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헬조선도 아니고 고조선이라니...

Lesley 2016. 11. 2. 00:01


  10월 마지막 주에 우리 모두 엄청난 드라마 한 편을 봤다.

  온 나라가 거대한 촬영장이었고, 나라 돌아가는 꼴은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큰 막장 드라마였다. (정치 + 사이비 종교 + 기막힌 반전...!!!)  스케일로만 따지자면 어떤 방송사에서 수백 억 또는 수천 억을 쏟아붓는다 해도 이런 드라마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 드라마 줄거리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겠다.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치고 그 드라마를 모르는 이가 없을테니 말이다.  정치 쪽으로는 별 관심 없는 친구조차 전화를 해서 그 일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 일이 엄청난 사건이 맞긴 맞구나 싶다.


  그 친구에게도 한 말이지만, 나는 이번 일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도 상황이 어지간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졌던 각종 게이트 때만 해도 대통령에 대해 비판도 하고 욕도 했다.  하지만 전부터 여기저기에서 이름이 언급되던 최순실이란 사람이, 알고 보니 이 드라마에서 제법 비중 높은 조연이 아니라 아예 주연이었다는 게 확인된 지난 주부터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아, 그 동안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 계속 터졌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허탈한 마음도 들고 가끔 헛웃음도 나올 뿐이다.  어디에서 읽은 구절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가장 슬픈 건 분노조차 느끼지 못 하고 마음이 냉담해 질 때라고 했다.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런 듯하다. 

  이쪽에서는 어떤 일로 화가 잔뜩 나서 책임자인 사람에게 화를 냈는데, 틀림없이 책임자인 것만 같았던 그 사람이 그 동안 우리에게 했던 말과 행동은 전부 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제3자가 그 사람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해.  그리고 저렇게 행동하도록 해." 하고 조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책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저 앵무새처럼 제3자가 해준 말을 그대로 읊고, 꼭두각시처럼 그 사람이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팔을 내밀거나 다리를 들었던 것 뿐이다.


  그리고 네티즌 사이에 유명했던 소위 '유체이탈 화법' 이란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이제야 알겠다.

  누구는 그 사람이 워낙 무식해서 그런 황당한 말을 한다고 했고, 또 누구는 그 사람이 뻔뻔한 나머지 자기 책임을 회피할 의도로 일부러 앞뒤 안 맞는 말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니, 그저 남이 알려준 말을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읊은 것이다.  그러니 네티즌들이 빈정거리는 의미에서 붙였던 '유체이탈 화법' 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정말로 유체이탈 상태에서 한 말이라는 게 이번 일로 드러난 셈이다. 

  자신의 생각도 없이 그저 누군가가 알려준 말을 그대로 읊기만 했던 꼭두각시를 상대로 화를 냈다니, 마치 내 방의 벽을 상대로 화를 낸 것과 똑같은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상대방은 화낼 가치도 없는 존재였는데, 그 동안 화를 낸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질 뿐이다.


  이번 사건 관련해서 온갖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데, 그 중에는 세월호 사건에 관한 추측도 있다.

  나도 세월호 사건의 진상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그대로일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에 나도는 소위 인신공양설이라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에이, 아무리 꼭두각시 대통령에 망할 놈의 정부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던가?

  만일 이번 사건이 정치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의 내용이었다면 틀림없이 짜증내고 외면했을 것이다.  '이건 또 뭐냐?  작가가 미친 것 아냐?  명색이 정치극이면 좀 현실적으로 대본을 써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 정도로 너무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사건이다.  이번 사건에 관하여 성향이 전혀 다른 여러 언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보도를 하고, 결국에는 의혹의 당사자 중 한 명인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사과까지 했으니, 우리 국민들이 믿을 수 없다고 경악하면서도 결국에는 현실로 받아들인 것 아닌가?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의 진상이 그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추측 그대로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아니, 요즘처럼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 연달아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추측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추측이라도 믿을 판국이다.  예를 들자면, 최순실이라는 인물 뒤에 적화통일을 위해 우리 사회를 뒤흔들려는 북한의 음모(죽은 김일성이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1970년대에 최태민을 포섭해서 미래에 대통령이 될만한 자에게 접근하게끔 지령을 내렸다든지... -.-;;) 혹은 아예 지구 정복의 시범 케이스로 한국부터 접수하려는 외계인의 음모가 있다고 해도, 시쳇말로 멘붕 상태인 우리 국민들은 '정말 그런가 봐.'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상식이니 이성이니 하는 건 다 사라져버린 상황이니까...  최고위층부터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을 잔뜩 벌여놓았으니까...


  이번 사건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마다 분노와 경악의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 촌철살인의 댓글이 있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는데 대충 다음과 같다.  '내가 헬조선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조선이었다.  우리나라는 제정일치 사회다.'  많은 네티즌들이 그 댓글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우습지만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달력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연도는 분명히 2016년, 21세기에 속한 시대다.  고조선 시대부터 수천 년이 흐른 21세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고조선 시대에나 일어났어야 할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까?


  허탈한 마음에 주저리 주저리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