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너무 더웠던 1994년 여름

Lesley 2016. 8. 22. 00:01


  지구 온난화 때문에 우리나라의 여름이 점점 더워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 여름은 정말 끔찍했다.

  내 인생 최악의 여름이었던 1994년 여름 이후로, 이렇게 무더위가 기승 떠는 여름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 지역으로 이사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쪽이니까 여름에 여기보다는 덜 덥겠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이번 무더위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번 여름의 조상격인 1994년의 여름에 대해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려볼까 한다.


  정말이지, 1994년 여름은 여러가지로 대단했다.

  물론 그 전에도 여름은 항상 더웠다.  하지만 적어도 밤에는 기온이 어느 정도 떨어져서, 창문을 열어놓고 얇은 이불을 덮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에는 그런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다수 한국인이 '열대야' 라는 단어를 1994년 여름에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1994년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에도 그 여름 무더위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올 정도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그 해 여름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마침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무더위가 극성이라 전력사용량이 연일 최대치를 경신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정전사태가 벌어졌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많이 사는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전 다음 날 학교에 가보면, 정전 때문에 시험공부 못 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더위에 질린 나머지 시험이고 뭐고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그나마 더운 바람이라도 나오던 선풍기조차 멈춰버려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화를 냈을 뿐이다. ^^;;

  나도 시험공부를 하면서, 무슨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고시생처럼 세수대야에 찬물을 떠다 책상 아래 두고 발을 담그는 원시적인(!) 방법까지 동원했다.  큰 효과가 없을 거라는 것은 알지만, 더워 죽을 것만 같아서 무슨 방법이든 써야 했다.  그래도 더위를 쫓을 수가 없어서, 시험공부하다 말고 찬 기운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 거실로 나가 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바닥도 시원하지 않고 미적지근할 뿐이고, 그나마 내 체온 때문에 곧 뜨끈해졌다.  그러면 몸을 한 바퀴 옆으로 돌려 눕지만, 새로 옮겨누운 자리도 곧 다시 뜨끈해지고... ㅠ.ㅠ   


  그리고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1994년 여름은 우리나라 가전업계에 새로운 수요가 창출(!)된 해였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가정에 에어컨이 없었다.  여름 더위가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굳이 에어컨이라는 비싼 물건을 구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 뿐 아니라 어지간한 규모의 상점에서도 선풍기나 돌렸을 뿐이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버스에는 냉방장치가 아예 없었고 지하철에나 커다란 선풍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94년에 끔찍한 더위를 겪고나니, 가정이고 상점이고 간에 앞다투어 에어컨을 구입하려 들었다.  그러니 1994년 여름 날씨야말로 우리나라의 에어컨 보급률의 1등 공신인 셈이다.  너도 나도 에어컨을 구입하려 하는 통에 물건이 달려서, 주문을 하면 한 달씩 기다려야 한다고 뉴스나 신문에 나올 정도였다.  우리집은 그 난리 부르스에 동참할 엄두도 못 내고 일단 그 해를 넘겨서, 다음 해 여름 직전에 에어컨을 장만했다. (이 때 구입한 에어컨이 지금까지 우리집 거실 한쪽 구석을 지키고 서있는 녀석임. ^^)


  하지만 그 다음 해부터는 사람 잡을 정도로 덥지 않았다.

  여름 중에서도 가장 더운 때(주로 중복에서 말복 사이의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잠들기 전 공기를 식히기 위해 두세 시간씩 트는 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이럴 거면 무엇하러 에어컨을 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에어컨이 올해에는 모처럼 몸값을 제대로 했다.

  끔찍한 더위 탓에 평일에는 식구들이 모이는 저녁부터 밤까지 너덧 시간 정도, 식구들이 온종일 집에 있는 주말에는 열 시간 이상씩 틀었다.  1995년부터 작년까지 20년간 에어컨을 튼 시간을 다 합쳐봐야, 올해 에어컨을 튼 시간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람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로 올 여름에는 에어컨 덕을 톡톡히 봤다. 


 

  뱀발 - 1 


  우리집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이 곧 맞게될 전기료 폭탄, 이거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이냐...!

