좀 묘한 태도를 보인다.  부하 형사가 빈센트의 가족 관계를 조사하겠다고 하자, 상급 형사는 자신이 이미 조사했지만 가족 관련 기록이 없다고 대답한다.  빈센트에게는 분명히 부모와 동생 안톤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나오는 반전을 위한 복선이다.


  제롬은 가타카의 체력검사에 참가한다.

  우주선에 탑승할만한 체력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려고, 런닝머신에서 달리는 동안 심장박동을 체크하는 검사다.  물론 제롬의 실제 심장 상태로는 이 검사를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유진이 휠체어 바퀴를 돌리는 운동을 하며 얻은 심장박동 데이타를 이용한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유진의 심장박동이니 당연히 너무나 규칙적이고 안정적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수한 가타카 직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라마(가타카 직원들의 각종 신체검사 담당자)' 가 기계에 표시되는 심장박동 그래프를 보면서 피아노 메트로놈 같다고 감탄할 정도다.


  라마와 함께 체력검사를 참관하던 '감독관(살해당한 감독관이 아니라 제롬의 직속 감독관)' 에게 상급 형사가 질문을 한다.

  상급 형사는 가타카의 직원 채용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특히, 우수한 신체조건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채용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질문한다.  상급 형사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가도 복선이 된다.


  감독관 : "누구도 자기 잠재력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형사 : "만일 넘어선다면요?"
  감독관 :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애초에 그 사람의 잠재력을 잘못 측정한 것이지요."


  이 때 감독관의 대답을 보면, 이 영화 속 세계관의 보편적인 통념과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즉, 인간의 잠재력은 유전자 상태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고, 그 누구도 최첨단 과학기술이 예측한 잠재력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고정관념 말이다.  감독관은 바로 그 순간 자기 눈 앞에서 달리고 있는 제롬이, 자신이 항상 대단하게 평가하는 가타카 최고의 직원인 바로 그 제롬이, 잠재력을 넘어선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잠재력을 뛰어넘는다는 건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유진의 심장박동 데이타가 끝난 순간 기계에 잠시 뜬 제롬의 심장박동 그래프를 보면, 제롬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필사적으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롬은 락커룸으로 들어가 혼자 있게 된 후에야 겨우 참고 있던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한편, 또 다른 가타카 직원 '아이린(우마 서먼)' 은 남몰래 제롬을 좋아하고 있다. 

  제롬이 타이탄으로 떠날 날짜가 다가오자 더는 무심한 척 있을 수 없었던지 행동에 나선다.  그런데 그 행동이란 게 제롬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몰래 제롬의 빗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빼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봐 평소에 제롬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빗에 걸어두었던 것임!)  그리고 유전자 분석을 해주는 업체를 찾아간다.

  앞뒤 상황을 보면 이런 업체는 불법업체인 것 같은데, 은밀한 뒷골목이 아닌 대로변에서 버젓이 영업하고 있다.  하긴,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이다.  불과 5분 전에 키스를 나눈 남자의 유전자 정보(즉, 자신의 입술에 묻은 남자의 침)를 가져와 분석해달라는 여자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이 영화의 세계관에서는, 자신이 사귀는(혹은 장차 사귈) 사람의 유전자를 당사자 몰래 입수해서 분석하고, 그 분석 결과에 따라 계속 사귈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게 흔한 일인 듯하다.  


  유전자 분석 업체는 제롬의 유전자(물론 실제로는 유진의 유전자)가 매우 우수하다는 결과를 내놓는다. 

  하지만 분석 결과지를 받아든 아이린의 표정은 심란하기만 하다.  영화가 절반이 진행되도록 아이린은 제롬에게 다가서지 않고 그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제롬의 대단한 조건 때문에 주눅 들고 자신 없어 하는 것이다.

  아이린 역시 가타카의 직원인데도 자신이 제롬보다 못 하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가타카 직원이라고 다 똑같은 가타카 직원이 아니다.  유전자 상태에 따라 가타카 직원끼리도 상하가 나뉜다. (그래서 감독관이 제롬은 무척이나 총애하면서, 아이린은 만만하게 보고 본래 업무 외의 일 - 형사들의 수사를 돕는 일 - 을 떠맡겼음.)  아이린의 유전자는 가타카에 들어올 정도로 우수하지만, 심장 상태는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우주 비행을 하더라도 멀리는 못 나가고 태양 주변까지만 할 수 있다.


  아이린이 제롬에게 느끼는 감정은, 상위 1%의 사람이 상위 0.1%의 사람에게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이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아이린 정도만 되어도 구름 위에 사는 특별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대다수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이기에, 특별한 존재만 모아놓은 곳에서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   

  제롬이란 남자에게 분명히 끌리기는 하는데, 상대방의 엄청난 조건을 검사 결과로 확인하고 나니 감히 접근할 엄두가 안 난다.  제롬에게 매력만 느끼는 게 아니라 선망, 질시, 경외감, 열등감 등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도 품고 있는 것이다.  아이린 또한 감독관처럼 이 세계의 통념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과학자들이 예측해 준 자신의 잠재력을 뛰어넘을 시도를 못 한다. 


  제롬 : (자신의 심장 상태를 털어놓은 아이린에게)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나로서는 모르겠는데요."
  아이린 :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자기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서 제롬에게 건네주며) "여기요, 받아요."  (제롬이 머리카락을 받아들자) "검사를 하고도 당신이 나한테 관심이 있으면 말해줘요."
  제롬 : (일부러 머리카락을 날려버리고는) "미안해요.  바람에 날아가 버렸어요."


  두 사람은 희미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제롬의 미소에는 안쓰러움의 감정과 함께 '겨우 그 정도 일로...' 하는 생각도 드러난다.  동생 안톤과 성장기를 함께 보낸 경험 때문에, 자신보다 유전적으로 우수한 이들 옆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린의 복잡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의지만으로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제롬이 보기에는, 아이린 정도면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지레 움츠러드는 아이린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이린은, 제롬이 유전자 조건만 좋은 게 아니라 타인의 유전자 조건을 따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열린 남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롬이 자신의 심장 상태를 듣고도 실망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른 유전적 문제는 더 없는지 알아볼 생각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암묵적으로 받아주었으니 말이다.  




