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선정릉(宣靖陵 : 선릉 + 정릉)에 다녀왔다.
점심약속으로 오래간만에 선릉역 근처로 나갈 일이 있었는데, 점심을 먹은 후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할 겸 해서 간 것이다. 나도 그렇고 함께 간 친구도 그렇고 선정릉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긴, 선정릉 근처를 지난 적도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 둘 다 강남이 서식(?)지역 또는 활동지역이 아니라서...
생각해 보면, 강남 같은 번화가 한복판에 널따란 왕릉이 있다는 것은 좀 묘한 일이다.
그래도 강남이 선정릉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왕릉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 허파 노릇까지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서울에 있는 다른 조선왕실도 주민들의 산책 코스를 겸한 녹지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선정릉 같은 경우는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한 듯하다. 온통 빌딩과 자동차 밖에 없는 강남이 그래도 선정릉 덕분에 숨 좀 쉴만한 것일테니까.
아, 참고로 강남구에 있는 정릉(靖陵)과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을 헷갈리면 안 된다.
공교롭게도 한자만 다를 뿐 한글 발음이 같아서 혼동하기 쉽지만, 엄연히 다른 능이다. 강남구 정릉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능이고, 성북구 정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 정릉(貞陵), 그리고 동구마케팅고등학교 오르막길에 얽힌 추억(http://blog.daum.net/jha7791/15790895)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
입구로 들어서서 재실(제사 지낼 때 이용하는 작음 집)로 가다가 저 은행나무를 발견했다.
은행나무가 재실 가는 길과 반대방향에 있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런데 친구가 용케 발견하고 "저 나무 멋있다." 하기에 쳐다봤더니, 정말 용트림 하는 형상으로 당당히 버티고 서있는 은행나무가 보였다. 우리 둘 다 식물 쪽으로는 깜깜절벽인데도 어떻게 저 나무가 은행나무인 걸 알았느냐 하면... 나무 바로 앞에 은행나무라는 팻말이 있기 때문이다. ^^
재실 대문 앞에 만발한 복사꽃.
(그런데 사진 상태가 왜 이 모양이냐... ㅠ.ㅠ)
친구는 이 꽃을 홍매화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팻말을 보니 복사꽃이라고 한다.
벚꽃, 매화, 복사꽃은 사람으로 치면 사촌쯤 되는 가까운 친척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처럼 눈썰미 없는 사람들 눈에는 그게 그것으로 보여서 구분하기 곤란하다고 한다. (...라고 꽃을 알아맞추지 못 한 친구를 열심히 변호해주는 나의 우정...! ^^)
밖에서 본 재실.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재실의 본채.
재실의 본채와 곁채.
잠깐 곁채 툇마루에 앉아 잠시 다리쉼을 했다.
선정릉 입구에서 여기까지 100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데도, 점심을 배부르게 먹은 직후인데다가, 이 날 기온이 23도까지 치솟아서 쉽게 지쳤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둘 다 올해 들어 부쩍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이유도 있다. (노화현상인가 봐... 어떡해... ㅠ.ㅠ)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고목 여기저기에 피어난 노란색 꽃잎~~!
재실을 나와 정릉 쪽으로 걷다가 문들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우와~~~ 진짜 파랗다...! 지난 겨울과 올봄은 유독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이 날은 모처럼 미세먼지가 가셔서 하늘이 새파랗고 깨끗했다.
철쭉꽃으로 추정(!)되는 꽃.
정릉에서 선릉으로 가는 길목에 연한 분홍빛 꽃이 보여서 무슨 꽃일까 궁금해했다.
그러자 친구가 철쭉꽃이라고 했다. 철쭉꽃이 보통은 진분홍색이나 흰색이지만 이렇게 연분홍색인 것도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철쭉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앞에 쓴 것처럼 친구에게 홍매화와 복사꽃을 구분 못 한 전과(!)가 있어서, 철쭉꽃으로 화실히 결정내지 못 하고 추정하는 것으로 끝~~~! ^^
선릉 중 정현왕후의 봉분 앞에 있는
말 모양 석상의 귀여운(?) 엉덩이.
