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소와다리 초판본 시집 '사슴(백석 시집)' - 출판계에 불어닥친 복고풍

Lesley 2016. 4. 14. 00:01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시리즈 中 사슴(백석 시집)


  지난 2월 책을 주문하려고 알라딘에 접속했다가, 시인 백석의 시집을 발견하고 주문했다.

  백석이 북한 시인이라서 남한에서는 백석의 시집이 별로 없다.  3년 전에도 백석의 시집을 사려다가 대부분 품절이라 헌책으로 한 권 구입했었는데, 이번에 새책이 나온다고 하니 얼른 주문했다.



1936년에 출판된 백석의 시집 '사슴' 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와 새로 출판한 책.

스테인레스 펜촉과 나무 펜대로 이루어진 펜은 '사슴' 에 딸려온 사은품. ^^ 



  백석에 대해서는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다니며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중에 괜찮게 본 영화에서도 백석의 시집이 나오는 것을 보고 삘(!) 받아서 나도 한 권 구입하게 되었다.  다만 백석이 199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던 탓에 북한시인으로 분류되어(정작 우리 쪽에 알려진 작품은 주로 일제강점기 때 쓴 것들이지만...), 남한에서는 백석 시집의 출간이 활발하지 않고, 이미 출간된 것도 몇 년 전에 품절된 상태다.  그래서 인터넷 헌책방을 통해 겨우 구할 수 있었다.

  ☞ 길상사(吉祥寺)(http://blog.daum.net/jha7791/15790814)
  ☞ 내가 고백을 하면 - soul place라는 개념을 알려준 영화(http://blog.daum.net/jha7791/15790942)
  ☞ 헌책방 -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다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http://blog.daum.net/jha7791/15790991)


  그런데 이번에 지름신(!)의 강림을 부른 백석 시집은 좀 특별했다.

  이 책은 소와다리라는 특이한 이름의 출판사에서 낸, 이른바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시리즈 중 하나다.  이 시리즈는 말 그대로 어떤 책의 초판본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와 새로 출판한 책들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비판하는 기사가 종종 나오곤 하는데, 이 시리즈는 그런 기사가 무색하게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다.



100자평이 윤동주 시집에 300여개, 김소월 시집에 260여개,

파본 소동 난 백석 시집에도 130개가 붙을 정도로

최근에 큰 인기를 끌고 있음. 

※ 출처 : 인터넷서점 알라딘(http://www.aladin.co.kr/shop/common/wseriesitem.aspx?ViewRowsCount=25&ViewType=Detail&SortOrder=2&page=1&Stockstatus=1&PublishDay=84&SRID=80676&CustReviewRankStart=&CustReviewRankEnd=&CustReviewCountStart=&CustReviewCountEnd=&PriceFilterMin=&PriceFilterMax=)



  다만, 이런 초판본 시집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그저 시집에 실린 시가 좋아서는 아닌 듯하다.

  이 시리즈가 돌풍을 일으키는 것은 시집의 내용이 좋아서 '읽고 싶은 욕망' 을 불러일으켜서가 아니다.  윤동주나 김소월 같은 유명시인이 쓴 시집이 그 동안에는 출판되지 않아서 독자들에게 안 팔렸던가?  오히려 초판본 모습 그대로다 보니, 맞춤법이 지금과 너무 달라 읽기에는 불편하다. 

  이 시리즈가 대박(!)을 친 원인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좋아할만한 시인의 시집을 초판본의 모습 그대로 소장할 수 있다는 '새로운 소장 욕구 창출' 의 성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드라마 '응답하라 19XX' 시리즈로 대표되는 복고풍을 마케팅에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글씨를 치는 시대건만, 한쪽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부러 만년필이나 연필로 손글씨를 쓰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MP3 파일로 된 음악을 듣는 동안, 한쪽에서는 LP판을 어렵게 구해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다.  독자들이 책에 대해서도 예스러움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점을, 이 출판사가 제대로 파악하여 마케팅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케팅 전략이 멋지게 들어맞아서 독자들 머리 위로 지름신(!)이 강림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책을 산 이유는 백석의 시가 좋다는 게 절반, 그런 마케팅에 혹했다는 게 절반이다. ^^;;


  그리고 이 시리즈가 여러 언론사의 기사를 탈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자, 소위 '미투 마케팅' 이라 하는 것도 나타났다.