  ◎ 위기에 처한 제롬 / 또 다른 제롬, 유진

  - "이제 와서 나까지 포기하게 만들지 마."


  아이린은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들을 돕는 과정에서 알게된 사실을 제롬에게 알려준다. 

  물론 아이린으로서는 별 생각없이 한 말이다.  하지만 제롬은, 자신의 눈썹이 발견되어 빈센트로서의 자신이 수사선상에 올랐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온 제롬은 자신이 의심받고 있으니 도망쳐야 한다고 유진에게 말한다.  그리고 각종 유전자 샘플을 변기 속에 마구잡이로 집어넣는다.  도망친 후에 붙잡히지 않도록 증거를 없애겠다는,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저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즉흥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유진 : (제롬이 냉장고 속 샘플을 꺼내 변기에 집어넣자 놀라서) "뭐 하는 거야?  그거 만드는 데 하루 넘게 걸렸어!"
  제롬 : "우리 도망쳐야 돼."
  유진 : (휠체어를 밀어 제롬에게 다가가며) "그만 해!"  (다른 냉장고로 가는 제롬을 급히 따라가며) "좋아, 좋다고!  떠나고 싶으면 너는 떠나.  하지만 그것들은 가져가지 마."  (제롬이 연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으며 소리치는) "그건 내 거야!"
  제롬 : (유진의 격렬한 제지에 겨우 멈추는)
  유진 : "네가 마지막 순간에 무너질 줄 알았으면 다른 용기있는 파트너를 골랐을텐데."  (유진에게서 도망치 듯 테이블을 돌아 움직이는 제롬을 쫓아가며) "이제 와서 나까지 포기하게 만들지 마.  나도 이 일에 많은 걸 쏟아부었어.  내가 휠체어 타고 가타카로 가서 직접 끝장냈으면 좋겠어?"
  제롬 : (답답하다는 듯) "유진, 그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아낼 거야."
  유진 : (가볍게 코웃음 치며) "너 아직도 모르는구나.  그 사람들이 너를 봐도 너인 줄 몰라, 나인 줄 알지."  (잠시 후
유진이 손을 내밀자, 제롬은 버리려고 손에 들고 있던 혈액팩을 순순히 넘겨준다.)


  이 장면을 보면 유진이 자신을 제롬과 동일시 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고를 당한 후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았던 유진은, 한 발 한 발 위로 올라가는 제롬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  이제 우주로 나간다는 꿈은 제롬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제롬이 우주로 나가는 건 유진 또한 함께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제롬이 모든 걸 포기하려 하니 도무지 참을 수 없다.  제롬이 꿈을 포기하고 부적격자로서의 삶으로 다시 추락하면, 유진 역시 아무 의미 없이 살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제롬과 아이린

  - "빈센트가 누구죠?" 


  유진의 만류로 마음을 가라앉힌 제롬은, 출발 전까지 의심받지 않도록 행동한다면서 아이린과 연주회에 간다. 

  연주회는 고급스럽지만 아담한 규모인데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연주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연주회의 피아니스트는 양손에 손가락 하나씩을 더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제롬보다  더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났는데도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제롬처럼 신분을 숨긴 채 성공한 게 아니라 자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 성공했으니, 더욱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연주회가 끝난 후에 아이린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이 오직 12개의 손가락을 지닌 사람만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된 것이라고 알려준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약점을 자신만의 특기로 승화시킨 것이다.


  제롬 : (연주회가 끝난 후 포스터 속 피아니스트의 6개짜리 손가락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는)

  아이린 : (제롬에게 다가와) "몰랐어요?"  

  제롬 : (좀 당황해서) "아, 네, 네."

  아이린 : "훌륭한 연주였죠?"

  제롬 : (피아니스트를 감싸는 것처럼) "12개짜리 손가락이든 1개짜리 손가락이든, 자기 방식대로 연주하면 되는 거죠."

  아이린 : "손가락이 12개여야만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에요." 


  감동적인 음악회로 이 날의 데이트가 마무리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제롬은 또 위기를 겪게 된다.

  두 사람은 연주회장을 떠나 차를 타고 가다가 경찰의 검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경찰이 적격자로 위장한 부적격자를 찾아내려고 눈 검사(적격자에게는 근시가 없기 때문에, 적격자 행세를 하는 부적격자는 근시를 숨기려고 안경 대신 콘택트 렌즈를 사용함.)와 유전자 검사를 하고 있다.

  제롬은 검문을 받기 전에 눈에 낀 콘택트 렌즈를 슬쩍 빼내어 도로에 버리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어차피 이제 집에 돌아갈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더 큰 위기가 닥친다.

  아이린이 제롬에게 보여줄 게 있다며 차를 도로가에 세우더니, 무단횡단(!)으로 길을 건넌 후에 제롬에게도 오라고 한다.  하지만 콘택트 렌즈를 안 낀 제롬의 눈에, 어둠을 가르며 쌩쌩 지나가는 차들은 제대로 안 보이고 헤드라이트 불빛만 여기저기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사정 모르는 아이린은 망설이는 제롬에게 늦으면 못 본다며 재촉한다.  결국 제롬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로로 들어선다.

  앞을 제대로 못 보는 제롬은 건너편으로 넘어갈 타이밍을 못 잡고 도로 한 가운데서 위태롭게 움직인다.  그런 제롬 주위로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 소리가 몇 번이나 울린다.  제롬이 자동차를 피해 건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동차들이 제롬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지나가는 것만 같다.  제롬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겨우 건너가자, 뜻밖의 상황에 아연해진 아이린은 제롬의 손을 잡고서 뭐라고 말도 못 한다.  그리고 아이린이 조금 전 일에 대해 물어보기 전에, 제롬이 먼저 어서 가자고 채근하며 그 상황을 넘긴다.


