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하려는 중국 한시는, 우리 한국인 입장에서는 특별한 감정을 느낄만한 시다.
시를 쓴 사람은 분명히 중국인인데, 시의 소재가 우리나라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시를 지은 사람은 고계(高啓)라고 하는데,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까지 살았던 유명한 문인이다. 그리고 시의 제목 조선아가(朝鮮兒歌)는 '조선 아이에 대한 노래'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시가 씌여진 시대를 생각한다면, 시 제목을 '고려 아이에 대한 노래' 로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원래, 우리나라에 들어선 왕조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나라를 가리킬 때 조선이라는 말과 고려라는 말을 혼용하곤 했다. 그래서 이 시에서도 고려를 조선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조선아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만계 일본작가 진순신이 쓴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권을 읽으면서다.
☞ 진순신(陳舜臣)의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권 및 5권(http://blog.daum.net/jha7791/15791103)
그 책에 이 시가 나오는데, 저물어가는 한 시대에 대한 비감을 절절히 읊고 있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시 그 자체의 주제나 느낌을 떠나서, 이 시 속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이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더 눈길이 갔다.
그런데 막상 이 시를 포스팅 하려니, 참고할만한 번역본이나 해설이 없다시피 해서 난감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시인데도, 정작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겨우 하나 찾아낸 게, 한국고전종합DB 사이트에 실린 원문과 해석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조선아가가 수록되어 있는데, 마침 그 해동역사가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원문과 그 해석만 실려있어서 곤란하다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권에 조선아가의 일부분과 함께 그에 관한 배경 설명도 실려있다.
그래서 조선아가를 포스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시리즈가 내용은 충실하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및 교정이 엉망이라서 욕해가면서 읽었더랬다. 그래도 그 엉망인 번역서 덕분에 우리나라에 관련된 외국시를 한 수 알게 되었으니, 새삼스레 읽은 보람을 느낀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시를 감상하려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고계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모두 왕조 교체기였기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그런 두 나라의 시대적 상황이 조선아가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고계가 살았던 중국의 상황부터 살펴보자면, 원나라가 망해가고 명나라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원나라를 세워 100년 동안 대륙을 지배했던 몽골족이, 사치와 향략에 젖고 자신들끼리 권력투쟁을 벌이며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몽골족 치하에서 피지배민족으로 살았던 한족이, 그 틈을 타고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한 한족 반란군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홍건적이다.
중국에서 벌어진 혼란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얄궂게도 우리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면서 동시에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
원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100년에 걸친 원 간섭기를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고려의 공민왕은 내부 반란으로 흔들리는 원나라를 공격해서 과거에 빼앗겼던 북쪽땅을 수복하고 부원배를 몰아내는 등 자주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원나라 관군에 쫓긴 홍건적의 일부 세력이 고려를 침략해서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큰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이 피해가 약 30년 후에 고려왕조가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계가 이 시를 짓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고계는 옛날부터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가 꽃피었던 소주(蘇州)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소주 지방의 유지 정도되는 인물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그 연회에서 고려에서 온 두 아이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고계는 한족인데도 원나라 때 태어나고 자란 탓인지, 원나라가 나날이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당시 원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흔들릴 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었다. 즉, 고려가 이전처럼 고분고분하게 복종하지 않고,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옛땅을 되찾기 위해 원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아이들이 원나라 땅에서 열린 연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니 원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이 떠올라, 어쩌다가 원나라가 그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하는 비통함에 이 시를 짓게 된 것이다.
이 시는 고계가 원나라 사람 입장에서 원나라의 쇠락을 슬퍼하는 내용이지만, 당시 고려의 상황도 비중 있게 묘사된다.
애초에 이 시의 주요 소재가 고려에서 온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을 사온 사람은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아이들을 사온 경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당시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고려 수도 개경의 상황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朝鮮兒歌(조선아가)
조선(고려) 아이에 대한 노래
- 高啓(고계) -
朝鮮兒髮綠 (조선아발록)
조선 아이들 머리색은 검푸른데
조선(朝鮮) : 고계가 이 시를 쓸 때 우리나라는 아직 고려시대였지만, 조선이라고 표현했음. 즉, 이 시에서 조선은 고려를 의미함.
