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이규보의 시 죽부인(竹夫人)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에 여름밤에 쓰던 침구 '죽부인' 을 소재로 하고 있다. 불볕더위가 이어지고 있는데다가 이틀만 지나면 중복이니,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위에 고생할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 시를 골랐다.
먼저, 죽부인이란 게 무엇인고 하니...
대나무로 만든 살을 이용해서 공기가 통하도록 듬성듬성 엮어 만든 침구를 말한다. 길이는 성인 여자의 키 정도 되고, 굵기는 한 팔로 안을 수 있을 정도다. 무더운 여름에 죽부인을 팔과 다리로 끌어안고 이불 속에 누우면, 대나무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거기에 이불 위아래로 삐져나온 죽부인을 통해 공기가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러니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여름밤을 보내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요즘에도 가끔 볼 수 있는 죽부인이지만
못 본 이들을 위해 서비스로 한 컷~!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100.daum.net/multimedia/entry/14XXE0053525)
재미있는 것은 죽부인을 정말로 부인 취급했다는 점이다.
일단 죽부인(竹夫人)이란 이름 자체가 '대나무 부인' 라는 뜻이다. 한 이불 속에 끌어안고 누운 데다가 크기까지 성인 여성의 키와 비슷하니, 옛날 남정네들이 자기 부인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옛날 사람들의 해학이 엿보이는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래서 부자지간 또는 형제지간에는 한 죽부인을 번갈아가며 쓰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부자끼리, 형제끼리, 한 여자를 두고 이상야릇한 관계에 빠지는 것 같아서 꺼린 것이다. ^^;;
그런데 이 죽부인이란 시는 몇 달 전에 드라마 '랑야방' 관련하여 소개한 사마상여-탁문군 부부의 사연과 연관이 있다.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봉구황(鳳求凰) / 탁문군(卓文君)의 백두음(白頭吟)(http://blog.daum.net/jha7791/15791258)
이규보는 이 죽부인이란 시 속에서, 죽부인을 진짜 여자인 것처럼 설정해놓고 자신의 실제 부인과 은근히 비교했다. 그런데 죽부인을 실제 부인과 비교하여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단점이 있는지에 관하여 쓰면서, 사마상여-탁문군 부부에 관한 사연도 잠시 언급했다.
竹夫人(죽부인)
- 李奎報(이규보) -
竹本丈夫比 (죽본장부비)
대나무는 본래 장부에 비할 것이니
亮非兒女隣 (양비아녀린)
참으로 아녀자의 이웃은 아니라네.
胡爲作寢具 (호위작침구)
어찌하여 침구로 만들어
强各曰夫人 (강각왈부인)
억지로 부인이라 부르는가.
搘我肩股穩 (지아견고온)
내 어깨와 다리를 편안하게 받쳐주고
入我衾裯親(입아금주친)
내 이불 속으로 친하게 들어온다.
雖無擧案眉(수무거안미)
비록 눈썹과 나란히 밥상 드는 일은 못 하지만
※ 거안미(擧案眉)거안제미(擧案齊眉)란 사자성어에서 나온 말임. 거안제미란, 부인이 밥상을 눈썹과 나란히 되도록 높이 들어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결국 부인이 남편을 무척 깍듯이 대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임.
幸作專房身(행작전방신)
다행히 (남편을) 독차지하는 아내가 되었네.
無脚奔相如(무각분상여)
상여에게 달려가는 다리도 없고
※ 상여(相如)
: 중국 전한 시대 사람인 탁문군(卓文君)의 남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의미한다. 탁문군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친정 아버지가 잔치를 열었는데, 마침 잘 생기고 문장 잘 쓰기로 유명한 사마상여(司馬相如)도 초대받았다. 사마상여가 거문고를 뜯으며 구애의 시(봉구황)를 읊자 탁문군은 반해버렸고, 두 사람은 바로 그 날 밤에 도망쳐서 부부가 되었다.
無言諫伯倫(무언간백륜)
백륜에게 간하는 말도 없다.