  아이린이 보여준다는 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태양열 발전소(어쩌면 다른 시설인지도... ^^;;) 위로 빛이 멋지게 퍼지는 광경이다.

  아이린은 조금 전의 일을 잊은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빛의 물결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흐르는 모습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이린에게는 감동을 주는 멋진 광경이 제롬에게는 어떤 감흥도 주지 못 한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건만, 제롬의 눈에는 그저 불분명한 형태의 기다란 빛 덩어리가 보일 뿐이다.  물론 제롬은 자신도 아이린과 같은 것을 보고 아이린과 같은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아이린이 보는 방향을 응시한다. 


  그리고 타이탄으로 출발하기 이틀 전, 제롬은 아이린과 다시 데이트를 한다.

  어찌어찌해서 수사망을 완전히 벗어난 듯하여 한결 마음이 편해진 상태다.  그러니 출발하기 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1년 동안 떠나있을 지구에서 즐거운 추억을 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번 데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데이트도 위기상황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춤을 추다 키스하려는 순간, 형사들이 들이닥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려 한다.  기겁한 제롬은 뒷문으로 빠져나가려다가 자신을 막아서는 형사를 때려눕히고, 뜻밖의 상황에 비명을 지르는 아이린을 강제로 끌고가다시피 하며 도망친다.  그러다가 아이린이 넘어져서 더 못 뛰게 되자, 아이린을 데리고 골목의 구석진 자리로 숨는다.

  한편 레스토랑 안에서는 상급 형사가 아이린이 미처 챙기지 못 하고 남긴 약통(아이린이 심장이 안 좋다며 먹는 약이 담긴 통)을 발견한다.  상급 형사는 무언가 감을 잡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간다.  제롬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이쪽 저쪽 쳐다보다가, 어둡고 차가운 밤공기에 대고 빈센트의 이름을 외친다.  빈센트의 이름을 부르는 상급 형사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결코 다 잡은 용의자을 놓친 형사로서의 직업적인 분노가 아니다.  좀 더 개인적이고 강렬한 어떤 감정이다. 

 

  "빈센트가 누구죠?" 

  아이린은 멀리서 들려오는 빈센트란 이름을 듣고서 속삭이듯 묻는다.  아이린은 제롬과 사귀면서 제롬에게 어떤 비밀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조금 전에 제롬이 형사들로부터 급히 도망치는 것까지 보았으니, 제롬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막연한 느낌은 이제 확신으로 바뀐다.

  하지만 제롬은 위기에 몰렸다는 절박감과 그 밖의 다른 감정들로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 한다.  아이린 역시 그런 제롬을 보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신 감정에 스스로를 맡긴다.  결국 두 사람은 그 날 밤을 함께 보낸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난 제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베개 위에 떨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이다.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주어들고, 아직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아이린이 깨어날까 살피며 침대를 빠져나간다.  하지만 아이린은 잠자는 척 했을 뿐 이미 깨어있다.  아이린의 두 눈에는, 지난 밤 제롬이 보인 기묘한 행동에 대한 의문이 가득하다. 

  벌거벗은 제롬이 인적 없는 바닷가에 쪼그리고 앉아, 적당히 고른 돌로 몸을 문지르며 차가운 바닷물을 끼얹는다.  그러다가 문득 멈추더니 손으로 머리를 짚는다.  지난 밤 감정이 고조된 나머지 무모한 짓을 저질렀구나 생각하는 빛이 역력하다.  아이린 앞에서 형사를 두들겨 팬 것만으로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아무런 대책 없이 온 침대와 아이린에게 남긴 셈이니...    




  ◎ 드러난 비밀

  - "내 이름은 빈센트!  빈센트 안톤 프리맨!  모두가 자연잉태자 또는 부적격자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수사가 시작된 이래 묘한 태도를 보이던 상급 형사가 태도를 바꾼다.

  이전까지는 부하 형사가 '부적격자인 빈센트란 인물이 적격자로 위장해서 가타카에서 일하며 살인을 저질렀다.' 고 추정하며 가타카 내부에서 범인을 잡으려고 하면, 옆에서 은근히 훼방놓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발벗고 나서서 가타카 직원인 제롬을 수사 표적으로 찍는다.

  그 사실을 알게된 아이린은 출근하던 제롬에게 피하라고 귀뜀을 해준다.  그리고 제롬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상급 형사에게는 제롬이 몸이 안 좋아 결근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상급 형사는 모든 걸 다 안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아이린을 데리고 제롬의 집으로 간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제롬이 급히 유진에게 연락하고, 유진이 제롬 행세를 하게 된다.

  참 얄궂은 일이다.  사실은 제롬이 유진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제 와서 거꾸로 유진이 제롬 행세를 하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유진이 제롬 행세를 하는 게 잘 통할 것인가는 둘째치고, 하반신이 마비된 몸으로 제롬이 거주하는 2층으로 올라가는 것부터가 큰 문제다.  유진은 자기 몸을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던지다시피 한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를 끌면서 팔 힘만으로 어렵게 나선형 계단을 기어 올라간다.

  미처 다 올라가지도 못 했는데, 상급 형사와 아이린이 벌써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른다.  겨우 올라가 서둘러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바로 잡고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맞이하는 유진.


  마침내 아이린은 또 다른 제롬인 유진과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처음 보는 남자가 제롬 행세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걸 보고 놀란다.  제롬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이야 짐작하고 있었지만, 원래 머리로만 아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른 법이다.  하지만 유진이 침착하게 연기를 하며 아이린을 이끌자, 아이린도 놀라움을 감추고 유진과 손발을 맞춘다. 

  이 때 유진이 상급 형사 앞에서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보일 생각으로 아이린에게 키스해달라고 한다.  아이린은 유진의 이마에 키스하려 하지만, 유진은 얼굴을 들어 아이린이 자기 입술에 키스하도록 유도한다.  평소에는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이지만 막상 위기 상황이 닥치면 제롬보다 더 침착하고 대범하게 구는 유진의 성격, 유진 특유의 짓궂음, 그리고 자신을 제롬과 동일시하고 있는 유진의 심리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상급 형사는 직접 유진의 정맥에서 피를 뽑아 신원을 확인하려 든다.

