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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림전 - 동성결혼이 나오는 고전소설이라니...!

Lesley 2015. 11. 25. 00:01

 

  지난 9월, 오래간만에 우리나라 고전소설을 읽었다.

  몇 년 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된 방한림전(方翰林傳) 이라는 조선시대 소설이다.  조선시대에 동성결혼(!)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로 쓴 소설이 있었다니 하며 많이 놀랐더랬다.  그래서 언제 한 번 꼭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생각만 하다가 몇 년이나 지난 최근에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  

 

  내 추측일 뿐이지만, 이 방한림전이란 책은 2000년대 들어서야 널리 알려진 것 같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방한림전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공자왈 맹자왈 하던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독특하고 파격적인 소설이 있었다는 게 알려졌다면...  이 소설이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성결혼을 소재로 하는 방한림전이라는 소설이 있다.' 정도의 이야기를 참고서나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읽기 전까지, 이런 소설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요즘 고등학생들은 이 소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임.)

  혹은 내 학창시절에 이미 이 소설이 국문학계에는 알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지금보다 보수적이었던 때라서 '어린 학생들에게 이런 망측(!)하고 엽기(!)적인 소설을 알려줄 수 없다!' 하고 금기시 되었을 지도 모른다.

 

 

 

 

 

  소설에 대해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주인공에 대해 설명하자면...

 

  방한림전이라는 제목만 보면 주인공 이름이 방한림일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공 이름은 방관주다.  그런데 왜 책제목이 방한림전이냐 하면, 방관주가 과거에 합격한 후 처음으로 지낸 관직이 '한림학사' 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방관주는 상서(지금의 장관)를 거쳐 승상(지금의 국무총리)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관직이라는 게 지배층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시절이다 보니, 이 소설 작가가 생각하기에 그 로망을 처음으로 실현하게 된 한림학사란 관직이 무척 중요했던 모양이다. (네~~ 처음이 중요하지요, 언제나... ^^)

 

  그리고 방관주란 이름을 봐도 그렇고 이런저런 관직에 올랐다는 것을 봐도 그렇고, 주인공이 남자일 것 같지만...

  방관주는 여자다...!  즉, 이 소설은 주인공 방관주가 남장을 하고서 평생 동안 겪는 일을 담고 있다.  인터넷의 여러 백과사전을 보면, 방한림전을 소개하면서 한 남장여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라고 해놓았다.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파란만장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완벽하고 화려한 일대기' 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설명일 듯하다.  다른 고전소설도 거의 다 그렇지만, 주인공 방관주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이다.  얼굴도 잘났고, 머리는 천재 수준이고, 무술과 병법에도 뛰어나고, 예의범절 깍듯하고, 기품과 위엄도 넘쳐흐르고, 악기도 잘 다루고, 기타 다른 면에서도 전부 잘났다.  그래도 다른 고전소설 속 주인공은 간신의 모함으로 귀양을 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한 번쯤은 시련을 겪기도 하건만, 방관주 인생에는 시련이나 실패 따위는 없다.

 

 

 

  방한림전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방관주는 명나라 때 사람이다. (조선시대 소설이지만, 소설의 시대적.장소적 배경은 중국의 명나라 시대임.) 

  방관주의 부모는 결혼하고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늘그막에 딸 하나를 낳아 관주라고 이름 붙이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남독녀 방관주는 어린 시절부터 좀 독특했다.  아이가 태어난 방에 기이한 향내가 가득하고 아이의 생김새가 매우 빼어나고 하는 것이야, 고전소설 속 주인공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 갖추는 조건(?)이니 그렇다 치고...  서너 살 때부터 항상 남자아이의 옷을 입으려 했다.  그리고 그 시대 여자아이들이 당연히 배워야 하는 바느질 같은 것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고, 온갖 어려운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부모는 아이가 범상치 않기도 하고 또 아직 어리다면서 원하는대로 살게 했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 방관주는 절.대.로. 범상치 않았다...!

