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서울 노원구에 있는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에 다녀왔다.
태릉은 드라마 '여인천하' 로 유명해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이다. 그리고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이며 조선 제13대 국왕인 명종(明宗)과 그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부부의 능이다.
장안에 화제였던 드라마 '여인천하' 의 문정왕후(전인화).
악역이지만 역을 맡은 배우가 배우다 보니, 위엄과 품위를 갖춘 인물로 나왔음.
태릉과 강릉은 버스 정류장 2개 정도의 거리를 둔 채 한 지역에 함께 있다.
말하자면, 어머니와 아들 부부가 떨어져 살되 한 동네에서 가까이 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 그리고 두 능 사이에는 국가대표선수들이 합숙훈련을 하는 태릉선수촌이 있다.
지도만 보면, 태릉과 강릉 사이에 마치 숲이나 산만 있는 것으로 보임.
하지만 실제로는 두 능 사이에 태릉선수촌이 자리잡고 있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문정왕후의 태릉(泰陵, 泰는 '크다' 는 뜻임.)이 이름값 하는 것처럼 무척 크다는 점이다.
저 위에 지도만 봐도 명종 부부가 함께 묻힌 강릉(오른쪽)보다 문정왕후 혼자 묻힌 태릉(왼쪽)이 훨씬 크다. 아들 부부는 둘이서 2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는 혼자서 40평짜리 아파트에서 사는 셈이다. ^^ 문정왕후가 조선시대 왕비 중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으로 유명한데, 마치 생전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처럼 능까지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그런데 문정왕후가 태릉에 묻히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문정왕후는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다.
중종은 문정왕후보다 먼저 세상을 떴는데, 원래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근처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나중에 자신이 죽게되면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적당한 구실을 붙여, 남편의 시신을 전처 장경왕후 곁에서 떼어내어(!) 지금의 서울 강남구에 있는 정릉으로 이장했다. (권력욕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독점욕도 강했던 모양임. ^^;;)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정릉에 남편과 나린히 묻히려고 했는데...
그만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새로 이장한 정릉의 지대가 낮다 보니 장마철만 되면 침수피해가 났던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 폭우가 내리면 강남이 강북보다 침수피해가 쉽게 발생함.) 그래서 문정왕후 사후, 정릉은 안 좋다고 지금의 서울 노원구에 따로 태릉을 만들어 문정왕후를 묻은 것이다.
남편과 같이 묻히겠다며 기껏 많은 돈과 인력과 시간을 들여 남편 무덤을 옮겼건만, 결국에는 같이 못 묻히고 한강을 사이에 둔 채 남과 북으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남편 중종은 더욱 딱하게 된 것이, 원래 묻힌 곳은 별 문제 없었는데 괜히 아내 문정왕후의 성화에 침수지역으로 이사(?)해서 장마철마다 물벼락 맞는 신세가 되었다. (아내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
그렇잖아도 위풍당당한 태릉인데, 태릉에는 특별히 '조선왕릉전시관' 까지 있음.
태능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에는, 조선시대 왕의 장례절차와 능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자료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 왕이 승하하면 세 차례에 걸쳐 시신에게 옷을 입히는데, 마지막 세 번째('대렴' 이라는 절차)에서는 무려 90겹의 옷을 입혔다는 점이다...! -0-;; 아무리 얇은 옷이라도 90겹이나 된다면 그 부피가 어마어마할텐데... 그렇게 옷을 잔뜩 입혀 놓으면 너무 답답해서 죽은 왕이라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
그리고 90겹짜리 옷 이야기만큼 놀랍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의외였던 사실 하나... 재궁(梓宮 :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관)은 왕이 세상을 뜬 후에 장만하는 게 아니라 왕이 즉위할 때 미리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평균수명이 짧던 시절이라 즉위할 때 이미 성인이 된 왕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만일 나이 어린 왕이라면 자기 관이 미리 준비되는 것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태릉 입구에서 봉분까지 가는 오솔길 양옆에는 유독 날씬하고 기다란 소나무가 줄지어 있음.
지금까지 조선왕릉을 대여섯 군데 가봤지만, 태릉처럼 규모가 큰 능은 없었음.
태릉을 우리집 근처에 있는 의릉과 비교하자면, 호화주택과 서민주택 같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의릉이 더 마음에 든다.
자주 가서 익숙해서 그런지, 아니면 팔이 안으로 굽는 심정인지... 어쨌거나 위엄이 철철 흘러넘치는 태릉보다는 소박한 의릉 쪽에 더 정이 간다. ^^
☞ 의릉(懿陵) - 왕릉과 안기부의 기묘한 동거(http://blog.daum.net/jha7791/15790831)
의릉의 가을 풍경(http://blog.daum.net/jha7791/15791135)
어도(왕이 걷는 길) 위에서 아빠한테 큰소리로 떼쓰는 아이들.
("뭐라? 그 입 다물라 하였느니!" ← '여인천하' 속 문정왕후 목소리를 입혀서 읽으세요~ ^^)
유독 높다란 곳에 있는 봉분.
