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에 종묘(宗廟)에 다녀왔다.
이상한 일이다. 같은 서울 시내에 있는 고궁은 수십 번도 더 가봤으면서, 종묘는 이번에 처음으로 가봤다. 사실 딱히 종묘에 가지 않을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찌된 일인지 나도 모르겠다. ^^;;
'유교의 파르테논 신전' 이라고 표현될만큼, 종묘는 유교 사상 및 의식의 정수가 집합된 곳이다.
그런데 조금 어이없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것은, 원래 종묘(또는 태묘)는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정작 중국의 태묘는 그 문화적 가치를 많이 잃었다는 점이다. 중국이 유교의 본고장이건만 공산정권 수립 및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태묘가 본래의 목적 및 기능을 상실한 채 '노동인민문화궁' 이라는 이름의 공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0-;;
그래서 원래 모습과 기능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종묘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고 종묘의 목적과 기능을 잘 살리고 있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이,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종묘로 가는 길부터 소개하자면...
전철 1호선, 3호선, 5호선의 환승역인 종로3가역의 8번 출구로 나가서, 출구 방향대로 조금만 걸으면 종묘를 둘러싼 담이 보인다. 그 담을 따라 오른쪽(담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이 나온다.
사실, 3호선 안국역도 종묘에서 가까운 편이다. 다만, 종묘까지는 가까운데, 종묘의 출입구인 외대문까지의 거리가 멀다. (담벼락을 따라서 종묘 밖에서 종묘를 반 바퀴는 돌아야 하는... ^^;;) 산책 삼아 오래 걸을 생각이 아니라면, 혹은 종묘 담벼락을 넘어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종로3가역에서 내리는 게 낫다.
종묘 지도. 조만간 창덕궁과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014년 현재에는 외대문이 유일한 출입구임!
(출처 : 종묘 홈페이지 http://jm.cha.go.kr/depart/n_jm/preview/virtual/virtual_01.jsp?mc=JM_01_01)
그리고 종묘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중요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단체관람을 해야 한다.
매주 토요일은 자유관람이 가능하지만, 그 외의 날에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해설을 맡은 안내인과 함께 단체관람을 해야 한다. 그래도 한국어 안내 관람시간은 1시간에 한 번씩 있어서, 헛걸음 할 일이 거의 없을 듯하다. 그러나 외국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안내 관람시간은 하루에 몇 번 없으니, 시간을 잘 맞춰 가야 한다. (혹시 외국에서 온 손님에게 종묘 구경시켜주려는 분은, 반드시 미리 종묘 홈페이지 들어가서 시간을 확인하시오...!)
현재 '매달 마지막 수요일' 은 '문화가 있는 날' 이라고 해서, 종묘는 물론이고 여러 고궁 및 왕릉 등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시간이 되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평일이면서 동시에 입장료도 안 받는 이 때 관람하면 좋을 듯하다. 특히, 평일에는 단체관람을 해야 하는 종묘이건만, 이 문화가 있는 날만큼은 자유관람이 허용된다. ^^
◎ 향대청(香大廳) 앞 연못
연못 뒤편으로 향대청의 망묘루가 보임. (사진 오른쪽 끝의 중간 부분.)
종묘에 들어서면 곧장 보이는 연못이다.
연못 자체는 네모 모양이고,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은 동그란 모양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는 동양사상에 따라 연못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옛날돈인 엽전이 둥근 모양에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린 이유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함.)
◎ 망묘루(望廟樓)
향대청 일원 건물 중 한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망묘루.
망묘루는 '종묘(廟)를 바라보다(望)' 는 뜻이다.
종묘를 관리하던 관리들이 각종 사무를 보던 곳이다. 그런데 종묘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종묘 정전 쪽을 보며 선대왕들의 덕을 생각하며 일하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니,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낙숫물 자국이 생겼음.
낙숫물 하면 생각나는 게 어린 시절 동화책(혹은 위인전?)에서 본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혹은 훈장이 제자들에게(기억이 가물가물... -.-;;),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의 기와가 모두 몇 줄이나 되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기와를 일일이 세다가, 중간에 헷갈려서 처음부터 다시 세는 것을 반복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단번에 정확한 숫자를 알아맞췄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정확하게 알아냈느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 왈 "낙숫물 자국 숫자를 세었습니다." (오~~ 진짜 천잰데~~ ^^)
이쪽도 낙숫물 자국. 이쪽 방향에서 보니 낙숫물 자국이 직선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보임.