  방관주가 8살 되던 해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어찌나 똑똑하고 성숙한지, 어른들도 힘들어 한다는 복잡한 장례와 3년상을 그 어린 나이에 완벽히 치러낸다.  그리고 친척 어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가장이 되어 노비들을 다스리는 등 집안을 이끌어 나간다. (현대인의 눈에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고전소설 속 주인공은 원래 다 천재급 팔방미인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그냥 넘어갑시다... ^^;;)

  그러다가 12살 되던 해에는 과거에 응시해서, 그냥 급제도 아니고 무려 장원급제를 한다...!  장원을 한 사람이 겨우 12살 밖에 안 된데다가, 얼굴은 연꽃처럼 아름답고, 답안지는 이백이나 두보 저리 가라 수준의 명문이기까지 하니...  당연히 온 장안에 엄청난 센세이션(!)이 일어난다.  

 

  그 센세이션의 여파로, 장안의 명문가란 명문가는 전부 나서서 방관주를 사위(!)로 삼으려고 한다. 

  물론 방관주는 자기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이라 들어오는 청혼을 전부 거절한다.  그런데 그 중 서평후 영의정(영의정은 관직 이름이 아니라 사람 이름임. 이 소설 작가의 작명 센스가 좀... ^^;;)이 유독 방관주를 마음에 들어하며 사위로 삼고 싶어한다.  영의정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청혼을 넣자, 방관주도 마음이 달라져 결혼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신은 계속 남자 행세하며 관직 생활을 할 생각인데, 그 시절에 일정 나이를 넘긴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과 결혼하는 여자는 평범한 삶을 박탈당하게 될테니 죄책감도 들고, 또 혹시라도 그 여자가 자신의 정체를 폭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도 드는 차에...

 

  방관주가 영의정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영의정의 막내딸 영혜빙과 만나게 된다.

  영의정에게는 많은 자녀가 있는데, 13살짜리 막내딸 영혜빙만 아직 미혼이다. (12살짜리와 13살짜리의 혼담. ^^;;)  그런데 공교롭게도 영혜빙 역시 방관주만큼이나 그 시대에 보기 드문 개성파(!)라서, 어린 나이에도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삶을 간절히 원한다.  여자는 뭐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 하고 남자의 규제를 받아야 하니 죄인 신세나 마찬가지라면서, 자기 언니들이 결혼해서 사는 것을 구차하다고 비웃곤 했다. (거 참,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 6학년짜리인데 참으로 당돌하구만... -.-;;)

  영혜빙은 짧은 시간 방관주와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방관주가 여자라는 걸 눈치챈다. (13살짜리 영혜빙도 단박에 방관주의 정체를 눈치챘건만, 전혀 눈치 못 채는 황제 및 조정 대신들은 죄다 해태눈이란 말이오...! ㅠ.ㅠ)  그리고 방관주가 여자라는 사실에 당황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방관주와 결혼하면 남자에게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될 거라며 오히려 좋아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혜빙이야 말로 방관주보다 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결혼 첫날밤 영혜빙은 자신이 방관주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슬쩍 내비치고, 다음 날 방관주는 자신의 사연을 전부 털어놓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대외적으로는 부부로 살고 대내적으로는 평생의 지기로 살 것을 약속한다.

  그 뒤로 방관주는 공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다른 공직자들과는 달리 따로 손님을 집에 들이지 않고 항상 영혜빙과 차를 마시고 담소를 즐기며 함께 시를 짓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방관주와 영혜빙이 항상 붙어있는데다가 방관주가 첩을 들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거절하기까지 하니, 너무 금슬 좋은 부부라며 칭찬하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들도 하나 얻게 된다.

