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그 때 그 시절(1) - 나의 '응답하라 1987'

Lesley 2015. 12. 23. 00:01

 

  요즘 '응답하라 1988' 이란 드라마가 방영중이다. 

  비록 나는 그 드라마를 안 보지만, 케이블TV 방송국 드라마인데도 시청률이 10%를 넘나든다니 무척이나 인기있는 모양이다.  1988년이란 해가 워낙 특별한 해여서, 1988년을 직접 겪었던 세대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세대까지도 그 시대에 빠져드나 보다.

  1988년은 88올림픽이 열렸던 해이기도 하고, 그 올림픽을 전후해서 우리나라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다만, 내가 1988년이란 해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어디까지나 성인이 된 지금에 와서 그 시대에 벌어진 사건들을 쭉 돌이켜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정작 1988년 당시에는 그런 것에 대해 알지도 못 했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1988년에 나는 철부지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란 말도 1988년에서 10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야 생겨난 말이고, 1988년 당시에는 국민학생이라고 했음. ^^)

 

  어쨌거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과 별도로 내 나름대로의 '응답하라 19XX' 를 써볼까 한다.

  엉뚱하게도 이런 포스팅의 계기가 된 사건은 지난 달에 있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좋아하는 대통령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의 죽음이 그 무렵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시너지(!) 효과를 냈는지, 괜히 옛날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 일기장으로 이어졌다.  '내가 김영삼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던 게 아마 초등학교 때 대통령 선거였지?' 하다가 문득 20년 이상 들쳐보지 않았던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을 떠올린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 썼던 일기를 이제와서 다시 보려니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등골을 타고 개미가 몇 마리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느낌. ^^;;)  하지만 지금 읽어서 아무리 유치하고 어색해도, 그 당시의 나는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느낌을 받았기에 그런 일기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의 일기장은, 설사 내가 지우고 싶어 하더라도 절대 지울 수 없는 나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일기장에 나온 내용을 가지고 아주 간단하게 나만의 '응답하라 19XX' 시리즈(?)를 써볼까 한다.

 

 

  자, 그렇게 1988년을 전후한 시기를 회고하는 포스트 1탄은 1987년이다. 

 

보라, 이 고풍(!)스러운 공책을...!

 

 

  공책만 봐도 그 시대 분위기를 슬쩍 엿볼 수 있다.

  이름 쓰는 공간 바로 옆에 '힘모아 국력신장 뜻모아 평화통일' 이라는 정치구호가 들어가 있다.  뭐, 구호 자체는 참 좋은 말이다.  국력도 신장하고 평화통일도 이루자는 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문제는, 저 때가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였던 1987년이라는 점이다.  즉, 순진하게 저 구호를 겉으로 드러난 뜻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저 구호가 아무리 순수한 의미라고 해도 절대로 애들이 쓰는 공책에 박아넣지 않을 것이다.  요즘 애들은 우리 때랑 달라서 미적 감각이 높아서 저런 구호 인쇄된 공책 절대로 아 쓸테니까... ^^;;   

  그리고 언제부턴가 문구류에서 '품' 자 마크를 못 본 것 같다.  저 마크가 사라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요즘은 어떤 마크를 쓰더라?

 

 

촬영상태가 왜 이 모양인고? -.-;;

 

 

  역시 숙제란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골칫거리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몇 년 간 일기를 꽤 열심히 썼다.  원래 뭔가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해서 어느 정도는 즐겨가면서 썼더랬다.  하지만 애초에 자발적으로 쓰기 시작한 게 아니라 숙제로 해가는 것이다 보니, 매번 즐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기를 일주일치씩(!) 안 썼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썼다고 나오니 말이다. (벼락치기는 시험공부 뿐 아니라 일기쓰기에도 유용합니다요~~! ^^;;)

  그리고 일기쓰기를 비롯한 그 밖의 모든 숙제가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로보트가 숙제를 척척 해주기를 바라기까지 한 것인지...  지금도 가끔 청소나 빨래 같은 것을 알아서 해주는 로보트가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망상(!)의 역사가 참 길었다는 걸 이번에 일기장을 읽고서야 알았다. -.-;;   

 

 

노태우가 대통령을 당선된 1987년 대선 때문에 김영삼이란 이름 석 자도 알게 되었다는...

 

 

  일기 속 대통령 선거는 1987년 12월에 있었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다. 

  역시 아이는 아이라서 대통령 선거날 하루종일 TV에서 선거 관련 보도만 하는 것에 지겨움을 팍팍 느꼈다.  기억도 안 나고 일기장에도 안 써있지만, 아마 그 날은 만화영화 같은 어린이용 프로그램이 전부 결방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치 같은 것에 털끝만큼도 관심없던 초등학생은 그 날 온종일 선거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에 짜증이 나서 TV를 확 꺼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바로 다음 날의 일기를 보면, 그 날 일기에 쓸거리가 마땅찮아서 선거 개표방송으로 억지로 채워넣은 티가 팍팍 난다. ^^;;  참고로 저 일기 속에 나오는 기호 2번, 3번, 4번이 바로 이번에 세상을 뜬 김영삼 전 대통령, 몇 년 전 세상을 뜬 김대중 전 대통령, 3김 중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김종필이다. (3김 시대를 거치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꽤 대단한 시대에 아동기를 보냈구나... ^^;;)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읽다 보니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일단, 내가 엄청난 악필이었다는 사실이다. -.-;;  이제 막 글씨를 처음 배우는 사람 수준의 필체다.  물론 지금도 악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 때에 비하면 필체가 많이 좋아졌다.  저 시절에는 글씨체가 예쁘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왜 저리 글씨 크기마저 고르지 않고 제각각이며, 글씨 높이가 위아래로 춤을 추기도 하고, 글씨 사이 간격마저 제각각인... (한 마디로 총체적인 난국...! -.-;;) 

  그리고 위에 올린 이미지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특징인데, 일기장에 대화체가 정말 많이 나온다.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닌데 큰 따옴표로 이루어진 대화글이 난무(!)한다.  그런 대화체의 글 때문에 일기장을 보는 내내 몸이 비비 꼬이고 낯이 간지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  그 때에는 아이들이 다 그렇게 일기를 썼나, 아니면 나만 괜히 그렇게 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