낙숫물 자국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우리 전통 건물의 처마가 직선으로 꺾인 모양이 아니다 보니, 그 처마에서 떨어진 물 자국 역시 직선이 아니다. 지금까지 낙숫물 자국에 신경 쓴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 날은 웬일인지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
◎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
망묘루 바로 옆에 있는 공민왕 신당 입구.
조선왕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곳에 고려 공민왕의 신당이 있는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고려 공민왕 이후로 3명의 왕이 더 있었지만, 제왕의 정통성은 그 3명의 왕을 건너 뛰어 고려 공민왕에게서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로 곧장 넘어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추측은 좀 이상하다. 우왕과 창왕이야 조선 건국 세력이 신돈의 자손이라고 규정해버렸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바로 그 이성계 일파 스스로가 '신돈의 자손을 몰아내고 진짜 왕씨의 자손을 옹립하자' 는 명분을 내세워 즉위시킨 왕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공양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했다.
그렇다면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공민왕보다는 오히려 공양왕의 신당을 종묘에 두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또 다른 하나는, 전설 수준의 이야기다.
이 종묘를 만들 때 갑자기 하늘에서 공민왕의 초상화가 바람을 타고 종묘에 떨어졌다고 한다. 조정에서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한 끝에, 공민왕 신당을 만들어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는 것이다. 이쪽은 '전설의 고향' 수준의 이야기라서 믿기 힘들다. ^^;;
다만, 이 이야기가 현실성 없는 것은 차치하고, 공민왕이 고려 말기에 차지하는 위상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원래 전설이니 설화니 하는 것들은, 당대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권위를 드높이는 종묘 한복판에, 고려의 34명이나 되는 왕 중 하필이면 공민왕의 초상화가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공민왕이란 존재가 당시의 백성들에게 고려의 마지막 불꽃으로 강렬하게 각인되었다는 뜻은 아닐까... 그래서 조선 개국에 앞장선 사람들이 민심을 수습해 순조로운 첫 출발을 하기 위해, 공민왕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어모시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공민왕 신당 내부의 모습.
좀 의외인 게, 위패는 없고 그림만 있다.
정면에는 공민왕과 그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모습이 함께 담긴 그림이 있다. 그리고 왼쪽 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 세 점이 있다.
정면의 그림.
(역시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항상 한 자리에... ^^)
옆면의 그림.
(역시 몽고풍이 많이 유행하던 시절 그림이라, 그림 속 인물의 의복이 낯설어 보임.)
공민왕 신당을 바깥에서 본 모습.
(담 너머로 살짝 보이는 머리의 주인공은 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여자 관광객. ^^)
서울에 공민왕을 모시는 곳이 두 군데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 곳이 이 종묘의 공민왕 신당이고, 나머지 한 곳이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공민왕 사당이다. 공민왕에게 관심 있는 이는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오~!!!
☞ 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 - 서울에 남아있는 고려왕의 흔적(http://blog.daum.net/jha7791/15791071)
◎ 재궁(齋宮)
(위) 재궁의 입구.
(아래) 왕이 머무는 어재실.
재궁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국왕과 세자가 머물며 준비를 하는 곳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왕이 쓰는 어재실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세자가 쓰는 세자재실이 있으며, 왼쪽으로는 왕과 세자가 목욕재계를 하는 어목욕청이 있다.
어재실 앞 한쪽 옆에 있는 드므.
'드므' 라는 것은 넙적하게 생긴 큰 항아리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라고 한다.
어재실 한쪽 구석에 물이 담긴 드므를 두어서, 화재 예방 및 화재 진압에 썼다. 화재가 나면 물을 부어 꺼야 하니, 드무 속 물이 화재 진압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화재 예방' 은 무슨 뜻일까? 바로 화재를 일으키는 화마가 저 드므 속에 가득찬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도망쳐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화마 얼굴이 어떻게 생겼기에, 자기 모습에 자기가 놀라 도망친다는건지... ^^)
◎ 정전(正殿)
정전 입구.
(입구에서부터 뭔가 엄숙한 분위기가 풍기는...)