  물론 여자끼리 결혼했는데 아이가 생길 리는 없고, 방관주가 지방직으로 나가 있을 때 기이한 인연으로 만난 아이를 양자로 삼은 것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며 큰 별이 하나 떨어졌는데, 별이 떨어진 자리에 갓난아이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아이 가슴에 낙성(落星 : 별이 떨어지다)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  방관주는 그 아이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양자로 맞아, 가슴에 써진대로 낙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영혜빙과 함께 키우게 된 것이다.  

 

  그 후로도 방관주의 앞길은 거칠 게 없었다.

  12살에 과거에 장원급제 해서 한림원 학사가 되었다가, 14살에 안찰사(지금의 도지사)가 되더니(지방에 안찰사로 나가있다가 낙성을 만나 입양하게 된 것임.), 15살에는 병부상서(지금의 국방부장관)가 된다. (초초초고속승진...!)  그리고 학문과 행정 방면에서만 뛰어난 게 있는 게 아니라, 군사적인 재능까지 발휘한다.  북방의 오랑캐가 침입을 하자 대원수가 되어 출전해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이 때의 공으로 마침내 승상(지금의 국무총리)이 된다.  남들은 이제 겨우 과거에 급제하네 마네 할 20대 중반의 나이에, 방관주는 신하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나중에는 아들 낙성까지 13살에 장원급제해서, 부자(?)가 온나라에 이름을 떨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낙성도 좋은 집안 여자와 결혼해서, 방관주 영혜빙은 아들 부부와 손주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지내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방관주가 눈부신 출세를 거듭하며 24살이 되었는데, 그 때까지 방관주의 얼굴에는 당연하게도 수염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깨끗하다' 며 칭찬할 뿐이다.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게 당연한 시대였는데도, 역시 수염은 지저분하게 느껴졌던 걸까... ^^;;

 

  그러다가 아직 한창 나이라 할 수 있는 39살에, 방관주가 갑자기 죽게 된다.

  이미 그 전에 방관주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도사가 홀연히 나타나 마흔을 넘기지 못 할거라고 관상풀이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방관주는 자신의 이른 죽음을 '음양을 바꾸어 임금과 천하를 속인 죄에 대한 벌' 로 담담히 받아들인다. (아무리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적인 소설이라지만, 남녀유별이라는 그 시대의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었던 모양임.)

  그리고 자신의 병이 깊어져 황제가 직접 문병을 오자, 황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죄를 청한다.  황제는 뜻밖의 사실에 무척 놀라지만, 방관주가 그 동안 나라에 세운 공이 매우 크다며 관직과 작위를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장인인 영의정도 이 날이 되어서야 사위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동시에 자기 딸 영혜빙이 방관주의 정체를 알고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 기막혀 한다. (그러기에 영의정씨, 처음에 방관주가 청혼 거절할 때 그만 두시지 왜 방관주와 따님을 만나게 하셨나요... ^^;;)

  방관주는 영혜빙과 아들 부부 및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는다.  식구들 모두 슬퍼하는 가운데 영혜빙이 여러 번 기절까지 하며 유독 슬퍼하고 힘들어 하더니, 결국에는 영혜빙마저 숨이 멎고 말았다. (아들 며느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줄초상...)

 

  방관주와 영혜빙이 죽고 1년이 지났을 때, 아들 낙성의 꿈 속에 두 사람이 나왔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와 낙성의 손을 잡고 자신들의 사연을 이야기해준다.  원래 방관주는 문곡성(사람의 운수를 점치는 데 쓰는 9개의 별 중 하나로, 주로 글재주와 관련이 있다고 함.)이었고 영혜빙은 항아성(달 속에 산다는 선녀를 뜻하는 별.)이었다.  그런데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항상 붙어있느라 각자의 임무를 게을리하다가, 결국 옥황상제의 분노를 사서 하늘에서 쫓겨났다. (이 부분은 '견우와 직녀' 이야기와 비슷한...)