솔직히, 출입금지 구역인 저 안으로 들어가 말의 엉덩이를 톡톡 쳐보고 싶었다.
어째서인지 땅까지 닿는 기다란 말꼬리와 통통한 숏다리(!)와 이어진 엉덩이가 무척 귀여워 보여서 만져보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품은 저란 사람은 변태인가요... ^^;;
훤칠한 소나무들에게 둘러쌓인 정현왕후 능역.
선릉은 조선 제9대 국왕인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부부가 함께 묻힌 능이다.
하지만 나란히 묻혀있는 게 아니라 제법 거리를 두고 따로 묻혀있다. 정현왕후의 능역을 가운데에 두고 남편 성종의 능역과 아들 중종의 능역이 양쪽으로 있는 형상이다. 그러니 정현왕후는 죽어서도 남편과 아들을 양 옆에 두어 참 든든한 마음일 것이다... 라고 훈훈하게 쓸 수 있다면 좋을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다.
선정릉에는 반전이랄까 공공연한 비밀이랄까 하는 사연이 하나 있다.
시신이 안치되어 있어야 할 세 개의 봉분이 전부 텅 빈 상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장품을 훔칠 겸 조선왕실을 능욕할 겸 선정릉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선릉에 묻혔던 성종-정현왕후 시신의 행방에 대해서는 따로 논란이 일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성종-정현왕후의 시신이 일본군의 만행으로 유실된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선릉을 복구하면서 봉분 안에 시신을 대신할 옷을 대신 안치했다.
문제는, 성종-정현왕후의 아들이며 정릉에 묻혀있던 중종이다.
일본군이 훼손한 정릉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시신이 중종의 시신인 건지 다른 사람의 시신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중종의 생전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궁인들을 데려다가 확인하게 했다는데... 중종이 세상을 뜬지 워낙 오래 되어서 궁인들이 생김새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 했고, 설사 기억을 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매장되어 있어서 변형된 시신을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그래서 정체불명의 시신을 지엄한 왕릉에 묻을 수 없다는 의견과, 다른 곳에 매장했다가 정말로 중종의 시신이면 어쩔 거냐는 의견으로,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시신을 다른 곳에 묻고, 정릉에도 선릉처럼 옷을 대신 묻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릉터가 꽤 안 좋은지, 중종의 시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수난을 겪었다.
원래 중종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와 함께 묻혀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나중에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은 마음에, 남편을 전처 곁에서 떼어내어(!) 정릉으로 이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이장한 곳이 하필이면 침수지역이었다. -.-;; 그래서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는 지금의 서울 노원구에 있는 태릉에 묻히게 되었다. ☞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왕릉보다 훨씬 큰 왕비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224)
중종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아내의 성화에 죽은 몸 이끌고(!) 귀찮게 이사를 했더니만, 이사한 곳이 침수가옥이라 장마철마다 물벼락을 맞게 된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예 시신조차 잃게 되었으니...
선릉의 성종 봉분 옆에서 내려다 본 풍경.
왕릉과 번화가의 빌딩이라니...
얼핏 생각하면 정말 안 어울리는 풍경인데, 의외로 그럭저럭 어울린다. 부조화 속의 조화랄까? ^^ 아마 이 날 모처럼 하늘이 맑아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성종 봉분 옆에 있는 무인상과 마상의 아리따운(?) 뒤태.
(이 날 이상하게 뒤태에 자꾸 눈이 갔음. ^^)
성종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벽.
(괜히 마음에 들어 찍어봤음. ^^)
의릉(懿陵) - 왕릉과 안기부의 기묘한 동거(http://blog.daum.net/jha7791/15790831)
정릉(貞陵), 그리고 동구마케팅고등학교 오르막길에 얽힌 추억(http://blog.daum.net/jha7791/15790895)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왕릉보다 훨씬 큰 왕비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224)
헌인릉(獻仁陵) - 서울 외곽의 조선왕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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