初剪齊雙眉 (초전제쌍미)
두 눈썹과 나란히 머리카락 잘랐구나.
芳筵夜出對歌舞 (방연야출대가무)
한밤에 화려한 자리에 나와 짝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는데
木綿裘軟銅鐶垂 (목면구연동환수)
무명옷은 하늘거리고 구리 고리(장식품인 듯)를 드리웠네.
輕身回旋細喉囀 (경신회선세후전)
가볍게 몸을 돌려 가냘프게 노래하니
蕩月搖花醉中見 (탕월요화취중견)
흐르는 달과 떨리는 꽃이 취중에 보인다네.
夷語何須問譯人 (이어하수문역인)
이국의 말이라고 굳이 역관에게 물을 필요 있을까?
深情知訴離鄕怨 (심정지소이향원)
깊은 정(노래에 담긴 감정)이 고향 떠난 원망임을 알 수 있거늘.
曲終拳足拜客前 (곡종권족배객전)
곡을 끝낸 후 발을 모아 손님 앞에 절하니
烏啼井樹蠟燈然 (오제정수랍등란)
까마귀는 우물 옆 나무에서 울고 촛불은 잦아드는구나.
共訝玄菟隔雲海 (공아현도격운해)
현도는 구름바다에 막혀있는 곳이라(즉,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는 곳이라) 모두 놀라는데
현도(玄菟) :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고조선 땅에 설치한 4군 중 하나인데, 이 시에서는 고려를 의미함.
兒今到此是何緣 (아금도차시하연)
아이들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어떤 인연일까?
主人爲言曾遠使 (주인위언증원사)
주인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사신이 되어 멀리 떠나"
萬里好風三日至 (만리호풍삼일지)
"만리 길을 순풍 타고 사흘 만에 (고려에) 도착했소."
鹿走荒宮亂寇過 (녹주황궁난구과)
"사슴 달리는 황폐한 궁궐(고려 궁궐)은 도적떼가 지나갔고"
고려의 궁궐을 지나갔다는 도적떼는 홍건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경상도 안동까지 피난가는 사태가 벌어졌음.
鷄鳴廢館行人次 (계명폐관행인차)
"닭이 우는 황폐한 관사에 사신 행렬 묵었다오."
四月王城麥熟稀 (사월왕성맥숙희)
"사월인데 왕성(고려 수도 개경)에는 보리 익은 게 드물어"
兒行道路兩啼饑 (아행도로양제기)
"아이들이 길을 가며 배고프다 함께 울었소."
黃金擲買傾裝得 (황금척매경장득)
"황금을 내어주고 (아이들을) 사서"
白飯分餐趁舶歸 (백반분찬진박귀)
"쌀밥 나누어 먹이고 배에 태워 돌아왔소."
我憶東藩內臣日 (아억동번내신일)
내가 돌이켜보니, 동번이 사신을 (원나라로) 보내던 때에는
동번(東藩) : 동쪽의 번국. 즉, 당시 원나라의 속국이었던 고려를 말함.
納女椒房被褘翟 (납녀초방피위적)
여인을 초방에 바쳐 위적을 입혔다네.
초방(椒房) : 임금의 여인들이 거처하는 곳.
위적(褘翟 ) : 황후가 제사 때 입는 꿩 무늬를 수놓은 화려한 옷.
즉, 동번이 초방에 바쳐 위적을 입게 되었다는 여인은, 고려에서 바친 공녀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 를 말함.
敎坊此曲亦應傳 (교방차곡역응전)
교방에 이 곡(연회에서 고려 아이들이 불렀던 고려노래)도 응당 전해져
교방(敎坊) : 궁궐의 연회 등에 음악을 담당하는 기관.
特奉宸遊樂朝夕 (특봉신유락조석)
궁궐에서 각별히 부르며 아침저녁으로 즐겼으리라.
中國年來亂未鋤 (중국연래난미서)
중국에는 지난 몇 해 난리(홍건적의 난 등 여러 반란)가 그치지 않아
頓令貢使入朝無 (조령공사입조무)
조공사신이 입조하지 않는다네.
