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한수영의 '연록흔 재련', '범이설' - 대하(?)로맨스소설

Lesley 2015. 10. 24. 00:01

 

 

 

  지난 추석 연휴부터 한 열흘 정도 '연록흔 재련''범이설' 이라는 유명한 로맨스소설을 몰아 읽었다.

  추석을 맞아 집에 찾아왔던 이들이 떠난 후 방바닥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책이나 한 권 읽자 했는데...  아무래도 명절 끝이라 피곤해서 가벼운 읽을거리가 당겼다.  마침 인터넷서점에 전자책 캐쉬가 남아있던 게 생각나 전자책을 다운받기로 했는데, 적당한 게 눈에 띄지 않아서 예전에 읽었던 것을 복습(?)하기로 했다. 


  그렇게 간택(?)된 책이 7, 8년 전에 읽은 '연록흔' 이란 로맨스소설의 개정판인 '연록흔 재련' 이다. 

  하지만 어차피 전에 읽어본 것이기도 하고 또 심심풀이로 읽을 생각이기도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전체 5권 중 끝의 4권과 5권만 다운받았는데...  읽다 보니 점점 빠져들어서 결국에는 몽땅 다운받았다.  그래서 추석 당일 저녁부터 연휴 마지막 날까지 눈이 시뻘개지도록(!) 읽었다. 


  그 다음에는 같은 작가가 쓴 또 다른 소설 '범이설' 에까지 손을 뻗쳤다. 

  연록흔 재련 분량이 상당해서 전부 읽고나니 진이 다 빠져, 머리에서는 '더 이상 읽으면 안 돼!' 하는 경고의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손이 저절로 인터넷 서점에 로그인해서 범이설을 다운받았다. (내 손이 나를 배신했어...! ㅠ.ㅠ)

 

  그렇게 연록흔 재련에 사흘간 푹 빠져 살고, 다시 범이설 붙잡고서 일주일을 보냈다.

  이 두 소설 때문에 '이것이 바로 폐인 생활이구나.' 하는 느낌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겪었다. -.-;;  그리고 전자책 단말기 크레마 샤인을 구입하고 나서 두 달 정도 지나니 안 쓰게 되었는데, 모처럼 열흘 동안 사용하면서 구입한 보람을 제대로 느꼈다.

 

 

 

  ◎ 연록흔 재련

   

 

  어째서 그냥 '연록흔' 이 아니고 '연록흔 재련' 일까? 

 

  초판 제목은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쓴 '연록흔' 인데, 개정판 제목은 '연록흔 재련' 이다.

  처음에는 '연록흔 재련' 의 재련이 재련(再戀), 즉 '다시 사랑하다' 인 줄 알았다.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연록흔과 가륜의 사랑 이야기니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시 손을 보고 다듬는다' 는 뜻이었다' 라는 뜻의 재련(再鍊)이다.  하긴, 초판에 없던 새로운 에피소드를 대대적으로 보충하고 기존의 문장을 모두 갈아엎다시피 했으니, 재련(再鍊)이란 단어를 제목에 쓸만하다.

 

 

  초판보다 2배나 늘어난 개정판 

 

  원래 끝의 두 권만 보려다가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게 된 이유는, 초판과 개정판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다운받았던 4권을 읽는데 첫장면부터 막혀버렸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고 또 그 때도 심심파적 삼아 읽은 거라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지 못 한다고 해도 그렇지, 첫장면이 너무 낯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앞뒤 상황을 보니 그 사람들이 어쩌다가 한 번 등장한 게 아니라 주인공 연록흔과 깊게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그 인물을 기억 못 하더라도 계속 읽다 보면 '아, 맞다.  이런 사람들도 있었지.' 하고 기억나야 한다.  하지만 완전히 처음 보는 인물에, 완전히 처음 보는 내용... (내 기억력이 아직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은데 말이지... -.-;;)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확인했더니, 놀랍게도 개정판 연록흔 재련은 초판 연록흔보다 2배 넘게 양이 늘었다...! -0-;;

