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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 정통사극을 가장(!)한 퓨전사극 / 목종 역 이인

Lesley 2016. 1. 23. 00:01

 

  2009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천추태후' 를 지난 달에야 보고 이렇게 뒷북 후기를 쓰고 있다.

 

  사실은 천추태후라는 드라마가 있었다는 사실도 3, 4년 전에야 겨우 알았다.

  어지간한 드라마라면, 비록 내가 시청하지 않았더라도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제목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방영했던 2009년은, 내가 중국으로 어학연수하러 가서 온갖 일로 파란만장(!)하게 지내던 때다.  당시 낯선 땅에서 좌충우돌하던 나의 생활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기에(-.-;;), 굳이 바다 건너 한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에까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고려사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도 찾아보게 되었다.  고려시대 관련 사극이 별로 없다 보니, 천추태후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드라마를 처음 알게 된 몇 년 전에 안 보고, 이제와서 새삼스레 봤느냐 하면...

  원래는 일부러 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드라마 평이 안 좋기도 하고, 또 종영한지 한참 지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12월 초에 어쩌다가 몇 회만 다운받아 본다는 게 그만 삘(!)이 꽂혀서 며칠 동안 몰아서 봤다. (네, 항상 그 놈의 삘이 문제지요~~ ^^;;)

  다만, 78회차나 되는 이 드라마를 전부 본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시간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서리...)  인터넷 포털에 나온 천추태후 각 회차의 요약 정보를 읽고서 재미있어 보이는 것만 골라 다운받거나, 또 그렇게 다운받은 회차의 끝부분에 나오는 다음 회차 예고편이 괜찮아 보이면 그 회차도 다운받아 보는 식으로 해서, 50회차 정도를 발췌(?)해서 봤다. (어쩌다 보니 건너뛴 회차가 전부 20~40회에 몰려 있음.)  

 

 

 

 

 

  ◎ 정통사극의 탈(!)을 쓴 퓨전사극

 

  2000년대 들어서 퓨전사극이 유행하면서, 새로운 사극이 나올 때마다 역사왜곡 논쟁이 불거지곤 한다.  

  그런데 사극이란 게 어차피 '역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일 뿐, 결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그러니 재미를 위해서 적당한 허구가 섞이는 것은, 정통사극이나 퓨전사극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통사극과 퓨전사극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으니, 바로 허구의 범위와 수준이다. 

  정통사극은 전체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행적 등 '드라마의 큰 틀' 에 있어서는 역사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온다.  다만, 그 역사 기록의 틀 안에서 여러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의 캐릭터 등 '세부적인 사항' 에 있어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다.

  하지만 퓨전사극은 역사에서 시간적.장소적 배경과 인물의 이름 정도만 차용할 뿐이다.  상당한 부분에서 광범위한 허구적 사항이 나온다.

  어떤 사극이 퓨전사극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다.  퓨전사극은 퓨전사극 나름대로의 의미, 즉 제작진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  '뿌리 깊은 나무' 나 '한성별곡 正' 같은 드라마는 허구적인 요소로 가득 찬 퓨전사극이지만, 꽤 괜찮은 추리극(혹은 음모극)이며 시청자들에게 굵직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문제는, 분명히 퓨전사극인데 정통사극 행세(!)를 하는 사극이다.

  역사와 동떨어진 내용을 마치 진실인 양 밀고 나가다가, 역사왜곡 논쟁이 터지면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봐달라.' 라든지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다 믿을 수 없다.' 식으로 얼렁뚱땅 빠져나간다.  어차피 드라마라는 게 허구니 허구적 내용으로 밀고나갈 거라면, 왜 '잃어버린 역사를 되살린다' 혹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다' 라고 요란하게 선전을 하나?  그리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애초에 무엇하러 정통사극이라고 선전을 하나?  정통사극이란 게 바로 그 믿을 수 없다는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런 것을 네 글자로 자가당착이라고 함.)

