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고려가요(2) - 서경별곡(西京別曲) : 고려시대 집착 강한 여인의 노래

Lesley 2016. 8. 27. 00:01


  몇 년 전에 고려가요 '쌍화점' 을 블로그에 소개했는데, 오래간만에 다른 고려가요 '서경별곡(西京別曲)' 을 소개하려 한다.

  ☞ 고려가요(1) - 쌍화점(雙花店)(http://blog.daum.net/jha7791/15790787)


  옛날이라고 하면 그저 막연히 '남녀관계에 있어서 무척 보수적이었던 시대'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은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성리학이 완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린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성리학이 아직 큰 힘을 못 쓰던 고려시대만 해도 남녀관계가 지금만큼,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몇 년 전에 블로그에 올린 쌍화점도 고려시대의 개방적인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시가인데, 이번에 소개할 서경별곡도 만만치 않다.  쌍화점과 서경별곡을 읽다보면 요즘 막장 드라마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막장성(!)이 줄줄 흐른다.


  먼저 쌍화점에 대해 간단히 복습(?)하자면...

  매력이 넘치는 나머지 가는 곳마다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난잡한 행동을 욕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러워하며 '그 난잡한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겠다.' 고 다짐(!)하는 또 다른 사람(아마 이쪽도 여인인 듯함.)의 이야기다. (왜 너만 즐기는 거냐?  나도 같이 즐기자~~)


  그런데 오늘 소개할 서경별곡은...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스토커나 데이트 폭력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애인에게 강하게 집착하는 사람' 에 관한 이야기다.  시대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사람 사는 모습이란 게 기본적으로는 같다.  강한 집착으로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고도 그 집착을 끊어내지 못 하여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은, 현대 뿐 아니라 머나먼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바로 서경별곡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인이 그런 사람이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


  아래에 서경별곡의 원문(갈색 글씨)과 현대어 해석(검은색 글씨)을 함께 올리겠다.

  그런데 서경별곡에서는 '아즐가' 라는 단어와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라는 구절이 반복된다. (이것들만 빼도 노래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들만큼 지겹도록 반복됨. ^^;;)  '아즐가' 는 그저 신명을 내기 위한 추임새(얼씨구, 지화자 등등) 비슷한 말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는 요즘의 '랄랄라~~' 같은 특별한 뜻 없는 후렴구 정도로 보거나, 혹은 노래 중간에 박자를 맞춰주거나 간주 역할을 하던 악기 소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서경별곡에 나오는 서경은 지금의 평양을 말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노래가 원래는 평양 일대에서 유행하던 민요라고 추측한다.




        서경별곡 (西京別曲)



西京(서경)이 아즐가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닷곤 ᄃᆡ 아즐가 닷곤 ᄃᆡ 쇼셩경 고ᄋᆈ마른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여ᄒᆡ므론 아즐가 여ᄒᆡ므론 질삼 뵈 ᄇᆞ리시고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괴시란ᄃᆡ 아즐가 괴시란ᄃᆡ 우러곰 좃니노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서경이 아즐가 서경이 서울이지만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닦은 곳('새로 고쳐지은 곳' 의 뜻) 아즐가 닦은 곳 소성경('작은 서울' 즉, 평양을 말함.) 사랑하지만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당신과) 이별하느니 아즐가 이별하느니 아즐가 길쌈하던 베를 버리더라도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즐가 사랑한다면 울면서라도 좇아가겠습니다.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구스리 아즐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ᄃᆞᆯ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긴히ᄯᆞᆫ 아즐가 긴힛ᄯᆞᆫ 그치리잇가 나ᄂᆞᆫ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즈믄 ᄒᆡ를 아즐가 즈믄 ᄒᆡ를 외오곰 녀신ᄃᆞᆯ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信(신)잇ᄃᆞᆫ 아즐가 信잇ᄃᆞᆫ 그츠리잇가 나ᄂᆞᆫ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구슬이 아즐가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우리 인연의) 끈이야 아즐가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당신과 헤어져) 천 년을 아즐가 천 년을 홀로 살아간다들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당신을) 믿는 마음이야 아즐가 믿는 마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大同江(대동강) 아즐가 大同江 너븐디 몰라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ᄇᆡ 내여 아즐가 ᄇᆡ 내여 노ᄒᆞᆫ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네 가시 아즐가 네 가시 럼난디 몰라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녈 ᄇᆡ예 아즐가 녈 ᄇᆡ예 연즌다 샤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大同江(대동강) 아즐가 大同江 거넌편 고즐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ᄇᆡ 타들면 아즐가 ᄇᆡ 타들면 것고리이다 나ᄂᆞᆫ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넓은지 몰라서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배를 내어 아즐가 배를 내어 놓았느냐, 사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네 아내가 아즐가 네 아내가 음란한지 몰라서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떠나는 배에 아즐가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느냐, 사공아.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나의 정인은) 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건너편 꽃을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나의 정인이) 배를 타면 아즐가 배를 타면 꺾을 것입니다.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리