  초판은 3권짜리이고 개정판은 5권짜리다.  개정판이 5권짜리로 나왔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농간(?)인 줄 알았다.  같은 양의 책이라도, 책의 판형을 바꾸고 한 권당 페이지수를 줄이고 폰트나 행간 등을 조정하면, 원래 3권짜리여던 것을 충분히 5권으로 늘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놈의 출판사가 돈에 환장했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 일이냐...  초판은 권 당 330페이지 내외로 3권짜리였는데 개정판은 권 당 470페이지 내외로 5권짜리다.  즉, 초판은 전체 약 990페이지였는데 개정판은 약 2350페이지나 된다...!  그래서 나머지도 몽땅 다운받아 읽어 보니 전에는 없던 에피소드가 꽤 많이 들어가 있다.  이쯤 되면 그냥 개정판이 아니라, 초판을 토대로 새로운 소설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을 보고 과장 좀 섞어 말하자면, 그냥 소설이 아니라 대하소설이다. (대하로맨스소설 ^^) 

 

  그리고 초판에도 있는 내용이라도, 전개가 미흡했던 부분에 적절한 내용을 보충하는 식으로 수정을 해놓았다.

  예를 하나 들자면, 결말부분에서 연록흔이 마굴에 다시 떨어졌다가 돌아오는 장면이 그렇다.  초판에서는 마굴에 떨어지게 된 이유와 마굴에서 겪는 사연까지는 다 나오는데, 어떻게 해서 마굴에서 지상으로 탈출했는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연록흔이 별안간 가륜의 막사에 나타났다.  그래서 초판을 읽을 때 '도대체 이게 뭐냐...' 하는 기분으로 그 부분을 읽었는데, 개정판에서는 탈출 과정이 나온다. 

 

  이 소설을 쓴 한수영 작가는 정말 양심적인 인물인가 보다.

  대학 시절에 그렇잖아도 비싼 전공서적이 매년 가격을 올려 개정판이랍시고 새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막상 들쳐보면 그 전해에 나온 책에서 겨우 몇 부분만 바뀐 게 전부였다.  그 정도는 따로 추록을 만들어 소정의 돈만 받고 팔아도 충분할 듯한데 말이다.

  여보시오, 대학가 전공서적 저자님들!  모름지기 개정판을 가격 올려서 내놓으려면 연록흔 재련처럼 왕창 바꿔 쓰고 양도 팍팍 늘이는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소이까...! -.-;;

 

  그런데 읽다 보니 내용만 추가하고 수정한 게 아니라 문장까지 새로 고쳐썼다.

  전에 읽은 초판은 로맨스소설이 다 그렇듯이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비교적 짤막한 문장으로 씌여 있어서, 무척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3권짜리를 한나절에 다 읽었던 듯...)  그런데 이번에 읽은 개정판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요즘은 보기 힘든 어휘가 가끔 튀어나오고, 또 문장이 초판 때보다 길어지고 수식어가 많이 붙는 등 화려해졌다.  그래서 읽을 때 감칠맛 느껴지는 것은 좋은데, 대신 읽는 데 시간이 걸린다.  

 

 

  연록흔 재련의 독특함 - 로맨스소설+무협소설+판타지소설

 

  2,000페이지를 훨씬 넘는 연록흔 재련의 내용을 매우 매우 매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단 소설의 시대적.장소적 배경은 가상의 시대.가상의 국가다. (그런데 중국 지리에 대해 대강 아는 사람이 읽다 보면, 각 지방의 이름, 위치, 기후나 풍습을 봤을 때 이 가상의 국가가 중국을 모티브로 했음이 딱 보임. ^^;;)

  주인공 연록흔은 로맨스소설 여주인공이 다 그렇듯이 엄청난 미녀인데, 갓난아이 시절에 겪은 불행한 사건 때문에 남장을 하고 자랐다.  그러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아버지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를 구하는 대가로 황제 가륜에게 몇 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평생 동안 신하로서 봉사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런, 평생 열정페이라니...! -.-;;)  그러다가 온갖 악귀가 우글거리는 마굴에 떨어져 3년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엄청난 무공을 익히게 되고, 다시 땅 위로 돌아온 후 그 능력을 인정받아 호분중랑장(특이한 사건들을 수사하는 황제 직속 비밀수사대인 부접의 우두머리.)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하여 가륜과 엮여 서로 사랑하게 되고, 이런저런 사정을 거쳐 마침내 가륜과 결혼하여 황후가 된다.  행복한 신혼을 보내던 중 '반역+스토킹' 으로 된 음모에 걸려들어 죽을 고비를 겪지만 잘 극복하고, 마침내 남편과 행복하게 살게된다.