  차라리 처음부터 당당히 퓨전사극이라고 밝히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퓨전사극이 역사 기록과 다르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실제로 몇몇 드라마는 '이 드라마 내용에는 실제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 는 요지의 경고문(?)을 드라마 시작 전에 보이는 양심적(!)인 행동을 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포스트의 소재인 드라마 '천추태후' 가 바로 '정통사극을 가장한 퓨전사극' 이다.

  방영을 시작할 당시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봤는데 노골적으로 정통사극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천추태후는 퓨전사극이다. (위의 포스터만 봐도 퓨전사극 분위기가 철철 넘쳐 흐르지 않나...!)

 

  일단 드라마 내용이 역사적 상황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천추태후(채시라)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진이나 거란과의 전쟁에 나선다는 것도 그렇고, 천추태후가 거란의 황제 및 태후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다는 것도 그렇다.  특히나 천추태후가 오빠인 성종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부분에서는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이 부분은 역사와 다른 건 둘째치고, 그냥 드라마적 허구라고 해도 개연성이 털끝만큼도 없음...!)

 

  그리고 등장인물의 신원이나 행적이 뒤죽박죽이다.

  졸지에 신분세탁(?)을 한 사람들 이야기부터 하자면...  천추태후의 연인 김치양(김석훈)은 난데없이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는 데 끝까지 반대했던 신라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의 손자로 나온다.  그래서 망한 신라를 부흥시키겠노라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훗날 강조의 정변을 일으키는 강조(최재성)도 뜬금없이 발해의 유민으로 나와서, 벙어리 삼룡이식으로 천추태후를 짝사랑한다. -.-;;

  그런가 하면 역사 속에서는 이런저런 업적을 남긴 인물 혹은 잘한 일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 이 드라마에서는 '악의 축' 처럼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성종의 아내인 문화왕후(문정희)인데, 역사 속에서는 별 존재감 없는 이 인물이 드라마에서는 천추태후 평생의 정적으로 설정되어 온갖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나왔다.  

 

  또한 조연급도 아니고 주연급 등장인물들이 파마(!) 머리로 나온다. -0-;;

  주인공 천추태후와 강조의 초기 헤어스타일을 보면 누가 봐도 분명히 파마를 한 머리다. (고려시대에 파마 머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사대주의에 찌든 후세 유학자들이 기록을 말살한 탓이더냐? -.-;;)  그 외에 김치양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도 파마까지는 아니어도 고데기와 헤어드라이어로 어지간히 공들여 세팅했음이 분명한 머리로 나온다.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나레이션이 참 생뚱맞다.

  원래 정통사극에서는 극중 상황에 대해서 시청자에게 따로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을 때면, 남자 성우의 듣기 좋은 저음으로 '00책에 의하면 무슨 왕 몇 년에 00를 시행했는데 ~~하게 되었다.' 식의 나레이션이 깔리곤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퓨전사극이건만 때때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인용하는 진중한 나레이션이 나온다.

  역사에 전혀 관심없는 사람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그 나레이션 때문에 이 드라마를 정말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서 만든 정통사극으로 착각하기 딱이다. (혹시... 바로 그 효과를 노린 걸까... -.-;;)

 

 

 

  ◎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러나 일관성 없는 캐릭터

 

  내용만 보면 한숨이 나오는 드라마인데도 한 1주일 동안 정신없이 본 것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때문이다.

  보통 퓨전사극을 보면, 얼굴만 반반한 아이돌 출신이 줄줄이 나와서 현대극 말투와 어색한 표정으로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천추태후는 비록 본질은 퓨전사극이라도 정통사극 행세(!)를 하는 드라마라 그런지, 의외로 출연진이 탄탄하다.

  당장 위의 포스터에 모습을 드러낸 주요인물 4인방(채시라, 김석훈, 최재성, 이덕화)야 이미 연기력이 충분히 검증된 배우들이니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조정 대신 또는 장군으로 나오는 중견배우들도 충신 역할이든 간신 역할이든 간에, 모두 연기에 있어서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실력파 배우들이다.  이런 좋은 배우들을 데려다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그렇게 좋은 배우들이 줄줄이 나와 열연하건만, 드라마의 질은 뒤로 갈수록 내리막길을 탔다. 