  산업용 전기료와 가정용 전기료의 차이가 크다는 점, 6단계로 나눠 누진제를 적용한 전기료가 불합리하다는 점, 이런 것들은 전부터 종종 언론에서 문제가 되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막연하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을 뿐, 이제껏 전기를 엄청나게 쓸 일이 없었으니 이 문제를 크게 실감하지는 못 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대다수 가정에 전기료 폭탄이 떨어질 게 확실시 되면서, 가뜩이나 더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구는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나 하고 있으니, 정말 속이 터진다.

  말이나 못 하면 얄밉지나 않지...  산자부의 채 뭐시기 실장이란 사람이 하는 말에, 그렇잖아도 더워죽겠는데 열받아서 더욱 더워졌다. -.-;;  "하루에 4시간만 에어컨을 틀면 전기료가 10만원 밖에 안 나돈다." 는 둥 "누진제 개편은 1% 부자들을 위한 감세와 같다" 라는 둥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만 하는데, 정말이지 TV 안에 손을 넣어 그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의 머리털을 몽땅 뽑아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이번 여름이 에어컨을 하루 몇 시간만 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전기료 문제가 이슈가 된 거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한테 하루에 4시간만 틀라니... 마치 쌀값이 갑자기 폭등해서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없는 국민들이 배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데, 거기에 대고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한 달 쌀값이 10만원 밖에 안 든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진제 개편이 우리나라 상위 1%에 해당하는 부자들을 위한 감세와 같다니, 이건 전기를 많이 쓰는 사람들은 전부 부자라는 전제를 깐 이야기다.

  하지만 올해 여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기를 많이 쓴 것은 모두가 부자라서가 아니다.   그저 너무 더운 나머지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전기를 많이 쓴 것 뿐이다.  전기 많이 쓰는 걸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기꺼이 하루 24시간 내내 에어컨을 수십 대씩 가동해서 전기료 왕창 낸 다음에 삼성이나 LG 같은 재벌이 되려고 할 것이다. -.-;; 


  이렇게 속터지는 소리나 하다가 뒤늦게 선심 쓴다는 식으로 대책을 내놓았는데...

  전기료 각 구간의 상한선을 50kWh씩 올려준다는 것이다.  하...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ㅠ.ㅠ



  뱀발 - 2


  한전과 산자부만큼이나 국민들 덥게 만든 기관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기창청이다. 

  원래도 기상청 일기예보가 안 맞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여름에는 그 정도가 유독 심하다.  평소에도 비가 온다 안 온다를 예보가 아닌 중계를 한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이제는 중계도 아니고 아예 후속보고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둥둥둥~~ ← 뒷북치는 소리 -.-;;)  그런가 하면 광복절만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꺽일 것이라 하더니, 막상 광복절이 되자 그 주 후반부에나 더위가 수그러들 것이라 말을 바꾸고, 얼마 후에는 그 다음 주로 또 바뀌었다.  그 와중에 9월 중순부터는 서늘해질 것이라는 하나마나 한 장기예보까지 해서 욕을 더 많이 먹는 중이다. ('9월 중순부터 서늘해지다가 11월 중순부터는 추워지겠습니다.  그리고 내년 3월 중순부터는 다시 따뜻해질 겁니다.' 는 식의 일기예보라면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할 수 있음. -.-;;)

  그래서 이번 여름 내내 인터넷의 날씨 관련 기사에는 온갖 댓글이 가득했다.  예를 들면, '한전 때문에 열불 나고 기상청 때문에 천불 난다.' 같은 댓글 말이다.  기상청의 엉터리 일기예보에 화가 나다가도, 그런 댓글을 보고 웃느라 화가 좀 풀리기도 했다. ^^;;


  어찌되었거나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일기예보 적중률을 높여서, 가뜩이나 빡빡하게 사느라 힘든 국민들의 짜증지수를 낮춰야 한다.  그리고 기상청도 구라청(^^;;)이니 상상청(-.-;;)이니 사기청(-0-;;)이니 하는 오명을 벗어야 하지 않겠나...



  쓰고나서 보니, 분문이나 뱀발이나 분량이 비슷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