 

  줄거리만 보면 클리셰가 철철 넘치는 뻔한 로맨스소설 같은데, 다른 로맨스소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장르가 복합적이라는 점이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로맨스소설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딱히 장르를 말하기 힘들다.  로맨스소설, 무협소설, 판타지소설의 성격을 전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세 가지 장르가 원래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기는 함.)  이 소설 독자의 성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런 장르상의 특징 때문에 다른 로맨스소설과는 달리 남성 독자 비율이 높을 듯하다. (남성향 로맨스소설? ^^)

  소설의 큰 줄기는 연록흔과 가륜의 로맨스지만, 연록흔이 호분중랑장으로 이런저런 사건들을 수사하는 과정(이 과정에서 무협소설 혹은 판타지소설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남.)이 나와서 무척 흥미진진하다.  또한 삼각관계니 사각관계니 하는 로맨스소설의 클리셰도, 이런저런 무리들과 관련된 정치적 음모와 엮이기 때문에 결코 뻔하지 않다.  게다가 작가의 이야기 구성솜씨가 뛰어나서, 여기저기에 복선(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떡밥. ^^)을 깔아두었다가 나중에 그 복선으로 암시되었던 사실을 하나씩 밝혀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요컨대, 요리에 비유하자면, 비록 평범한 재료를 썼지만 솜씨 좋은 요리사의 손을 거쳐 맛있는 음식이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초판보다 판타지 색채가 짙어지고 내용도 풍부해진 개정판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훑어 보니, 대체로 개정판이 더 좋다는 반응이 많지만 초판이 더 낫다는 반응도 있었다.

  초판이 좋다는 사람들이 드는 이유는 '생소한 어휘' 와 '대폭 낮아진 주인공 남녀의 로맨스 비중' 때문이다.  어휘 이야기야 이미 위에서 했으니 넘어가고...

  개정판이 초판보다 2배 이상 늘어나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덧붙여지다 보니, 자연스레 주인공 연록흔과 가륜의 사랑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지게 되었다.  초판에서는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 비중이 60~70%는 되었는데, 개정판에서는 30% 정도나 되나?  그래서 로맨스에 방점 찍고 읽은 독자들 입장에서는 실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초판 '연록흔' 보다 이번에 읽은 개정판 '연록흔 재련' 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로맨스 부분보다는, 온갖 신비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나 악역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음모를 꾸미는 과정이 훨씬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짜임새 있는 소설이지만, 로맨스 부분에 있어서는 결국 로맨스소설의 한계를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클리셰의 연속이다.  남녀주인공이 운명으로 엮인 연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둘 다 비극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에 우연히 짧은 만남을 가졌던 것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리고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마주치다가, 이런저런 일을 겪고 마침내 이어진다.

  다른 로맨스소설이나 멜로드라마에서 이미 질리도록 본 설정 및 과정이다.  그래서 로맨스 비중이 높은 초판을 읽었을 때는 개정판만큼 몰입하지는 못 했다. (물론, 개정판보다는 못 한 초판조차 다른 로맨스소설보다는 훨씬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느낌이라 재미있음.)  

 

  그렇게 다소 뻔한 연애담에 비해, 연록흔의 사건 수사담(혹은 모험담?)은 그것들만 따로 떼어내어 판타지 단편소설집을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흥미롭다.

