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친구가 갑자기 창덕궁 후원관람을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친구가 무언가 착각하는 줄 알았다. 창덕궁에 이미 대여섯 번 가봤는데, 창덕궁을 전체적으로 관람하는 코스에 후원 일부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내내 서울에서 살았으면서도 창덕궁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이 친구가, 창덕궁 전체 관람을 후원만 관람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말로 후원관람이라는 게 따로 생겼다...! @.@ 기존의 일반관람은 창덕궁을 한 바퀴 돌면서 후원도 잠시 거쳐가는 코스인데, 후원관람은 창덕궁 중에서도 후원만 집.중.적.으.로. 관람하는 코스다.
후원관람의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자면...
후원관람은 무조건 가이드와 함께 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일반관람에는 가이드 동반 관람말고 자유관람도 생겼다. 하지만 후원관람은 아직까지는 무조건 가이드와 함께 다녀야 한다.
입장표는 미리 구입하는 게 좋다. 가이드와 함께 다녀야 하다 보니 입장시간에 제한이 있고(한국어 가이드 기준으로 하루 8회), 또 한 회당 입장표가 100장으로 제한되어 있기까지 해서(현장구매로 50장, 인터넷예매로 50장), 경쟁률이 치열한 편이다. 우리는 관람 2주일 전에 일찌감치 인터넷으로 예약했는데, 우리가 원하는 시간의 입장권이 달랑 8장만 남아 있었다. 인터넷예매표가 매진되면 현장에서 구매할 수 밖에 없는데, 인터넷예매표도 동이 나는 판국에 현장구매표인들 넉넉히 남을까... 그저 부지런히 미리 예매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창덕궁 후원관람용 5,000원짜리 입장표만 사면 되는 게 아니라, 일반관람용 3,000원짜리 입장표도 함께 사야 한다. 그 이유인즉슨, 후원만 구경한다고 해도 일단은 창덕궁 안으로 들어가야 후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후원까지 가는 길에 '본의 아니게'(!) 창덕궁의 후원 아닌 지역도 통과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반박하기 힘들지만, 좀 억울한 생각이 드는... -.-;;)
창덕궁 후원관람의 두 가지 주의점!
우선, 관람 시작 20분 전까지 돈을 내고 입장표를 받아가지 않으면 예매가 취소된다. 인터넷으로 예매한다고 해서 결제까지 인터넷으로 되는 건 아니고, 입장표 파는 곳에 예매할 때 프린트한 종이를 보이고 돈을 지불한 후 입장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유명세 치르느라 관람객이 많아서 입장표 사려는 사람이 우글거리니, 시간을 넉넉히 잡고 가야 한다. 20분 전에만 입장표 사면 된다고 딱 20분 전에 맞춰 갔다가는, 줄서는 데 시간 허비해서 예매가 취소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
그리고, 후원관람은 창덕궁 안으로 몇 분 걸어들어가면 있는 함양문이라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 함양문 앞에서 시간 맞춰 가이드를 기다려야 한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가이드를 기다리면 절.대.로. 안 된다. (돈화문은 일반관람 가이드를 기다리는 곳입니다요~~~)
일찌감치 들어갔더니 시간이 남아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나 둘러보고 가기로 했음.
인정문 밖에서 인정전을 바라본 모습.
부용지 건너편으로 보이는 주합루.
후원에서 처음 간 곳은 부용지란 연못이 있는 곳이다.
내 기억에, 이 부용지는 창덕궁 일반관람 때도 들렸던 곳이다. 주합루는 정조 때 설치한 규장각 건물로 쓴 곳인데, 2층은 책을 보관하는 곳으로 썼고 1층은 그 책을 보는 곳으로 썼다고 한다.
주합루의 대문(!)인 어수문과, 어수문 양옆의 쪽문(!).
어수문이라는 이름은 수어지교(水魚之交)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의 촉나라를 세운 유비가 아직 여기저기 떠돌던 시절, 자신이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 하는 것은 유능한 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삼고초려를 해가며 제갈량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제걀량이 이미 신하가 되었는데도, 유비가 유독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자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 장비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제갈량이 아무리 잘났어도 엄연히 유비의 신하인데, 유비가 제걀량에게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유비는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는 말로 의형제들의 불만을 막았다.