※ 백륜(伯倫)
: 중국 진나라 시대 죽림칠현 중 한 명인 유령(劉伶)의 자가 백륜이다. 술 한 병만 들고 수레를 타고서 삽을 든 사람 하나만 따르게 하며, 자신이 죽으면 곧 묻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백륜의 아내가 울면서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섭생하는 도가 아니니 반드시 끊어야 한다." 고 말렸다고 한다.
靜然最宜我(정연최의아)
조용한 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드니
何必西施嚬(하필서시빈)
어찌 서시의 찡그린 얼굴에 비할 것인가.
※ 서시(西施)서시는 춘추시대 말기의 유명한 미인으로,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로 칠 정도다. 그런데 평소 위장병이 있어서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곤 했는데, 대단한 미인이다 보니 찡그린 얼굴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자 같은 마을에 사는 못생긴 여자가 자신도 얼굴만 찡그리면 미인으로 보일 줄 알고, 서시를 따라 얼굴을 찡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이규보는 과도한 음주 때문에 부인에게서 수시로 잔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하긴, 어느 부인이 남편이 술독에 빠져사는 걸 좋아하겠는가... 더구나 어린 아들마저 자기 아버지 하는 것을 보고 배워 술을 마시는 판국이니, 부인은 더욱 속이 상했을 것이다. ☞ 이규보(李奎報) 시문(11) -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http://blog.daum.net/jha7791/15791255)
하지만 이규보 이 아저씨, 자기가 술을 절제하면 될 것을 그건 죽어도 싫고, 그저 부인에게 술 좀 그만 마시라는 소리 듣는 게 귀찮았던 모양이다.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비판이나 충고를 들으면 주저리 주저리 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자신은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려니 어쩔 수 없이 마신다는 둥, 자신은 남보다 주량이 세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 없다는 둥, 다른 사람들도 다 자신만큼 마시는 데 당신이 모르는 것 뿐이라는 둥... (이런 식으로 장황하게 변명 늘어놓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증거임. -.-;;)
그래서 이규보는 죽부인을 자기 부인과 비교한다.
일단은 죽부인의 단점을 드는데, 딱 하나다. 실제 부인처럼 밥상을 차려다 주지 못 한다는 것이다. (술 배 따로 밥 배 따로라, 부인이 해다주는 밥은 정말 좋았던 모양임. ^^;;)
곧 이어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죽부인이 너무 마음에 드는 이유, 즉 죽부인의 장점이며 이 시의 주제이기도 한 내용을 읊는다.
죽부인의 첫 번째 장점은 탁문군처럼 사마상여에게 달려갈 수 있는 다리가 없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잔소리를 항상 귓등으로 듣고 무시해버려도, 죽부인한테는 다리가 없어서 다른 남자에게 가버릴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술타령에 질린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도망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긴 한 모양임. -.-;;)
그리고 죽부인의 두 번째 장점으로, 죽부인은 실제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입이 없어서 말을 못 한다는 점을 든다. 입이 없으니 백륜의 부인처럼 남편에게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고 울며불며 말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서시 같은 굉장한 미인이라도 이 죽부인에 비할 바가 못 된다며, 죽부인을 극구 찬양한다.
이 정도면 이규보는 그냥 주당이 아니라 대마왕급 주당이다.
이규보의 이상형인 여자는, 서시 같은 예쁜 여자도 아니고 자신의 부인처럼 밥을 잘 차려서 가져다주는 여자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 여자이기만 하면 세상 최고의 여자인 것이다...!
이규보(李奎報) 시문(11) - 동일여객음냉주희작(冬日與客飮冷酒戱作)(http://blog.daum.net/jha7791/15791145)
이규보(李奎報) 시문(12) -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http://blog.daum.net/jha7791/15791255)
이규보(李奎報) 시문(14) - 동일여승음희증(冬日與僧飮戲贈)(http://blog.daum.net/jha7791/1579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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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시문(22) - 치통(齒痛) https://blog.daum.net/jha7791/15791700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봉구황(鳳求凰) / 탁문군(卓文君)의 백두음(白頭吟)(http://blog.daum.net/jha7791/1579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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