 

  우선 '진주조개 이야기' 와 '모피 이야기' 가 있다. (진주조개 이야기와 모피 이야기는 포스팅을 위해 편의상 붙인 제목이지, 절대로 소설 속 제목이 아님. ^^;;)

  양식장의 진주조개는 인간에 의해 강제로 진주핵을 품어 진주를 키워낸 후 그 진주 채취가 끝나면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담비니 여우니 하는 동물들 역시 보다 질 좋은 모피를 얻으려는 인간에 의해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겪는다.  미(美)와 부(富)를 위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 때문에 다른 생물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렇게 고통을 받던 진주조개의 정령 비슷한 해인(海人)이 인간에게 저주를 내려 전염병이 돌고, 생으로 피부가 벗겨진 채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동물들은 인간으로 환생해서 모피업자 혹은 모피를 즐겨입는 사람들을 살해하며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각종 동물보호와 관련 있는,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튀어나오는 다양한 어휘 만큼이나 교육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결혼 첫날밤 괴기하게 죽어가는 신부들의 이야기도 인상적인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는 초판에도 나왔던 듯...?)

  순진한 처녀가 가난과 타인의 질투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되어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 한을 풀지 못 하고, 신분 높고 부유한 집안 출신 신부들을 결혼 첫날밤에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작가의 이야기 구성력이나 문장 속 묘사가 워낙 세세해서, 처음에는 어지간한 공포영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데(특히, 귀신이 신방에 등장할 때면 부르는 노래 가사가 정말... ㅠ.ㅠ), 귀신의 안타까운 사정이 밝혀진 후반부에는 슬픈 이야기로 종결된다. 

 

 

 

  ◎ 범이설

 

 

  범이설 - 연록흔 재련의 스핀오프

 

  연록흔 재련에는 초판에 없었던 '이설' 이란 여자가 새로 등장한다. 

  이설은 어떤 사정이 있어 임신한 몸으로 홀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런데 연록흔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이설을 구해주고 아예 머물 곳과 생계까지 주선해주게 된다.  이설은 연록흔과 그 수하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동시에 갓난아이 시절 잃은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 하며 거친 삶을 사는 연록흔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다만, 이설이 나오는 부분을 빼도 연록흔 재련의 전개에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비중이 없는 인물이고, 이설에게 어떤 사정이 있기에 이역만리를 혼자 떠돌았던 것인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째서 이 인물이 새로 등장해야만 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이설은 연록흔 재련의 스핀오프라 할 수 있는 '범이설' 의 주인공이다.

  두 소설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연록흔 재련의 무대인 황룡국범이설의 무대인 현국은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국가이며, 동방 국가들의 패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기도 하다. (다만, 황룡국은 한때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새 황제 가륜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는데, 반대로 현국은 한때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사회지도층인 황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막장 상태라서 여러가지로 엉망임.)

  그리고 연록흔 재련의 남주인공 가륜과 범이설의 남주인공 범산이 깊은 우정과 의리로 이어진 벗이다.  그래서 두 소설의 등장인물 중 일부가 겹친다.  아마도 한수영 작가가 연록흔의 개정판을 내면서, 이미 범이설의 내용을 구상해놓고 범이설 속 등장인물 몇 명을 연록흔 재련에 우정출연(?) 시켰던 모양이다.  범이설은 현재 4권까지 발간된 상태인데, 여주인공 이설과 남주인공 범산, 괴기스런 의원 곽우안 등이 연록흔 재련과 범이설에 '겹치기 출연'(?) 중이다.  그리고 연록흔 재련의 남주인공 가륜도 직접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범산의 회상을 통해서 몇 번 나왔다.  아마 5권에서는 연록흔 재련의 여주인공 연록흔과 그 수하 6총사가 나올 듯하다.