  제롬의 사정을 모르는 아이린이 말린다.  아이린은 자기 옆에 앉은 유진이야말로 진짜 '제롬 모로우' 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다.  그저 제롬이 어떤 사정으로 살인을 하고서 형사와 대면하는 걸 피하려고 대역을 세웠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러니 혈액검사를 하면 유진이 가짜 제롬이라는 게 들킬 거라 걱정하며 말린 것이다. 

  그러나 아이린의 걱정이 무색하게, 유진의 피를 기계에 집어넣자 '제롬 모로우' 로 확인이 된다.  상급 형사는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지만, 아이린의 커다래진 눈에는 경악의 빛이 떠오른다.  그제서야 아이린은 그 동안 제롬에게서 느꼈던 미심쩍음이, 제롬이 살인자라서가 아니라 '사다리를 빌린 사람(유전자 정보를 빌려 적격자 행세를 하는 부적격자)' 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상급 형사는 살인범을 체포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나가고, 아이린은 충격에 젖은 채 남는다.

  유진은 상급 형사가 있는 동안에는 천연덕스럽게 아이린과 키스하거나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단 둘이 남아 아이린이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응시하자, 미안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시선을 내린다.

  그리고 유진 뒤편의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제롬...  제롬은 말은 유진에게 하면서 시선은 아이린에게 둔다.  유진 또한 제롬과 대화를 하면서 내내 아이린만 바라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제롬' 이라고 부른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어떤 관계인지 아이린에게 설명하는 것 같다.  


  제롬 : "괜찮아, 제롬?"
  유진 : "그다지 나쁘지 않아, 제롬."
  제롬 :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어?"
  유진 : "나 걸을 수 있어.  그 동안 못 걷는 척 했지."


  충격을 받은 아이린이 집 밖으로 나가는데 제롬이 따라온다. 

 

  아이린 : (제롬이 자신을 붙잡자) "건드리지 말아요!  나는 이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제롬 :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이예요."
  아이린 : "더는 거짓말하지 말아요, 제롬."
  제롬 : (뒤돌아가려는 아이린을 붙잡으며 절박하게) "내 이름은 빈센트!  빈센트 안톤 프리맨!  모두가 자연잉태자 또는 부적격자라고 하는 사람이예요.  하지만 살인자는 아니에요."
  아이린 : (놀란 나머지 갈라진 목소리로) "당신이 '신의 아이' 라고요?"
  제롬 : (아이린의 손바닥을 자신의 심장이 있는 가슴에 가져다 대며)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어요.  나는 20살에서 30살까지 밖에 못 산다고 했어요.  하지만 내 심장은 예상보다 만 번은 더 뛰어서 이렇게 살아있어요."
  아이린 :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건 불가능해요."
  제롬 : "가능한 지 불가능한 지는 당신이 정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린?  당신은 당신의 약점만 열심히 찾아내도록 길들여져서, 당신 약점 밖에 보지 못 해요.  이런 말하는 게 소용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당신도 가능하다고 말해주려 따라왔어요.  당신도 가능해요."

  아이린 : (제롬과 시선을 맞춘 채 천천히 뒷걸음 치더니 뒤돌아 가는)

  제롬 :  (더는 붙잡지 않고 바라만 보는)


  한편, 부하 형사의 연락을 받고 가타카로 간 상급 형사는 뜻밖의 결과와 마주하게 된다.

  붙잡혔다는 살인범은 바로 제롬을 높이 평가하던 그 감독관이다.  타이탄으로 우주선을 발사하는 건 70년에 단 7일만 가능하다면서 형사들의 수사가 길어지는 것을 불편해하던 그 감독관 말이다.  70년만에 한 번 오는 기회에 우주선 발사를 성공시키는 걸 삶의 목표로 삼았던 이 감독관은,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우주선 발사를 연기하려는 또 다른 감독관과 갈등을 겪다가 그만 살해한 것이다.

  드디어 살인범이 체포되었건만 상급 형사의 얼굴은 전혀 밝지 않다.  부하 형사가 부적격자 빈센트를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하며 수사하려 할 때, 상급 형사는 부적격자가 어떻게 가타카에 있을 수 있으냐며 부하 형사의 의견을 묵살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말대로 부적격자 아닌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졌건만, 마치 자신의 예측이 빗나간 것처럼 혼란스러워 한다.




  ◎ 형제의 마지막 수영 경기

  - "나는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았어."


  제롬은 2층에서 유진을 안고 내려와 1층의 휠체어에 앉힌다.

  유진은 제롬에게 말로만 들었던(비록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안 나오지만 틀림없이 제롬에게 들었을 것임.) 아이린을 만난 일로 잔뜩 들떠있다.  그리고 살인범이 체포되었으니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는 유진과 달리 제롬의 얼굴은 심각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상급 형사를 만나러 가타카로 간다.


  드디어, 그 동안 상급 형사가 보인 애매하고 기묘한 태도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드러난다. 

  상급 형사는 모두 퇴근한 가타카 사무실에서 제롬 자리에 앉아 있다.  제롬은 상급 형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상급 형사는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도, 제롬이 평소 연구하던 지구에서 타이탄까지의 항로에 관한 동영상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더니 뒤돌아 보지 않았으면서도 발자국 주인의 이름을 부른다.  단, 제롬이 아닌 빈센트란 이름으로 부른다.  상급 형사는 바로 제롬, 아니 빈센트의 동생 안톤이다...!