  정통사극을 표방하고도 역사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흘러간다는 점은 위에 이미 썼으니, 여기에서 굳이 반복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런 내용상의 문제 말고도 캐릭터상의 문제도 있다.  특히,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천추태후와 그 아들인 목종의 캐릭터가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우선 천추태후의 캐릭터를 보자면, 뒤로 갈수록 김치양바보(-.-;;)가 되어 버렸다.

 

  역사적 진위는 둘째 치고, 이 드라마 초반에는 천추태후가 자나깨나 고려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여장부로 나왔다.

  그래서 김치양을 사랑하게 된 후에도,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애써 누르고 나라의 앞날을 최우선시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더니, 갑자기 김치양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여기저기에서 김치양이 수상한 인물이라는 단서가 튀어나오고, 오랜 세월 천추태후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측근들도 김치양이 수상하다며 의심하고 경고하는데도 말이다.  이쯤 되면, 뻔한 멜로 드라마 속 '사랑 밖에 난 몰라' 식의 여주인공과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천추태후가 나라고 백성이고 다 내팽개친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차라리 한 때는 나라의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했던 사람이 막상 권력을 쥐고나자 변했다는 내용이라면, 그 나름대로 개연성 있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그런 정치인이 많으니까.) 

  그런데 이 드라마 속 천추태후는 국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냉철하고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치양의 음모에 대해서만 깜깜절벽이다.  즉, 여전히 뛰어난 통찰력 보이는 천추태후가 김치양 문제에 있어서만 어수룩하게 군다.  그러니 더 황당한 것이다.  어째서 김치양 앞에서만 천추태후의 총명함과 통찰력이 나란히 가출을 하는 것인지... -.-;;

 

  천추태후의 캐릭터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제작진이 천추태후를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되고 평가절하 된 희생자로 그리려고 무리수를 연달아 두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정도전' 의 이인임 캐릭터나 드라마 '선덕여왕' 의 미실 캐릭터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결코 그 두 캐릭터가 정의롭고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인임이나 선덕여왕이나 모두 대마왕(!)급 악당 캐릭터다.  그런데 악행을 저지르는 과정이 나름 개연성이 있다. (등장인물이 하는 행동의 '옳고 그름' 과 '개연성 있고 없음' 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임...!)  그리고 자기 사람 혹은 정적을 대할 때의 태도에서 인간적인 매력 혹은 소름끼치는 카리스마가 넘쳐흐른다.  그래서 '옳은 길을 가려는 주인공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악역' 인데도 시청자들은 오히려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이 드라마도 차라리 천추태후를 역사 속 모습 그대로 가져오되, 천추태후가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경위와 심리변화를 개연성 있게 그려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더라면 이인임이나 미실처럼 매력덩어리(!) 악당 캐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굳이 천추태후를 '큰 뜻을 품고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나 후세의 유학자들에게 철저히 왜곡된 인물' 로 만들려다가,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3층밥(!)으로 만들어 버렸다. ㅠ.ㅠ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인)은 이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캐릭터인데, 역시나 망가져버렸다.

 

  목종이 정신적 방황을 하며 난봉꾼으로 나올 때는 오히려 공감이 되었다.

  이 드라마 속 목종은 어린 시절부터 친어머니 천추태후와 양어머니격인 외숙모 문화왕후 사이에 끼여,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란 인물이다.  게다가 그 시대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없던 전간(간질)을 앓고 있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지간히 강단있는 인물도 견디기 힘들텐데, 목종은 마음이 여리기까지 하다.

  두 어머니 사이에서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몇 번이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어려서는 점잖고 부드러웠던 성품이 점점 거칠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인 정치니 권력이니 하는 것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번번히 맞서는가 하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난잡한 생활에 빠지는 게, 충분히 개연성 있어 보였다.