  태을성(전쟁, 재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별)이 문곡성과 항아성의 처벌을 맡게 되어서, 두 사람을 인간세상의 방씨네 집과 영씨네 집에서 태어나게 했다.  그런데 문곡성은 원래 남자였기 때문에 남자의 일생을 살게 하되 일부러 여자로 태어나게 해서, 방관주-영혜빙이 한평생 거짓부부로 살게 했다.  두 사람이 하늘에서 사랑놀음에만 빠져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이 괘씸한 나머지 짖궂은 장난을 쳤다는 것이다. (장난 한 번 거창하오... -.-;;)

 

   

 

  방한림의 부모와 유모

 

  이 소설에서는 방한림만 독특한 게 아니라, 방한림 부모의 태도도 묘하다.

  딸이 아직 어려서 딸이 원하는대로 남자아이처럼 지내게 했다는 부분까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굳이 친척들에게까지 방관주를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저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시대라서 하나 뿐인 자식이 딸인 게 아쉬워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혹시 시대를 앞서가는 부모님이라서 딸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해 준 건가요... ^^;;)

 

  오히려 그 시대 기준으로는, 방관주의 부모보다 유모가 더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방관주의 유모는 이 소설 속에서 그저 평범한 조연급 인물이 아니라,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의 통념에 맞추어 살 것을 강요하는 다수의 사람' 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방관주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것을 걱정하고, 다른 여자들처럼 평범하게 살라고 계속해서 충고한다.

 

  방관주는 자꾸 여자의 삶을 살라는 유모에게 화를 내는데, 이 때 방관주 부모가 생전에 보였던 묘한 태도가 방관주에게 좋은 명분(!)이 된다.

  방관주는 유모에게 '내가 남자의 삶을 원해서 남자 행세를 한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적반하장(?)식으로 "내 이미 선친과 어머님의 명을 받들어 남아로 행세한지 삼년이 다 되었고..." 라고 말한다.  사실은 부모가 딸에게 남자로 행세하라고 명을 내린 적이 없다.  그저 어린 방관주가 남자옷을 입고 싶다고 하니 그냥 둔 것 뿐이지...  하지만 부모가 딸의 남자 행세를 묵인한 것은 사실이고, 또 친척들에게 딸을 아들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으니, 방관주가 확대해석(!) 할 빌미를 준 것 또한 사실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자신이 평범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는 것을 '돌아가신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부분 읽을 때, 뒷목 잡고서 입에 거품 무는 유모의 모습이 머리 속에 저절로 떠올랐음. ^^;;)

 

  그런데 이 유모가 소설 중간에 갑자기 증발(!)해 버린다...!

  방관주와 영혜빙이 결혼하고 10년이 흐른 어느 날, 아들 낙성의 약혼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유모는 그 때까지도 두 사람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두 사람이 이제라도 남자를 만나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의지의 한국인... 이 아니라 의지의 중국인인 유모... ^^;;)  물론 방관주는 이번에도 유모에게 화를 내며 안 좋은 소리를 한다.

  바로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유모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져서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유모가 자꾸 여자로서의 삶을 살라고 잔소리를 하니, 방관주가 귀찮은 나머지 어디 멀리 내다버리기라도 했나 보다. (방관주씨, 유모를 외딴 섬 새우잡이 어선에 팔아버렸나요... -.-;;)

 

 

 

  방관주와 영혜빙은 어떤 사이?

 

  방관주와 영혜빙이 어떤 사이인지, 이 소설을 세 번이나 읽어봤는데도 도통 모르겠다.

 

  얼핏 보면 방관주와 영혜빙은 계약결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계약결혼을 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방관주는 결혼을 안 하면 남들이 자신의 정체를 의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영혜빙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영혜빙은 남자와 결혼하면 평생 그 남자에게 얽매여 살아야 한다며, 같은 여자라서 자신을 억압하지 않을 방관주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다만, 계약결혼이란 것은 미리 서로의 조건을 맞춰 합의를 본 후에 결혼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관주와 영혜빙은 결혼하고나서야 방관주의 정체나 영혜빙이 원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기투합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성끼리 결혼하기는 했지만, 요즘 우리가 말하는 동성결혼과는 다르다.