  1연을 보면... 

 

  이 노래 속 화자는 서경에 사는 어떤 여인이다.

  그런데 어떤 사정인지 이 여인의 정인이 떠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여인은 정인을 따라가겠다고 한다.

  여인이 사는 서경은 서울인데다가(서경이 고려의 정식 수도는 아니었지만 수도에 버금가는 특별한 지역이었음.) 새로 닦기까지 해서 정말 좋은 곳이다. (즉, 최근에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해서 생활환경이 좋아지고 부동산 값도 꽤 오른... ^^;;)  그래서 여인은 자기 고향 서경을 무척 사랑하고 그 곳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런 서경에서 살며 열심히 길쌈을 해서 베를 어지간히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정인이 떠난다는 소리에, 서경이고 베고 다 필요없고 그저 정인을 따라가겠단다.  정인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울면서라도 따라가겠다고 한다. (사랑 밖에 난 몰라~~! ♪) 


  이 부분이 그저 '여인이 자기 정인을 무척 사랑하나 보네.'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요즘처럼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가서 사는 게 흔한 시대도 아닌데, 고향을 떠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정인을 따라가겠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길쌈이라는 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하는 힘든 일인데 그 동안 애써 짜던 베도 내버리고 정인을 따라가겠다니, 이 여인의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의 보통 아닌 성격은 2연 및 3연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남.)



  2연을 보면... 


  여인은 떠나려는 정인에게, 자신들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운명 공동체라고 강조한다.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  너는 내 운명!)

  줄로 꿴 구슬들이 바위에 떨어져서 다 깨진다 한들, 그 구슬들을 묶어주던 끈마저 끊어지겠냐고 묻는다.  즉, 자신들이 단단한 바위에 떨어진 구슬처럼 어려운 처지가 된다 한들, 자신들을 이어주는 인연의 끈만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인과 헤어져 천 년을 홀로 외로이 살아가게되더라도, 정인과 자신 사이의 믿음은 절대로 끊어질 리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이 정도면 정인을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정인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나려는 이에게 이렇게 부담감 팍팍 주는  말을 할 정도면, 둘이 한창 연애하던 때에도 정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캐내고 간섭하며 자기 곁에 붙잡아두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정인은 여인의 집착 때문에 많이 지쳤을 게 뻔하다.  어쩌면 정인에게 어떤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서 억지로 떠나려는 게 아니라, 여인의 집착에 질린 나머지 도망(!)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인과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다짐하는 2연이, 역설적이게도 이 여인이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인이 이번에 떠나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도 끈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둥, 혼자서 천 년이나 살게 되어도 정인과 자신 사이의 믿음을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둥,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과장된 말로 질긴 인연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이라는 말처럼, 너무 불안한 나머지 뻔히 보이는 현실을 외면한 채 일부러 지나치게 낙관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하며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3연을 보면... 


  1연과 2연에서는 여인이 그.나.마. 좀 자제했지만 3연에서는 성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여인이 그토록 정인과 헤어지지 않으려 애썼건만, 정인은 결국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 떠나버린다.  정인이 떠나버리자 여인은 시쳇말로 뚜껑(!)이 열려버린다...!