 

  그런데 김치양의 반란이 터지면서 목종이 확 바뀌어 버린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더니, 정말로 바뀐지 얼마 안 되어 살해당함. -.-;;)

  오랜 세월 애증의 대상이었던 어머니 천추태후에게 갑자기 효성스러운 아들로 변하는가 하면, 내내 멀리 하며 마음 고생 시켰던 아내 선정왕후(이인혜)에 대해서도 자상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게 변하기까지 동성애 문제로 어머니 및 아내와 한바탕 눈물바람을 겪고 화해하는 장면이 있기는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오랜 세월 쌓아온 감정이 그렇게 하루 아침에 다 풀어질 수가 있나?  

  어머니 및 아내와의 관계에서만 갑자기 바뀐 게 아니라, 한 나라의 임금로서도 갑자기 바뀐다.  그 동안 정치가 너무 싫어 임금 노릇 그만 두고 궁궐 밖으로 나가 살고 싶다며 온갖 소동을 벌이다가, 마침내 신하들 앞에서 자신이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는 핵폭탄급 고백까지 했던 목종이다.  그런데 반란이 터지자 별안간 "아직은 내가 이 나라의 황제다!" 라면서 갑옷까지 챙겨입고 어머니와 함께 반란군에 맞서겠다고 나선다.  

  목종의 변화가 뜬금없다고 느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드라마가 방영 중일 때 네티즌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남긴 글을 찾아봤더니, 목종을 다중이(다중인격자)라고 써놓은 글이 제법 많이 보였다. -.-;; 

 

  천추태후의 숙적으로 나오는 문화왕후(문정희)는 개그(!) 캐릭터로 변신했다.

 

  성종의 아내 문화왕후는 악역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드라마 초반에는 비록 천추태후의 반대편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신라계 출신이라서 같은 신라계의 편에 서는 정도였다.  그런데 신라계 신하들이 그런 문화왕후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만족하지 못 하고 문화왕후와 의논하지도 않고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는 통에, 천추태후와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는 것으로 나왔다.  즉, 천추태후가 보자면 정황상 문화왕후를 의심할 수 밖에 없고, 문화왕후는 자기 모르게 일을 저지른 신라계 신하들에게 화를 내면서도 결국에는 자신도 신라계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신라계를 보호하려 천추태후와 맞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드라마 중반부에서, 목종이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천추태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자 이 때부터 천추태후에 대해서 정말로 원한을 품고 악인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삼천포로 빠지자면, 성종이 죽는 장면이 정말 황당하다.

  아무리 성종이 이미 병이 깊어 다 죽어간다고 해도 그렇지, 강조가 한 번 떠밀었다고 갑자기 피까지 토하고 죽는다. -.-;;  차라리 떠밀리면서 침대나 탁자의 모서리 같은 곳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든지, 혹은 강조가 이성을 잃은 나머지 성종을 번쩍 들어다가 메다꽂아서(!) 죽은 거라면 말이 되겠는데...  강조가 그다지 세게 민 것 같지도 않은데, 뒤로 엉덩방아 한 번 찧더니 덜컥 죽어버린다.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뭔가... -.-;;

 

  하여튼 문화왕후가 본격적으로 음모를 주도하게 된 뒤로도, 캐릭터의 입체성은 유지되었다.

  천추태후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욕심에 목종에게 마약을 먹이기도 하고 미인계를 쓰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자신이 친아들처럼 양육한 목종에게 못할 짓을 한다는 죄의식을 떨쳐내지 못 한다.  나중에는 사람을 시켜 목종을 죽이는데, 목종의 죽음으로 천추태후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목종에 대해서는 회한을 떨치지 못 하고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물론 목종이나 천추태후 입장에서 보자면 그 눈물은 악어의 눈물 같은 것이겠지만...) 