  몇 년 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해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점점 늘어나더니, 올해 들어서는 미국까지 동성결혼을 허용해서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동성결혼이란 동성애자 사이의 결혼, 즉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결혼이다.  하지만 방관주와 영혜빙을 동성애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먼저 방관주는 동성애자라기보다는 아예 남성으로서의 성정체성을 가진 경우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여자로서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몸은 여자인데 정신적으로는 남자' 인 상황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방관주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 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거나, 자신을 남자로 인식해서 스스로에 대해 '대장부가...' 라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성전환 수술을 받으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영혜빙도 동성애자기보다는 페미니스트에 가까운 모습이다.  영혜빙이 방관주와 결혼한 이유는, 여자로서 같은 여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시대 여자들에게 너무 당연하게 요구되는 '남자에게 종속되는 삶' 을 피하기 위해서 방관주와 결혼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그저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동업자(?)' 혹은 '마음이 너무 잘 맞는 친구' 일 뿐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뭐냐...! -.-;;)

  방한림이 죽었을 때 영혜빙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몇 번이나 기절하더니, 결국에는 방관주를 따르는 것처럼 숨을 거두었다.  그러니 영혜빙에게 방한림이란 사람이 매우 소중한 존재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따라 죽을 정도로 슬퍼했다는 이유만으로, 영혜빙이 방한림을 사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랑 이외의 감정으로도 죽음을 불사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충성이라는 관념을 유독 중시했던 동양의 역사를 보면, 자신이 모시던 임금이나 장수가 죽었다고 따라서 죽는 신하 혹은 부하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또 죽음까지 함께 하는 친구 혹은 전우의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역시 모르겠다... -.-;; 

   

 

 

  기타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고전소설의 특성상 설정오류가 좀 있는데, 특히 방관주의 나이가 뒤죽박죽이다.

  과거에 급제한지 몇 년이 지났다는 대목이 분명히 나왔는데, 바로 두어 줄 아래에는 방관주가 13살인 것으로 나온다.  1년을 가지고 몇 년이라고 하지는 않으니, 12살에 과거에 급제해서 몇 년이나 지났으면 15, 16살이어야 한다.  

  그리고 방관주가 전쟁터로 나가는 장면에서 영혜빙이 "혼인한지 7년 만에 만리타국으로 가시니 어찌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방관주는 12살에 결혼했으니 7년이 지났으면 19살이어야하고,  햇수로 계산한다면 18살이어야 한다.  하지만 영혜빙의 저 말이 나오기 바로 전에 방관주가 24살이 되었는데도 얼굴에 수염이 안 났다는 대목이 있다. (주식시세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방관주의 나이... ^^)

 

  그리고 소설 끝에 이 소설을 필사한 사람이 한 마디 써놓았는데, '오자와 낙서가 많으니 보는 사람이 알아서 보소서.' 다.

  처음에 그 문장을 보고 어이 없어하다가, 그 다음에는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마치 인터넷에 떠도는 미드에 '자막에 오타 많으니 이해해주세요' 라는 문구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달리 생각하면, '내가 이 책 안 베꼈으면 네가 읽을 수나 있었겠니?  그러니까 오자나 낙서 많다고 징징대지 말아라.  입 닥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읽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

  그리고 번역자의 짖궂음에도 웃음이 나왔다.  소설 필사자가 써놓은 저 문장은 소설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그 문장까지 현대어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굳이 번역해서 소설 본문 끝에 떡하니 써놓았다.  어쩌면 중요한 내용인지 중요치 않은 내용인지를 가리지 않고, 필사본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번역하자는 학자다운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 문장을 쓴 필사자만큼이나 번역자도 장난기가 발동해 저 문장을 번역했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