태릉은 능역 그 자체의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봉분을 머리 꼭대기에 얹고 있는 동산(?)부터 다른 능의 동산보다 훨씬 크고 높다. 분명히 왕비보다 왕이 더 높은 지위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여러 왕들이 묻힌 봉분보다 에 문정왕후가 묻힌 봉분이 훨씬 높은 동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역시 여왕이란 소리 들었을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의 능이라 뭐가 달라도 다르다.
조선왕릉전시관 안에 전시해 놓은 여러 릉의 석물 복제품을 봐도 그렇다. 아무리 봐도 태릉의 무인석이 다른 왕릉의 무인석보다 표정이나 자세가 더 당당하다. 주인의 기세가 대단하니, 그 주인에 딸린 하인(?)까지 기세등등한가 보다. ^^
들어가지 못 해서 아쉬웠던, 태릉과 강릉을 잇는 숲길.
이 숲길은 4, 5월과 10, 11월만 개방한다고 한다.
이 숲길을 이용하면, 태릉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강릉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두 능을 잇는 길까지 따로 있다니, 문정왕후가 살아있을 적에 문정왕후의 기에 눌러살았던 아들(명종) 며느리(인순왕후)가 죽어서도 마음 편히 못 지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아, 며늘아, 너희 지금 뭐하고 있느냐?' 하며 연락 없이 불쑥 들이닥치는 어머니... ^^;;)
저 길 때문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9월이라 저 숲길이 출입급지 상태여서, 태릉을 나가 도로변에 있는 인도를 걸어 강릉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태릉표로 강릉까지 관람할 수 있어서 검표원 아저씨에게 표를 보이지 않고 그냥 들어갔다. 내 생각에는 강릉에서 표를 산 사람만 검표원 아저씨에게 표검사를 받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구경 다 하고서 나오는 나를 그제서야 발견한 검표원 아저씨, 내가 정문을 통과하는 걸 못 보셨으니 저 숲길을 통해 태릉에서 강릉으로 왔다고 생각하셨다. 엄한 표정으로 지금은 그 길로 다니면 안 된다고 하셨다. (태릉, 강릉을 같이 구경할 관람객은 검표원 아저씨에게 꼭 표를 보이고 들어가세요~~ ^^;;)
태릉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에 있는 태릉선수촌.
삼육대학교 정문 바로 옆에 있는 강릉.
눈앞에 갑자기 삼육대학교가 나타나서 당황했더랬다.
휴대폰 지도를 보면 분명히 '태릉-태릉선수촌-강릉-삼육대학교' 순서대로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태릉선수촌을 지나 걷다 보니, 강릉은 안 보이고 별안간 삼육대학교가 저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혹시 내가 강릉을 그냥 지나친 건가 하며 당황해했는데... 삼육대학교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려 좀 더 걸어갔더니, 삼육대학교와 담을 맞대고 있는 강릉이 보였다.
태릉과는 달리 입구부터 워낙 작고 검소(?)하다 보니 눈에 안 띈 것이다. ^^;; 하마터면 눈앞에 있는 강릉을 두고 되돌아가서 엉뚱한 곳에서 강릉을 찾아헤맬 뻔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뻗은 길의 길이가 태릉의 길에 비해 짧음.
강릉은 그 동안 비공개 능이었다가, 작년 1월 1일부터 공개하게 된 능이다.
그런데 여러가지로 태릉과 비교된다. 규모가 작은 것도 그렇고 태릉만큼 깔끔하지도 않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굴러다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사실 관람객이라고는 나 혼자 뿐이라 쓰레기를 버릴 사람도 없는 상황... -.-;;). 잔디가 듬성듬성 나있거나 정리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라 을씨년스러웠다.
공개한지 2년도 채 안 되어 아직 사람들이 잘 몰라 그러는 건지, 관람객이 제법 있던 태릉과는 달리 강릉은 썰렁했다. 사람은 고사하고 태릉에서는 곧잘 보이던 까치와 다람쥐마저 안 보였다. 그저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여기에서 파리 날린다는 말은 썰렁하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묘사한 것임. 정말로 파리들이 자꾸 날아와 달려드는 통에 사진 찍는데 방해가 되었음. -.-;;)
다음달 10월부터는 태릉과 강릉을 잇는 숲길도 개방이 되니, 걷기 좋아하는 이라면 겸사겸사 한 번 들려볼만 하다.
아직은 한낮에 햇살이 강해서 움직이다 보면 쉽게 지치지만, 10월은 활동하기 가장 좋은 선선한 때다. 그 좋은 10월에 김밥이나 샌드위치 넣은 작은 가방 하나 들쳐메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태릉과 강릉도 구경하고 두 능을 잇는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일상에 지친 머리도 식히면, 그 아니 좋은가... ^^
의릉(懿陵) - 왕릉과 안기부의 기묘한 동거(http://blog.daum.net/jha7791/15790831)
의릉의 가을 풍경(http://blog.daum.net/jha7791/15791135)
헌인릉(獻仁陵) - 서울 외곽의 조선왕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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