 

  그런데 드라마가 마지막 몇 회 동안 갑자기 KTX  속도로 전개되면서, 문화왕후의 캐릭터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현종이 즉위한 후 거란이 침입하자 왕실 사람들이 피난을 가게 된다.  그런데 문화왕후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니, 거란군의 목표가 된 현종과 함께 움직여봤자 같이 죽을 가능성만 높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사적으로는 사위가 되는 현종을 버리고 신라계 신하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으로 간다.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그 곳의 유력인사였으니, 그 곳으로 가면 제왕 못지 않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거만하게 큰소리 탕탕 치면서 말이다. (이 때부터 이 캐릭터가 웃기게 변하기 시작...) 

  그런데 막상 가보니, 문화왕후의 아버지가 워낙 욕심 많은 사람이라서 그 지방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착취했기 때문에 민심이 들끓고 있다. -.-;;  그래서 제왕 못지 않는 대접을 받기는커녕 돌멩이 세례만 잔뜩 받게 된다.  게다가 문화왕후를 따르던 신라계 신하들이 문화왕후가 끝 떨어진 연 신세라는 것을 깨닫고 다들 나 몰라라 떠나버린다.  그러자 충격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문화왕후가 울다 웃다 하면서 허공에 대고 호령을 해댄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맛이 간 것이다. -.-;;

  그런데 문화왕후의 몰락은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악인은 결국 벌을 받게 되어 있다' 라는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시트콤이나 개그 프로그램 속 인물처럼 웃기기만 할 뿐이다. -.-;;

 

  목종 역의 이인 -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는 유망주

 

  위에 쓴 것처럼, 이 드라마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배우가 목종 역할을 맡은 이인(과거에는 '이준' 이란 예명으로 활동했음.)이다. 

 

  이인이란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에 방영한 드라마 '명성황후' 를 통해서였는데, 그 드라마에서 이인은 고종의 아역을 맡았다.

  당시 '국민 여동생' 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독보적이었던 아역배우 문근영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 명성황후의 아역을 맡았다.  이인은 명성황후와 막 결혼한 고종의 아역을 맡아, 결혼 전부터 따로 총애하는 후궁이 있어서 명성황후를 소박(!) 놓는 연기를 했다.  아역이라 몇 회 나오지도 않았고 드라마 속 비중도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냥 잘 생긴 게 아니라 귀티(!) 나게 생긴 아역배우라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고종의 후궁 역은 아역을 안 쓰고 이인보다 13살이나 많은 정선경이 그냥 맡았기 때문에, 졸지에 왕-후궁이 아니라 이모-조카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는... ^^;;) 

 

  2008년에 방영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 에서는 주인공 신윤복의 의붓형 신영복으로 나왔다.

  명성황후에서는 문근영과 어린 부부로 함께 나오더니, 바람의 화원에서는 문근영이 맡은 신윤복('바람의 화원' 에서는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배우인 문근영이 신윤복 역을 맡았음.)과 의붓형제 간으로 나온 것이다.  겉으로는 신윤복과 형제 사이지만 마음 속으로 신윤복을 한 여자로 보고 사랑하는, 역시 몇 회 나오지는 않았지만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신영복이 '명성황후' 속 어린 고종인 줄 몰라봤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데다가 콧수염까지 있어서 못 알아봤던 듯... ^^;;)  나중에 문근영과 이인의 인연이 '명성황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기사를 읽고서야 '아, 그 귀티 나던 애가 저렇게 자랐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0년에 방영한 드라마 '추노' 에서는 효종(단, 아직 왕이 되기 전 세자 시절의 효종)으로 출연했다.

  형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갑자기 세자가 되어서, 어린 조카(소현세자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가 자기 아버지 인조의 묵인 아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역할이었다.  숙부로서는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가 목숨마저 잃게 생긴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왕위 계승권자로서는 그 조카가 본의 아니게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하고 있기에 함부로 나서서 보호할 수도 없는, 그런 모순되고 복잡한 심리를 잘 연기했다.