그 후로 수어지교란 말은 제왕과 신하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정조는 규장각 건물인 주합루의 문을 어수문이라고 이름붙여서, 자신이 규장각의 신하들을 매우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규장각 신하들의 사이가 유비와 제걀량처럼 긴밀하기를 원한다는 소망을 품었다.
재미있는 것은 어수문 양옆에 있는 쪽문이다.
큼직한 어수문은 임금님 전용문이라 신하들은 감히 그 문으로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어수문 양옆에 신하 전용문을 만들었는데, 일부러 문의 높이를 낮게 만들어서 신하들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치사하면 신하 말고 임금 해야죠~~ ^^)
부용지 한쪽 끝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부용정.
부용정은 부용지를 사이에 두고 주합루와 마주보고 있다.
부용정에서 왕과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는데, 낚은 물고기는 다시 풀어줬다고 한다. 현대인 눈으로 보자면 생명은 해치지 않고 낚시의 재미만 즐긴다는 점이 무척 낭만적인 것 같은데, 당시 배곯던 백성들 눈에는 '그야 궁궐 안에는 먹을 게 넘쳐나니까 물고기 따위 안 먹겠지!' 식으로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낚시 성적이 시원찮은 신하는 벌칙 삼아서 부용전 한가운데 있는 섬(사진 오른편에 잘려 보이는 작은 인공섬)으로 잠시 귀양(!)도 보냈다고 한다.
(위) 역시 부용지 옆에 있는 영화당.
(아래) 예쁘장한 필체로 쓴 영화당 현판.
영화당은 주로 연회장소로 이용된 곳이라고 한다.
영화당의 현판은 영조가 쓴 것이라고 한다. 영조하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사도세자인데, 그런 무정한 아버지가 쓴 것치고는 글씨가 무척 예쁘장해서 의외다. 현판에 쓴 붓글씨에 예쁘장하다고 하는 게 좀 이상하기는 한데, 영화당 현판은 우리가 다른 전통건물에서 보는 현판 글씨에 비해 정말로 예쁘장하게 생겼다!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조선후기 왕실에서는 마치 여자가 쓴 글씨로 보일 정도로 부드럽게 쓰는 글씨체가 유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영조라고 한다. 그런데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그런 예쁘장한 필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힘차고 굵직한 남성스러운 글씨체로 바꾸었다고 한다. (왜? 예쁘장한 글씨도 보기 좋구만~~)
애련지와 애련정.
애련지(愛蓮池 : 연꽃을 사랑하는 못)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큼지막한 연잎이 가득하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사람들이 연꽃 하면 보통 불교를 떠올리지만 유교 쪽에서도 연꽃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연꽃이 비록 더러운 진흙에서 살지만 아름답고 깨끗하게 피어나기 때문에, 군자의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란다.
시간관계상 가이드 뒤를 따라 곧 애련지를 떠나야 하는 게 아쉬웠다. 애련지 한쪽 끝에 혼자서 가만히 앉아 조용히 기다리다 보면, 저 무성한 연잎 위로 개구리 왕눈이가 삐리리 하고 피리 불면서 튀어나올 것 같은데... ^^
존덕정의 독특한 모습.
아무래도 이 존덕정은 일반관람에는 없는 후원관람만의 아이템(!)인가 보다.
전에 이런 특이한 정자를 한 번이라도 봤으면 기억 못 할리가 없다. 그만큼 독특하게 생겼다. 우리나라의 정자 대부분이 사각형인데, 존덕정은 육각형이다. 게다가 지붕도 이중지붕, 기둥도 다 이중기둥이다. 중국풍도 느껴지는 게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존덕정의 화려한 내부모습.
존덕정은 겉모습만 독특한 게 아니라 내부도 독특하다.
천장에 화려하고도 정교한 문양이 그려져있고, 그 한 가운데 두 마리 용이 있다. (용 그림 확대사진은 아래에~~)
또 나무로 만든 큼직한 현판이 하나 걸려있다. 나무 현판 안의 글은 정조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담아 쓴 것이다. 정조는 스스로에게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모든 시내를 비추는 밝은 달의 주인)이라는 호를 붙였는데, 이 호에는 밝은 달이 온 세상의 시내를 다 비추듯이 자신이 펼치는 정치가 모든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소망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 현판의 글씨를 전부 풀어놓은 것을 읽어보니, 달은 태극이며 태극은 정조 자신이고 음양오행이 어쩌구 저쩌구 써있다. 그런데 몇 번을 읽어봐도 너무 어려워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존덕정 천장에 그려진 청룡과 황룡.