  안톤 : (아무 말 없는 제롬과 마주 서서) "세월이 많이 흘러서 동생도 못 알아보는 거야?"
  제롬 : "우리가 형제였던가?"
  안톤 : "부모님은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돌아가셨어.  하지만 나는 형이 안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제롬 :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안톤?"
  안톤 : "그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천천히 제롬에게 다가가며)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지만 형은 아니잖아."
  제롬 : (안톤이 다가오자 뒷걸음질 치면서)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구나."  (어색하고 불편하게 웃는) "내가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아서 실망했겠지."
  안톤 : (걸음을 멈추며) "형은 사기죄를 저질렀어.  심각한 상황이야.  내가 형을 여기에서 도망치게 해 줄 수 있어."
  제롬 : (분노로 눈이 번들거리는) "내가 여기에 들어오려고 어떻게 했는지 네가 알기나 해?"
  안톤 : "형은 너무 멀리 왔어.  지금 나하고 같이 가야 해, 빈센트!"
  제롬 : "아직도 수백만 마일을 더 가야 해.
  안톤 : "다 끝났어."
  제롬 : "내가 실패하는 꼴을 봐야만 네가 이길 수 있는 거냐?"
  안톤 : "다시 말하지만..."
  제롬 : (안톤의 말을 끊으며 격렬하게) "젠장!  이제는 너까지 내가 뭘 할 수 있네 없네 말하려는 거야?"  (다시 작아진 목소리로, 그러나 감정이 들끓는 말투로)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안톤, 나는 (수영 경기를 하며 힘이 빠져 물에 빠졌다고 해서) 살려달라고 한 적 없어.  하지만 너는 살려달라고 한 적이 있지."
  안톤 : (얼굴이 굳는) "!"
  제롬 : "자, 너도 다 알잖아.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래?"
  안톤 : (옛날 기억에 자존심이 상한) "그 날 형이 나를 이긴 게 아니야.  내가 체력의 한계를 넘었던 것 뿐이지."
  제롬 : "그런 말로 누구를 설득하겠다고?"
  안톤 : "내가 형한테 증명했으면 좋겠어?"
  제롬 : (속삭이는 말투로) "그 때 일은 중요하지 않아, 안톤.  그 일은 다 잊었어."
  안톤 : "내가 증명하지." (목소리를 높이며) "내가 증명하기를 원해?  그럼 내가 형한테 증명한다고!"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 이 장면의 한글자막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본 비디오 테이프에서나 나중에 본 다운받은 파일에서나, 한글자막에는 안톤이 신분을 속인 제롬을 체포하려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영문자막이나 대본을 읽어 봐도 그렇고, 안톤이 수사 초점이 제롬에게 꽂히는 걸 은근히 방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을 봐도 그렇고, 안톤은 제롬을 체포기는커녕 오히려 체포망을 피할 수 있도록 도망치게 하려는 걸로 보인다.


  살인사건 수사 과정에서 안톤이 보인 미묘한 행동을 생각하면, 안톤도 제롬의 일로 많이 고민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안톤은 영화 속 세상의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스스로가 기득권층인 적격자이기도 하고, 또 법을 어긴 사람을 체포하여 법질서를 수호하는 형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롬이 앞으로도 법을 어기고 적격자 행세하며 사는 걸 묵인해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제롬은 자신의 친형이다.  그런 제롬을 체포해서 감옥으로 보내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적당한 수준의 타협적인 해결안, 즉 제롬을 가타카에서 은밀히 내보내 다시 부적격자로서 조용히 살게 하는 쪽을 택한 것 같다.  하지만 이제 하루만 지나면 타이탄행 우주선에 탑승할 수 있는 제롬은, 안톤의 말대로 순순히 가타카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 순간에 꿈을 포기한단 말인가...!   


  두 형제가 오래간만에, 그리고 아마도 생애 마지막으로, 함께 수영을 한다.   

  한밤중인데다가 파도까지 거칠어서 수영하기에는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친다. 

  한동안 헤엄치는 데만 몰두하던 안톤이 큰 소리로 형을 부른다.  자신들이 지나치게 멀리 헤엄쳐 나온 것을 깨닫고 당황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 둘 생각이냐고 묻는 제롬의 말에 오기가 치솟아 다시 헤엄을 친다.  제롬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을 치던 안톤이 또 다시 제롬을 부른다.  육지에서 너무 멀리 나와 돌아갈 수 있을까 겁이 나기도 하고, 그렇게 멀리 나올 때까지도 부적격자인 형이 적격자인 자신과 대등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가 않는다.


  안톤 : "빈센트!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어?  그 동안 어떻게 이렇게 한 거야?  우리 돌아가야 해."
  제롬 :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어.  반대쪽 해변이 더 가까워."
  안톤 : "무슨 반대쪽 해변?  우리 둘 다 빠져 죽었으면 좋겠어?"
  제롬 : "내가 어떻게 해냈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이게 내가 해낸 방법이야, 안톤.  나는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았어."

 

  형제의 질문과 대답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어?" 라는 안톤의 질문에는'부적격자로 태어났으면서 어떻게 적격자인 나보다 헤엄을 더 잘 칠 수 있느냐' 는 의문과 놀라움이 들어 있다.  또한 '적격자 중에서도 최고의 적격자만 모아놓은 가타카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느냐' 는 뜻도 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았어." 라는 제롬의 대답도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수영을 할 때 익사의 위험성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수영 그 자체에만 힘을 다 쏟아부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가타카에 들어가서도 만약의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우주 비행사가 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제롬의 대답에 안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짓더니 방향을 바꾸어 헤엄을 친다.
  제롬은 지금까지 나가던 방향과 안톤이 되돌아간 방향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자신도 안톤이 간 쪽으로 헤엄을 친다.  출발한 해변에서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차라리 반대편 해변이 더 가깝다는 제롬의 말은, 아마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톤은 그 정도로 멀리 헤엄친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에 빠져 무작정 되돌아가 버렸다.  제롬으로서는 안톤이 위험해 질 게 뻔한데 그냥 가버릴 수 없다. 

  역시나 안톤은 해변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중간에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제롬은 가출하기 전날 그랬던 것처럼 다시 안톤을 건져내어 해변을 향해 헤엄친다.  안톤을 데리고 해변으로 가는 제롬의 눈에, 밤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수많은 별이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이제 타이탄으로 향하는 제롬의 길을 막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거라는, 행운의 표지처럼... 


