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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 - 대한민국 대통령들에게 둘러싸인 조선 후궁 창빈 안씨

Lesley 2015. 9. 14. 00:01

 

  지지난 주에 태릉과 강릉을 다녀온데 이어, 지난 주에는 현충원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현충원에는 가본 적이 없다.  여지껏 가보지 않은 현충원에 새삼스레 다녀온 이유는, 현충원에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태릉과 강릉을 다녀온 일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문정왕후와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봤다.  ☞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왕릉보다 훨씬 큰 왕비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224)  그러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남편 중종은 여러 후궁을 두었는데, 그 중 창빈이라는 후궁의 묘가 생뚱맞게도 현충원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현실적일 만큼 새파란 하늘 아래 서있는 '충성 분수대'.

 

 

  지하철 4호선과 9호선의 환승역인 동작역 8번 출구로 나가면, 현충원의 정문이 바로 나온다.

  그런데 4호선을 타고 동작역으로 갈 경우, 9호선 쪽 출구인 8번 출구로 나가기까지 동선이 꽤 길어서 한참 동안 걸어야 한다.  다리 불편한 노약자들은 참 난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9호선의 특성상 개찰구도 2번이나 통과해야 한다.  9호선을 안 타본 이들, 혹은 평소에 공고문이나 안내문 같은 것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하기 딱이다. (환승 통로의 개찰구 통과할 때는 지하철요금이 부과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내문에 써있으니 안심하세요~~)

 

 

수많은 병사들이 잠든 사병 묘역.

 

 

  비록 현충원을 찾은 게 창빈의 묘를 보기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병사들의 묘를 보니 숙연해져서 잠시 묵념을 했다.

  우리가 오늘날 마음 편히 지내는 게 다 저 곳에 누운 병사들의 희생 덕분이니 말이다.  현충원을 사진이나 TV를 통해 볼 때에는 큰 느낌이 없었는데, 막상 내 눈으로 묘소가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보니 뭐라고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멍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도 들고... 

 

 

채명신 장군의 묘.

 

 

  사병 묘역 중에 유독 꽃이 많이 놓인 묘가 있어서 가까이 가봤더니, 채명신 장군의 묘다.

  채명신 장군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지는 못 하지만, 몇 년 전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기사 내용인즉슨, 5.16에 참여해서 박정희 정권 때 계속해서 군대에서 승승장구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개헌을 추진하는데 반대했다가 전역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사망했는데 월남전 때 함께 고생했던 병사들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서, 현충원 사상 처음으로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힌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사병 묘역 너머 짙은 수풀 속에 현충탑이 우뚝 서있음.

 

 

  사병 묘역 외곽을 돌아 경사가 낮은 오르막길을 한참 올랐다.

  현충원이란 곳의 특성상, 입장객 대부분이 유족 아니면 학교 등 각종 단체에서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온 단체관람객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충일이나 6.25 발발일이 들어있는 6월도 아니니, 입장객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묘지라고는 해도 서울에 별로 없는 큰 녹지대라서, 근처 주민들이 운동이나 산책 코스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운동이나 산책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몇몇 영감님이 휴대폰 외부 스피커로 뽕짝을 요란하게 틀어놓고 다니는 것은 정말 보기 안 좋았다.  망자들이 묻힌 묘지이고, 더구나 그 망자들이 보통 망자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애썼던 전몰군경인데, 최소한의 예의로 정숙함은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굳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이어폰을 쓰면 될텐데, 왜 안 쓰는 건지...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는 현충원의 모든 묘역 중 가장 깊숙한 곳, 그리고 가장 높다란 곳에 위치해있다.