(지엄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함.)
존덕정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초가지붕 정자.
단청도 칠해놓은 정자 위에 뜬금없이 초가지붕이 올라가 있다.
명품 정장 빼입고 머리에는 밀짚모자 쓴 꼴이라 처음에는 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꾸 보니 나름대로 부조화 속의 조화가 느껴지는 듯하다. 어쩌면 왕실 사람들의 서민체험을 위한 장소였을 수도 있고... ^^
존덕정 천장과는 다른 느낌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태극정 천장.
태극전을 지나서 연경당이란 곳을 마지막으로 들렸는데...
그곳은 공사중이라 어수선해서 사진을 안 찍었다. 그러니 사실상 이 태극정 구경으로 1시간 30분짜리 창경궁 후원관람이 끝난 셈이다.
우리가 창경궁 후원관람을 갔던 9월 하순만 해도 아직 한낮 더위가 가승을 부렸다.
그래서 이 포스트 제목을 처음에는 '창덕궁 후원 가을 나들이' 라고 했다가 '가을' 이라는 단어를 빼버렸다. 가을정취가 느껴지기는커녕 여름부터 계속된 가뭄 때문에 나뭇잎이나 꽃잎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것이 보였고, 겨우 1시간 반짜리 코스인데도 뜨거운 햇살 때문에 쉽게 지칠 정도였다. (늦더위에 아직 안 죽은 모기에게 손등을 물리기까지... ㅠ.ㅠ)
하지만 10월이 된 지금 창덕궁 후원에 가면 나뭇잎이 울긋불긋해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살면서 가을정취 느끼고 싶은 이라면, 괜히 돈과 시간 잔뜩 들여서 멀리 나갈 생각 말고 가까운 서울 창덕궁으로 가도 괜찮을 듯하다.
뱀발
첫 번째 사연
고등학생 30명 정도가 우리 관람팀에 끼였는데 정말 어수선했다.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떠들어대면서, 가이드가 그만 다음 장소로 가자고 해도 말을 제대로 안 들었다. 인솔교사가 모두 3명이었는데 누구도 아이들 관리에 신경쓰지 않았다. 여교사 두 명은 수다 삼매경에 빠지고 남교사 한 명은 셀카 삼매경에 빠져서, 학생들이 가로 뛰고 세로 뛰어도 나 몰라라 분위기... -.-;; 얼마나 통제가 안 되고 어수선했으면, 같이 간 친구가 앞으로는 학생단체팀이 예약했는지 알아보고 와야겠다고 했을 정도다.
그 와중에 어떤 남학생과 여학생이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면서, 맨땅도 아니고 빗물 빠지라고 만들어놓은 철골 구조물(길거리에 있는 환풍구 비슷하게 생긴 철망처럼 생긴 구조물) 위에서 위아래로 펄쩔펄쩍 뛰었다. -.-;; 철골 구조물 아래로 나있는 구덩이가 제법 깊어서, 망아지만한 아이들이 뛸 때마다 철골 구조물이 철컹대는 소리가 메아리 쳤다. 문득 작년에 벌어졌던 판교 환풍구 붕괴 사건이 떠올라, 보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결국 그 광경을 본 경비원 아저씨가 잔뜩 굳은 얼굴로 오셔서 "너희 떨어져 죽고 싶어!" 하고 고함치는 것으로 상황종료~~~
두 번째 사연
가을이다 보니 후원에 뻗어있는 길마다 도토리가 떨어져있는 게 눈에 띄였다.
어떤 도토리는 도토리 알갱이만, 어떤 도토리는 모자(?)를 쓴 채로 떨어져 있는 게 귀여워 보여서, 가이드를 따라가며 우리끼리 계속 도토리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우리 바로 앞에서 걷던 가이드 왈, 고궁 안에서 도토리 주우면 안 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어르신들이 기어이 도토리를 줍는다 했다. 주머니에 몇 개 넣어가는 것 정도는 약과고, 아예 비닐봉투나 보자기(!)까지 준비해오는 어르신들까지 계시다고. -.-;; 친구 왈 "그럴 거면 여기 들어오는 표 살 돈으로 도토리를 사는 게 나을텐데요." ^^;;
제발 단체투어팀은 매너 좀 지키고, 산이나 고궁 같은 곳에서는 도토리나 밤 함부로 주어가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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