  3월이 되자 다른 출판사에서도 초판본 시집 시리즈가 나왔다.  정지용 시인의 시집 같은 경우를 보면, 아예 두 출판사에서 같은 시기에 내놓기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 또 다시 지름신이 강림하여 정지용 시집도 구매했음. ^^;;)

  초판본 시리즈로 나오는 시집이 거의 일제강점기 때 나온 오래된 것들이라, 아마 지금에 와서는 저작권을 신경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출판사에서 초판본 디자인을 그대로 이용해서 새로 출판한다 한들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는데...  그래도 여기저기에서 같은 책을 동시다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좀 찝찝한 느낌도 든다.    




  파란만장한 백석 시집 '사슴' 구입기 


  이 시집을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한 때가 2월 23일이다.

  아직 출판이 안 된 상태에서 예매를 받고 있었는데, 출판예정일이 2월 25일이라고 해서 26일 혹은 27일이면 받을 수 있겠거니 했다.  위에 언급한 윤동주나 김소월의 시집과는 달리 백석 시집은 시중에 나온 게 워낙 없어서, 기대로 부푼 가슴으로 주문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출판예정일이 서너 번이나 뒤로 밀렸다.  책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던 댓글란에는 차츰 짜증("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과 걱정스러움("혹시 출판 계획이 엎어지는 것 아니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월 15일로 미루어졌던 출판예정일이 다시 하루 뒤인 3월 16일로 바뀌었을 때는, 거짓말 보태서 댓글 분위기가 저주(!)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나 역시 이 책이 취미로 읽는 시집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책이었더라면 뚜껑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3월 16일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알림문자가 와서, 기쁜 마음에 알라딘 사이트에 들어가봤는데...

  이미 그 날 시집을 받았다는 몇몇 사람의 댓글을 보니, 이번에 나온 시집이 파본이라고 한다.  일부도 아니고 전체가 파본...! (3주일 넘게 기다렸는데 우째 이런 일이... ㅠ.ㅠ)  다음 날 책을 받은 후에야 뒤늦게 온 알림문자를 보니, 22페이지에 다른 시구절이 잘못 삽입되었다고 한다.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시리즈가 최근 들어 출판업계에서 워낙 화제작이다 보니, 이번 파본 소동이 기사로 났을 정도다.  ☞ 서울신문 기사 : 백석 '초판본 사슴', 1쇄 2만 5000부 파본 드러나(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60318134007009)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출판사에서 새로 수정본을 출판한 후 파본을 받은 모든 이에게 수정본을 발송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영화 '동주' 를 보면서 이 사슴 시집이 나온 것을 보고 '우와~~ 저거 백석 시집이네...!' 했던 바로 그 날, 우리집에 수정본이 도착했다. ^^

 



  예스러운 시집에 어울리는 예스러운 사은품

   

  그런데 파본 소식 와중에도 나로 하여금 실실 웃게 만들었던 일 하나...

  백석 시집에는 사은품으로 펜이 하나 딸려온다.  그런데 볼펜이나 만년필 같은 펜이 아니라, 펜촉을 펜대에 끼워서 잉크를 찍어가며 쓰는 펜이다. (사은품까지 복고풍이로구만~~ ^^)

  그런데 사은품으로 받은 펜을 보고 당혹스러워 하는 내용의 댓글이 몇 개 눈에 띄었다.  펜촉이 펜대 옆구리(?)에 붙어 스카치 테이프로 꽁꽁 묶인 모습으로 배송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펜을 본 적 없는 세대에 속하는 몇몇 사람이 그만 오해를 했다.  펜촉을 펜대 끝에 합체(!)시켜야 하는 것을 모르고, 망가진 펜을 보냈다고 여긴 것이다.  "아니, 책도 파본인데, 사은품이랍시고 보낸 펜까지 모가지(!)가 부러졌네...!" 하고 화를 냈을 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 



책 본문의 편집상태도, 활자체도, 사은품으로 온 펜도

모두 예스러움이 넘치는... ^^



  나보다 윗세대인 분들은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이런 펜으로 영어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실수로 잉크병을 넘어뜨려 책상이나 공책이 잉크 범벅이 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또 잉크병이 넘어졌을 때의 참사(?) 수준을 줄여보려고 잉크병 속에 스펀지를 넣는 방법도 썼다고 한다.

  잉크를 넣어 쓰는 만년필도 아니고,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이라니...  물론 실용적인 면에서 보자면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 선비들이 붓을 먹물에 찍어 쓰던 모습을 연상케하는, 상당히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느낌이다.