 

  사실, 처음에는 이 범이설을 연록흔 재련만큼 흥미롭게 읽지 못했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이설의 캐릭터가 너무 진부했기 때문이다.  무슨 8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마냥 그저 착하고 순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눈물부터 글썽인다.  더구나 스톡홀름 증후군에라도 걸렸는지 자신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온 남자(남편 범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

  솔직히 2권까지는 주인공보다 악역들 보는 맛에 읽었다.  비록 인간 말종(!) 수준의 악역들이지만, 캐릭터의 입체성이나 개성으로 보자면 차라리 악역들이 주인공 이설보다 낫다.  1권과 2권은 악역들의 뻔뻔스럽고 잔인한 행동에 경악하고 욕하는 재미로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욕하며 보는 막장드라마' 의 뒤를 잇는 '욕하며 보는 악역 중심 소설' ^^;;) 

 

  그런데 한수영 작가는 연록흔 재련에서도 복선과 반전을 적절히 이용하더니, 범이설에서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알고 보니 밋밋하기만 했던 이설의 캐릭터가 다 이유가 있었다.  이설의 그런 성격은, 양어머니에 의해 과거의 기억이 봉인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2권 및 3권에서 이설에게 어떤 비밀스러운 과거가 있다는 떡밥이 여기저기 뿌려지더니, 결국 4권에서 이설이 원래 모습으로 각성한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묻혀있던, 자신의 친어머니가 누구이며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난 것이다. (불당에서 절을 하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모습이 반복하여 교차되는 장면 묘사는 최고였음!)  그렇게 각성한 후 원수들 앞에서는 여전히 순한 모습으로 사근사근히 행동하며, 은밀히 복수의 계획을 세우는 내용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이설은 기억을 되찾은 후로는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본래의 성품을 되찾았다.  그런데 어째서 연록흔 재련에서 연록흔과 만났을 때는 각성 이전처럼 유순하고 눈물 많은 성격으로 돌아간 걸까?  범이설에서 이설이 연록흔과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 그 부분도 설명이 되려나... (작가님, 설마 설정오류는 아니겠지요? ^^)

 

  그런데 아무래도 연록흔 재련 속 이설은 연록흔이 여자라는 것을 눈치챈 듯하다.

 

  일단 연록흔 재련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만 봐서는, 이설이 연록흔을 남자로 아는 것처럼 나온다.

  이설의 시점으로 나온 설명 중에, 연록흔을 도망치던 중 만난 다른 나쁜 남자들과는 다르게 신뢰가 가는 남자라고 하거나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나온다.  그러한 설명만 보면 이설이 연록흔을 남자로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이설이 연록흔을 정말 남자로 믿고 있다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연록흔이 곤경에 빠진 이설을 구해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돌봐줬다는 점을 생각해도, 연록흔 재련의 이설은 범이설의 이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행동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한다.  범이설 속 이설은 각성하기 전에는 그저 얌전하고 수줍음 많던 성격이라 낯선 남자에게 경계심이 많았고, 원래의 당찬 성격으로 각성하고 난 후에는 그 전에 결혼한 남편 범산만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즉, 외간남자와 태연히 스킨쉽을 나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더구나 두 소설 모두 남녀유별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는 옛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연록흔이 임신한 이설을 부축한다든지 작별인사를 하든지 할 때 이설의 손을 잡으면, 이설은 그런 연록흔의 태도에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당연스레 받아들인다.  한술 더 떠서, 이설 쪽에서 비에 젖은 연록흔의 머리카락을 직접 수건으로 말려준 적도 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설과 연록흔을 연인이나 부부 사이로 착각할 지도 모름. ^^;;)

 

  내 생각에는, 비록 소설 속에 따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이설이 연록흔의 정체를 알아챈 듯하다. 

  처음에 만났을 때야 연록흔이 남자로 꾸민데다가 대단한 무공까지 갖추고 있으니, 정말 남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만나면서 어찌어찌 눈치챈 듯하다. (사실, 이설도 초능력 비슷한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러니 그 정도 눈치채는 것쯤이야~~!)

  다만, 이설의 사려 깊은 성격상, 그리고 이설 자신도 비밀을 간직하고 떠돌던 처지라, 연록흔에게도 남모를 사정이 있어 그러겠거니 하고 모르는 척 넘어간 듯하다.  그리고 연록흔도 이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음을 어렴풋이(어쩌면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이설의 됨됨이를 믿어서 아무 말 안 한 듯하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이심전심으로 통했다고 할까?