 

  공교롭게도 천추태후를 포함해서 내가 본 이인의 출연 드라마는 전부 사극이고, '바람의 화원' 을 제외하면 전부 왕으로 나온다. (역시 귀티 흐르게 생긴 배우라 신분 높은 역할에 잘 어울려 그런 모양임. ^^) 

 

 

 

  그런 이인이 천추태후에서는, 복잡한 성장과정과 정치적 음모 때문에 망가져버린 젊은 왕 목종을 연기했다.

  비록 드라마 후반부에서 목종 캐릭터가 붕괴되었지만, 이인의 연기력 자체는 좋았다.  이인의 섬세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장면 몇 개를 꼽아보라면...

  우선, 천추태후가 수 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목종과 상봉했을 때 자객들이 습격한 장면이 있다.  천추태후의 칼이 자객을 찌르자 자객의 몸에서 나온 피가 목종의 얼굴과 목에 튄다.  그 때 겁에 질린 나머지 눈동자만 겨우 돌렸다가, 덜덜 떨리는 손을 목 근처에 가져가지만 차마 피 묻은 목에 대지 못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었던 이들이 차례로 자신을 배신하고 이용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면, 미친 사람처럼 울면서 웃곤 했다.  그냥 울부짖었더라면 오히려 덜 비극적으로 보였을텐데,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모습이 목종의 절망감을 더 생생히 보여주는 듯했다.

 

  이런 좋은 배우가 아직 빛을 못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13년에 아침 드라마에 출연했던 이후로 활동이 없다.  본인은 연기를 계속 하고 싶은데 기회가 오지 않아 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연기활동을 접어버린 것인지...  조만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기타

 

  1. 채시라는 특이하게도 노인 분장이 참 잘 어울리는 배우다.

 

  여배우에게 노인 분장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기분 나쁜 말일 수도 있지만, 채시라는 정말 잘 어울린다. 

  채시라의 나이 30세를 전후해서 드라마 '왕과 비' 와 '미망'에서 노인 분장을 하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 때도 노인 분장이 잘 어울렸다. ^^;;  그러더니 40대 초반에 출연한 천추태후 마지막 회에서는, 나이가 좀 더 들어 그런지 노인 분장이 더욱(!) 잘 어울린다.

  채시라가 유독 노인 분장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은 애초에 성숙한 얼굴이기 때문인 듯하다.  동안으로 유명한 문근영 같은 경우에도 채시라가 '왕과 비' 에서 노인 분장을 선보일 때와 비슷한 20대 후반의 나이에 노인으로 분장했다. (영화 '사도' 에서 혜경궁 홍씨 역할)  그런데 자기 나이로도 안 보일 정도로 동안인 배우에게 노인 분장을 해놓으니, 차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  그에 비해 채시라는 젊어서도 성숙해 보이는 인상이라서 노인 분장이 잘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왕과 비' 속 인수대비, '미망' 속 태임, '천추태후' 속 천추태후...  그렇게 채시라가 노인 분장을 선보인 캐릭터는 전부 여장부 캐릭터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며 한 세상 헤쳐간 여장부 말이다.  그런 여장부도 세월의 흐름은 이기지 못 해 늙게 되늗데, 여전히 젊은 시절의 미모와 카리스마가 엿보이는 노인이 된다.  

 

  2. 이 드라마에서 채시라를 사랑하는 두 남자 김석훈(김치양 역)과 최재성(강조 역)이 후덕(!)하게 변했다.

 

  나에게 최재성은 1990년대 초반에 대히트 친 명작 '여명의 눈동자' 속 최대치로, 김석훈은 1990년대 중반(혹은 후반?)에 방영한 드라마 '홍길동' 속 홍길동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예전에 봤던 날렵하게 생긴 최대치와 홍길동이 워낙 인상적이었기에, 동글동글(!)하게 생긴 이 드라마 속 강조와 김치양의 모습이 처음에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특히, 강조 역의 최재성은 갑옷 차림으로 있을 때는 목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ㅠ.ㅠ

 

  하긴, 내가 여명의 눈동자를 볼 때 중학생이었고, 홍길동을 볼 때 대학생이었다.

