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여행기/경기도

가을의 남한산성 행궁 / 천주교 남한산성 순교성지

Lesley 2016. 11. 6. 00:01


  10월 마지막 주말부터 기온이 부쩍 떨어지며 초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유독 기승떨던 무더위로 고생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겨울인가 싶다.  떠나가는 가을에 아쉬움을 느끼며 가을의 마지막 모습을 소개해볼까 한다.  바로 남한산성 행궁의 가을 풍경이다.


  남한산성 행궁을 포함한 남한산성은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소속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광주시 뿐 아니라 성남시 및 하남시에 걸쳐있어서, 세 지역 사이에 신경전(?)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세 도시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세 곳 모두 자기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 혹은 관광지로 남한산성을 꼽고 있다.

  광주시 입장에서는 좀 기분이 묘할 것 같다.  성남이나 하남이나 원래 광주 소속이었는데 각자 독립해 나가서는, 원래 광주가 갖고 있던 남한산성에 눈독 들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


  원래 계획은 남한산성 전체를 둘러보는 것이었지만, 도착해서는 남한산성 행궁만 구경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남한산성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가본 적이 있지만, 어린 시절 단체관람이란 게 다 그렇듯 특별한 기억이나 인상이 남아있지 않다.  그저 '관광버스 타고 남한산성이란 곳에 갔었다.' 는 것만 생각날 뿐, 가서 뭘 봤는지 뭘 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좀 만만하게(?)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어서 하루 동안 전부 보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산성이라서 평지도 아니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다니려면 꽤나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평평한(그래봤자 온통 계단투성이인... ^^;;) 남한산성 행궁만 둘러보는 것으로, 계획 급변경...! 




  ◎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이 광주, 성남, 하남에 걸쳐 있다 보니, 세 도시 모두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따로 있다.

  이 날 내가 선택한 노선은 성남에 속하는 전철 8호선 산성역으로 가서, 산성역 2번 출구 쪽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9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그러면 남한산성 안에 있는 남문 주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다. (나처럼 구경이 아닌 등산을 위해 올라가시는 분들은 다른 노선을 찾아보시기를...)

   

  남한산성은 남문(지화문) 위에만 올라가 살짝 맛만 보고 내려와, 행궁으로 고고씽~~!

  이날 수도권에 안개가 낀다고 해서 날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걱정도 했는데, 의외로 산 위 날씨는 괜찮았다.  걷는 사람이 지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수준으로 햇볕이 들고, 파란 하늘에 구름도 예쁘게 펼쳐져서, 구경하기에 적당했다.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남한산성과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 곳에서 40여일 간 머물다가 결국 청나라에 항복한 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의 정문인 한남루는 정작 병자호란 당시에는 없었던 문이다.  한참 후 정조 때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외행전.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했다.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치고는 예스러운 느낌을 잘 살린 듯하다.  경복궁보다 훨씬 낫다.  나는 경복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경복궁에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 짓느라 허물어놓은 것을 복원한다면서 너무 알록달록하게 만들어놓아서 창덕궁 같은 예스러운 느낌이 안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료비 절감을 위한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대체적으로 건물 크기가 작다.  그래서 좀 심하게 말하면 레고 블록으로 옛날 궁궐을 본따 만든 테마파크 같은 기분이 든다. -.-;;


  그리고 남한산성 행궁은 정문인 한남루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대가 점점 높아진다.

  위의 사진에서도 외행전 오른편으로 계단이 보인다.  그 뒤의 건물은 이 외행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산 위에 지은 행궁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정식 궁궐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작은데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보면 종아리 근육과 무릎이 점점 아파진다. (아, '운동부족 + 살찜' 의 슬픔이여~~~ ㅠ.ㅠ)



외행전 담 밖으로 단풍이 울긋불긋~~



  외행전을 둘러싼 담 바깥으로 단풍이 보인다. 