정전은 종묘의 핵심 건물이다.
국왕과 왕후가 승하하면 일단 궁궐 안에서 3년간 국상을 치른 후, 상이 끝나면 그 신주를 이 정전을 모시게 된다. 그리고 매년 5번씩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지금 매년 5번씩 제사를 지내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서,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종묘제례' 또는 '종묘대제' 라고 하는 행사다.
가로 길이가 101미터나 되어, 우리나라의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긴 정전의 모습.
처음 종묘를 만들 당시에만 해도, 이 정정은 5칸짜리 소박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승하하는 왕과 왕후가 계속 늘어나자, 신주를 모실 자리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몇 차례 옆으로 증축을 하면서 19칸짜리 긴 건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한 건물인데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나무로 된 기둥이나 문의 오래된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만일 조선왕조가 경술국치로 망하지 않고 명맥을 이어나갔다면, 그 후로도 계속해서 새 국왕이 나오고 또 승하를 했을테니, 또 다시 증축해야 했을 것이다. 정전이 점점 길어져서 경내를 꽉 채운 후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궁금하다. 정전을 둘러싼 담을 허물어 정전 경내를 확장해야 했을까... ^^
그리고 월대가 무척 큰 것이 인상적이다.
월대란, 저 사진 속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 납작한 돌을 잔뜩 깔아 만든 커다란 대를 말한다. 어찌나 큰지, 도심의 자그마한 중학교 운동장 크기는 된다.
그리고 정전의 사진을 찍으려면, 본의 아니게 넓은 월대 위에서 달음박질을 쳐야 한다. 정전이 가로로 기다랗게 뻗어있기 때문에, 카메라에 최대한 그 모습을 담으려면 월대 끝까지 물러서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월대 밑으로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면서 월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서도, 정전이 워낙 길어서 한번에 찍지는 못 한다. (위의 사진 역시, 정전의 양쪽 끝부분이 잘려있음.) 인터넷에 뜨는 완벽한(!) 정전의 사진은,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이어붙인 것이라고 한다. ^^
측면에서 비스듬히 바라본 모습.
(낡은 기둥에서 세월의 흐름과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짐.)
정전의 회랑 모습이 장관임.
(저 곳에 관람객이 직접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쉬웠음.)
◎ 영녕전(永寧殿)
정전의 '마이너 버전'(?)인 영녕전. ^^
얼핏 보면, 영녕전은 위에서 소개한 정전보다 좀 작을 뿐이지 생김새는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정전과 영녕전의 지붕을 보면, 두 건물의 차이점이 쉽게 구분이 간다. 저 위의 정전은 지붕 중에 위로 돌출된 부분이 무척 길어서, 가로로 된 지붕 대부분이 돌출되어 있다. 하지만 이 영녕전의 지붕은 가운데 일부분만 돌출되어 있다.
월대에서 회랑까지의 높이 차이가 별로 안 남. (정전은 계단으로 너덧 칸 차이가 남.)
영녕전도 정전처럼 역대 국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곳이다.
신주를 모시는 정전이 이미 있건만 굳이 영녕전을 또 만든 이유는, 정전의 크기에도 나름 규칙이 있어서 마음대로 증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녕전을 따로 건립한 후,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짧은 왕' 또는 '살아서는 왕이 아니었는데 사후에 추존된 왕' 의 신주를 이 곳으로 모셨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중요성이 떨어지는 왕들의 신주만 이 곳에 모아놓은 셈이다. ^^;;
한 가지 의외였던 점은, 우리나라의 정체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후에도 이 곳에 모셔진 이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영친왕 부부다. 영친왕은 1970년에, 이방자 여사는 1989년에 세상을 떴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였으니, 두 사람 모두 왕족이 아닌 일반 시민의 신분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그런데도 마지막 왕위계승자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는지, 이 곳에 신주를 모셨다.
영녕전 지붕의 괴수(?)들.
전에는 궁궐이나 종묘 지붕에 항상 보이는 저 생물(?) 모형이 서유기 속 주인공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즉, 맨 앞부터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맨 뒤는 불교 설화에 나오는 무슨 괴물이라고... 그런데 요즘은 서유기와는 별 상관없는, 이무기 등 상상 속의 영물들이라는 말도 있다. 그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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