  내 나이 든 것은 생각 안 하고 최재성과 김석훈에게만 여전히 20대의 멋진 모습을 기대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하다. -.-;;

 

  3. 재작년에 방영했던 사극 '정도전' 의 배우 몇 명이 천추태후에서도 보여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정도전에서 공민왕 역을 맡았던 김명수가 천추태후에서는 천추태후의 오빠 성종 역으로 나온다.

  두 역할 모두,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깊은 회한에 빠져 괴로움에 시달리는 역할이다.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보려고 애썼지만 주위 상황은 여의치 않고, 엎친 데 덮치나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고 무너져버린 공민왕.  예언에 힘입어 왕이 되었지만 그 예언 때문에 사랑하는 혈육들과 등지게 되어, 외로움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성종.

  김명수는 그렇게 고뇌에 찬 인물을 생생히 연기한다.  이러다가 절망감과 고독감에 휩쌓인 왕이라는 역할을 전담하게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정도전에서 이색 역을 맡아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박지일이 천추태후에서는 김심언이라는 간신 역으로 나온다.

  눈빛이 워낙 강렬한 배우다 보니, 충신으로 나오든 간신으로 나오든 카리스마가 넘쳐 흐른다.   

 

  4. 반효정(천추태후 및 성종의 할머니 신정황후 역)은 드라마 초반에만 등장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우선, 이 노배우는 요즘 젊은 여배우들보다도 키가 더 크다...! @.@

  그렇잖아도 그 동안 사극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역을 많이 맡았던 배우인데, 그 세대 사람치고는 농구선수로 뛰어도 될 만큼 키가 훤칠해서 더욱 위풍당당해 보인다.  손녀인 천추태후와 헌정왕후 역을 맡은 아역 배우들이 전부 반효정보다 키가 작았다.  애초에 반효정의 키 자체가 그 세대 여자로서는 장신이기도 하지만(인터넷 자료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일단 165센티미터는 되는 듯함.), 무용 전공자라 자세가 곧아서 가뜩이나 큰 키가 더 커 보이는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신정황후는 주인공이자 손녀인 천추태후의 인생을 결정 짓는 사람이다. 

  신정황후는 황주의 황보 가문 출신인데, 자기 가문에 대한 애착심 및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여장부로 나온다.  그런데 큰 기대를 걸고 키운 손자 성종이 신정왕후에게는 원수나 다름 없는 신라계 유학자들과 야합하자, 충격을 받고 세상을 뜨게 된다.

  신정황후는 죽어가면서 손녀 천추태후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긴다.  하나는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아 고려를 대제국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제국 건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성종과 유학자들을 몰아내고 대신 천추태후의 아들(목종)을 왕위에 앉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정황후가 임종 시에 남긴 말 중에 왕건이(!)가 있다.

  신정황후는 언제나 손자손녀들에게, 자신의 가문이 신라계 사람들의 참소를 받아 광종의 호족숙청작업에 휘말린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일로 아들과 동생들은 물론이고 딸(공교롭게도 이 딸은 광종의 아내임.)마저 잃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한을 풀겠노라 복수심을 다지며 손자(성종)를 왕위에 앉히려 애를 썼다.

  그런 신정황후가 죽기 직전에야 천추태후에게 진실을 말한다.  사실은 신정황후를 중심으로 한 황주 황보 가문이 정말로 광종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준비했었다는 것이다...! -0-;;  왕조 시대에 제왕에게 반기를 든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역모다.  그러니 황주 황보 가문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간 것은 억울하게 당한 게 아니라, 그 시대 기준으로는 '죽을 짓을 해서 죽은 것 뿐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신정황후는 큰 뜻을 품은 여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집과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던 셈이다.

  자기 가문이 광종에게 억울하게 당한 게 아닌데도, 평생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신라계 대신들 탓만 하며 복수심을 버리지 못 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유야 어쨌든 간에 어린 손자 하나 빼고 자기 가문의 모든 남자가 떼죽음 당하는 것을 보았으니,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은 것이야 인지상정이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술 더 떠서 손자손녀에게까지 신라계에 대한 복수심을 주입시켰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는 나약하고 비겁한 임금으로 나오는 성종이야말로 다르게 평가할 여지가 있다.