  나중에 버스를 타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갈 때 어르신들이 올해는 단풍이 별로 예쁘지 않다며 아쉬워하시던데, 내 눈에는 이 정도 단풍도 예뻐 보였다.  어째서인지 이번 가을에는 나뭇잎 색깔이 바뀌는 걸 미처 보지 못 했던 듯하다.  정말 어르신들 말씀대로 올해 기승을 떨었던 폭염 때문에 단풍이 별로인 건지, 아니면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인지, 혹은 요즘 나라가 하도 어수선해서 그런 건지...



외행전에서 본 가을 하늘.



  이 날 수도권에는 안개(혹은 미세먼지?)가 엷게 깔렸는데, 산 위에서 보는 하늘은 맑기만 하다.

  남한산성이 우리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니, 앞으로 공기가 안 좋은 때는 남한산성으로 올라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더러워진 폐를 세척(?)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행전 옆에 있는 일장각.



  일장각은 외행전 담벼락 너머에 쪽방(?)처럼 있다.

  광주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실은 광주유수도 상당한 고위직(요즘으로 치면 광역시장급)이지만, 그래봤자 임금님 앞에서는 아랫것(?)일뿐이다.  그래서 이 행궁에서 당당히 정전에 머물지 못 하고 이렇게 한쪽 구석에 박힌 건물에 거처했다.

  그런데 옛날 분위기 내려고 소품으로 가져다놓은 물건 중 죽부인이 눈에 뛴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참 깨알같다. ^^



외행전 뒤편에 있는

내행정으로 이어지는 계단.



  행궁이 산지형을 타고 점점 높아지는 구조라, 이 날 계단을 꽤 오르내렸다.

  무릎 안 좋은 어르신들이나 운동부족인 사람은 구경하기 좀 곤란할 듯하다.  그러니 남한산성 행궁 구경가기 전부터 열심히 다리 운동을 하며 몸을 단련합시다~~~! ^^



왕의 침소로 쓰던 내행전.



  인조도 병자호란 때 이 곳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철저히 포위하여 고립된 상황에서, 매일 밤 이 내행전에서 전전긍긍하고 뒤척이며 제대로 자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했을 때 항복의식을 치르기 위해 틀림없이 이 곳에서 옷을 갈아입었을 것이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느낌이 드는 장소다.



위쪽에서 내려다 본 내행전 지붕 위의 괴수(?)들.



광주유수의 집무실인 좌승당.



  내행전 옆의 담 넘어로 좌승당이 있다.

  그런데 좌승당은 병자호란 때 있었던 건물이 아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한참 후인 순조 때, 광주유수 심상규가 만들었다고 한다.



내행전 위편에 있는 이위정.



  여기도 위의 좌승당을 만든 심상규가 만든 곳이다.

  활을 쏘기 위한 장소로 만든 정자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활터로서의 기능은 잃었고, 대신 이 행궁에서 가장 높다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행궁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다. (아, 물론 진짜 전망대 수준의 풍경을 기대하지는 마시고... ^^;;)



남한산성 행궁의 후원.



  뜬금없이 무슨 후원이냐 싶겠지만, 정말로 이위정 옆 공터의 이름이 후원이다.

  후원은 원래 창덕궁에 있는 넓다란 정원 이름이다.  그런데 이 행궁 역시 유사시에 궁궐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서 궁궐의 격에 맞추느라고, 창덕궁 후원에 비하면 꽤나 협소한 곳이지만 후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후원 반대편으로 보이는 좌전.



  이위정에서 후원 반대편 쪽으로 눈을 돌리면 담벼락 건너편으로 좌전이 보인다.

  좌전은 창덕궁 옆 종묘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이 남한산성 행궁이 다른 행궁과는 달리, 유사시 임시 수도 역할을 하는 곳이라서 역시 임시 종묘를 만든 것이다.  다만, 정작 임금이 이 행성으로 피난해서 정말로 임시 수도 역할을 했던 병자호란 때는 좌전이 없었다.  숙종 때 만일을 대비해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후로 이 곳이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적이 없었으니... ^^;;)

  그런데 아쉬웠던 것은, 나중에 행궁 구경을 끝내고서 좌전도 둘러보려고 갔는데 출입금지 상태다.  아픈 다리 이끌고 갔건만 헛수고만 했다.  행궁 안내서에 관람불가라고 적혀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 기타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



  외행전 앞뜰 한쪽으로, 이 행성과 어울리지 않는 온실 비슷하게 생긴 건축물이 보였다.