儲皇尙說居靈武 (저황상설거영무)
태자는 영무에 머문다고 여전히 말하는데
영무(靈武) : 당나라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황제인 현종의 태자(훗날의 숙종)가 영무로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했음. 이 시에서 태자가 영무에 머문다는 것은,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의 태자 아유시리다라(순제와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군벌 볼로드테무르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패해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친 것을 비유하는 것임.
丞相方謀卜許都 (승상방모복허도)
승상은 허도에 머물려 한다네.
허도(許都) : 후한 시대 조조가 당시 황제인 헌제를 수도인 낙양 대신 허도에 머물게 하고 자신이 정사를 좌지우지했음. 이 시에서 허도 땅에 머물려는 승상은, 볼로드테무르가 태자 아유시리다라와 권력투쟁을 벌여 이긴 후 승상이 되어 전횡을 휘두르는 것을 비유하는 것임.
金水河邊幾株柳 (금수하변기주류)
금수하 근처에 있는 몇 그루 버드나무는
금수하(金水河) : 원나라 수도 대도(지금의 북경)의 궁궐 앞을 흐르는 강.
依舊春風無恙否 (의구춘풍무양부)
예전처럼 봄바람 속에 아무 일 없을까?
小臣撫事憶升平 (소신무사억승평)
못난 신하(이 시를 지은 고계 스스로를 말함.)가 태평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尊前淚瀉多於酒 (준전누사다어주)
술병 앞에 흘리는 눈물이 술보다도 더 많구나.
이 시의 앞부분(1연~10연)은 고려에서 온 두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두 고려 아이가 한밤 중에 연회에 나와 가볍게 몸을 돌려 춤을 추며 가냘프게 노래한다.
둘이서 하늘거리는 무명옷을 입고 구리로 된 장신구를 차고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리땁다. 그래서 취한 고계의 눈에는 '흐르는 달과 떨리는 꽃' 으로 보일 지경이다.
참고로, 이 시에서는 아이들의 성별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연회에서 춤추고 노래했다는 것으로 보아 무희, 즉 여자아이들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진순신 역시 이 아이들을 여자아이들로 해석했다.
그런데 두 아이가 먼 이국땅으로 팔려온 신세다 보니, 그 모습과 노랫소리가 마냥 곱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노래와 춤에서 처연함도 묻어나왔던 모양이다. 두 아이가 고려말로 노래를 하니, 원나라 사람인 고계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역관에게 무슨 뜻인지 통역해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비록 노랫말은 못 알아들어도, 그 노래 속에 담겨있는 깊은 감정이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대한 원망 혹은 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의 중간부분(11연~19연)은, 고려 아이들이 원나라까지 오게 된 사연과 당시 고려의 비참한 상황이 나온다.
고계를 비롯한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바다 건너 고려에 살던 아이들이 어째서 원나라 소주까지 왔는지 놀라고 의아해한다.
그래서 연회의 주최자인 주검교(周檢校 : '주' 는 성이고, '검교'는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임.)에게 어찌된 사연인지 물었다. 주검교의 대답인즉슨, 자신이 예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사온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권에 의하면 주검교는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로 파견한 사신이 아니다. 당시 강소성 및 절강성을 근거지로 삼아 큰 세력을 떨쳤던 홍건적 출신의 군벌 장사성(張士誠)이 파견해서 고려로 간 것이다. (실제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도, 공민왕 때 장사성이 보낸 사신이 고려로 온 기록이 여러 번 나옴.)
그런데 주검교가 말해주는 고려 상황이 말이 아니다.
개경의 궁궐은 도적떼가 한바탕 지나간 뒤에 황폐해져 사슴 같은 야생동물이 다닐 지경이고, 외국 사신을 묵게 하는 관사 역시 황폐해져 닭 같은 짐승이 활개치고 다닐 정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도적떼란 아마도 홍건적을 말하는 듯하다. 공민왕 때 왜구의 침입이 자주 있었지만, 왜구가 개경을 함락시킨 적은 없었다. 하지만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한 후 대대적으로 살육과 방화를 저질렀고, 그 와중에 궁궐까지 불타버렸다. (그리고 이 때 불탄 궁궐은 고려왕조가 망할 때까지 재건하지 못 해서, 오늘날까지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음.)
임금이 사는 궁궐조차 그 지경이니, 백성들의 삶은 오죽하겠는가...