  성종은 할머니 신정황후나 여동생 천추태후에게는 나라의 앞날과 자존심을 팽개친 임금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신정황후의 비뚤어진 집념과 복수심을 생각하면, 오히려 언제까지 고구려계 신라계로 나뉘어 싸움만 할 거냐며,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겠다며 전쟁을 벌이기 보다는 모두가 화합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성종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신정황후는 손자 성종이 자기 앞날만 걱정하며 누이들의 희생(정략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꾸짖지만, 따지고 보면 성종에게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든 반드시 고려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세뇌교육(!)을 시킨 사람이 바로 신정황후다.  그리고 성종이 자신의 뜻을 어기고 신라계와 손을 잡자, 이제는 손녀 천추태후에게 친오빠 성종과 맞서라고 부추키는 유언까지 남겼다.  그러니 보기에 따라서는, 천추태후 3남매가 모두 불행한 삶을 살게된 가장 큰 이유는 신정황후라고 할 수 있다. . 

 

  이 반전을 소재로 해서 이런저런 양념을 적당히 쳤더라면 괜찮은 에피소드가 나왔을 듯한데...

  유감스럽게도 황주 황보 가문이 사실은 정말로 역모를 꾀했다는 반전이, '그게 다 못된 신라계 유학자들을 몰아내고 이 나라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 대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라는 대의명분에 묻혀 얼렁뚱땅 지나가 버렸다.  작가가 왜 이런 왕건이를 그냥 내던져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예를 들면, 신정황후가 임종 시 남긴 말을 나중에 성종도 알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성종이 천추태후에게 "할머니는 우리를 속였다.  자신의 복수심을 위해 우리 모두를 이용한 거다.  너는 언제까지 할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그렇게 살 생각이냐?" 라고 일갈하고, 천추태후는 천추태후대로 어쩌면 오빠 성종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만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애써 마음을 다잡고 할머니의 유언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으로 그려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즉, 천추태후를 '고뇌하는 지도자' 의 캐릭터로 그렸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혹은 후반부에서 천추태후가 권력도 아들도 다 잃게 되었을 때, 할머니 신정황후를 떠올리며 깊은 회한에 젖는 장면을 넣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평생 손자를 왕위에 앉히려 애를 쓰다가 결국 그 손자에게 배신당하고 손녀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야 진실을 말했던 할머니처럼, 자신도 대제국 건설이라는 이상에만 매몰되어 주위를 살피지 않고 무작정 질주하면서 주위 사람들(특히 아들 목종)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평생 할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과연 정말로 그 길만이 백성과 나라를 위해 옳은 길이었을까... 하는 회한 말이다.

 

  5. OST 중 모세와 김주택의 듀엣곡인 '마음꽃' 이 듣기 좋다. 

 

 처음에는 신영옥이 부른 '천추별곡' 이 좋았는데, 보컬곡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마음꽃' 이 더 좋아졌다.

 '마음꽃'은 '김주택, 모세의 듀엣 버전' 과 '김주택의 솔로 버전' 이 있다.  가사가 또렷하게 들리기로는 솔로 버전이 더 낫지만, 어째서인지 듀엣 버전이 훨씬 듣기 좋다.  심지어 모세가 부르는 파트에서 고음 처리가 잘 안 되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처럼 들리는데도 말이다. ^^

 

  6. 몇 번이나 쓰는 말이지만 이 드라마 내용은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행적을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

 

 고려 현종(顯宗) (上) - 우리 역사상 유일한 사생아 출신 왕(http://blog.daum.net/jha7791/15791050)
      고려 현종(顯宗) (中) - 강조의 정변 / 거란의 제2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2)
      고려 현종(顯宗) (下) - 김훈, 최질의 난 / 거란의 제3차 침입(http://blog.daum.net/jha7791/15791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