  차에서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던 아이린이 눈을 뜬다.
  아마 제롬의 집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제롬을 기다리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것은 백미러에 비친 제롬의 모습이다.  아이린의 차에 기대어 땅바닥에 앉아있는데, 수영을 끝내고 곧장 온 건지 아이린이 항상 봤던 완벽하고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췌하기만 하다.


  아이린 : (백미러에 비치는 제롬의 모습에 대고) "볼 수 없었던 거죠?  그 날 밤 길을 건널 때 말이에요."   (잠시 멈췄다가) "하지만 어쨌든 건넜어요." (백미러에서 얼굴을 돌려 제롬에게 시선을 주는) 
  제롬 : (자기 머리카락을 뽑아 아이린에게 건네주며)
"검사를 하고도 당신이 나한테 관심이 있으면 말해줘요." 
  아이린 : (일부러 머리카락을 떨어뜨고) "미안해요."  (제롬을 보더니) "바람에 날아가 버렸어요."


  두 사람은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심한 근시로 앞을 제대로 못 보면서도 결국 도로를 건넌 제롬.  어쩌면 자동차에 치어 죽을 수도 있었는데도, 제롬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어이 도로를 건넜다.  제롬의 인생 역정과 비슷하다.  부적격자로 태어난 제롬이 적격자들과 경쟁하는 것은 승률이 거의 없고 들킬 경우에는 범죄자로 낙인 찍힐 수 있는 무모한 일이었지만, 제롬은 기어이 그들과 같은 자리까지 올라왔다.

  아이린은 처음에 제롬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충격으로 어찌할 줄 몰라했다.  하지만 제롬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일부러 버렸던 것처럼 자신도 제롬의 머리카락을 버리고, 유전자 상태가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제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인다.   


 


  ◎ 마침내 꿈을 이루다.

  - "나는 너에게 몸을 빌려준 것 뿐이지만, 너는 나에게 꿈을 빌려줬으니까."


  타이탄으로 떠나는 날 아침, 지구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이린과 보낸 제롬이 유진을 찾아온다.

  제롬이 들어간 곳은, 평소 유진이 제롬에게 줄 샘플을 만드느라 온갖 실험 기구들이 즐비했던 방이다.  그런데 마치 앞으로 오랫동안 그 방을 사용하지 않을 것처럼 커다란 비닐로 가구와 실험 기구들을 덮어놓았다.  제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닐을 만지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유진이 나타나서 샘플을 준비했다고 말한다.


  제롬 : "내가 갈 곳에서는 샘플이 필요없잖아."

  유진 : "네가 돌아오게 되면 필요할 지도 모르지." (제롬에게 혈액과 소변 등의 샘플이 가득 찬 냉장고를 보여주며) "네가 다시 태어나서 써도 충분할 정도로 많아."
  제롬 :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왜 이렇게까지 해?"
  유진 : "그래야 제롬이 언제나 여기 있을테니까."
  제롬 : "어디 가려고?"
  유진 : "나도 여행갈 거야."
  제롬 : (여전히 이해가 안 가지만) "너에게 어떻게 고맙다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어."
  유진 : "아니야, 이 거래로 내가 더 이익을 봤어.  나는 너에게 몸을 빌려준 것 뿐이지만, 너는 나에게 꿈을 빌려줬으니까." (잠시 제롬을 응시하다가 카드를 내밀면서) "우주에 올라간 다음에 읽어." (제롬을 보며 미소 짓는)


  제롬이 우주선을 타러 가는데, 뜻밖에도 복도에 간이 검사실이 설치되어 비행사들이 소변검사를 받고 있다.

  의아해 하는 제롬에게 라마(제롬의 심장박동 그래프를 보며 피아노 메토로놈 같다고 감탄했던 그 신체 검사 담당관)가 설명한다.  가타카의 새로운 정책으로 하는 검사라는 것이다.  유진의 소변을 가져오지 않은 제롬으로서는 낭패다.  그 전까지는 우주선 탑승 전에 소변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고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라마 : (소변을 보지 않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롬에게) "비행 때문에 긴장 되어서 그러나?"
  제롬 :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좀 문제가 있어요, 라마."
  라마 : (제롬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불쑥 다른 말을 꺼내는) "내가 아들 이야기 한 적 없지?  그 애는 자네의 열렬한 팬이야."
  제롬 :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변을 보면서) "이것만은 기억해요, 라마.  나는 다른 사람만큼 잘 했고 누구보다 우수했어요."
  라마 : (여전히 제롬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내 아들도 여기 지원하고 싶어하거든."

  제롬 : "이 일만 없었으면 내 힘으로 잘 해냈을테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 했을..." 

  라마 : (제롬의 말을 가로막듯이) "불행히도 내 아들은 의사들이 장담했던 대로 되지 않았어.  하지만 그 애가 무엇을 해낼지 누가 알겠어?"


  이 때 제롬은 꿈을 이루는 마지막 단계에서 터진 돌발상황으로 정신이 없어, 라마의 말 중에서 중요한 것을 놓친다.

  라마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불행히도 내 아들은 의사들이 장담했던 대로 되지 않았어." 라고 말한다.  라마의 아들도 태어나기 전에 유전자 조작을 거쳤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실패해서 제롬처럼 부적격자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타카에 들어오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기처럼 부적격자인데도 가타카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제롬을 자기 롤 모델로 삼고 열렬한 팬이 되었다.

  즉, 라마는 제롬이 유전자 정보를 속이고서 가타카에 들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자기 아들에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건 상급 형사가 안톤이라는 반전이 일어난 후 또 다시 일어난 반전이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와서 정체를 들키게 된 제롬의 귀에는, 라마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제롬이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소변을 담은 컵을 내밀자, 라마가 소변을 기계에 집어넣는다.

  잠시 후 스크린에 빈센트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것을 본 제롬은 분노하거나 좌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쓴웃음을 지으며 라마를 쳐다본다.  오랜 세월 죽어라 노력하고 몇 번이나 고비를 넘겨 이 자리까지 왔건만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어이없이 들키게 되다니, 그저 허탈한 기분만 들었을 것이다. 