그렇잖아도 홍건적들이 한바탕 휘젓고 나간 끝이라 모든 게 피폐하기만 한데, 4월인데 보리가 제대로 익지 않아 굶주린 이들이 많았다. (즉, 보릿고개를 말함.)
그 와중에 주검교는 배고프다고 길에서 우는 고려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주검교가 아이들 처지를 딱하게 생각해서 배나 곯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에 먼저 사겠다고 나선 건지, 아니면 두 아이의 부모가 끔찍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서 먼저 팔겠다고 나선 건지, 어쨌거나 두 아이는 주검교에게 팔리게 되었다. 그래서 두 아이는 주검교를 따라 말도 안 통하고 풍습도 다른 원나라 소주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시의 끝부분(20연~31연)은 고계가 고려 아이들에 관한 사연을 듣고서, 원나라가 번성했던 과거와 몰락해가는 지금을 비교하며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
원나라의 위세가 대단해서 고려가 원나라에 복종하던 시절에, 고려는 각종 물품은 물론이고 여자(즉, 공녀)까지 바쳤다.
그런 여자들 중에 마침내 원나라 황후(즉, 기황후)까지 나오게 되었다. 고려 여자가 원나라 궁궐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자연히 궁궐 안에 고려의 문물이 유행하면서 고려 노래까지 전해져서 자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원나라가 약해지니, 고려가 더 이상 조공을 바치는 사신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나라의 위상이 떨어졌건만 지배층은 혼란함을 수습하려 애쓰기는커녕, 기황후 소생인 태자 아유시리다라의 무리와 권신 볼로드테무르의 무리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진순신의 해석이 매우 흥미롭다.
예전에 원나라가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에 나서며 고려를 강제로 참여시킨 통에, 고려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이제 고려 여자 기황후가 낳은 태자가 권력투쟁의 한 축이 되어, 원나라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순신은, 고계가 '혹시 이것이 고려의 복수가 아닐까?' 라고 여겼다고 해석한다.
처음에는 진순신의 해석이 뜬금없고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옛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죄악을 저지르면 그 사람 당대에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후손대에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는 인과응보적인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계가 이 시를 지을 때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고계는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린다.
진순신에 의하면, 고계는 한 번도 대도(원나라의 수도. 지금의 북경)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궁궐 앞을 흐르는 금수하나 금수하 옆에 서있는 버드나무를 봤을 리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원나라의 못난 신하(小臣)라고 인식하고 있을 만큼 원나라를 생각하는 고계는, 그런 금수하 옆 버드나무가 태평성대처럼 여전한지를 염려한다. 버드나무 그 자체를 염려한 게 아니라, 버드나무로 상징되는 원나라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회에서 술병을 앞에 두고, 그 술병에 담긴 술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뱀발을 붙이자면...
이 조선아가를 지은 고계는 천수를 누리지 못 했다.
39살의 한창 나이에 요참형(큰 작두로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벌)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고계가 정말로 죽을 죄를 지어서 그런 끔찍한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그 유명하고 잔인한 숙청에 걸려들어 죽은 것이다.
고계가 비참한 죽음를 맞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고계는 주원장이 무척 싫어했던 문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문인) 또한 주원장의 강력한 적수였던 장사성의 근거지 소주 출신이었다. (조선아가 역시 소주의 연회에서 고려 아이들을 보고 지은 시임.) 그리고 명나라 조정에서 고계를 고위직에 임명했지만 얼마 안 되어 사임하고 낙향해버렸는데, 이런 행동은 명나라라는 새 왕조를 거부하는 걸로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결정타였던 일은, 소주에 관청을 새로 짓게 되었을 때 고계가 상량문을 지었는데, 그 상량문 중 한 부분이 장사성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의심받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말고도, 위에 소개한 조선아가라든지 그 밖의 다른 시 역시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조선아가에서도 자신을 분명히 원나라의 신하로 규정하고 원나라가 쇠퇴해가는 것을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하고 있고, 다른 시에서도 원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애잔함을 드러냈다니 하니 말이다. 그렇잖아도 의심 많은 주원장인데, 그냥 그런 이름 없는 문인도 아니고 당대에 손꼽히는 문인인 사람이 주원장 스스로가 멸망시킨 원나라를 생각하는 시를 짓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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