 

  그렇지 않고서는, 두 사람의 행동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설은 연록흔을 남자로는 전혀 생각 안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연록흔은 연록흔대로 남자 행세하느라 다른 여자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친밀한 행동을 이설에게는 자연스럽게 한다.  겉모습으로는 엄연히 남녀 사이니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장면마다 손을 잡는 장면이 한 번씩은 나온다.  그런가 하면 혼자 사는 이설에게 연록흔이 대낮도 아니고 한밤중에 불쑥 찾아왔는데도, 이설은 놀라거나 난처해하기는커녕 반가워하며 늦은 저녁상까지 차려준다. (아내에 대한 독점욕이 대단한 범산이 봤으면 눈이 뒤집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 듯... ^^;;)  심지어 나중에 이설이 출산할 때 연록흔이 그 옆을 지키기까지 한다...! 

  내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90%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확실한 것은, 범이설 다음 권이 출간되어 이설이 연록흔과 만나는 부분이 좀 더 자세하게 나와야 밝혀지겠지만...

 

 

  국어사전(!)이 필요한 로맨스소설, 들어보셨수? -.-;;

 

  범이설에 대해 말하자면, 이 소설 속 어휘 이야기를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위에 이미 썼지만, 작가가 연록흔 재련을 새로 낼 때에도 초판의 문장 상당수를 새로 썼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 쓴 문장 속에는 생소한 어휘가 제법 나온다.  하지만 그런 연록흔 재련조차 범이설에 비하면 정말 양반이다.

  범이설은 국어사전 없이 읽는 게 곤란할 지경이다...!  요즘에는 안 쓰는 고전적인 한자어, 국어교사도 뜻을 모를 것만 같은 순우리말, 전라도 및 강원도의 방언은 물론이고 북한 방언까지... 정말이지 온갖 생소한 어휘가 튀어나온다.  내가 살다 살다 국어사전 찾아가며 로맨스소설 읽기는 처음이었다. -.-;;

  그나마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이기나 하면 괜찮다.  국어사전에 없는 어휘도 제법 되어서, 따로 인터넷 포털에서 그 단어의 뜻 혹은 뜻을 짐작할 수 있을만한 용례를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국어사전에서도 포털에서도 뜻을 찾을 수 없는 어휘가 꽤 많다. -.-;;

 

  어떤 의미에서는, 한수영 작가의 연록흔 재련과 범이설 모두 매우 교육적(!)인 로맨스소설이라 할 수 있다.

  영어광풍에 독서량 부족까지 겹쳐서, 우리 국민의 평균 국어실력이 곤두박질 치고 있다.  이런 때, 독자들로 하여금 생소한 어휘를 잔뜩 접하게 함으로써 국어 어휘 능력을 향상시켜주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에게 한글날 관련한 상이라도 줘야 할 판국... ^^;;)

  그리고 연록흔 재련도 초판에 비해서 문장이 무척이나 유려해졌던데, 범이설에서는 그런 경향이 훨씬 강해졌다.  그래서 연록흔 재련보다 읽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 대신 범이설 쪽 문장이 더 감칠맛 난다.  소설의 내용을 읽는 재미와는 별도로, 소설 속 서술이나 묘사에 대한 재미도 쏠쏠하다. 

 

 

  범이설 VS. 연록흔 재련

 

  범이설이나 연록흔 재련이나 로맨스소설 + 무협소설 + 판타지소설의 복합적인 성격을 같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뒤섞인 장르의 비중이 좀 다르다. 

  연록흔 재련에는 인간이 아닌 온갖 신령한 존재가 등장한다.  도교의 신, 바다의 정령, 귀신, 용이나 맥 같은 상상의 동물 등등.  하지만 범이설은 연록흔 재련만큼 판타지 성격이 강하지는 않다.  범이설에도 판타지의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신비한 힘이나 기운 정도지, 연록흔 재련에서처럼 말을 하고 스스로의 의지를 갖는 생물의 형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범이설 쪽이 음모극 성격이 훨씬 강하다. (복잡하고 살벌한 구중궁궐의 권모술수! 좋아, 좋아~~ ^^)

  연록흔 재련에서도 가륜에게서 황위를 찬탈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촌형 및 이런저런 이유로 그 음모에 발을 담근 무리들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 음모의 비중이 낮은 편이다.  소설의 3분의 2정도 까지는 연록흔의 성장기, 연록흔의 각종 사건 해결담, 연록흔과 가륜의 사랑 이야기 위주로 진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 분량으로 끝나는 여러 에피소드가 나오기 때문에, 많은 양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호흡은 비교적 짧은 편이다.  그래서 범이설보다 읽기 수월한 편이다. 