  이건 또 뭔가 했는데, 2000년대 들어서 행궁을 복원하면서 뜻밖에도 통일신라 때의 건물이 있던 터를 발견한 것이다.  7세기 문무왕 시절에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느라 이 지역에 주장성이란 성을 쌓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남한산성의 전신인 셈이다.  위 사진의 건물지는 그 주장성에 딸린 건물의 터다.  지금까지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중 최대규모라고 한다.  기와 한 장의 무게가 20킬로그램이었다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런 곳을 관람할 때는 파트너를 잘 골라야 무언가를 보고 감탄하거나 놀랐을 때 그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내가 건물지 안에 들어가 구경하는 동안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줌마 두 분도 내 곁에서 구경을 하셨는데...  한 사람이 "언니, 이것 좀 봐.  기와 한 장이 20킬로래!" 하고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자 문제의 언니 왈 "20킬로고 G랄(!)이고 발 아파 죽겠다.  운동화 신고 올 걸 괜히 힐 신고 왔네." -.-;; 



좌전에 헛걸음 했다가 행성 밖으로 이어진 수로를 봄.



행성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연무관.



  연무관은 말 그대로 무예를 연마하는 곳이다.

  남한산성 내부에 있기는 하지만 행궁과는 꽤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음식점이라서 연무관이 너무 외로워 보인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까지 되었는데, 남힌산성 내부에 있는 음식점 같은 상업시설을 어느 정도는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천주교 남한산성 순교성지


  연무관에서 도로를 건너 조금만 걸으면 천주교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나온다. 

  남한산성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이 날 내가 들릴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 연무관을 보고 나왔다가 도로에서 이 곳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를 봤다.  그래서 즉석에서 계획 수정...!  여기도 들리자...!




남한산성 안에 있어서 한옥 형식으로 지은 성당.



  성당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보니,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에서 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서울과 가까운 곳이고 경기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순조 때인 신유박해 때부터 고종 때인 병인박해 때까지 여기에서 약 300명의 순교자가 생겼다고 한다. 



성당의 옆모습.



  그런데 나는 천주교인을 죽일 때 교수형 또는 참수형만 쓴 줄 알았는데, 안내판 내용에 의하면 그게 아니다.

  병인박해 때는 잡혀온 천주교인이 너무 많아서 하는 줄 알았더니, 사형을 집행하는 군사들마저 피를 보는데 진저리 날 지경이라 정식 사형이 아닌 백지사로 죽였다고 한다.  백지사란, 사형수 얼굴에 물을 뿌리고서 종이로 얼굴을 덮어서 질식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한 번에 목이 잘려 죽는 게 낫지, 서서히 숨이 막혀 죽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여전히 가슴 아픈 2년 전 사고 관련 현수막.



  성당 건물 옆에는 세월호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리고 현수막 근처 성모 마리아상 앞에는 색색의 촛불을 밝혀놓았다.  누구는 천주교인으로서 신앙심 때문에 촛불을 밝혔을 것이고, 누구는 현수막을 보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촛불을 밝혔을 것이다.

  나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세월호 사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초를 하나 꺼내서 밝혔다.  구조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희생자가 더 많아졌던 세월호 사건, 어쩌면 그 늦은 구조작업의 원인이 요즘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대형 정치 스캔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비선조직이 저희들끼리 어떻게 해보겠다며 구조체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우왕좌왕 하다가, 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하고 안일하게 넘겼다가, 구조시간을 놓쳤던 게 아닐까...  빠른 시일 안에 세월호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를,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이 부디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라며,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