  아마 나처럼 1990년대 초중반에 중학교를 다닌 세대가 이런 펜을 써본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다만,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영어 시간에 펜글씨 쓰는 풍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대신 중학교 1학년 한문 시간에 펜으로 한자를 썼더랬다.  우리 세대가 한자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라서, 학생 대부분의 한자 쓰기 실력이라는 것이 한문 교과서를 보며 베껴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글씨체 바로 잡는데는 펜글씨만한 게 없다며, 학생들에게 펜으로 한자쓰기를 연습시켰다. 


  그런데 '사슴' 의 수정본이 나오고서부터는 사은품이 바뀌어서 더 이상은 펜을 주지 않는다.

  새 사은품은 오거나이저라고 부르던데 내 눈에는 그냥 수첩일 뿐이다. (수첩인 듯 수첩 아닌 수첩 같은 너~~~~ -.-;;)  마침 내 주위에 이 펜에 눈독을 들이며 사슴을 구입하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사은품이 바뀌었다는 소식에 무척 실망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사은품도 타이밍! ^^




  자루매기


  아래 사진을 보면 이 시집은 제본 형식이 매우 독특함을 알 수 있다. 

  자루매기라는 제본 형식인데, 인쇄면이 밖으로 나오게 종이를 접은 뒤 묶은 것이다.  주로 한지로 만든 책에 쓰인 방법이라고 한다.  소와다리라는 출판사가 1인 출판사여서 인력이 부족한데다가 이런 특이한 제본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느라, 그만 파본이 났던 모양이다.



'자루매기' 라는 특이한 형식으로 제본되어 있어서

종이가 두 장씩 붙어있는 모양새임.



  파본 때문에 내 마음에 커다란 금이 쩍 갔는데, 자루매기 덕분에 그 금이 희미해졌다.

  물론, 독자와 약속한 출판일을 몇 번이나 바꾸다가 결국 파본까지 낸 것은 분명히 출판사의 잘못이다.  출판일이 한 번 밀렸더라면,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떻게 실수가 없을 수 있느냐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밀렸다는 것은, 출판사가 애초에 작업에 필요한 기일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 하고 무리하게 일을 추진한 탓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원본을 재현하려고 애썼다는 점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더구나 1인 출판사라 자금 사정이 넉넉할 것 같지도 않은데, 파본 구입자 모두에게 수정본을 보내주려면 출판사 쪽 손실도 만만치 않을 듯하여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이 '사슴' 하나만 놓고 보면 출판사가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볼 듯하다.


  그래서 수정본이 도착한 뒤에도 파본을 버리지 않았다.

  똑같은 시집이 2권 생겼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잘 간직하련다.  누가 알겠는가?  세월이 흐르면 파본도 독특한 레어템(!)으로 취급받게 될런지... ^^



백석 시집에 딸려온 펜이 워낙 훤칠하다 보니

만년필들이 전부 짜리몽땅해 보이는... ^^




  백석 시집 '사슴' 에 실린 시 두 편


  이 시집 속에 담긴 시 중 인상적인 것으로 두 편만 소개하겠다. 

  역시 일제강점기 때 쓴 시라 맞춤법이 지금과 많이 다르고 한자도 제법 섞여서, 원문으로 보면 어색한 느낌도 들고 얼른 읽히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철자가 지금과 다른 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데, 요즘 우리가 쓰는 글에 비해 띄어쓰기가 너무 안 되어 있는 게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산 다른 백석 시집에 나온 현대어 해석본도 함께 소개하겠다.

  그런데 원문은 특이하게도 내어쓰기가 되어 있다. (어째서 내어쓰기를 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힌밤>


넷城의돌담에 달이올라다
묵은초가집웅에 박이
또하나달같이 하이얗게빛난다
언젠가마을에서 수절과부하나가 목을매여죽은
  밤도 이러한밤이었다



  <흰밤>


  옛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女僧>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났다
쓸쓸한낯이 넷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설어워졌다


平安道의 어늬 山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女人에게서 옥수수를샀다
女人은 나어린딸아이를따리며 가을밤같이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지아비 기다려 十年이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않고
어린딸은 도라지꽃이좋아 돌무덤으로갔다


山꿩도 설게울은 슳븐날이있었다
山절의마당귀에 女人의머리오리가 눌물방울과
  같이 떨어진날이있었다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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