  그런데 범이설에서는 주인공과 악역들이 윗세대부터 악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다가, 음모의 내용도 매우 복잡하다. (이설 모녀와 현국 황실 사람들의 악연, 현국 황실 내부 사람들의 정치적.감정적 갈등, 현국에게 망한 은월국의 부흥운동 등)  또 악역이라고 다 같은 악역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심리가 비틀려있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보니, 이설을 괴롭힌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저희들끼리도 툭하면 이전투구를 벌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음모에 얽혀 있기 때문에 소설 전개의 호흡이 길고 완만한 대신, 연록흔 재련보다 스케일이 더 크고 구성이 정교하다는 느낌이다.  또한 악역들의 캐릭터도 연록흔 재련 때보다 더 다양해졌다. (여러가지로 현국의 악당들은 황룡국의 악당들을 능가함.  음란마귀가 씌였나 죄다 음탕하고, 전생에 살인귀였는지 모두 잔인무도하며, 스토커란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주는 것처럼 집착으로 똘똘 뭉쳐있는... -.-;;)  

 

  마지막으로, 작가가 연록흔 재련에서도 노래와 시를 종종 이용하더니 범이설에서는 좀 더 자주 이용한다.

  애초에 주인공 이설이 노래로 유명한 영랑의 일족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이설 스스로는 물론이고 같은 일족인 다른 등장인물들도 종종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런데 노랫말이 하나같이 중의적이라, 겉으로 드러난 평범한 뜻과는 달리 소설 전개에 키워드 같은 역할을 하는 심오한 뜻이 숨어있다.   

 

 

  과연 5권으로 완결될 수 있을까?

 

  범이설은 2011년에 1~3권이 나오고 2013년에 4권이 나온 뒤로 감감무소식이다.

  원래는 4권 완결 예정이었다는데 어쩌다 보니 5권 완결 예정으로 바뀌었고, 그나마 그 5권은 언제 출간될지 기약조차 없다. ㅠ.ㅠ  작가의 건강이 안 좋아서 그렇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4권까지 읽은 독자들은 조바심을 내다 못 해 속이 새까맣게 타고 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그래도 다수의 독자는 작가가 얼른 건강을 회복해서 5권을 써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5권을 기다리다 못 해 화가 나버린 일부 독자는 원고를 다 끝내지 않은 상태로 단행본부터 낸 작가와 출판사를 성토하고 있을 정도다. ^^;;    

 

  완결난 후에 읽겠다며 몇 년 동안 1~4권도 안 읽고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안 된 이야기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5권으로 완결되기는 힘들 듯하다.

  3권까지는 사실상 본론에 앞선 배경설명 및 떡밥깔기로 채워져 있고, 이설이 원래의 모습으로 각성하는 4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워낙 많은 등장인물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데다가(오죽하면 종이에 등장인물 관계도 그려가며 읽어야 한다는 독자가 있을 정도... ^^;;), 개인적인 원한 뿐 아니라 정치적 문제까지 뒤엉켜 판이 크게 벌어졌다. (한 번 망했던 나라를 재건하는 게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님...!)

  그러니 5권 달랑 한 권만으로 그 동안 깔아놓은 떡밥을 회수해가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건 힘들 듯하다.  물론 작정하고 한 권으로 끝내려 든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랬다가는 날림 결말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6권, 어쩌면 7권까지는 가야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게 끝을 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작가의 건강이 안 좋다고 하니, 혹시 이러다가 미완으로 끝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아무래도 독자들이 돈 모아서 작가의 건강 회복을 위한 기원굿이라도 지내야 하는 게 아닌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