  라마 : (별로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충고를 좀 하자면..."  (제롬의 하반신 쪽을 흘깃 쳐다보며) "오른손잡이 남자는 소변 볼 때 절대 왼손으로 그걸 잡지 않아.  자네가 알아야 할 것 중 하나지."


  빈센트는 '그것 때문에 들킨 건가'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부적격자라는 게 확인되었는데도 라마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에 라마 앞에서 소변검사를 받으며 무심결에 왼손잡이의 습관을 보였기 때문에, 라마가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었나 보다 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라마가 기계에 다가서더니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스크린에 뜬 빈센트의 얼굴이 제롬의 얼굴로 바뀐다.  흠칫하며 라마를 바라보는 제롬.  그리고 라마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말.

  라마 : "이러다가 우주선 놓치겠군, 빈센트."

  제롬 : (라마가 그 동안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감아 줬다는 것을 깨닫는) "!"


  제롬은 천천히 걸어나가다가 뒤돌아서 온갖 감정이 담긴 얼굴로 라마를 바라본다.

  라마는 그런 제롬에게, 아니 자기 아들의 우상인 빈센트에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서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다.  다시 돌아서서 동료 비행사들이 이미 들어간 통로로 들어가는 제롬.

  그 시간에 유진은 불편한 몸을 움직여 제롬이 쓰던 소각장치가 있는 샤워부스로 들어간다.  제롬을 마지막으로 비행사들이 모두 우주선에 들어가 우주선 문이 닫힌 순간, 유진도 샤워부스의 문을 닫는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비행사들과는 달리 제롬이 조용히 눈을 감고 출발을 기다리는 그 순간에, 유진은 품에서 올림픽 은메달을 꺼내 목에 건다.  그리고 유진이 소각장치를 가동하는 버튼을 누른 순간, 우주선이 출발하며 제롬이 눈을 뜬다.  제롬을 태운 우주선이 하늘로 치솟으며 화염을 뿜어내는 것처럼, 유진이 들어간 샤워부스 안에서도 화염이 치솟는다.  유진의 목에 걸린 은메달을 금색으로 빛내면서...

  가타카 OST에 수록된 'The Departure' 가 처음에는 잔잔하게 연주되다가 점점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제롬과 유진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나오는 이 장면은 이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이다.


  마침내 제롬은 우주로 나간다.

  지구에서 보던 별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게 된 감동으로, 제롬의 눈에 물빛이 어린다.  그리고 유진이 주었던 카드를 살며시 펼친다.  그 안에는 유진의 머리카락이 있다.  그 동안 제롬에게 주었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몇 가닥씩 뽑아주었던 머리카락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살아갈 친구에게 유품으로서 주는, 곱게 잘라낸 머리카락이다.   




  ◎ 기타


  1. 영화 제목 '가타카(Gattaca)'


  이 영화의 제목 가타카(Gattaca)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우주 탐사 전문 회사의 이름이 가타카다.  오직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는 꿈의 직장이며, 동시에 주인공이 우주를 향한 꿈을 이루기 위해 들어가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영화 속에서는 유전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바로 그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DNA와 관련이 있다.  즉, DNA를 이루는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의 머릿글자를 따서 조합한 단어다.


  2. 유진(Eugene)이라는 이름


  주드 로가 맡은 배역의 퍼스트 네임은 '제롬' 이지만, 그 이름을 빈센트에게 주었기 때문에 미들 네임인 '유진' 을 쓰게 된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유진이란 이름에 대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영어 광풍 부는 나라에서 사는 자의 숙명(!)으로 Vocabulary 22000 류의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유진이란 이름에 엄청난 심오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유진(Eugene)은 '좋은 혈통의, 좋은 출신의' 라는 그리스어 단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영화 속에서 유진이란 인물이 매우 좋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적절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3. SF영화답지 않은 SF영화


  이 영화의 장르는 분명히 SF지만, 전형적인 SF와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처럼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과 정교한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다양한 우주선, 여러 외계 종족, 최첨단 무기를 보여주는 영화' 를 기대하고 보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의 정체성이 SF라는 사실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SF적인 요소가 적기 때문이다.


  가타카에는 'SF스러운 모습' 보다는 'SF스럽지 못 한 모습' 이 더 많다. 

  가타카 직원들이 출근할 때 신분증명을 위해 통과하는 기계(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을 추출해서 본인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기계)는 아무리 봐도 서울 지하철의 개찰구처럼 생겼다. -.-;;  교통카드를 찍으면 열리는 양문이나 돌아가는 금속바가 없다는 것만 빼면 영락없는 지하철 개찰구다.

  그런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옷차림은 이 영화가 제작되었던 199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잡고 봐도 꽤나 구식이다. (좀 더 호의적으로 말하자면 복고풍 옷이라고 할 수 있음. ^^;;)  가타카 직원들의 옷차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온 형사들의 옷차림도 제2차 세계대전 시대와 별 차이가 없다. (몇몇 형사는 중절모도 쓰고 다님!)

  그 밖의 집 안의 가구나 전자제품, 가타카 사무실에 있는 직원용 컴퓨터, 혈액이나 소변을 넣어 신분을 확인하는 기계, 길거리의 자동차 등 모든 것이 예스러운 느낌을 준다. (단, 자동차 모양은 구형이지만 가솔린 엔진 소리 대신 전자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남.)  심지어 빈센트가 가출하는 장면에 나오는 빈센트네 가족 사진은 흑백사진이기까지 하다...!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과 사회가 획일화 되고 경직된 상황을 상징하려 그렇게 설정한 것 같다.  영화가 제작된 20세기 후반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였지만, 20세기 초중반은 옷차림에서나 행동에서나 더 규범을 중시했으니 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이질적인 모습 때문에 이 영화가 다른 SF보다 더 특별해 보인다. 