  솔직히 현충원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든 곳이 바로 이 묘다.  봉분과 그 주위의 석물만 보면 괜찮은데, 현충원 외곽에 둘러진 길에서 이 묘로 올라가는 계단이 후덜덜하다.  각각 10여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단을 대여섯개 정도 올라야 한다. (무릎 안 좋은 노인은 힘들어서 못 올라갈 듯...)  묘역 자체도 이 현충원에 있는 다른 전직 대통령(김대중, 이승만)의 묘역보다 큰 편인데, 그렇게 수십 개의 계단 위에 묘를 쓴 탓에 거짓말 좀 보태면 묘가 하늘 높이 둥실 떠있는 모양새다. -.-;;

  그 시절이 지금과는 여러가지로 다른 시대라서, 대통령의 묘를 왕릉 수준으로 만드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는 국민들의 의식과 정서가 많이 변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 현충원에 묻히더라도 이 묘역 만큼 대규모의 묘역을 만들지는 못 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가 나온다.

  묘 옆에 추모시가 새겨진 큰 비석이 있기에 읽어봤는데, 그 추모시를 쓴 이가 고은 시인이다.

  그리고 이건 좀 황당한 일인데, 이 날 직통으로 내리꽂히는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돌아다녔더니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모양이다.  묘를 바라보면서 '왜 여기는 봉분이 하나 밖에 없지?  아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에는 두 개였는데...'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은 멀쩡히 생존해있다는 사실을. -.-;;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묘는 대통령 묘 중 가장 아래쪽에 있다. 

  여기도 추모시와 약력을 새긴 비석이 있다.  그런데 좀 의외였던 게, 어째서인지 비석에 '이승만' 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리승만' 이라고 새겨놓았다.  그 시절의 한글 맞춤법은 지금과 달라서 두음법칙을 안 썼나?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갸우뚱~~)

 

  그리고 이 묘는 합장묘다.

  여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와는 다르게 분명히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 의 묘라고 되어 있는데도, 봉분이 하나 밖에 없어서 이상했다. (이 날 나는 역대 대통령 묘를 둘러보면서 계속해서 봉분 숫자에 집착했음. -.-;;)  스마트폰으로 얼른 검색해 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와는 다르게 한 봉분 안에 부부를 합장했다고 한다. 

 

 

6.25 때 전사한 학도의용군을 위한 무명용사탑.

 

 

  정문 가까이로 내려오면 무명용사탑이 있다.

  6.25 때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산화해야 했던 학도의용군을 위해 잠시 묵념을 하는 것으로, 현충원 관람을 끝냈다.

 

 

 

  여기까지는 현충원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 모습이었고...

  지금부터는 20세기에 만든 현충원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16세기 인물 창빈 안씨 묘에 관한 부분이다.  원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묘를 본 다음에 창빈의 묘를 봤지만, 창빈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다른 인물들과 여러가지로 달라서 맨 끝에 따로 빼내어 쓰겠다.

 

 

 

창빈의 묘역 입구.

 

 

  표지판만 봐서는 박정희,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묘가 전부 창빈의 묘 한쪽 방향으로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나있을 뿐,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 묘는 창빈의 묘 뒤편(그것도 한참 뒤편)에 있다.  그리고 사진 속 '창빈안씨 묘역' 이라는 표지판을 가운데 두고, 김대중, 이승만 두 전직 대통령의 묘가 양옆으로 있다.

 

 

드라마 '여인천하' 속 창빈 안씨.(배우는 최정원)

 

 

  이 창빈이란 인물을 소개하자면, 2000년대 초반에 방영한 화제의 드라마 '여인천하' 를 빼놓을 수 없다.

 

  창빈은 장녹수나 장희빈처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후궁은 아니다.

  다만, 창빈의 손자(조선 제14대 국왕 선조)가 후계자 없이 승하한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기 때문에, 그나마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 사이에서 '선조의 할머니' 정도의 인지도는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즉위는 창빈이 세상을 뜨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라, 창빈이란 사람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 무명 배우... 가 아니라 무명 후궁 창빈이 별안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바로 드라마 여인천하 덕분이다.