  화가 난다면 차라리 당사자인 정인에게 대놓고 화를 내면 좋으련만, 그 와중에도 정인에게 미움받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인 대신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낸다.  여인의 화풀이 대상이 된 사람은, 정인이 대동강을 건널 때 탄 나룻배를 젓는 사공이다.  원래 사공이 하는 일이 배삯을 지불한 사람을 배에 태워 강을 건너게 해주는 것인데, 그런 사공에게 왜 떠나가는 자기 정인을 태워줬느냐며 화를 낸다. (요즘으로 치면, 이별을 선언한 남자친구가 버스 타고 떠났다고 그 버스 기사에게 마구 화내는 격. -.-;;) 


  그나마 정인을 배에 태워줬다고 화내는 건 약과고, 그 뒤에 퍼붓는 악담(!)이 정말 대단하다. 

  "네 아내가 음란한지 몰라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으냐, 사공아!" 라고 막말을 퍼붓는다.  아마 노래 가사라 이 정도로 순화된 것이지, 이 대목을 실제상황 버전으로 바꾸자면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린이 또는 비속어에 강한 거부감 느끼는 분은 다음 파란색 부분은 읽지마세요~~~!)  "네 마누라가 음란하게 다른 놈이랑 바람 피우는 거나 신경 쓸 것이지, 네 마누라 단속도 못 하는 주제에 왜 내 정인이 떠나가게 배를 태워주고 지랄이야, 이 얼어죽을 사공 놈아!"  

  그저 생계를 위해 열심히 나룻배를 젓던 사공은, 졸지에 자기 아내가 바람 피는 것도 모른 채 남의 정인이 도망치는 거나 도와준 한심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집에서 부지런히 밥하고 빨래했을 사공의 아내는, 졸지에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음란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요즘 같으면 사공 아내가 명예훼손죄로 주인공 여인을 고소할지도... ^^;;)


  여인은 한바탕 욕을 퍼붓더니 좀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정인을 생각하며 슬퍼한다. (감정기복이 어찌나 심한지, 무슨 롤러코스터 수준임. -.-;;)

  정인이 배를 타고 대동강 건너편으로 간 후에 그 곳에 있는 꽃을 꺾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즉, 정인에게는 서경이 아닌 어딘가에 다른 여인이 있다.  주인공 여인이 아무리 자기들 인연이 끊기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해봤자, 정인의 마음은 이미 이 집착녀(!)에게서 떠나 다른 여인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여보세요!  한 번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만 정신 차리고 때려치웠던 길쌈이나 다시 해서 부자 되세요~~!)



  충이니 효니 하며 점잔 빼는 조선시대 시가와는 너무 다른, 화끈하기(!) 이를 데 없는 고려시대 시가...!

  정말 마음에 든다.  여러가지로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 서경별곡이나 쌍화점이 교과서에 실려있었다면, 아마 국어 과목은 선생님이 제발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100점 받았을텐데...  그 때만 해도 '가시리' 나 '청산별곡' 같은 점잖은 작품만 교과서에 올라가 있었던 게 무척 아쉽다. ^^



  뱀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보통은 서경별곡을, 순종적인 조선시대 여인상과는 다른, 자기 감정 표현에 당당했던 적극적인 고려시대 여인상을 잘 표현한 시가로 본다.  그런데...  서경별곡에 나오는 떠나간 남자가 정말로 주인공 여인의 정인이 맞긴 맞는 걸까?  어쩌면 '대동강 너머에 있는 꽃' 으로 표현된 또 다른 여인이야말로 이 남자가 정말로 사귀는 여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경별곡 속 주인공 여인은 싫다는 남자를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자신들은 정인 사이가 맞다고 빡빡 우기던 스토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스토커의 망상(!)으로 이루어진 노래다. (이렇게 추측하면 무슨 스릴러 영화의 마지막 반전 부분 같아서 섬찟한 느낌이 드는... -.-;;)



고려가요(1) - 쌍화점(雙花店)(http://blog.daum.net/jha7791/15790787)

고려가요(3) - 만전춘(滿殿春) : 남녀상열지사의 최고봉(http://blog.daum.net/jha7791/15791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