  가타카를 SF영화라고 규정할만한 근거 대부분은 관객 눈에 직접 보이지 않고 '영화상 설정' 으로만 등장한다. 

  예를 들면 '유전자 조작 기술' 이나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까지 유인 우주선을 보낼 수 있는 기술' 같은 식으로 말이다.  대단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효과 없이 그저 등장인물들의 대사로만 나온다.

  드물게 관객 눈에 띄는 SF적인 요소도 있기는 하다.  몇 번이나 등장하는 우주선의 이륙 장면이다.  하지만 그 장면조차 다른 SF영화와는 전혀 다르게 연출된다.  일단 우주선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을 멀찍이서 잡은 데다가, 강렬하다기 보다는 매우 부드럽게 처리해서(특히 한밤에 하늘로 솟아오르는 우주선의 모습), 마치 어린이를 위한 판타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가타카를 처음 보고 한참 후에야 안 사실인데,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서 '오~~  정말 괜찮은 영화다!' 하고 반한 나머지 몇 번이나 되풀이 해서 본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SF영화와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형적인 SF영화를 기대하고 영화관으로 간 사람들이 실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타카의 감상 포인트는 다른 SF영화와 다르게 잡아야 한다.

  물론 다른 SF영화 중에도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묘사하며 기술 발달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영화라도, 보통은 인공지능이라든지 가상현실이라든지 하는 눈부신 기술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타카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비판하는 SF영화이면서도, 오히려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보다 예스럽고 감성적이다.

  영화의 주제를 돋보이기 위해 일부러 만든 역설이며 모순이다.  영화의 소재는 최첨단 과학인데, 영화 속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예스러운 것이다.  영화의 주제는 인간의 의지와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오히려 낭만적이고 아날로그적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가타카' 는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과 비슷하다.

  '은하철도 999' 속 세계는 인간들이 질병도 굶주림도 없는 영생을 꿈꾸며 육신을 기계로 바꿀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인간성 상실, 빈부격차, 물질만능주의 등 온갖 폐해가 만연해 있다.  애니메이션은 분명히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의 폐해를 비판하는 내용인데, 정작 애니메이션 분위기는 증기 기관차를 타고 우주를 여행한다는 동화 같은 상황이 나올 정도로 낭만적이다.  


  4. 에단 호크(Ethan Hawke)와 주드 로(Jude Law)


  이 영화의 첫번째 포스트 첫머리에 나오는 이미지는 가타카의 포스터 중에서도 무척 마이너(?)한 것이다.

  ☞ 가타카(Gattaca) - 1(http://blog.daum.net/jha7791/15791352)  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도 그렇고, 그 밖의 다른 포스터도 그렇고, 남녀 주역인 '에단 호크' 와 '우마 서먼' 두 사람만 나온다.  하지만 유진 역을 맡은 '주드 로' 가 조연이기는 해도 주역에 못지 않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내 생각에는 이 영화 포스터에는 마땅히 주드 로도 같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주드 로까지 함께 나온 포스터를 구하려니, 좀 허접(!)하기는 하지만 지난 포스트에 실은 포스터 하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영화를, 에단 호크와 주드 로 두 남자배우를 투탑으로 내세운 작품으로 생각한다.

  공식적으로는 에단 호크와 우마 서먼이 주역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녀별로 주역을 한 명씩 내세우는 영화계의 대세(?)를 따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누가 이 영화의 주역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에단 호크와 주드 로의 이름을 함께 말하겠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아도, 주인공 제롬과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를 보아도, 유진 역을 연기한 주드 로가 아이린 역을 맡은 우마 서먼보다 더 중요하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마 서먼의 아이린 없는 없는 가타카는 상상할 수 있어도, 주드 로의 유진이 없는 가타카는 더 이상 가타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이 연사 강력히 외칩니다~~~!!!) 


  5. 에단 호크(Ethan Hawke)와 우마 서먼(Uma Thurman)


  에단 호크와 우마 서먼은 가타카에 출연한 일로 연인이 되었다가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에단 호크가 아이들 보모와 외도를 한 게 원인이 되어 이혼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는데 그렇게 되다니...  시 영화가 아름다운 건 영화이기 때문이고 현실은 시궁창인가 보다. ㅠ.ㅠ


  에단 호크는 나중에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 에 출연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는 아내와의 사이가 이미 식어버렸는데도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중에 어떤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제시가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바로 에단 호크라고 한다.  이 영화를 찍을 때 아내 우마 서먼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였고, 그런 개인적인 체험이 영화 속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 '비포 시리즈'의 완결판?(http://blog.daum.net/jha7791/15790995) 


  6. 멋진 OST - The Departure


  가타카의 OST가 우리나라에서는 출시되지 않아서 어렵게 구했다. 

  굳이 애써가며 OST를 구한 이유는 OST가 전체적으로 좋아서가 아니라 그 중 단 한 곡,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The Departure' 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제롬이 라마가 진작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묵인해줬음을 깨닫고 우주선에 탑승하여 출발하는 장면과, 유진이 은메달을 목에 건 채 샤워부스에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이 교차하는 부분에서, 이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불굴의 의지로 현실의 모든 제약을 뛰어넘고 마침내 우주로 나가는 꿈을 이루게 된 제롬의 모습과, 제롬을 통해 잃어버렸던 자기 존재의 이유를 되찾은 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유진의 모습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OST에서 The Departure가 중복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가출한 제롬이 청소부로서 가타카에 도착하게 된 장면에서도 이 음악이 나오는데, 그 때는 'The Arrival' 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어째서 같은 음악을 제목만 다르게 해서 두 번이나 OST에 실었을까 의아해 했는데...

  영화를 반복해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분명히 같은 음악이지만, 제롬이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며 꿈을 이루기 위해 가타카에 도착(The Arrival)한 것과, 드디어 꿈을 이루어 우주로 출발(The Departure)하는 것은, 그 의미와 느낌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두 음악을 그냥 음악으로만 들으면 분명히 같은 곡일 뿐이지만, 두 음악이 나오는 장면을 번갈아가며 보면 다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