  이 드라마에서 창빈은 경빈(도지원) 및 희빈(김민희)과 함께, 중종의 후궁 3인방으로 등장했다.  참고로, 3인방에 못 드는 하급후궁(?)들은 어쩌다 가끔 등장해서 3인방의 뒤편을 장식하는 역할을 맡았다. -.-;;

  어쨌거나 창빈은 후궁 3인방 중 가장 현명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  경빈과 희빈은 각자 자기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고 이런저런 정치적 음모를 꾸미기에 바빴다.  하지만 창빈은 권력다툼에 휘말리지 않으려 몸가짐을 조심하며, 바람 잘 날 없는 궁궐에서 항상 정도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여인천하 후반부에서 후궁 3인방의 운명은 사필귀정식으로 마무리 되었다.

  경빈은 항상 음모를 꾸며서 남을 해치려고 하더니만 정작 자기가 음모에 빠져 사약을 받고 죽었다.  희빈도 몰락해 목숨은 부지했지만 궁궐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창빈만이 평소에 남에게 원한 살 짓을 안 하고 정도를 걸으며 살았기에 무난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천하 마지막회에서, 훗날 창빈의 손자가 왕이 되었으니 창빈이야말로 치열하게 경쟁하던 궁중여인 중 최후의 승자라는 나레이션이 나왔다.  선조부터 시작해서 그 후의 조선 국왕 모두가 창빈의 후손이니, 최후의 승리자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담으로, 창빈이란 작호는 생전에 받은 것이 아니다. 

  창빈 생전에는 숙용의 지위까지만 올라갔는데, 훗날 선조가 왕이 되면서 자기 할머니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빈으로 올리고 창빈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여인천하에서 창빈이라고 나오는 것은 오류인 셈이다.  아마 여인천하 작가가 후궁 3인방 중 창빈만 빈이 아닌 게 딱해서, 창빈을 특별승진(?) 시켜준 모양이다. ^^;;

 

 

창빈 묘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신도비.

 

 

  원래 후궁의 묘에는 신도비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선조의 할머니라서 예우 차원에서 만들어줬다고 한다. (후손을 잘 두고 볼 일... ^^)

  

 

창빈의 묘.

 

 

  사실은 창빈의 묘가 뜬금없이 현충원에 있는 게 아니라, 원래 창빈의 묘가 있던 곳에 현충원이 밀고들어온 것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에서 경비(혹은 안내?) 역할을 하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 분이 창빈 묘로 가는 길을 알려주면서 창빈 묘에 얽힌 사연까지 설명해주셨다.  창빈이 묻힌 이 곳이 워낙 터가 좋아서 창빈의 손자가 왕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런 대단한 명당이다 보니 현충원을 조성할 자리로 뽑혔다고 한다.  하지만 양옆으로 전직 대통령의 묘가 들어서면서, 원래는 널찍했던 창빈 묘역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한다.  

  어찌 생각하면, 창빈 혼자서 넓은 집에서 활개치며 살다가, 제멋대로 밀고 들어온 군식구들과 부대끼며 동거하게 된 상황이다.  하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왕비도 아니고 일개 후궁이었던 사람이 두 전직 대통령을 양옆에 거느리며(!) 호사를 누리게 된 모양새이기도 하다.  게다가 뒤편으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이 창빈 묘를 내려다보며 지키고 있으니... ^^ 

 

 

왕조는 무너졌고 공화국이 되었지만, 공화국 대통령들을 거느리고 사는 후궁의 위엄...!

여인천하 마지막회의 나레이션대로, 창빈이야말로 최후의 승리자다...!

 

 

  요즘 하늘을 보면 천고마비란 말이 딱 어울리는 높고 새파란 하늘이다.

  이런 청명한 날씨에 나들이는 떠나고 싶은데, 그렇다고 멀리 움직이는 것은 귀찮은 사람이라면...  현충원에 가서 순국선열도 생각하고, 외곽길 돌면서 걷기운동도 하고(여기저기 구경하고 중간에 잠깐씩 쉬기도 하며 걷다 보면 2시간 정도 소요됨.), 추억의 드라마를 떠올리며 창빈의 묘도 들려보면 좋을 듯하다.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왕릉보다 훨씬 큰 왕비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